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미국산 사과 수입을 통상 협상 카드 중 하나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미국의 25% 상호관세 유예가 8일 종료되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가별로 최대 7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압박하자 비관세장벽 중 하나인 농산물 검역을 협상 카드로 꺼내 든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단 1개의 사과도 수입한 적이 없어 시장 개방 시 농가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된다.
4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최근 수입 농축산물 검역 당국인 농림축산식품부에 미국산 사과 수입을 전향적으로 검토하라는 지시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미국은 1993년 우리나라에 사과 수입 위험 분석을 신청한 바 있으나 33년째 8단계 검역 절차 중 2단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미국산 사과의 검역 절차가 수십 년 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국내 농가의 피해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 사과는 국내 전체 과일 중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과일로 재배 면적은 올해 기준 전국 노지 과수 재배 면적의 23.3%에 달했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호주 등 사과 수입 위험 분석을 신청한 11개국 중 검역을 통과한 곳은 지금껏 단 한 곳도 없었다.
문제는 미국이 수년째 사과를 비롯한 농산물 수입 위험 분석 절차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관세장벽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3월 발표한 ‘2025 국별 무역장벽(NTE) 보고서’에서도 “사과, 11개 주(州)산 감자 등 미국의 여러 시장 접근 요청이 한국의 농림축산검역본부에서 보류되고 있다”며 “이 상품들의 승인 절차를 신속하게 처리해줄 것을 요청해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여 본부장 역시 이날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미국 측은 농산물과 자동차·서비스 분야에서 시장 접근과 높은 수준의 규범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을 향해 쌀 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박 수위를 높인 것도 우리 정부가 사과 수입 카드를 검토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오늘날 여러 나라가 미국에 대해 얼마나 버릇없어졌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말하자면 일본은 엄청난 쌀 부족을 겪고 있는데도 우리 쌀을 수입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일본에서 쌀 품귀 현상으로 인한 쌀값 폭등 사태가 1년째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이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한국 역시 지난해 사과 공급 부족에 따른 사과값 폭등 사태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쌀을 향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사과 가격은 공급 부족으로 인해 전년 동월 대비 최대 88.2%까지 폭등한 바 있다.
다만 생산량이 전 세계 2위인 미국산 사과가 들어올 경우 국내 사과 농가의 소득 피해는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후지(부사) 품종을 제외한 사과의 대미 관세율은 0%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미국의 연간 사과 생산량은 우리나라의 10배를 훌쩍 넘는 542만 6500톤에 달했다. 전 세계 수출량은 90만 톤에 육박했다.
한편 여 본부장은 사과 등 농산물 비관세장벽 완화,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확대 등을 포함한 각종 대미 무역적자 해소 방안 카드를 들고 이번 주말에 미국 워싱턴DC를 찾아 상호관세 부과 직전 막판 대미 협상에 나설 예정이다. 여 본부장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USTR 대표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등 미국 고위 당국자들과 면담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 본부장은 “주요 이슈별 우리 측 제안과 한미 상호 호혜적 산업 협력 방안을 제시할 것”이라며 “협상 진행 경과에 따라 필요시 상호관세 유예 연장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