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전공의 떠난 500일, AI로 버텼다…의료공백 메운 '디지털 레지던트'

[헬스케어 판 흔드는 AI]

<상> 의료진 '새 어시스턴트' AI

AI가 2주내 부정맥 발병시점 예측

의사-환자 대화 실시간 기록·요약

3시간 걸리던 서류작업 AI가 처리

의료진 행정업무 벗어나 진료 집중

의료현장 AI기술 활용 혼란 최소화

위기를 기회로 바꾼 진료실험 성공

김지완 서울아산병원 정형외과 교수가 인공지능(AI) 진료 음성인식 시스템을 활용해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사진 제공=서울아산병원김지완 서울아산병원 정형외과 교수가 인공지능(AI) 진료 음성인식 시스템을 활용해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사진 제공=서울아산병원




4일 서울 양천구의 이대목동병원. 박준범 이대목동병원 부정맥센터장(순환기내과 교수)이 부정맥 의심 증상으로 응급실을 통해 내원한 A 씨의 심전도(ECG) 검사 결과를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 모니터의 전자의무기록(EMR)에서 환자의 주요 병력을 확인한 박 센터장의 시선이 또 다른 모니터 속 영상으로 향한다. 왼쪽 모니터에는 14일 이내 치명적인 부정맥인 심방세동 및 심방조동이 발생할 확률이 92%에 달한다는 분석 결과가 제시돼 있다. 인공지능(AI) 기반 부정맥 예측 솔루션 ‘맥케이(Mac’AI)’가 A 씨의 ECG 검사 결과를 토대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정맥 발생의 위험과 시점을 분석한 것이다. 이를 확인한 박 센터장은 A 씨에게 실시간 ECG 모니터링이 가능한 웨어러블 디바이스 착용과 함께 입원 처방을 내렸다.

흔히 부정맥 진단을 ‘두더지 게임’에 비유한다.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부정맥을 10초 남짓의 표준 ECG 검사로 잡아내기기가 쉽지 않아서다. 시너지에이아이가 개발한 맥케이는 부정맥 의심 환자의 ECG를 AI로 분석해 향후 14일 이내 발생할 부정맥의 시점을 예측한다. 의료진이 환자에게 언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근거를 제공하고 궁극적으로 뇌졸중 등 치명적인 부작용을 예방할 수 있다. 맥케이는 정상 ECG 데이터만으로 부정맥 27종의 발생 위험을 91.3%의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다는 확증 임상 결과를 토대로 2024년 4월 식품의약품안전처 2등급 의료기기 허가를 받았다. 올 4월 보건복지부 신의료기술평가 유예 대상으로 선정돼 20여 개 대학병원에서 순차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2주라는 짧고 명확한 부정맥 예측 기간을 제시할 수 있는 기술은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의 의료 AI 대표 기업 템퍼스AI조차 1년 이내 심방세동 위험을 예측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박 센터장은 “이제 AI가 단지 위험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시점을 제시해 의료진의 고민을 덜어주는 시대가 왔다”며 “2주 예측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진료 방식의 흐름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준범 이대목동병원 부정맥센터장(순환기내과 교수)이 인공지능(AI) 기반 부정맥 예측 솔루션 ‘맥케이’를 활용해 환자의 심전도(ECG) 검사 결과를 분석하고 있다. 사진 제공=이대목동병원박준범 이대목동병원 부정맥센터장(순환기내과 교수)이 인공지능(AI) 기반 부정맥 예측 솔루션 ‘맥케이’를 활용해 환자의 심전도(ECG) 검사 결과를 분석하고 있다. 사진 제공=이대목동병원



의료 AI는 X레이, 컴퓨터단층촬영(CT) 같은 영상 검사를 판독해 의료진의 진단을 보조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치료 의사 결정을 돕는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문자·그림·영상 등 다양한 유형의 정보를 동시에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는 멀티모달 AI와 대규모언어모델(LLM)이 보편화되면서 질병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가까운 미래에 어떤 질병에 걸릴 위험이 높은지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식약처에 따르면 2018년 4건에 불과했던 의료 AI 제품은 2021년 102건, 2022년 149건, 2023년 213건 등으로 빠르게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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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과대학 정원 증원 추진에 반발한 전공의 1만 3000여 명이 병원을 떠나면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뉴노멀’ 상황은 진료 현장의 혁신을 가속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가장 먼저 변화를 맞은 곳은 의무 기록 작성 현장이다. 그동안 의료진은 하루에도 수십 건씩 쌓이는 입퇴원 서류와 각종 기록지, 보험 청구 문서 작성 등 진료 외 업무를 수행하느라 2~3시간을 허비해왔다. 하지만 새로 도입된 AI 기술은 타이핑 없이 음성인식으로 실시간 의무 기록을 작성하도록 돕고 진료 문서 초안도 작성해준다. “500일 넘게 이어져 온 의료 공백을 버티게 해준 동료”라는 게 의료 현장 관계자들의 평가다.

각종 행정 업무를 AI가 떠안으면서 부담이 줄어든 의료진이 환자에게 더 집중하는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연세의료원은 지난해 11월부터 환자의 진료 기록 작성을 지원하는 AI 기반의 ‘와이낫(Y-Knot)’을 도입했다. 전공의 공백으로 남은 의료진의 업무 부담이 커지자 온프레미스(내부구축형) LLM 기반의 자동 임상 문서 초안 작성 시스템을 자체 개발했다. 응급의학과 퇴실기록지, 마취통증의학과 수술 협의 진료회신서, 퇴원기록지 등의 초안이 자동으로 작성되기 때문에 담당 의사가 확인 후 수정만 하면 된다. 유승찬 연세대 의과대학 의생명시스템정보학과 교수는 “시범 도입 후 퇴실기록지 1건 작성에 걸리는 시간이 약 66.4%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며 “기존 의료진의 업무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AI 활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어 내부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한림대춘천성심병원 병동 간호사들이 컴퓨터에 띄워져 있는 인공지능(AI) 예측모델을 보며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 제공=한림대춘천성심병원한림대춘천성심병원 병동 간호사들이 컴퓨터에 띄워져 있는 인공지능(AI) 예측모델을 보며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 제공=한림대춘천성심병원


서울아산병원은 국내 최초로 의료진과 환자 간 대화를 실시간 기록하고 요약해 의무 기록 작성까지 자동으로 시행하는 AI 기반 진료 음성인식 시스템을 구축했다. 올 3월부터 운영을 시작해 현재 소화기내과·신경과·종양내과 등 약 20개 진료과에서 의사·간호사·임상심리사 등 다양한 직군이 활용 중이다. 음성인식 정확도는 평균 96.1%, 요약문 정확도는 92.8%에 달한다. 김영학 서울아산병원 디지털정보혁신본부장은 “반복적인 기록 업무의 자동화로 의료진의 업무 효율성과 환자 중심 진료 환경을 동시에 실현하고 있다”며 “심폐소생술 등이 필요한 응급 상황에서 긴박한 의료진의 대화를 실시간 텍스트로 변환해 의무 기록으로 자동 저장하고 추후 활용할 수 있어 환자 안전을 지키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안경진 의료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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