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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풍납토성이 고대 로마·아테네에 버금간다고? [최수문 선임기자의 문화수도에서]

을축년 대홍수로 인한 풍납토성 발견 100주년 맞아

1550년 전 고대 백제 수도 유적이 땅속에 그대로

발굴 조사 과정에서 지역주민들과 마찰은 해결해야

‘풍납토성’ 아닌 ‘백제 왕도 한성’ 호칭 변경 주장도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모습. ‘고대 로마와 아테네에 버금간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최수문기자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모습. ‘고대 로마와 아테네에 버금간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최수문기자




풍납토성 인근 전경. 외곽의 배모양 푸른 지역이 성벽이다. 토성 성벽 길이는 원래 3.5㎞로 추정되나 현재는 2.1㎞만 남아 있다. 네이버 항공사진 갈무리.풍납토성 인근 전경. 외곽의 배모양 푸른 지역이 성벽이다. 토성 성벽 길이는 원래 3.5㎞로 추정되나 현재는 2.1㎞만 남아 있다. 네이버 항공사진 갈무리.


“백제는 한반도의 고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해양국가입니다. 한성백제는 백제의 700년 역사 중 약 500년간 서울(한성)에 수도를 두었던 시기를 말합니다.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왕성인 ‘위례성’을 건축하고 풍요롭게 살며 화려한 문화예술을 꽃 피웠습니다. 그러나 5세기 말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에게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공주)’로 천도하게 됩니다, 그 후 ‘위례성’은 폐허로 방치되어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잊혀 갔고, 점차 그 흔적마저 땅속에 묻혀 한성백제의 시기는 그렇게 잃어버린 왕국이 되었습니다.



그후 1600년 동안이나 지하에 묻혀 있던 한성백제의 역사가 1997년에 우연히 발견됩니다 풍납동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포크레인에 훼손되어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한성백제의 왕성 유적을 한 사학자가 발견한 것입니다. 이후 국가적인 차원의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발굴 과정에서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의 왕성이며 백제의 위대한 건축기술이 반영된 유적지란 학설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백제의 역사를 통해 서울은 로마, 아테네에 버금가는 2000년 역사를 간직한 역사고도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천호(풍납토성)역 10번 출구를 나와 약 100m 가량을 걸어가면 ‘언덕’ 같이 보이는 토성 유적이 나온다. 서울 송파구 풍납동 소재 풍납토성의 북동쪽 성벽 부분이다. 바로 그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 위 내용이다. ‘풍납토성이 고대 로마에 버금간다’는 설명이 눈에 확 띈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정부(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적어놓은 설명이 이 정도라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 사학자’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이형구 선문대 교수다.

풍납토성 동남쪽 성벽 전경. 왼쪽이 성 안으로,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있다. 당초 높이 11m 정도였던 성벽은 1500여년이 흐르면서 눈에 띄게 낮아졌다.풍납토성 동남쪽 성벽 전경. 왼쪽이 성 안으로,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있다. 당초 높이 11m 정도였던 성벽은 1500여년이 흐르면서 눈에 띄게 낮아졌다.


기존 주택들을 이전시키고 조성된 ‘풍납 백제 문화공원’의 건물지 유적 모습.기존 주택들을 이전시키고 조성된 ‘풍납 백제 문화공원’의 건물지 유적 모습.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 왕도다. 세부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고구려 임금 주몽의 아들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서기전 18년 백제를 세운 곳이 한강 유역의 하남위례성(또는 한성)이다. 한성은 이후 서기 475년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근초고왕 등 백제의 전성기는 대부분 이곳에서 진행됐다. 하지만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는 웅진(지금의 공주)로 옮겨간다. 551년 성왕때 한성 지역을 잠시 되찾았지만 553년에 다시 신라에게 빼앗긴다.

이후 풍납토성 지역은 폐허로 변했다. 대부분의 고대 국가 수도는 어떤 형식으로든 후대에 이용되는 데 백제 한성은 아니었다. 아마 한강물의 범람에 취약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강을 다스릴 중앙집중 권력이 사라지면서 이 지역은 단순한 한적한 강변 마을이 됐다. 물론 덕분에 고대 유적이 땅속에 그대로 잠들어 있는 상태가 계속됐다.

남은 토성은 깎여 언덕이 됐고 그냥 ‘옛날 토성이 있던 자리'로 불릴 뿐이었다. 풍납토성을 되살린 것도 한강물이니 아이러니하다. 역사상 가장 큰 홍수 중에 하나였다고 하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풍납토성 지역의 일부가 아예 깎여나가면서 유물이 드러났다. (1925년 7월 16~18일 사흘 동안 퍼부은 비로 한강 수위가 13m나 올라갔다고 한다.) 홍수의 와중에 당시로서는 아주 귀했던 중국 수입의 청동초두, 청동거울, 유리옥 등이 발굴돼 고대의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기 시작됐다. 2025년 올해로 딱 100년이 되는 해다. 한성이 땅속에 파묻힌 것은 1550년 전이다.



일제시대 토성이 1936년 ‘고적: 광주 풍납리토성'으로 지정되면서 간간히 발굴됐지만 여전히 백제 수도로서는 긴가민가했다고 한다. 해방 후 1963년 풍납토성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풍납토성’으로 재지정됐다.(풍납동에 있는 토성이라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전히 한적한 시골이었던 이 지역은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도시화가 가속화된다. 1970년대 서울에서 이전한 여러 공장이 들어서고 다시 1980년대 주택단지가 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는 고층 아파트도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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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이 터닝포인트인 해다. 아파트공사 현장에서 터파기 작업 중에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백제유적층을 발견했다.(대부분 백제 유적은 지하 5m 아래에 있다.)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까지 나서 대대적인 발굴과 조사가 이뤄진다. 풍납토성이 백제 수도인 하남위례성(전기)이자 한성(후기)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풍납토성의 북쪽 성벽 모습. 오른쪽 규제 안내문과 왼쪽 규제 철폐 주장이 함께 울타리에 놓여 있다.풍납토성의 북쪽 성벽 모습. 오른쪽 규제 안내문과 왼쪽 규제 철폐 주장이 함께 울타리에 놓여 있다.


풍납토성 동쪽 성벽을 발굴한다는 안내문이다.풍납토성 동쪽 성벽을 발굴한다는 안내문이다.


물론 지금도 ‘백제의 수도 유적’이 아니라는 사람도 없진 않다. 가보면 알겠지만 현재도 풍납토성 내에는 1만여 가구가 살고 있다. 고층 아파트도 많고 학교도 있고 시장도 있다. 2000년 당초에는 이 지역의 모든 주민을 이주시키고 본격 발굴하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주민들의 동의를 받지는 못했다.

현재 보존구역과 관리구역으로 나누고 일부 토지는 매입해서 발굴을 하고 일부는 주민들이 그대로 살고 있다. 전체 권역은 4군데로 구분된다고 한다. 정부가 유적지로서 이미 매입한 곳, 매입할 예정인 곳, 그리고 일반 주민들이 그대로 살 수 있는 곳, 아파트 공사 등으로 인해 유적지가 아예 파괴되었다고 판단되는 곳 등이다. 이미 매입한 곳의 일부는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여전히 철거를 앞두고 있는 곳도 많아 동네가 어수선하다. 3권역 같이 거주를 인정받은 주민들에게도 땅 깊이 팔 수 없다는 등의 규제에 살기 편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앞에서 본 안내판에서 ‘고대 로마, 아테네에 버금간다’고 했으니 발굴 조사 및 복원 사업도 그런 방향으로 갈 것 같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서울문화유산연구소는 지난 16일 ‘풍납토성 발견 100년 기념 학술대회’를 열었다.

주제 발제를 한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풍납토성’(‘풍납동 토성’이라는 말과 혼용된다)이라는 이름을 바꿔야 한다며 풍납토성과 인근 몽촌토성을 합해 ‘백제 왕도 한성’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한성을 ‘고도(古都)’로도 지정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자고 했다. 역사상 백제의 다른 수도인 공주와 부여, 익산이 이미 ‘고도’이자 ‘세계유산’인데 더 크고 오래 지속된 한성이 안될 것이 뭐냐고 했다. 풍납토성이라는 근본없는 이름이 아니라 ‘백제 왕도 한성’이라는 개념화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또 석촌동고분군과 방이동고분군은 ‘서울 백제왕릉원’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러면 지하철 역에서도 방송이 현재의 ‘천호, 풍납토성 역입니다’가 아니라 ‘천호, 백제 왕도 한성 역입니다’는 등의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

‘규제 때문에 못살겠다’는 플래카드들이 붙어 있다. 정비 대상인 건물이 철제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다.‘규제 때문에 못살겠다’는 플래카드들이 붙어 있다. 정비 대상인 건물이 철제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다.


노 교수는 “풍납토성 보존 관리 종합계획을 집행하기 위해 매년 국가유산청 가용 예산의 약 15~20%를 투입하고 있지만 지가 상승 등으로 조속한 매입과 보상이 지연되고 있다. 예산은 예산대로 투입되면서도 주민들의 불만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최수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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