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000270)가 ‘반값 전기차’를 목표로 추진해 온 배터리 구독 사업을 중단한 것은 전기차 시대에 걸맞은 제도적 기반을 정부가 제때 뒷받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기차에서 배터리 소유권을 떼낼 수 없도록 한 규제로 인해 전기차를 사는 소비자에게 배터리를 빌려주는 구독 서비스를 시행할 수 있는 길 자체가 막혀 있는 것이다. 반면 전기차 시장 패권을 놓고 국내 업체와 경쟁을 벌이는 중국 업체들은 자국과 유럽 시장에서 배터리 구독 서비스를 적극 확대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전기차와 배터리 소유권의 분리·등록을 허용하지 않는 자동차관리법은 구독 서비스와 같은 신사업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로 꼽힌다. 현행법은 전기차 배터리는 내연기관차의 엔진과 마찬가지로 주요 부품으로 간주해 소유권이 차량 주인에게 자동 귀속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기아와 같은 완성차 업체가 배터리를 소유하고 차량만 소비자에게 파는 구독 서비스 모델이 원천 차단돼 있는 셈이다.
기아는 1년 이상 실증 사업을 벌이며 법 개정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기약이 없자 배터리 구독 사업 추진을 중단했다. 기아의 당초 목표는 지난해 하반기 택시 전용 전기차 모델인 ‘니로 플러스’에 배터리 구독 서비스를 적용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해를 넘겼고 그 사이 니로 플러스는 단종됐다. 기아는 서비스 출시 일정이나 니로플러스를 대체할 서비스 탑재 모델을 정하지 못한 채로 법 개정만 기다리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올 초 ‘친환경차·2차전지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하며 전기차에서 배터리 소유권을 분리하는 자동차관리법 개정을 검토한다고 밝혔지만 법 개정안 발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구독 서비스 도입 자체가 무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배터리 교체와 연계한 구독 서비스는 전기차 구매 비용을 낮추고 부족한 충전 인프라를 해소할 수도 있어 시장의 기대감이 컸다. 전기차 값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배터리를 뺀 가격으로 전기차를 살 수 있고 접근성 좋은 배터리 교체소에서 충전이 끝난 배터리로 갈아 끼우는 식으로 소비자 편의성까지 높아지기 때문이다.
실제 중국의 3대 전기차 스타트업 중 한 곳인 니오는 배터리 구독 서비스를 활용해 경쟁력을 배가하고 있다. 니오 산하 브랜드인 온보는 지난해 9월 선보인 중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L60의 판매 시작가를14만 9900위안(약 2859만 원)으로 정해 경쟁 차종인 미국 테슬라 모델Y의 26만 3500위안(약 5025만 원)보다 40% 이상 저렴해졌다. 이는 배터리 가격을 제외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니오는 L60 구입시 한 달에 599위안(11만 4200원)의 배터리 구독료만 내도록 해 소비자 부담을 대폭 줄였다.
니오는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3240여 곳의 배터리 교체소를 구축하고 3분 안에 방전된 배터리를 빼고 새 배터리로 바꾸는 기술까지 확보했다. 올해에는 독일과 네덜란드·스웨덴 등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 25개 국가로 사업 영토를 확장할 계획이다.
반면 한국은 규제 특례를 통해서만 전기차 배터리 구독 서비스를 허용하고 있다. 규제 특례 지역도 안양·수원·용인·인천·성남시 등 5곳에 국한되는데 택시나 화물차 등 영업용 차량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중국 니오 사례처럼 전기 SUV 등 전기차를 구입하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서비스는 불가능한 것이다.
규제의 덫에 갇힌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 장기화로 고통이 커지고 있다. 내수 부진에 더해 미국의 고관세정책과 중국 전기차 업체의 저가 공세 등이 맞물리고 있어서다. 현대차(005380)·기아는 연초부터 전기차 1대당 수백만 원을 깎아주는 할인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판매 확대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현대차는 2월과 4월에 이어 이달 27~30일에도 아이오닉5·코나 일렉트릭을 생산하는 울산1공장 12라인 가동을 중단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