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지난 67년 3월 31세의 나이로 대우실업을 창업하면서 경영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김 전 회장은 이후 왕성한 기업사냥을 통한 ‘다계열ㆍ다업종’ 확장으로 회사규모를 키워나갔다. 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달고 무역 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고, 76년에는 한국기계를 흡수해 대우조선으로 개편한 옥포조선소과 묶어 대우중공업을 만들었다.
이 같은 급속한 외형확장의 결과 72년 수출 5위라는 눈부신 기록을 남긴 데 이어 창업 15년 만에 대우를 자산기준 국내 4대 재벌로 성장시켰다.
70년대 국내 산업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힌 그는 80~90년대 ‘세계경영’을 화두로 내걸고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였던 폴란드ㆍ헝가리ㆍ루마니아ㆍ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는 등 사업영역을 확대해나갔다.
그러나 97년 11월의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돌입은 대우 신화의 붕괴를 재촉했다. 국가신용등급 추락의 여파로 해외 채권자들로부터 극심한 상환압력을 받게 되면서 세계경영의 허점이 노출된 것이다.
김 전 회장은 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아 ‘수출론’을 집중 부각시키면서 승부수를 던졌으나 대우차-GM 합작 추진이 무산되고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결국 99년 8월 대우그룹 모든 계열사의 워크아웃이라는 극약 처방을 받은 그는 10월 중국 공장 방문 이후 귀국하지 않은 채 지금껏 5년10개월째 해외를 전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