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제조의 명가인 일본의 전자 업체 캐논은 2007년 등장한 스마트폰에 휴대용 사진기 시장을 잠식당했다. 연간 4조 엔대에 이르렀던 순매출은 2009년 3조 엔대로 떨어진 후 10여 년간 거의 답보했다. 영업이익은 2008년 4961억 엔에서 2020년 1105억 엔까지 추락했다. 성장 동력을 잃어가던 캐논이 부활의 계기를 맞았다. 인공지능(AI) 시장 팽창으로 반도체 후(後)공정 수요가 급증하면서 반도체용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캐논에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 캐논은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 북쪽 우쓰노미야시에 있는 공장 내에서 새로운 노광장비 제조 시설 기공식을 열었다. 캐논이 반도체 노광장비 신공장을 여는 것은 2004년 이후 21년 만이다.
노광장비는 원형 반도체 기판인 웨이퍼에 빛을 쏴서 설계한 전자회로를 그리는 공정에 사용되는 핵심 장치다. 1970년 노광장비 첫 제품을 내놓은 캐논은 정부의 반도체 기술 국산화 정책 지원을 받으며 한때 업계 선두권에 섰다. 경쟁사인 네덜란드 ASML이 1990년대 후반 극자외선으로 웨이퍼에 초미세 회로를 찍어넣는 신형 노광장비 개발에 나서자 캐논은 차별화를 꾀했다. 회로를 각인하는 ‘전(前) 공정’을 마친 웨이퍼를 작은 칩들로 자른 뒤 전자기판과 접합해 반도체 제품을 완성하는 ‘후공정’의 노광장비 제조에 집중한 것이다. 최근 성능을 높이기 위해 복수 반도체를 하나로 연결하는 후공정 작업이 중요해지면서 TSMC 등이 캐논에 주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캐논은 2016년 도시바 의료기기 자회사를 인수해 영상 의료 진단 등 헬스케어 장비 사업에도 진출했다. 노광장비와 헬스케어 장비 사업이 각각 회사 전체 매출의 20%가량까지 성장해 캐논의 순매출은 2022년 4조 엔대로 회복됐다. 원천·기초 기술인 광학 기술을 꾸준히 갈고닦은 것이 성공 비결이다. 우리 기업들도 정부의 전방위 지원을 받으면서 원천 기술 연구개발(R&D)에 매진해야 글로벌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