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장남이자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막후 실세’로 꼽히는 트럼프 주니어가 30일 국내 30대 그룹 주요 총수들과 릴레이 회동했다. 미국의 통상 압력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트럼프 주니어와 마주한 국내 기업인들은 미국에 투자를 많이 한 기업에 혜택을 줄 것을 요청하는 등 전략적 협업을 구애했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주니어가 자신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등 적극적인 기업 활동을 벌이는 만큼 철저한 비즈니스 관점에서 한국 기업과의 관계 설정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날 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주니어는 전날 오후 6시 25분께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입국해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자택에서의 만찬을 시작으로 1박 2일간의 짧은 일정을 소화했다. 트럼프 주니어는 이날 이른 아침부터 재계 총수들과 잇따라 면담을 가졌다. 관계자 외 접근이 차단된 조선팰리스호텔 내 보안 구역에서 진행됐으며 총수들은 해당 구역으로 향하는 ‘핫라인’을 이용하는 등 극비리에 이동했다. 대기업의 경우 개별 회동, 중견기업은 집단 회동으로 각각 30분~1시간가량 진행했다. 이후 트럼프 주니어는 오후 11시 30분께 인천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출국했다. 30시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한국의 주요 그룹 총수들을 두루 만난 것이다.
기업인들은 미국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며 눈도장 찍기에 나섰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 김동선 한화갤러리아·호텔앤드리조트 미래비전총괄 부사장 등 한화그룹 오너 3세 3형제는 오전 일찍 총출동했다. 면담에서 한화가 미국에서 추진 중인 필리조선소 기반 미 해군 선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과 조지아주에 구축 중인 태양광 생산기지 ‘솔라허브’ 관련 사업 계획 논의 등이 안건으로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오 분야를 육성하는 기업들도 다양한 협력 방안을 어필했다. 바이오는 미중 관세전쟁으로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는 대표 분야인 만큼 미국과의 협력이 필수다. 롯데그룹 오너가 3세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 부사장은 동남아시아 출장길에 올랐다가 이날 오전 귀국하자마자 트럼프 주니어를 만났다. 신 부사장은 롯데가 주력하고 있는 신사업인 바이오 분야에 대한 협력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2022년 미국 시러큐스 공장을 인수한 후 증설해 국내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 중 처음으로 미국 내 생산을 시작한다. 셀트리온 역시 서정진 회장이 직접 미국 영업을 뛸 정도로 글로벌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점유율 확대를 노리고 있어 이번 만남에서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는 인공지능(AI)과 테크, 글로벌 진출에 대한 의견을 나눴고 이재현 CJ그룹 회장과는 K푸드와 뷰티, 콘텐츠에 대한 투자 및 다양한 협업 방안을 논의했다. 이 밖에 구자은 LS그룹 회장, 허용수 GS에너지 사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양종희 KB금융지주 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과도 만날 것으로 관측됐으나 실제로 성사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트럼프 주니어는 한국 기업들과 협업해 새로운 사업 기회를 모색하는 데도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국내 최대 부동산 개발 회사인 엠디엠그룹을 이끄는 문주현 회장에게 면담을 요청해 이날 회동했다. 트럼프그룹에서 대규모 부동산 개발에 참여하며 핵심적 역할을 맡고 있는 트럼프 주니어는 문 회장과 미국과 한국의 부동산 개발에 적극 협력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주니어는 백악관 내에서 공식 직함이 없다. 하지만 최근 벤처 투자 기업 ‘1789캐피털’을 설립하고 슈퍼리치들을 모아 별도 사교 클럽을 창립하는 등 정재계 인사들을 주무르며 활발히 기업 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 방한 직전에도 루마니아·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을 연달아 방문해 미국과의 정치 및 경제 동맹을 강조하기도 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뼛속까지 사업가 집안인 트럼프 일가는 모든 거래를 철저히 비즈니스 관점에서 판단한다”며 “국내 기업들의 미국과의 협력도 결국 비슷한 논리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