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무역 협상의 교착 상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일본에 이어 유럽산 자동차 관세까지 15%로 확정하면서 25%를 부과받는 한국을 압박하고 나섰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약속한 3500억 달러(약 490조 원)를 사실상 현금성으로 미국에 투자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내놓아 압박 수위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술 더 떠 대미 투자 금액을 일본 수준에 근접하게 늘리라는 주문까지 하고 나섰다. 이재명 대통령과 한국 정부 인사들은 UN총회 기간을 계기로 미국 뉴욕과 워싱턴DC에서 전방위로 외환시장 안정 방안을 선결해 달라고 사정하고 있지만, 미국은 쉽게 타협하지 않을 자세만 취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국가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대미 수출품 1위 자동차의 미국 시장 점유율 하락과 제2의 환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규모 현금 투자 사이에서 한국만 선택지를 강요받는 분위기다. 재계와 외교가에서는 한국이 당장 원하는 통화 스와프(화폐 맞교환) 방안에 대해 양국이 합의하더라도, 미국 측 요구 수준이 너무 높은 만큼 무역 협상이 완전히 타결 될 때까지는 시간이 한참 더 걸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트럼프 “韓 대미투자금 3500억 달러는 선불”…日·EU 車관세 15%, 한국만 25%
지난 24일(현지 시간) 미국 상무부와 무역대표부(USTR)는 25일 정식 게재할 관보 내용을 사전에 공개하고 유럽산 자동차와 부품에 대한 관세율을 기존 27.5%에서 15%로 내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변경된 관세율은 지난달 1일부로 소급 적용된다. 해당 시점 이후 15%보다 더 높은 관세를 낸 유럽 자동차 업체는 세금을 환급받을 수 있다.
앞서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지난달 21일 유럽산 자동차와 부품에 15% 관세를 적용하는 무역 합의안을 발표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5일 행정명령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의 상호관세 조정을 약속했다. 유럽산 자동차에 대한 15% 관세는 EU가 미국산 공산품 관세 철폐, 일부 미국산 농산물·해산물의 특혜적 시장 접근권 제공에 대한 입법안을 선제적으로 마련하는 조건으로 합의됐다. EU는 지난달 28일 해당 입법안 초안을 실제 발표하면서 사전 작업을 완료했다. 이날 발표한 미국·EU 간 관세 조정 내용에는 일부 의약품 성분과 항공기 부품에 대한 무관세 조항도 포함됐다. 이는 이달 1일부로 소급 적용된다.
현대차(005380)그룹은 올 초까지만 해도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무관세 조치로 2.5% 기본 관세를 부과받는 일본·EU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다 트럼프 대통령이 4월부터 관세 전쟁에 돌입하면서 미국 시장에서 한순간에 불리한 처지가 됐다. 한국은 7월 30일 상호 관세와 자동차 품목 관세를 25%에서 15%로 나란히 인하하는 방안을 미국과 합의했으나 후속 협상 단계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25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취재진과 만나 한국이 미국에 투자할 금액을 3500억 달러로 재확인하면서 “그것은 선불(up front)”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 결코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잘하고 있다”며 “우리가 이토록 잘한 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관세와 무역 합의 덕분에 한 사례(EU)에서는 9500억 달러(약 1경 3400조 원)를 확보하게 됐는데 이전에는 전혀 지불하지 않던 금액”이라며 “알다시피 일본에서는 5500억달러(약 760조 원), 한국에서는 3500억달러를 선불로 받는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와 함께 이날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글을 올리고 “우리의 위대한 대형 트럭 제조사들을 불공정한 외부 경쟁으로터 지키겠다”며 외국산 대형 트럭에도 다음 달 1일부터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또 같은 날부터 미국에 공장을 건설하지 않는 제약사들의 의약품에 100%, 부엌 수납장과 욕실 세면대 등에 50%, 가구에 30%의 관세를 각각 매기겠다고 알렸다. 미국 상무부는 관세 부과를 염두에 두고 의료 소모품과 로봇, 산업기계가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조사하기 시작했다.
투싼, 美서 티구안보다 240만원 비싸져···현대차, 가격·점유율 유지하고 이익 출혈 감수
일본에 이어 유럽산 자동차까지 10%포인트 낮은 관세를 부과받게 되자 상반기 재고 물량으로 버티던 현대차도 하반기부터는 이익 출혈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가령 현재 적용 중인 관세를 소비자가격에 그대로 반영한다고 가정하면 출고가 2만 9200달러(약 4080만 원)인 현대차 투싼은 3만 6500달러(약 5112만 원)로, 경쟁 차종인 폭스바겐의 티구안은 3만 245달러(약 4234만 원)에서 3만 4782달러(약 4869만 원)로 올라간다. 1000달러가량 싸던 투싼 가격이 티구안 판매가를 단번에 넘어서는 셈이다. 현 관세를 그대로 적용하면 투싼의 가격은 그간 1~3%가량 더 비쌌던 일본 도요타의 라브4(3만 4270달러·약 4798만 원)도 추월한다.
현대차그룹의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도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다. 기본 소비자가격이 4만 8985달러(약 6860만 원)인 제네시스 GV70은 기본 소비자가격이 1000달러 이상 높던 BMW의 X3보다 3000달러 이상 비싸진다. 현재 울산 공장에서 전량 생산되는 현대차의 소형 SUV 코나와 화성공장에서 생산되는 기아 니로도 같은 차급인 폭스바겐 타오스와 비슷한 가격에서 각각 2300달러, 4300달러 더 높게 책정된다.
이는 그간 미국 시장에서 가격 인상을 억제하며 점유율을 꾸준히 늘렸던 현대차그룹의 판매 전략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상이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시장에서 경쟁 차종보다 조금이라도 낮은 가격대를 유지하며 현지 소비자들을 공략하는 전략으로 승부를 봤다. 현대차·기아는 관세를 차량 가격에 반영하지 않고 점유율만 사수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이 경우 25% 관세가 그대로 이익 감소로 이어지게 돼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와 관련해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은 지난 18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가진 ‘2025 최고경영자(CEO) 인베스터 데이(투자자의 날)’ 행사에서 “미국의 관세 부과가 곧바로 미국 내 차량 가격 인상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차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의중을 내비쳤다. 무뇨스 사장은 또 “관세 대응의 핵심은 최대한 수요를 창출할 방안을 찾는 것”이라며 “지금 가격을 올리면 시장에서 기회를 잃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李대통령, 美재무에 외환위기 우려 전달…김민석 “통화 스와프 없인 안 돼”
현재 미국은 한국 측에 무역 합의 조건으로 미일 협정 수준의 양보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미 투자금 상당액을 달러 현금성으로 투입하고 자금 회수 뒤엔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 간다는 부분이 핵심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지난 11일 CNBC와의 인터뷰에서 이 같은 내용의 미일 협정 세부 내용을 소개하면서 “한국은 무역 협정을 수용하지 않으면 (기존 25% 수준의) 관세를 내야 하고 유연함은 없다”고 겁박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애초 한국은 전체 대미 투자액 가운데 5%만 지분 투자 형태로 투입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직접 현금 이동이 없는 보증(credit guarantees) 형태로 지불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미국의 요구에 맞추다 보면 한국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20% 정도, 내년도 예산안(728조 원)의 67% 정도를 3년 동안 매년 달러 현금으로 넘겨줘야 한다. 초대형 달러 수요가 발생하면 원·달러 환율이 급등할 것은 불보 듯 뻔하다. 현재 한국의 외화보유액은 4163억 달러 수준이고, 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는 규모는 연간 200억~300억 달러 정도로 전해졌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UN총회에 참석한 이 대통령은 24일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을 만나 “관세 협상은 양국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며 외환시장 안전판을 만들어 달라는 입장을 전했다. 이 대통령은 “한미 관계는 안보뿐 아니라 경제 측면에서도 양국의 긴밀한 협력 관계가 동맹의 유지와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며 “안보 측면 협력이 (협의가) 잘 진행되고 있는데 통상 분야에서도 좋은 협의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베선트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 역시 한국이 미국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조선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파트너’라고 강조한 바 있다”고 답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24일 미국 뉴욕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무제한 통화스와프는 필요조건”이라며 “(투자 규모가) 우리나라 현행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여야 하고 필요하면 수출입은행법을 고치거나 중요한 부담이라면 국회 보증 동의도 받아야 한다는 점은 충분조건”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대통령이 외환위기도 거론했지만, (외환시장에) 미칠 충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라며 최소한의 안전 장치인 통화 스와프가 체결되더라도 추가 논의를 많이 거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미국의 쌀·소고기 시장 개방 압박을 두고는 “무역 분야 비관세 장벽의 실질적 진전에도 그 내용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며 “협상 시한을 따로 두지 않고 있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한미 정상회담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미국 정부의 요구에 대한 불만은 김민석 국무총리도 제기했다. 김 총리는 25일 공개된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미 투자를 약속한 3500억 달러는 한국 외환보유액의 70%에 달하고 통화스와프 없이는 우리나라 경제에 타격이 클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22일 공개된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이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때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던 우려를 되풀이한 셈이다. 김 총리는 또 최근 미국 조지아주 한국인 근로자 구금 사태도 거론하며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의미 있는 진전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안전에 대한 담보 없이는 근로자 본인도, 그 가족들도 미국에 입국하기를 굉장히 꺼리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러트닉 “5500달러에 가깝게 투자 더 늘려라”…10월말 APEC ‘담판’까지 교착 가능성
자동차 관세와 천문학적인 외환 투자 사이에 끼어 한미 무역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정부 인사들도 물밑에서 바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다만 재계와 외교가에서는 최소한 다음달 말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 때까지는 양국 협상이 평행선을 달릴 가능성을 높게 보는 분위기다. 북미·미중 정상회담의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는 행사에서 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관세 담판까지 추진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25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러트닉 장관은 한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대미 투자 액수를 기존 3500억 달러에서 일본의 5500억 달러에 근접하도록 더 늘려 달라고 압박하고 있다.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23일 미국 뉴욕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APEC 정상회의 전이라도 접점을 찾으면 타결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라고 주장했다. 위 실장은 “우리 정부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지금은 양측의 견해차가 크지만 개인적으로는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국민들을 안심시키려는 발언을 내놓았다. 위 실장은 “기업들의 활동을 안정시키고 예측 가능하게 해야 한다”며 “한미 재무 라인도 가동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도 장외 협상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기재부는 25일 “이 대통령에 이어 구 부총리도 베선트 장관과 별도 면담을 갖고 통화스와프를 포함한 대미 투자 패키지, 환율 협상 등을 논의했다”고 알렸다. 구 부총리는 이 대통령과 베선트 장관 간 접견 때도 비공식수행원 자격으로 배석했다.
지난 23일 말레이시아로 출국한 여 본부장은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경제장관회의를 계기로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관세 협상 후속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여 본부장은 출국길에 취재진들과 만나 “최대한 우리 기업들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반도체, 철강 등 여러 가지 품목 관세와 관련해서 우리 기업들의 어려움은 정부가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그리어 대표와 여러 가지 다자 협의 논의를 하면서 이런 한미 사안도 논의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는 산업 경쟁국보다 높은 25% 관세와 500조 원에 육박하는 현금성 달러 투자 사이에서 당분간 미국과 줄다리기 협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하는 ‘숫자’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미국 국민들 눈에 한국이 많은 것을 양보한 듯한 방안을 내놓는 것이 협상의 핵심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경제 치적에는 다른 나라와의 ‘윈윈 전략’이 부각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트럼프 스톡커(Stocker)'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 투자에 도움이 될 만한 미국의 시장·기업·정책·정치·외교 관련 현장 이야기와 현안 분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구독하시면 유익한 미국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