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IN 사외칼럼

한일 해저터널과 침략의 땅 [임병식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

임병식 순천향대 초빙교수

한일 해저터널의 일본 쪽 기점으로 회자되는 규슈 사가현 가라쓰에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출병 거점이었던 가라쓰성이 다리 너머 보이는 모습. /사진 제공=임병식한일 해저터널의 일본 쪽 기점으로 회자되는 규슈 사가현 가라쓰에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출병 거점이었던 가라쓰성이 다리 너머 보이는 모습. /사진 제공=임병식





통일교가 정치권을 흔들고 있는 가운데 일본 사가현 가라쓰(唐津)에 눈길이 간다. 통일교 최대 숙원인 한일 해저터널의 일본 쪽 기점으로 가라쓰가 거론되기 때문이다. 규슈에 위치한 가라쓰는 한반도와 최단 거리에 있는 일본 땅이다. 부산과 가라쓰를 연결하는 한일 해저터널은 과거 정부에서도 심심치 않게 거론됐다. 연간 한일 방문객이 1,400만 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해저터널이 열린다면 한일 관계에 폭넓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부산에서 가라쓰는 200km, 해저 구간만 140km에 이른다.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유로터널 50km(해저 38km)와 비교하면 네 배 이상 길다. 또한 대한해협은 수심이 깊고 물살도 거세다. 100조 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업비에다 지진·단층·수압이라는 기술적 난관도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업 성격상 양국 정부 동의 없이는 한 발도 나갈 수 없다. 그런데도 통일교는 수십 년째 이 사업에 목을 매고 있다. 왜일까.

지금까지 드러난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통일교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접촉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윤석열과 이재명 후보를 놓고 배팅했다. 이들 로비가 향한 종착점은 ‘한·일 해저터널’이었다. 통일교가 해저터널에 집착하는 이유는 교리와 관련됐다. 문선명 총재는 1981년 ‘국제 평화 고속도로’ 구상을 발표했는데, 도쿄-서울-평양-베이징-모스크바-런던-뉴욕을 잇는 도로망이다. 출발점은 한·일 해저터널이다. 그는 한국을 ‘아담(아버지 나라)’, 일본을 ‘하와(어머니 나라)’로 불렀다. 한국과 일본이 연결돼야 ‘새 문명’이 열린다는 것이다. 통일교가 주관하는 한국과 일본 사이 대규모 합동결혼식도 여기에 근거한다.



종교적 교리는 해저터널이라는 토목 사업으로 구체화 됐다. 터널은 교리만으로 뚫리지는 않는다. 예상 노선은 일본 사가현 가라쓰에서 부산 또는 거제도다. 만일 한일 해저터널이 뚫린다면 세계 최장이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난제는 많고 사업비 또한 천문학적이다. 결국 통일교 단독으로는 불가능하고, 국가 재정과 인허가, 군사·안보까지 고려한 정부 결단이 필요하다. 로비가 ‘필연적 통로’가 되는 구조다. 부산 정치권이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부산은 한국 측 관문이자, 사업 성패가 달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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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에 따르면 통일교는 가라쓰 일대 토지 매입까지 마쳤다. 종교 단체가 특정 노선의 기점 토지를 매입하고, 탐사 목적에서 굴착까지 진행했으니 단순한 부동산 투자를 넘어섰다. 정책 결정을 유인하려는 선행 조치다. 정치권에선 그간 가덕도 신공항, 부산항 물류, 남부권 메가시티 같은 개발 의제가 등장할 때마다 해저터널이 끼어드는 장면이 반복됐다. 지역 숙원과 초대형 프로젝트가 맞물리고 막연한 구상이 ‘미래 먹거리’로 포장되면서 복마전 양상을 띠고 있다.



더 불편한 건 역사 속에서 가라쓰가 차지하는 의미다. 가라쓰는 433년 전 임진왜란 당시 왜군 출병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앞두고 가라쓰 나고야성을 쌓고 병참과 지휘 체계를 구축했다. 18만 명에 달하는 왜군은 이곳에서 부산으로 향했다. 그들이 가라쓰를 택한 이유 또한 통일교가 내세우는 ‘최단 거리’와 같았다. 가라쓰는 조선과 가장 가깝고, 배를 숨기기 쉽고, 대군을 집결시키기 유리했다. 결국 가라쓰는 ‘침략의 기억’을 환기하는 땅이다. 이제 나고야성은 폐허로 변해 황량하지만 400년 전에는 조선을 약탈한 불행한 출발점이었다.

한일 해저터널과 관련해 유럽 사례가 소환된다. 유로터널, 그리고 스웨덴 말뫼와 덴마크 코펜하겐을 잇는 외레순 대교는 국경을 넘어 사람과 물류가 오가는 성공 사례로 회자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가 있었다. 제도적 정비, 규범과 표준의 조율, 오랜 신뢰와 축적이 있었다. 터널과 교량은 ‘통합의 원인’이 아니라 ‘통합의 결과’였다. 한·일은 아직 그 단계에 있지 않다. 경제 협력 필요성 못지않은 과거사 인식, 안보 환경, 국민 정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게다가 어느 쪽에 수혜가 돌아갈지, 불균형은 어떻게 보완할지, 유사시 안보 취약점은 없는지까지 냉정한 계산이 필요하다.

결론은 간단하다. 한·일 해저터널은 ‘종교 단체 비전’도, 선거 때마다 던지는 ‘한 방 공약’도 될 수 없다. 역사와 현실을 직시한 토대 위에서 비용과 위험, 외교·안보 파장을 국민 앞에 투명하게 설명하고 결정할 사안이다. 400여 년 전 가라쓰에서 부산으로 이어졌던 길은 침략의 통로였다. 오늘 ‘연결의 통로’를 말하려면, 신뢰와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라쓰가 뜬금없이 뉴스로 부상한 현실은 불편하다. 수년 전 가라쓰 성터에서도 착잡한 심경이었다. 그나마 조선 침략을 인정하고 한일 교류 역사에 초점을 맞춘 사가현립박물관에서 불편함을 덜었다. 해저터널은 기술로 연결할 수 있겠지만, 신뢰는 시간이 만든다. 순서를 바꾸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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