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59·서울대 사대 교수) 시인이 새 시집 ‘봄비 한 주머니’(창작과 비평사 발행)를 냈다. ‘누이’ 이후 3년 만에 묶어낸 신작 시집이다. 평론가 최원식씨는 이 시집에 붙인 해설에서 18세기 조선시대의 시인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35)의 한시 한 편을 인용하고 있다. ‘아름다운 이여, 낭군의 나이를 묻지 마시라 오십년 전에는 스물셋이었다네(佳人莫問郎年幾 五十年前二十三)’라는 이 시의 구절이 유씨의 새 시집을 보면 절실하게 느껴진다. 한 시절 많은 시와 에세이로 젊은이들의 가슴을 울렸던 그의 시세계가 등단 35년에 와닿은 연륜의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새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자비로움’이라는 짧은 시는 그 세월에 시인이 획득한 여성으로서의 모성이나, 인간에 대한 생각의 깊이가 그림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는 명편이다.
‘종일 헤매어 지친 애버러지 떨어져 시든 꽃잎 위에 엎드리니 내일 떨어질 꽃잎 하나가 보다 못해 미리 떨어져 이불 덮어주는 저녁답’
내일 떨어질 꽃잎 하나가 미리 자신을 던져 지친 벌레의 이불이 되어준다는 섬세한 이미지가 읽은 이의 가슴을 훈훈한 자비심으로 감싸안는다. 시집의 표제작도 이런 자비심의 표현이다.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헤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 살 돋기 바라면서’.
시인의 이런 마음은 그러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사의 철저한 죄값을 먼저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버러지’라는 비유가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에서는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낙엽이 낙엽에게 말한다.
‘시뻘겋게 싯누렇게 물든 얼룩으로 거무죽죽 푸르딩딩 썩어 파인 자국으로 땅바닥에 엎드려 죄값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구나’(‘낙엽이 낙엽에게’부분)
‘이 장엄하고 성스러운 백설의 천지에서는 내가, 나 같은 버러지가 감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만 그저 동맥이나 싹둑 잘라 아아 외마디나 바쳐올릴 수밖에는’(‘눈 쌓이는 밤’ 부분).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가장 잔인하고 흉물스런 짐승’인 인간에 대한 이런 철저한 자기비판의 길을 지나서야 비로소 미리 떨어져 이불이 되는 꽃잎의 자비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을 시인은 ‘세한도 가는 길’이라 부른다. 추사의 ‘세한도’를 보고 유씨는 우리가 걷는 길이 알발로 얼음장 길을 가는 것이라 깨달아 보여준다. ‘천명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세한도 가는 길’ 부분).
모든 시인은 단 한 편의 시를 꿈꾼다. 유씨는 “오기나 욕심 같아서는 이 한 편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고 할 만한 시를, 쓰고 나선 죽어도 좋다 싶은 시 한 편을 써보고 죽고 싶었습니다마는…”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번 시들은 바로 그 한 편의 시에 이르기 위한 고통의 도정으로 읽힌다.
하종오기자입력시간 2000/04/02 2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