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반도체 이후 전 세계 1등 기업을 배출해내지 못하고 혁신이 지연되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산업정책의 주도권을 민간에 일부 이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첨단산업에서 ‘패스트 팔로어’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있어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미 16년 전부터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미래 산업 전략을 공동 설계해 엔비디아와 같은 1위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아놓은 미국이다. 2009년 취임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직속 과학기술자문위원회(PCAST)를 전면 개편해 민간 부문의 핵심 인사들을 대거 자문위원으로 참여시켰다. 에릭 슈밋 전 구글 회장이 공동의장을 맡았고 폴 오텔리니 전 인텔 사장 등 빅테크 최고경영자(CEO)들이 이름을 올렸다. 단순한 자문을 넘어 민관이 미래 첨단산업의 기술과 정책을 함께 설계하는 ‘슈퍼 싱크탱크’가 출범한 것이다.
과거 정부에서 민간 자문위원을 지낸 재계의 한 CEO는 8일 “우리나라도 비슷한 조직을 만든 적이 있었지만 중요 일정이 있는데도 대면 회의를 강요하는 등 조직과 사고가 관료화돼 있어 유연한 아이디어를 내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반면 오바마 행정부 당시 PCAST는 ‘미국 첨단 제조업 리더십 확보 방안’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인재 양성 방안’ 등의 보고서를 줄줄이 쏟아내면서 미국의 첨단제조파트너십(AMP)의 토대를 닦았다. 엔비디아와 같은 ‘괴물 기업’이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을 민관이 함께 조성한 것이다.
산업 혁신 지연 외에도 △노동생산성 저하 △비효율적 연구개발(R&D) △양극화 등 사회 갈등 △민간 분야 부채 중독 △재정 건전성 악화 등이 우리 경제가 풀어야 할 난제들로 꼽힌다.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는 “미국처럼 기업과 정부가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경제정책의 큰 방향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첨단산업 2인3각‘ 中·대만, 톱티어로 韓은 여전히 민관 따로
대만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
민관 원팀으로 파운드리 1위 키워
싱가포르 미래위·日 라피더스 설립
산업 생태계 조성 ‘협업체계‘ 성과
수직적 통제 아닌 수평적 파트너로
민간 창의성 높여 글로벌 도약 절실
대만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
민관 원팀으로 파운드리 1위 키워
싱가포르 미래위·日 라피더스 설립
산업 생태계 조성 ‘협업체계‘ 성과
수직적 통제 아닌 수평적 파트너로
민간 창의성 높여 글로벌 도약 절실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시장의 절대 강자로 통하는 대만 TSMC의 성장 배경에는 ‘민관 원팀’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정부가 “산업 혁신 기반을 닦되 기업 경영에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TSMC와 함께 만들어졌다. 실제 대만 정부는 TSMC 설립 때 자본금의 절반을 댄 주요 주주였지만 모리스 창 창업주의 전략과 판단을 존중했고 경영과 인사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반도체 장비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대만에는 세계 1위 TSMC뿐 아니라 미디어텍과 같은 반도체 설계 회사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며 “정부가 민관과 함께 만든 생태계의 힘이 대만을 글로벌 일류로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산업 혁신이 지연되는 한국이 벤치마킹해야 할 국가가 바로 대만이라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한국의 새로운 성장 공식을 민관이 함께 찾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당장 과거 ‘필승 공식’으로 통했던 패스트팔로어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있다. 기술 자체의 난도가 상승하고 수출입 장벽도 빠르게 높아지고 있어 모방 가능성 자체가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나 미국 오픈AI의 챗GPT와 비슷한 수준의 물건을 만들어 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러는 사이 중국과의 기술 격차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중국이 액정표시장치(LCD)와 같은 한계 산업을 잠식해왔다면 현재는 저부가 산업은 물론 첨단산업도 선점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전 세계에 딥시크 쇼크를 불러왔던 첨단 인공지능(AI)이나 로봇·드론·배터리 등이 대표적 사례다. 현재 중국의 전체 산업에서 고기술 첨단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6% 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며 앞으로는 노동집약적산업의 비중보다 더 비중이 커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정부도 그동안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민관과의 협력을 확대하겠다고 반복적으로 선언해왔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취임한 이명박 정부가 청와대 지하에 만든 ‘워룸(비상경제상황실)’이 이 같은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워룸 회의는 2009년 한 해에만 40회 열렸고 참석자 757명 중 21%가 민간기업인과 전문가일 정도로 나름의 성과를 냈다.
문제는 이 같은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도 정부가 일방향 정책을 짜고 여기에 맞춰 예산과 자원을 분배하다 보니 민간의 창의성이 억제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이 지적이다. 김정회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정부가 업계 의견을 듣겠다고 불러 모으는 자리는 많지만 대부분 형식적으로 듣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민관이 함께 경제·산업전략을 짜는 것은 대만이나 미국뿐만이 아니다. 싱가포르는 2017년 ‘미래경제위원회(CFE)’를 출범시키며 정책 설계 방식을 근본부터 바꿨다. 위원회에는 장관과 기업 최고경영자(CEO), 학계·노동계 인사들이 모여 산업 전략을 함께 짜고 실제 실행까지 책임졌다. 총 23개 산업별 디지털 전환 청사진인 ‘산업 전환 지도(ITMs)’를 공동 작성했고 산업별로 민관이 공동 의장을 맡아 전환 과정을 이끌었다. 위원회가 단순히 의견을 듣는 자문 기구에 머물지 않고 예산 편성부터 인력 양성까지 민과 관이 역할을 나누고 실행하는 협업 체계가 작동한 것이다.
일본이 반도체 부활을 위해 2022년 민간 주도로 설립한 ‘라피더스’도 대표적인 민관 협력 사례로 꼽힌다. 라피더스는 도요타·소니·NTT 등 8개 대기업이 자본을 출자했고 일본 정부의 재정 지원 규모는 9200억 엔(약 9조 원)에 달한다. 독일은 에너지 전환 분야에서 민관 협력 모델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2023년 독일 정부는 지멘스에너지에 75억 유로 규모의 지급보증을 제공하고 그린수소 기술 개발에 공동 투자했다.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는 “정부가 인프라·제도·인력 공급 같은 기반을 확실히 마련해서 민간과 기업이 2인3각으로 협동하면서 전투에서 이길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성장 조력자…기업 뛸 판 깔아줘야"
■구윤철 전 국무조정실장 인터뷰
"규제 개선하고 맞춤형 지원책 제시“
"AI 대전환, 정부는 방향 민간 주체로"
■구윤철 전 국무조정실장 인터뷰
"규제 개선하고 맞춤형 지원책 제시“
"AI 대전환, 정부는 방향 민간 주체로"
새 정부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로 거론되는 구윤철(사진) 전 국무조정실장이 “정부가 모든 것을 주도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민간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조력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구 전 실장은 최근 산업 정책의 키워드로 떠오른 ‘민관 협력’에 대해 “선택이 아닌 시대정신”이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기업이 제대로 경영해서 돈을 잘 벌면 세수가 늘고 정부는 그 재정으로 복지든 교육이든 쓸 수 있는 정책 수단이 많아진다”며 “세수 부족을 걱정할 게 아니라 기업이 돈을 잘 벌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구체적으로는 규제 개선과 맞춤형 지원책 등을 꼽았다. 민관이 손을 맞잡는 구조가 지금 필요한 정책의 기본 틀이라는 것이다.
구 전 실장은 최근 펴낸 저서 ‘인공지능(AI) 코리아’에서도 비슷한 구상을 밝혔다. 그는 33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쉬는 기간 동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화두가 무엇인지 그 실체가 궁금했다’며 AI에 관심을 갖고 국가 전략을 고민해왔다.
구 전 실장은 책에서 “AI 시대의 등판에 올라타야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들 수 있다”며 “국가·기업·국민이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기술 개발, 인재 양성, 생산성 향상, 거버넌스 혁신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AI 관련 국제기구 유치와 국가 시스템의 대전환도 주요 과제로 언급했다. 그는 “정부가 밀어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민간의 속도와 창의력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정책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며 “정부는 길을 닦고 방향을 제시하되 실제 뛰는 주체는 민간이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AI 관련 유엔 산하 국제기구를 유치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를 주도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