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6700만 홍콩달러(한화 약 301억 2000만 원). 신사 숙녀 여러분, 이게 바로 크리스티입니다.”
26일(현지 시간) 저녁 홍콩 센트럴 더헨더슨 크리스티 경매장. 아시아·태평양 총괄 사장(CEO) 내정자이자 스타 경매사인 라훌 카다키아가 낙찰을 선언하며 경매봉을 내리치자 현장은 박수와 환호로 들끓었다. 25년 만에 경매장으로 돌아온 파블로 피카소의 1944년작 ‘여인의 흉상’이 새 주인을 찾은 순간이었다.
그림을 두고 약 15분간 펼쳐진 입찰 경쟁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7000만 홍콩달러에서 시작한 경매는 약 3분 만에 1억 홍콩달러를 돌파하며 박수를 끌어냈다. 진짜 경쟁은 이때부터였다. 대만 지사장인 에이다 옹과 인상주의·현대미술 부문 비즈니스 디렉터 엘레나 페레라가 각각 전화로 고객을 대리하며 10여 분간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30여 차례가 넘는 응찰을 주고 받은 끝에 옹의 고객이 낮은 추정가(8600만 홍콩달러)의 두 배가 넘는 금액에 최종 낙찰자로 선정됐다. 경매 수수료를 포함한 판매가는 1억 9675만 홍콩달러(약 356억 7280만 원). 경매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보니 브레넌 크리스티 글로벌 CEO는 “이번 경매가 아시아에서 팔린 피카소의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을 새로 썼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팔린 피카소의 가장 비싼 작품은 마지막 아내 자클린 로크를 그린 ‘웅크린 여인’으로 2021년 1억 9100만 홍콩달러에 판매됐다. 피카소가 걸작 ‘게르니카’를 그린 시기를 함께한 거장의 다섯 번째 연인 도라 마르의 초상이 4년 만에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이날 경매는 피카소 외에도 추정가 상단을 훌쩍 넘긴 작품들이 속출했다. 이탈리아 거장 살보의 대형 회화는 시중 거래금액 대비 저렴한 추정가(80만~150만 홍콩달러)로 나왔다는 평가 속에 입찰이 쏟아져 508만 홍콩달러(9억 2100만 원, 이하 최종 판매가)에 판매됐다. 마르크 샤갈의 ‘연인들을 위한 꽃다발’ 역시 추정가 상단(750만 홍콩달러)의 두 배가 넘는 1514만 홍콩달러(약 27억 5400만 원)에 새 주인을 찾았고, 폴 세잔의 ‘소녀(Fillette)’도 260만 홍콩달러에서 시작해 825만 홍콩달러(15억 원)까지 가격이 올랐다.
아시아 미술의 인기도 높았다. 경매에 처음 출품된 중국계 프랑스 거장 자오 우키의 추상 풍경 ‘17.3.63’가 최종 8520만 홍콩달러(약 154억 4600만 원)에 판매돼 이날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을 기록했다. 한국 작가로는 박서보와 이성자의 두 작품이 이브닝 세일에 나왔다. 이성자의 ‘구성’은 추정가 상단(280만 홍콩달러)을 넘긴 381만 홍콩달러(약 6억 9000만 원)에, 박서보의 ‘묘법 No.1-78’은 높은 추정가에 근접한 698만 홍콩달러(12억 6500만 원)에 각각 거래됐다. 다음날 열린 낮 경매에는 이우환·김창열·윤형근 등 한국 거장들의 100호 이하 작품들이 출품됐고 모두 추정가 상단을 훌쩍 넘긴 3억~4억 원대에 새 주인을 찾았다. 한국 신진 작가인 애나 박과 유귀미의 작품도 추정가보다 높은 4000만~6000만원 대에 낙찰돼 눈길을 끌었다.
홍콩 본사 이전 1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가을 경매 결과에 크리스티 측도 고무됐다. 20·21세기 미술을 다룬 이브닝 세일의 총 판매 대금은 5억 6560만 홍콩달러(약 1025억 원)로 올 상반기 총액인 5억 5995만 홍콩달러보다 소폭 높았다. 총 41점 중 39점이 팔렸던 상반기와 비교해 38점 중 35점이 팔린 이번 경매의 총액이 더 많은 것은 입찰 경쟁이 치열해지며 낙찰가가 높아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실제 수수료를 뺀 최종 낙찰가 평균은 낮은 추정가 대비 116%선으로 집계됐다.
크리스티는 이번 경매 결과를 경기 침체 우려에 따른 미술품 시장의 ‘순환적 위축’이 끝나가는 신호로 해석했다. 경기 침체기 미술품 경매 시장은 소유자들이 저가 낙찰을 우려해 우량 작품 출품을 미루면서 질 낮은 작품만 거래되고 다시 전체 낙찰가를 끌어내리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브레넌 CEO는 “지난 2년간 좋은 작품이 시장에 잘 나오지 않았던 수급 문제가 마침내 해결되고 있다”며 “하반기 글로벌 시즌 세일의 포문을 여는 홍콩 경매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면서 앞으로 열릴 크리스티 런던·파리·뉴욕 경매도 열기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시아 20·21세기 미술 부문 대표 크리스티안 알부 역시 “미술 시장은 침체된 적이 없고 다만 선택적일 뿐”이라며 “전 세계 수집가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걸작을 손에 넣으려 한다는 사실을 이번 경매가 잘 보여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