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그렇지만 일본 또한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이 있었다. 메이지유신을 즈음해 궁벽한 시골에서는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쏟아졌다.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기 전까지는 시골 출신이라도 신분상승을 꿈 꿀 수 있었다. 이제 ‘개천 용’은 옛말이 됐다. 일본에서 ‘개천 용’이 많이 난 지역은 하나같이 외진 시골이다. 가고시마 가지야초(加治屋町)와 야마구치 하기(萩)가 대표적인데, 모두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깡촌이다. 이곳에서 메이지유신을 전후해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무더기로 나왔는데, 총리대신은 물론이고 해군대장과 육군대장, 교육‧정치 사상가가 줄을 이었다.
남쪽 끝 가지야초에서는 ‘유신 3걸’ 중 오쿠보 도시미치(총리)와 사이고 다카모리(참모 총장)를 비롯해 총리 2명, 육군대장 3명, 해군 대장 6명이 나왔다. 가지야초 ‘유신의 길’에는 이곳 출신 인물 18명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는데 면면이 빼어나다. 모두 반경 500m에서 나고 자랐다. 하기(萩) 또한 마찬가지다.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요시다 쇼인을 정점으로 이토 히로부미(총리)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육군 대장), 기도 다카요시(유신 3걸), 다카스키 신사쿠(회천 대업 주역), 가쓰라 다로(육군 대신과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총리와 조선 총독)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인구 4만 명에 불과한 곳에서 총리 5명과 대신, 육군대장이 배출됐으니 그야말로 ‘개천 용’의 성지다.
인물 경쟁에서 오이타(大分)현 기쓰키(杵築) 시를 빼놓을 수 없다. 구니사키(國東) 반도에 속한 기쓰키 또한 규슈 북동쪽에 위치한 한적한 바닷가다. 그런데도 일본 근대사를 추동한 숱한 ‘개천 용’이 나왔다. 지난주 구니사키 반도를 일주하면서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은 쇠락했지만 한때 일본 근대사를 쥐락펴락한 인물들이 쏟아졌다는 게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일본인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 대부분은 우리와 악연이라서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일관계가 제대로 보인다. 김종필 총리는 “한·일 역사를 넘나들면 영웅이 역도(逆徒)가 되고 역도가 영웅이 된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앞서 소개한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카타 아리토모, 데라우치 마사다케, 가쓰라 다로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조선 침략과 직접 연관돼 있다.
오이타가 배출한 최고 스타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다. 게이오(慶應)대학을 설립하고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쿠자와는 뛰어난 계몽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당대 일본 지식인과 근대화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후쿠자와는 700여 년 동안 지속된 막부 정치를 끝내고 서양문물을 수용하자고 역설한 선각자였다. 김옥균을 비롯해 유길준,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윤치호 등 조선의 개화파 사상가들도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후쿠자와는 갑신정변에도 개입했다. 요시다 쇼인과 함께 일본 근대화를 언급할 때마다 나란히 거론되는 후쿠자와는 얼마 전까지 일본 최고액 1만 엔 권을 장식하기도 했다. 정한론과 주변 국가 침략을 부추긴 죄과가 있지만 그에 대한 오이타 시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오이타가 배출한 또 다른 인물은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1887~1957)다. 그는 태평양 전쟁 당시 외무대신을 지냈고 천황을 대신해 항복문서에 날인했다. 10여 년 전 처음 기쓰키 성에서 시게미쓰와 조우했는데 예상치 못했다. 인근 무사마을을 돈 뒤 오른 기쓰키 성에서 전시물 가운데 시게미쓰 유품이 눈에 뜨였다. 윤봉길 의사 사진과 그가 입었다는 혈흔이 묻은 해진 옷, 그리고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사진 등이다. 윤 의사가 왜 이곳에 있을까하는 의문은 사진 설명을 읽고 풀렸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기념식장에서 윤 의사가 던진 폭탄에 오른 발을 잃었다. 너덜너덜한 옷은 그때 입었던 것이다. 그는 1945년 8월 15일에는 미주리 전함에서 일본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날인했다. 유튜브 영상에서 나레이터는 ‘일본 대표단을 이끄는 시게미츠 외무상은 수년 전 상하이에서 한국인 애국자에 의해 부상을 입었으며, 한쪽 다리는 의족이다.(They are headed by Agent Mamoru Shigemitsu, Foreign Minister of the Japanese surrender Cabinet, who was wounded by a Korean patriot in Shanghai years ago and walks on an artificial leg.)’고 소개한다. 기쓰키 시가 시게미쓰 유품을 전시한 의도는 자랑스러운 출향 인사임을 알리기 위해서였겠지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불편한 역사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쓰키 성에서 ‘상하이 의거’ 관련 유품이나 항복문서 서명 사진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기쓰키를 찾는 한국인들 감정을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인지 알 수 없다. 지난주 방문에서도 시게미쓰가 쓴 휘호와 저서, 가족사진으로 새롭게 꾸민 전시물만 확인했다. 이외 기쓰키 출신으로 조선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南次郎, 1874~1955)와 연합함대 사령관을 역임한 해군 대장 도요다 소에무(豊田副武, 1885~ 1957), 호세이(法政)대학 설립자 가네마루 데쓰(金丸鐵)와 이토 오사무(伊藤修), 그리고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1924~) 총리가 있다. 소도시치고는 대단한 인맥이다. 어쩌면 기쓰키 시민들은 이들을 통해 더는 ‘개천 용’을 기대할 수 없는 상실감을 달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