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 여는 수요일]눈의 묵시록


- 송종찬


갈 데까지 간 사랑은 아름답다

잔해가 없다

그곳이 하늘 끝이라도

사막의 한가운데라도

끝끝내 돌아와

가장 낮은 곳에서 점자처럼 빛난다

눈이 따스한 것은

모든 것을 다 태웠기 때문

눈이 빛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기 때문

촛불을 켜고



눈의 점자를 읽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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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는 날에는 연애도

전쟁도 멈춰야 한다

상점도 공장도 문을 닫고

신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성체를 받듯 두 눈을 감고

혀를 내밀어보면

뼛속까지 드러나는 과거

갈 데까지 간 사랑은

흔적이 없다





눈은 내려앉을 자리를 걱정하지 않는다. 순백의 빛깔을 지녔지만 그곳이 진흙이든, 잿더미든, 시궁창이든 가리지 않는다. 강물에 떨어져 가뭇없이 녹더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차별 없는 마음으로 갈 데까지 가고 만다. 서로 다른 색깔과 형태를 뽐내며 맞서고 다투던 것들을 하나로 감싸 안는다. 전쟁을 하다가, 장사를 하다가, 공장을 돌리다가도 흰 눈이 내리면 마음을 멈추게 된다. 모나고 이지러진 것들이 대책 없이 한 이불 덮은 걸 보면 서로가 한 형제인 걸 알게 된다. 갈 데까지 간 사랑은 흔적이 없지만, 올 데까지 오신 사랑은 만물에 스미어 새로운 생명이 된다. 2022년 메리 화이트 크리스마스!

-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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