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직종에 오래 몸담고 있다 보면 특유의 버릇이나 직업병이 생기게 마련이다.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해온 필자의 직업병 중 하나는 일상 주변에서 미술작품이 보이면 어김없이 작가명, 작품명을 확인하거나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이나 아카이브 소장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가의 미발표작이거나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품이 없는 작가를 발견하면 로또에 당첨된 듯 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작가 김종휘의 작품을 재발견한 계기는 매우 우연한 기회였다. 2018년 ‘갤러리 60’이 성북동에 잠시 있었을 때다. 전시를 보러 가서 갤러리 카페에서 커피를 기다리다 벽에 걸린 풍경화 소품을 발견하게 됐다. 구성과 필치가 좋아서 작가명을 물어보았더니 김종휘 작가라고 했다. 당시 갤러리 60의 김정민 대표가 김종휘 작가의 차녀임을 알게 됐고 그 뒤로 작가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에는 김종휘의 작품이 2점 밖에 없었기에 김종휘의 전체 작품세계 중 시기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향리’(1987),'오향(奧鄕)'(1979),'청관(淸館)'(1959) 3점을 추가로 수집하기에 이르렀다.
‘향리’는 1987년에 제작돼 제9회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당시 그는 ‘향리’라는 주제로 연작을 제작했다. 환갑에 들어선 그가 자신의 기억 속 고향을 떠올리는 작품을 제작한 것인데, 예술가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생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노스탤지어의 환기는 미술 뿐만 아니라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예술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특징이다. 그럼에도 김종휘의 고향관이 남달랐던 이유는 역사가 살아있던 경주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부친의 사업으로 함경남도에서 살았던 기억 때문이다. 경주는 남산을 비롯한 다양한 산림이 분포하고 있지만 그리 높지 않은 산세, 가까운 곳에 동해를 낀 지역인 데 반해 함경남도 신흥군은 고원지대와 평야 지대, 바다가 공존하고 있지만 대부분 산악지형으로서 성천강과 그 강으로 유입되는 작은 하천들이 있다. 높은 고원지대를 끼고서 폭포도 더러 있다고 하니 어린 소년이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기후에 있어서도 함경남도는 경주보다 더 혹독한 겨울을 지내야 했기에 4계절을 더욱 뚜렷하게 겪었을 것이다.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까지 지낸 함경남도가 그의 기억 속에 고향에 대한 시각적 추억과 경험으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각인된 곳이었다. 하지만 1951년 전쟁 중 경주로 귀향하게 된 이후 더 이상 가볼 수 없는 곳이 돼 버렸다.
따라서 작가는 풍경을 그리는 데 있어 고향, 자연, 기억 마을의 이미지를 회상하며 그려내는데, 마치 실향민과 같이 존재하지만 가볼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담아냈다. 되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애절함은 1970년대부터 본격화됐다. 홍익공전에 재직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고 토착적인 이미지 발상에 주력했던 ‘구상회전’에 참여하면서 작가는 경주와 함경도 광산촌을 재구성해 자신만의 자연관을 확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정한 장소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의 작품이 더 정감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회화기법에 있어서 서양화지만 동양화적 감성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서양과 동양, 구상과 추상, 수채와 유채 등의 단절된 구분에 구애받지 않고 과감한 실험을 해왔으며 ‘향리’에서 보듯 스케일감이 큰 동양화 한 폭과 같은, 경계를 초월한 화면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당시 다른 작가들의 한국성 추구 경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작가는 1970년대 후반부터 속도감 있는 빠른 필치, 독특한 질감 효과, 전면을 가득 찬 풍경을 그렸는데 작품 속 스케일이 커지면서 화면에서는 전체를 조감하는 듯한 시각으로 인해 광활한 자연의 거대하고 압도적인 장관이 펼쳐진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향리’ 시리즈에서 작가는 자연의 운동감을 그대로 표현하는데 적갈색, 황갈색, 청록색 등을 중심으로 그가 느끼는 한국의 공기, 흙 등을 나타내고 있다. 빠른 필치와 담백한 질감 표현은 그가 즐겨 그렸던 수채화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으나 산이 지닌 공간감과 공기의 흐름에 의한 호쾌한 기운을 잘 드러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가 이렇듯 자신감 있게 자기 뜻을 펼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50년대 초 경주예술학교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의 수학이 있다. 경주예술학교는 1945년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전문학교로서 음악과와 미술과를 개설했고, 1948년 하반기부터는 미술과만 운영했다. 김준식, 김만술, 김창억, 주경, 윤경렬 등 공예, 조각, 회화 등 여러 분야의 쟁쟁한 실력자들이 초기 교수진으로 있었으며 독자적인 교과과정을 실천했다. 김종휘로서는 초기부터 미술에 대한 열린 태도를 습득한 계기가 됐다. 이후 편입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도 김환기를 비롯한 박고석, 이봉상, 한묵 등이 재직해 당대 재야적이며 실험적인 화풍을 강조했다. 이는 20대 후반 신진작가인 김종휘에게 개인의 개성을 바탕으로 창의성과 진취성을 고양하는 데 자극이 됐을 것이다.
오랫동안 홍익대에 재직했던 작가는 생전 경기도 양평에 작업실 겸 집을 마련해 새로운 작품세계를 희망했다. 정년퇴직 후 가족들과 함께 교외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고자 했던 계획이었으나 2001년 작고해 실현되지 못했다. 그런데 2025년 유족 김정민이 남편과 함께 부친의 뜻을 기려 그 자리에 미술관을 지어 현재 ‘가회 60+ 김종휘 아카이브’를 운영하고 있다. 김종휘가 구체화하려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양평 작은 마을이 보이는 창가 옆에 걸린 작품에서 그가 꿈꾸었던 향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종휘 ‘향리’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향수, 고향을 그리다’(11월9일까지) 전시에서 볼 수 있다.
★김종휘(1928~2001) : 경주에서 태어나 부친을 따라 유년시절을 함경남도 신흥군 원평면 풍서리에서 보냈다. 1951년경 경주예술학교에 입학해 공부했으며 1953년 홍익대학교 2학년에 편입해 1957년 졸업했다. 1958~62년 인천여자상고 강사 및 교사, 1964~65년 홍익공예고등전문학교 강사, 1969~1976년 홍익대 미대 강사 1965~1989 홍익공업전문대학 전임강사 및 교수, 1981~88년 홍익대 미대 강사, 1989~91년 홍익대 산업대 교수 및 학장, 1992~93년 홍익대 조형대 학장을 역임했다. 1959년 제 1회 개인전을 인천 항도다방에서 개최한 이후 1989년까지 10회에 걸쳐 꾸준히 개최했고 주요 단체전으로 1958~59년 현대작가초대미술전,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신상회, 구상전 등에 참여했다. 1979년에는 한국수채화 9인전에도 참여했으 1980년대까지도 수채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수채화 전시에 다수 출품했다. 1980년대에는 국내외 현대서화전시에 참여했다.
▶▶필자 류지연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운영부장이다.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입사해 전시기획, 미술관교육, 소장품연구, 레지던시, 서울관·청주관 건립TF 등 미술관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며 29년째 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영남대 미학·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에식스대학교(Essex University)에서 미술관학(Gallery Studies)을 공부했으며, 서울대에서 미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겸임교수(2022~2023)를 비롯해 여러 미술관과 기관의 운영자문위원, 소장품 수집위원 등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