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유럽이 연이어 대미 자동차 관세율을 15%로 내림에 따라 미국 시장 경쟁 관계인 한국 현대차그룹에 비상등이 켜지게 됐다. 일본과 유럽연합(EU) 모두 관세율 낮추는 대신 천문학적인 액수의 대미 투자, 미국산 상품 구매 약속 조건을 내걸었기에 한국 정부도 이에 상응하는 카드를 꺼내야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7일(현지 시간) AFP·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영국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만난 뒤 자동차 등 EU산 모든 품목에 대한 관세율을 15%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미국에 수출되는 EU산 제품에는 지금도 기존의 평균 4.8% 관세와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 도입한 기본관세 10%가 부과되고 있어 유럽 입장에서는 사실상 현상 유지에 성공한 결과를 얻게 됐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도 15% 관세 합의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번 합의가 안정성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엇보다 “미국으로 수출되는 EU산 자동차에도 15% 관세율을 적용할 것”이라고 말해 한국 정부와 업계를 긴장하게 했다. 이는 상호관세와 자동차 관세를 모두 총 15%로 인하하기로 한 지난 22일 미일 무역 협상과 유사한 결과다. 미국이 올 4월부터 모든 해외산 자동차 제품에 동일하게 25%의 품목 관세를 부과하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과 EU만 단숨에 경쟁력을 확보한 형국이 됐다. 실제 미일 협상 타결 당시 제너럴모터스(GM)·포드·스텔란티스 등 미국 3대 자동차 제조 업체를 대표하는 미국자동차정책위원회(AAPC)는 “해외 업체에 대한 15% 관세가 캐나다·멕시코에 공급망을 둔 자국 기업에 대한 역차별”이라며 반발한 바 있다.
EU가 상호관세율과 자동차 품목 관세율을 15%까지 낮춘 데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대미 투자 약속이 지렛대 역할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가 총 7500억 달러(약 1038조 원)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를 구매하고 기존 투자 건 외에 6000억 달러(약 830조 7000억 원)를 추가 투입하기로 했다”며 “막대한 규모의 미국산 군사장비도 구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에 따르면 일본 역시 무역 협상을 타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5500억 달러(약 759조 원)어치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미국산 에너지 구매와 관련해 “2028년부터 러시아산 화석연료를 완전히 퇴출하기로 한 EU 계획에 맞춰 추산된 액수”라고 설명했다. EU 대변인도 기자들에게 보낸 입장문에서 구체적인 액수는 언급하지 않으며 “에너지 구매와 대미 투자에 관한 연간 금액에 관한 EU의 약속이 합의안에 포함됐다”고 수긍했다.
일본과 EU가 무역 합의로 자동차 등 한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대미 수출품 가격 경쟁력을 얻게 됨에 따라 우리 정부도 관세 협상에 더 속도를 낼 수밖에 없게 됐다. 일본·EU 등 거대 경제 권역과 먼저 무역 합의를 진행하면서 이를 빌미로 한국에 대한 협상 압박 수위를 끌어올리는 전략이라는 평가다. 최근 블룸버그통신은 미국이 우리나라에도 4000억 달러(약 554조 원) 규모의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러트닉 장관은 지난 24일 CNBC와의 인터뷰에서 “한국도 유럽과 마찬가지로 매우 매우 협상을 타결하고 싶어 한다”며 “한일은 서로 경계하기 때문에 한국이 미일 합의를 읽을 때 입에서 욕설(expletives)이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 스코틀랜드 방문하러 백악관을 떠나는 자리에서 EU·중국·캐나다·호주 등과의 무역 협상 상황만 언급하면서도 한국 대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도 지난 26일 통상대책회의를 열고 다음 달 1일 전까지 한미 무역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한 대응 전략을 집중 논의했다. 한국에서는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조현 외무부 장관이 이번주에 각각 미국의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과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을 만날 예정이다. 앞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미국의 관세 압박이 거세지자 지난 3월 24일 직접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을 찾아가 4년 간 210억 달러(약 31조 원)에 달하는 현지 투자를 트럼프 대통령 앞에서 약속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