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을 세우는 자가 미래를 설계한다. 소프트파워의 개념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하버드대의 조지프 나이 교수였다. 하지만 그 개념을 수치화하고 국가별 순위를 발표하며 세계적 기준으로 만든 주체는 영국의 컨설팅 그룹이었다. 브랜드 파이낸스의 글로벌 소프트파워 인덱스를 확인한다. 영국의 인기 잡지 모노클의 소프트파워 순위도 마찬가지다. 영국은 가치평가의 기준을 세워서 문화적 소프트파워에 대한 세계 질서의 설계자로 자리 잡았다. 영국은 기준을 만들어서 비즈니스로 만드는 재주가 영리하고 실용적이다.
영국은 오래전부터 ‘룰세팅’의 나라였다. 1884년 런던의 그리니치가 세계 시간의 기준점이 됐고 런던은 시간의 수도가 됐다. 축구·골프·배드민턴 등 스포츠의 근대적 규칙을 만들고 보급한 것도 영국이다. 오늘날 학술지 등급 평가 체계마저도 영국에서 비롯됐다. 기준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한 규칙 수립이 아니라 영향력의 구조를 디자인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일이다.
이제 한국이 디지털 소프트파워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 K컬처의 영향력을 볼 때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반드시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이 글로벌 문화 강국으로 도약하는 길이다. 기존의 기준에 맞추는 시대는 지났다. 우리가 기준이 돼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골든타임이다.
그 가능성은 이미 입증되고 있다. 런던의 빅토리아앤드앨버트박물관(V&A)에서 시작된 ‘한류’ 전시는 보스턴·샌프란시스코·취리히, 그리고 호주까지 전 세계를 순회하고 있다. 이 전시는 단순한 한국 문화 소개가 아니라 한국이 디지털 기반에서 가진 K팬덤이 이미 전 세계에 새로운 문화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디지털 팬덤과 글로벌 공감대로 이미 한국은 새로운 기준의 중심에 있다.
런던은 룰을 만들고 시장을 설계하는 도시다. 크리스티와 소더비는 예술 경매의 규칙을, 프리즈 런던은 현대미술 유통의 형식을 정립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시스템. 이 개방성과 제도적 설계가 영국 문화 산업의 힘이다. 마찬가지로 K컬처도 이제는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전 세계 팬들이 K의 주체가 됐을 때 K컬처는 21세기의 시대정신이 되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구조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 산업, 외교부의 공공 외교, 교육부의 한국학 진흥이 하나의 전략으로 연결돼야 한다. 범부처 통합의 단조로운 관료 연합을 뛰어넘어 ‘한류비서관’과 같은 창의적인 역할자가 절실하다. 한국은 이제 ‘어디 있는가’를 묻는 대상이 아니다. 이미 디지털 세상에서 전 세계 K팬덤의 사랑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게 받고 있는 문화다.
나는 전시와 문화 외교, 학술의 현장에서 살아왔다. 영국박물관의 한국실, V&A의 한류전, 전 세계 뮤지엄과 협업하며 체감한 것은 하나다. 한국은 K컬처로 디지털 소프트파워의 기준을 만들 준비가 돼 있다. 지체 없이 기준을 세워 K시대를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