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 유타주는 전통적 법률 서비스에 기술 혁신을 유입하기 위해 ‘리걸 샌드박스’ 제도를 도입했다. 일정한 조건하에서 비변호사도 법률 서비스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이 제도는 법률 산업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실험적 성격이 강했다. 유타주 대법원 산하의 혁신사무소(Office of Legal Services Innovation)를 운영 주체로 문서 자동 작성, 계약서 분석, 법률 정보 제공 등 기술 기반의 법률 서비스를 운영했다. 시험 운영 이후에는 안정성과 소비자 만족도, 윤리 위반 여부 등을 평가했다. 이 제도는 시장에 혁신을 유입하되 혼란은 최소화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미국은 이처럼 성과와 리스크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제도화 여부를 결정하고 특별한 규제 없이 법률과 기술의 공존을 추구하고 있다. 기존 로펌들이 리걸테크를 기반으로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서는 모습도 보인다. 개방된 환경을 바탕으로 미국은 전 세계 리걸테크 산업을 선도하는 국가로 자리 잡았다. 자유로운 규제는 혁신을 뒷받침하고 이는 리걸테크 기업들의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화를 이끌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2년 설립된 하비다. 인공지능(AI) 법률 리서치 플랫폼인 하비는 챗GPT 등 대규모언어모델(LLM) 기반 기술을 활용해 법률 리서치, 문서 요약, 문서 리뷰 등의 기능을 제공하는 ‘하비 AI’를 선보이며 급격히 성장했다. 최근 기업가치가 50억 달러로 평가 받기도 했다. 또 다른 주요 기업인 렉시스넥시스는 2023년 10월 세계 최초로 미국 법률 특화 AI 서비스인 ‘Lexis+AI’를 출시하며 글로벌 법률 AI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리걸테크 유니콘 기업 약 16개 중 15개가량이 미국에 기반을 둘 정도로 시장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미국변호사협회(ABA)도 지난해 7월 29일 신기술 활용 지침과 기술 수용 방향을 담은 15쪽 분량의 의견서를 발표해 리걸테크 확산에 또 다른 동력을 보태고 있다.
미국과 인도에 이어 리걸테크 기업 수가 많은 영국도 법률 시장에서 신기술 활용에 적극적이다. 영국 정부는 올해 5월 세계 최초로 변호사 대신 AI를 활용한 채권 추심 법률 서비스를 공식 승인했다. 이에 따라 영국 리걸테크 스타트업인 가필드 AI는 민사소송 규칙을 학습한 챗봇을 통해 소액 청구 관련 법원 절차를 안내하고 독촉장 작성 및 청구 서류 제출 등을 지원할 수 있게 됐다. 영국 정부는 판례 데이터셋을 공개해 스타트업의 진입장벽을 낮추기도 했다. 이와 함께 AI 기반 계약서 검토 기술을 개발한 ‘루미넌스’에는 수백억 원대의 투자가 몰렸다. 루미넌스는 수천 개의 조항을 실시간 분석하고 리스크를 식별하는 기능을 갖춘 AI 문서 리뷰 플랫폼으로 이미 수십 개국의 로펌 및 대기업에 납품되고 있다.
규제가 강한 일본조차도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리걸테크 산업의 불확실성을 해소했다. 일본 변호사법 제72조는 비변호사의 법률사무 수행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지만 일본 법무성이 2023년 8월 AI 등을 활용한 계약서 관련 업무 지원 서비스 제공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변호사가 AI 활용 서비스의 결과물을 수정할 수 있다면 법 위반이 아니라고 해석되면서 일본 리걸테크 산업은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일본 최대 리걸테크 플랫폼인 ‘벤고시닷컴’은 일본 변호사의 절반 이상이 가입한 플랫폼으로 실제 효과를 입증하고 있다.
이외에도 독일은 ‘법률서비스법’을 통해 비변호사도 기존 변호사의 업무 일부를 분리해 수행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전환 중이다. 특히 소비자 민원 대응, 계약서 초안 작성 등 반복성과 고비용 구조를 지닌 법률 서비스 영역에 AI 기반 소프트웨어 솔루션의 직접 진입을 허용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해외 여러 국가는 기업이 법률 시장에 진입해 기술과 경영에 투자한 만큼 정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가 마련돼 있다”며 “기술이 법률과 공존할 수 있다는 마인드가 제도 전반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