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시 칼을 빼들었다. 이번 타깃은 인공지능(AI) 규제다. 핵심은 ‘원 룰(One rule)’이다. 미국의 50개 주마다 따로 움직이던 AI 규제를 연방 차원의 단일 규칙으로 통일하겠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이다. ‘기업이 새로운 서비스를 낼 때마다 50개 주의 승인을 받는 나라에 혁신이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말이 정치적 수사처럼 들릴 수 있지만 행정명령에 담긴 내용은 미국이 기술패권을 잃지 않겠다는 선전포고다. 연방 규제와 충돌하는 주법을 법무부가 태스크포스까지 꾸려서 소송을 통해 제압하겠다는 구상은 ‘AI 패권 경쟁에서 규제 난립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유럽연합(EU)은 정반대의 길을 간다. EU의 인공지능법(AI Act)은 위험 기반 규제를 전면에 내세워 고위험 분야에 촘촘한 의무와 금지 규정을 부과한다. 회원국마다 샌드박스를 의무 설치하도록 하고 개인정보보호법(GDPR)과의 중첩 규제까지 겹치면서 기업의 준수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 부담을 감당할 체력이 있는 기업은 빅테크뿐이다. 결과는 뻔하다. 스타트업은 줄고 벤처 투자는 위축되며 유럽의 디지털 경쟁력은 뒷걸음쳤다. 규범은 강화됐지만 속도는 떨어졌다.
한국은 미국과 EU의 중간 어디쯤 서있다. AI·자율주행 기술만 보면 격차는 있지만 미국과 중국 등 선도국의 바로 다음 위치에 있다고 평가된다. 문제는 제도다. 한국은 미국처럼 시장 규율과 사후 책임을 중시하는 기업자율형 규제도 아니고 유럽처럼 규범을 수출할 정도의 위치도 아니다. 잘못하면 EU식 엄격함에 한국식 행정주의가 더해진 최악의 규제 조합이 현실이 될 수 있다.
복잡한 절차와 부처 간 충돌은 이미 여러 산업 분야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2017년 정부가 가상자산공개(ICO)를 사실상 전면 금지한 사례는 뼈아프다. 국내 기업들은 싱가포르와 스위스로 옮겨가 토큰을 발행했고 혁신과 일자리, 그리고 우수한 인재는 해외로 빠져나갔다. 반면 해외에서 발행된 토큰은 국내 투자자에게 팔리는 기형 구조가 만들어졌다. 규제를 택했지만 위험은 국내에 남고 기회는 해외에 뺏긴 셈이다. ‘모르는 것은 일단 차단하라’는 손쉬운 선택이 가져온 값비싼 대가였다.
AI·자율주행은 그보다 훨씬 큰 무대다. 한국이 다시 ‘위험은 일단 막자’를 반복한다면 인재와 스타트업은 미국·중국 등으로 이동할 것이다. 국내 기업은 규제 불확실성을 이유로 투자를 미룰 것이고 국민은 해외 플랫폼이 제공하는 AI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기술은 수입하고 규제만 국산인 나라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방향성의 재정립이다. 우선 미국처럼 ‘원 룰’은 어렵더라도 최소한 ‘원 스톱(One-stop)’은 해야 한다. AI·자율주행 인허가를 위해 여러 부처를 전전하는 구조를 방치하면서 혁신을 말할 수는 없다. 부처 간 충돌을 조정할 상설 기구를 두고 인허가의 단일 창구를 명문화해야 한다.
둘째, ‘고위험만 강하게, 나머지는 가볍게’라는 원칙이 필요하다. 의료·금융 등 생명과 재산이 걸린 영역 중 민감한 부분은 강한 사전 규제를 두되 다른 서비스는 사후 책임·투명성·시장 경쟁으로 통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모든 AI를 잠재적 ‘위험물’로 취급하는 순간 한국은 스스로 경쟁력을 제한하는 꼴이 된다.
셋째, 규제 샌드박스를 제도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으로 가져와야 한다. 유럽이 샌드박스 설치를 의무화한 이유는 간단하다. 신기술은 실험과 학습 없이는 규제도 성숙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도 모든 신기술은 원칙적으로 샌드박스를 통해 빠르게 실험과 학습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 위험을 상상해 막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와 근거를 기반으로 규제를 설계해야 한다.
기업의 역할도 중요하다. 기업이 취할 AI 시대의 비시장 전략은 더 이상 정부의 규제 대응에 멈춰서는 안 된다. 규제 설계 자체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다. 기업은 기술 가이드라인, 안전 기준, 데이터 거버넌스를 정부보다 먼저 설계해 제안해야 한다. 정부가 참고할만한 규범의 초안을 만드는 기업이 규제의 방향을 결정한다. 글로벌 규제 포트폴리오를 분석해 어디서 개발하고 어디서 출시할지 전략을 정하는 일, 외국과 공동 테스트베드를 구축해 국제 레퍼런스를 확보하는 일도 이제 기업의 퍼블릭어페어즈(PA) 부서가 맡아야 한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단순히 미국 국내용이 아니다. AI 패권 경쟁의 룰을 미국식으로 세팅하겠다는 지정학적 선언이다. AI 시대의 규제 전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과잉 규제를 경계하면서도 가장 영리한 규칙을 가장 먼저 실험하는 나라가 돼야 한다.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 자칫 규칙은 남이 정하고 비싼 사용료는 우리가 치르는 시대가 올 수 있다. 기술은 수입해서 쓰고 규제만 국산인 나라가 된다면 결코 우리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보다 자신감을 갖고 AI 등 첨단산업의 규제를 대폭 정비해 기업이 맘껏 뛸 수 있도록 뒷받침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