은퇴 설계를 연구하면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은퇴 전후의 수익률이 은퇴 생활 전체를 좌우한다는 사실이다. 같은 자산, 같은 평균수익률을 기록해도 수익률의 순서에 따라 은퇴 생활의 수명은 크게 달라진다. 이를 ‘시퀀스 리스크’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철수와 영희 모두 은퇴 시점에 10억 원을 가지고 있으며, 은퇴 후 매년 4%(4000만 원)를 인출한다고 가정하자. 또 장기적으로 연평균 6% 수익률을 기록한다고 설정하면 두 사람 모두 30년 이상 안정적인 은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퀀스 리스크는 ‘평균’이 아니라 ‘순서’의 문제다.
철수는 은퇴 직후 3년 동안 –15%, –10%, –5%의 손실을 기록한 뒤 매년 8%의 수익률을 얻었다고 하자. 첫 3년 동안 손실과 인출이 동시에 발생해 원금이 크게 훼손된다. 실제 시뮬레이션에서 약 22년 차에 자산이 고갈된다. 반대로 영희는 은퇴 직후 첫 3년 동안 15%, 10%, 5%의 수익을 기록한 뒤 매년 3%의 수익률을 기록했다고 가정하면 평균수익률은 동일하게 6%이지만, 은퇴 초기 자산 증식 덕에 인출의 영향이 거의 없어 영희의 자산은 30년이 지나도 4억 원 이상이 남는다.
같은 자산, 같은 인출률, 같은 평균 수익률을 갖고도 철수와 영희의 은퇴 자산 수명은 1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은퇴 초기 시장 상황이 이후 30년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은퇴 초기의 손실은 회복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근로 시기에는 급여가 꾸준히 투자금을 보강해주지만 은퇴 후에는 상황이 정반대다. 인출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손실이 발생하면 충격이 배가된다. 예컨대 -15% 손실이 난 첫 해에 4%를 인출하면 자산은 단순 계산으로 19%가 감소한다. 이런 상태에서 다음 해 손실이 반복되면 원금의 훼손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다.
그렇다면 시퀀스 리스크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첫째, 은퇴 전후 5년간 주식 비중 조정이 필요하다. 5년간 주식 비중을 60%에서 40% 수준으로 낮추는 것만으로도 초기 손실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 둘째, 인출률의 유연성을 도입해야 한다. 시장이 -10% 이상 하락한 해에는 인출액을 10~20% 조정하고, 평년에는 정상 인출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미국에서는 이를 ‘가드레일 인출 전략’이라고 부른다. 셋째, 현금성 자산(2~3년치 생활비) 확보도 효과적이다. 시장 급락 시 투자자산을 팔지 않고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어 손실기에 불가피한 매도를 피하게 해준다.
은퇴 시점을 스스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시퀀스 리스크는 운의 영역이 아니다. 포트폴리오 구성, 인출 전략, 안전자산의 비중 등 얼마든지 관리 가능한 위험이다. 은퇴를 앞둔 투자자라면 단순히 평균수익률만 보지 말고, ‘초기 5년의 위험’을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 그 5년이 은퇴생활 전체를 결정짓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