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는 오랫동안 낭만의 섬으로 알려졌지만, 오늘날 그 이미지는 무너지고 있다. 전력·식수·위생·식량 등 기본 인프라가 붕괴하며 국가 존립마저 흔들리고 있다.
지난 2015~2018년 주멕시코대사관에서 쿠바 업무를 전담하며 미수교 상태의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뛰었던 경험이 있다. 북한의 반대 속에 외교장관 회담을 준비하고, 오바마 행정부 시절 미국 대사관 ‘음파공격’ 의혹까지 겹치며 긴장된 국면을 겪었다. 그래서 지금의 쿠바 위기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쿠바의 에너지 문제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2000년대 초 전력난이 심화되자 쿠바는 현대중공업의 이동식 디젤발전기를 긴급 도입했고 한때 전체 전력의 20~30%를 이 장비가 담당했다. 쿠바 정부가 이를 지폐에 새겨 넣은 것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부품 교체와 유지보수가 미뤄지며 현재는 노후화가 심각하다.
칠레 온라인 언론인 Emol의 보도에 따르면 쿠바 아바나에서는 정전과 상수도 중단, 쓰레기 적체가 겹쳐 주민 생활이 마비됐다. 하바나 인구의 10% 이상이 수돗물 공급을 못 받고 있으며 어떤 지역은 3주 넘게 단수 상태다.
스페인 라디오 네트워크인 Cadena SER 보도에 따르면 올해만 다섯 차례 전국 정전이 발생했고 국토의 약 57%가 동시에 암흑에 빠졌다. 전문가들은 “발전소 노후와 정부의 부품 대금 미지급이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정전 전에도 이미 하루 16시간 이상 전기가 끊긴 상황이었다.
전력난은 물·식량·위생으로 이어진다. 6개 성에서 식수 공급이 차단되었고 일부는 홍수로 수도 시설까지 마비됐다. 식량 배급도 축소돼 닭고기가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해외 송금에 의존하지 못하는 빈곤층은 에너지와 식량 빈곤을 동시에 겪는다.
쓰레기 수거 차량 고장과 연료 부족으로 거리는 오염되고 분쇄기·폐수 처리장까지 멈춰 위생 상태가 악화됐다. 글로벌 통신사인 로이터와 유엔라틴아메리카리브경제위원회(ECLAC)에 따르면 지난해 쿠바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2019년에 비해 10%나 감소했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전년 대비 1.1% 하락했으며 올해도 추가로 1.5%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구매력은 급감으로 기본 생활필수품조차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 결과 쿠바 주민 수십만 명이 국경을 탈출하고 있다. 2021~2023년에 약 85만 명이 미국 국경을 넘어섰고 2023년 쿠바 인구는 전년 대비 3.1% 감소했다. 이는 단순한 이주가 아닌 체제에 대한 불신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국제 정세도 불리하다. 러시아는 전쟁으로, 베네수엘라는 경제 파탄으로 각각 쿠바에 대한 지원 여력이 없고, 중국 역시 미·중 갈등으로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렵다. 반면 미국은 강경 노선을 강화하고 있어 쿠바의 외부 의존 전략은 한계에 봉착했다.
쿠바 정부의 구호는 “서두르지 않되 멈추지 않는다(sin prisa, sin pausa)”였지만 지금은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 국민들에게는 정부의 이런 입장이 위기 방치로 비치고 있고 그동안의 점진적 개혁은 더 이상 체제를 지탱하지 못할 정도가 됐다. 쿠바의 사례는 현대 사회에서 전기·물·식량·위생 같은 최소 인프라가 국가 존립의 근간임을 보여준다. 카리브의 진주, 쿠바는 이제 ‘서두르지 않는다’가 아니라 “신속하고 단호하게(con prisa, con decision)”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He is…
스페인 마드리드 꼼뿔뗀세(Complutense)대학교 언어학 박사
(前) 중남미 전문 외교관(1997~2024년): 콜롬비아, 페루, 칠레, 파나마, 파라과이, 멕시코(쿠바 전담), 볼리비아
(現)국가철도공단 글로벌대사
(現)콜롬비아 덴톤스 까르데나스 & 까르데나스(Dentons Cardenas & Cardenas) 로펌 고문
(現)페루 뚜르히요(Trujillo) 국립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