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대통령 선거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느닷없는 계엄령 선포, 헌법재판소의 윤 대통령 파면 결정, 조기 대선을 위한 후보 선출까지. 6개월 동안 그야말로 ‘다이내믹 코리아’의 진수가 펼쳐졌다. 내지 않아도 될 ‘수업료’를 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회복 탄력성이 증명됐고 새 정치 체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이 커진 점은 소득이다.
사실 이번 대선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3년 만에 대통령을 또 뽑아야 하는 유권자들이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들이나 매한가지다. 후보들의 비전·국정철학·공약·도덕성 등을 심도 있게 검증해야 할 시간도 그 어느 때보다 짧다. 게다가 후보 등록 마감일인 이달 11일까지 생중계된 국민의힘의 ‘대선 후보 단일화 막장 드라마’ 탓에 짧은 검증 시간을 추가로 허비했다. 결국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김문수 국민의힘,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 라인업은 선거일(6월 3일)을 고작 23일 앞두고 확정됐다.
대선 후보들은 지난주부터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잇달아 공약을 내놓고 전국을 돌며 유세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 때문에 치러지는 ‘조기 대선’의 특수성 때문에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세세한 공약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과거에 활발했던 시민사회나 전문가 집단의 공약 검증도 거의 없다. 위헌적 계엄에 대한 심판이 우선이냐, 국회 권력을 남용한 정치 세력에 대한 견제가 먼저냐가 ‘투심’을 가르는 포인트가 되는 분위기다.
국민들이 정치인들의 공약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정치인의 약속을 잘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많은 선거에서 후보들은 그럴듯한 공약들을 쏟아냈지만 제대로 실행한 경우는 찾기 힘들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따르면 과거 대통령들의 4년 차 공약이행률은 모두 절반에도 못 미쳤다. 국민들이 이번처럼 급조된 선거에서 급조해 내놓는 공약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이런 경험의 산물일 것이다.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일 뿐’이라는 좌절감을 또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방어기제일 수도 있다.
국민들이 공약에 큰 관심이 없다 보니 후보들도 ‘아무 말 대잔치 공약’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재명·김문수 후보가 나란히 내세운 ‘요양병원 간병비 급여화’가 대표적이다. 초고령화 시대에 간병비는 분명 국민들의 큰 부담이지만 두 후보의 공약에는 ‘어떻게’가 없다. 건강보험공단연구원에 따르면 중증 환자의 요양병원 간병비만 급여화해도 연간 최소 15조 원의 건보 재정이 필요하다. 내년에 적자로 전환되고 2030년에는 기금이 소진될 것으로 예상되는 건보로서는 여력이 없다. 게다가 간병비 급여화는 지난 20대 대선에서도 윤석열·이재명 후보 모두 내세웠던 공약이다. 하지만 한 걸음도 진척되지 못한 채 3년이 지났다.
대통령 후보의 공약은 그 어떤 정치인의 공약보다 중요하다. 임기 내 국정 전반에 걸친 ‘철학’을 규정짓는 약속이다. 유권자 스스로 공약을 중시해야 새 정부의 정책 방향성을 강제하고, 성실한 이행을 요구할 수 있다. 이번 선거의 특수성 때문에 후보들의 공약에 대한 관심이 예전에 비해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비극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는 공약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 특히 비상계엄과 탄핵으로 이어졌던 혼란의 원인인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개헌을 통해 제한하고 분산해야 한다. 마침 18일 이재명·김문수 후보가 각각 개헌 공약을 발표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발표한 것은 다행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두 후보 간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통령의 권력을 축소시키고 책임은 강화하려는 취지가 읽힌다.
두 번에 걸친 대통령 임기 전 탄핵의 고리를 끊고 대화와 타협을 통한 갈등 중재라는 정치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시작은 개헌이다. 유권자 스스로 강력한 ‘개헌 공약 청구서’를 손에 쥐어야 한다. 그래야 차기 대통령이 또다시 차선을 벗어나려 할 때 안전벨트를 조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