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30일 한은의 유동성 공급 정책의 대대적인 손질을 시사했다. 극단적으로는 미국과 같은 양적완화 도입 검토도 열어뒀다. 실현 가능성이 적지만 잠재성장률이 예상보다 큰 폭으로 하락할 수 있다는 우려에 더이상 기준금리로는 통화정책을 운용하기 어려운 상황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는 이날 한은이 한국금융학회와 함께 연 정책 심포지엄에서 환영사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이 총재는 "우리 경제를 둘러싼 통화정책 여건의 중장기 구조적 변화를 고려하여 통화정책 운영체계를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면서 “그동안 기조적인 유동성 흡수 수단으로 주로 활용되어 온 통화안정증권의 역할을 재점검할 필요가 생겼고 한은의 환매조건부증권(RP) 거래도 유동성 변화 추세에 부응할 수 있도록 개선 방향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의 통화정책은 통화안정증권 발행과 RP 매각 등 유동성 흡수로 이뤄졌는데 최근에는 단기 자금시장 유동성이 빠듯한 상황이 지속돼 RP 매입 등 그 반대의 공급이 필요한 상황이다. 주된 배경으로는 환율 급등락에 따른 외환 당국의 시장 개입이 꼽힌다. 당국은 달러를 매도(공급)하고 원화를 매수(흡수)하는 방향으로 환율 안정화에 나선다. 은행이 한은에 맡긴 계좌에서 원화가 빠져나간다는 얘기로 이 과정에서 원화 유동성이 자금시장에 덜 공급될 소지가 있다.
일각에서는 덩치를 불린 '서학개미'의 영향으로 외환 수급 불균형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 총재 역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은은 외환보유액을 확충하고 과도한 환율 변동성을 완화하는 과정에서 시중에 공급된 유동성을 흡수하는 데 공개시장운영의 초점을 맞춰왔다"면서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추세적으로 감소할 가능성이 커지고, 거주자의 해외증권투자가 증가하는 등 유동성 수급 여건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 총재는 중앙은행의 국고채 매입 등 주요국의 양적완화(QE) 도입 가능성도 시사했다. 이 총재는 “저출산・고령화 심화, 잠재성장률의 추세적 하락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선진국처럼 정책금리가 제로하한 수준에 근접하게 되면, 선진국 중앙은행이 했던 것처럼 양적완화와 같은 대차대조표 확대 정책을 도입할 수 있을지,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등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