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지주회사 설립을 전면 금지했던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인 1999년 세제 혜택을 부여하면서까지 대기업집단의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적극 장려했다.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도입된 이 제도는 이미 복잡한 지분 구조를 가진 기업 환경에서, 외국과는 달리, 지주회사가 자회사 주식을 전부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자회사와 손자회사 지분 30~50% 확보 정도가 허용됐다. 이처럼 불완전한 그룹 지배구조는 경제력 집중 또는 대주주의 지배력 확대라는 문제로 이어졌고, 이들 문제와 씨름하기 위해 수많은 규제가 추가되면서 한국은 세계에서 지주회사를 가장 강력하게 규제하는 국가가 됐다. 이제는 지주회사 체제가 오히려 기업 성장의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이재명 대통령은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인공지능(AI) 시대 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 보고회’에 참석해 투자 자금 조달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일리가 있다”며 “금산분리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실질적인 대책이 거의 다 된 것 같다”고 밝혔다. 첨단기술 투자에 한해 지주회사 체제에 적용되는 주요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문제가 되는 규제는 지주회사에서만 발생하는 독특한 규제로, 지주회사 체제가 아닌 대기업집단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다.
먼저 공정거래법상 손자회사의 ‘증손회사 주식 100% 소유’ 부분을 ‘50% 소유’로 완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투자 프로젝트는 사전 심사와 승인을 거쳐야 하고 지방 투자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조치는 금산분리 원칙과 관계가 없다. 금산분리 원칙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 지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원칙을 말한다. 손자회사의 증손회사 지분 100% 소유 규제의 주된 목적은 적은 자본으로 복잡한 피라미드식 지배구조를 무한히 확장하는 것을 차단하고, 기업집단의 소유구조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50% 소유로 낮춘다고 해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간의 영역이 침범되는 것도 아니고, 피라미드식 지배구조가 무한히 확장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50% 소유로 낮추면 국내외 전략적투자자(SI)나 재무적투자자(FI)를 영입해 합작투자회사(JV)나 특수목적법인(SPC)인 증손회사를 설립할 수 있다. 첨단산업 분야에 대규모 투자 유치가 가능해지고 전반적인 경영 효율성이 크게 증대된다.
다른 하나는 일반 지주회사가 첨단기술 투자에 한해 ‘금융 리스’와 같은 특정 금융업을 제한적으로 영위하는 자회사를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금융업은 본래 고객 예탁금(deposits)을 해당 금융기관의 운영 자금원이자 부채로 해 운용 수익을 창출하는 영리 행위다. 그러나 지주회사가 리스업 자회사를 두는 것은 금융업의 이와 같은 본질적인 요소와 거리가 멀어 금산분리와 큰 상관이 없다. 리스업은 제조·설비 투자가 필수적인 산업 분야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산업자본이 직접 금융 리스 회사를 소유하면 회계상 초기 비용을 줄이면서도 계열사나 관련 기업에 필요한 첨단 장비나 설비에 대한 금융 지원(리스)을 더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규제 완화가 이뤄질 경우 정부는 교조적인 기업집단 규제의 맹점을 과감히 해소하는 실행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한술 밥에 배부를 리 없다. 일회성에 그치지 말고 지속적으로 기업의 애로를 찾아 귀 기울여주면 좋겠다. 산업 환경 변화에 맞춘 규제 유연성 확보가 시대의 요구이자 성장의 열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