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조직 내 ‘2인자’와 ‘3인자’에 해당하는 치안정감과 치안감 등 경찰 고위직 인사가 마무리됐다. 지난 6월 30일에 이어 지난달 25일 두 차례에 걸친 인사를 통해 이재명 정부는 경찰 조직 내 단 7명밖에 없는 치안정감을 모두 물갈이하며 본격적으로 ‘새 판’ 짜기에 나섰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듯 새 정부 출범에 따라 맞아 조직 인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번에 승진한 고위직 인사들도 대내외적으로 그 역량을 인정받은 자타공인 전문가들이다. 다만, ‘초유의 사태’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국민의 안전을 담당하고 있는 치안 당국의 인사에 역량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영향을 미치는 모습이 더이상은 지속되면 안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초유의 사태의 희생양이 된 것은 이번 인사에서 경찰인재개발원장으로 발령 받은 박현수 치안감이다. 박 치안감은 12·3 비상계엄 사태에 연루돼 직위해제 및 대기발령 상태에 놓인 김봉식 전 서울경찰청장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지난 2월 치안정감으로 승진 내정되며 서울청장 직무대리직을 맡게 됐다. 당시 국회 윤석열 내란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는 박 청장이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으로 근무하며 계엄 당시 이상민 전 행안부장관과 조지호 경찰청장 등과 통화를 했다는 이유로 지명 철회를 요구했다.
야권의 반대 속에서 서울청장 직무대리직을 맡았던 박 치안감은 윤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이라는 혼란한 정국 속에서 헌법재판소 인근을 경찰 버스 차벽으로 막아 ‘진공상태’를 만드는 등 안정적으로 경비 작전을 지휘해 큰 사건 사고 없이 마무리했다. 이후에도 각종 시위와 집회가 난무했던 서울시에서 치안 정책을 안정적으로 운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에서 초고속 승진했다는 점과 경찰국장으로 근무했다는 이력이 꼬리표가 됐다. 대전 출생인 박 치안감은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 주영대사관 경찰주재관과 서울 광진경찰서장과 경찰청 위기관리센터장을 지냈다. 이후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사검증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 파견근무, 경찰국장직을 수행했다. 윤 정부에서 박 치안감은 경무관, 치안감 승진에 이어 치안정감 승진 내정되며 ‘초고속 승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점이 걸림돌이 돼 박 치안감은 7개월 만에 ‘치안정감 승진 내정 취소’후 한직 발령이라는 경찰 역사상 사상 초유의 사태의 대상이 됐다.
경찰 내부에서는 박 치안감의 승진 내정 취소를 두고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경찰관은 “박 치안감이 서울청장 직무대리 시절 자신의 입지나 정치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치안’에만 집중해 성공적으로 서울청을 운영했다”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 했지만 결국 정권이 바뀌며 그 공을 인정받기는 커녕 승진 내정이 취소되는 결과를 맞았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경찰국장 시절 계엄 당시 정부 요인들과 전화를 했다는 사실이 걸림돌이 됐다는데, 경찰국장이 관계자들과 전화조차 하지 않으면 그게 직무유기 아니냐”고 덧붙였다.
다른 경찰 고위직 관계자는 “박 치안감의 사례는 정권에 상관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도 결국 정권의 눈에 들지 못하면 좌천당한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승진을 위해 정권에 맞는 수사와 경비 정책을 하지, 누가 국민 안전에 신경을 쓰겠나”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초고속 승진’은 윤 정권에서 승진한 박 치안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2017년 6월 문재인 정권이 출범한 이후 미국 워싱턴 주재관(경무관)으로 근무하던 김창룡 전 경찰청장은 그해 12월 치안감 계급으로 승진해 경찰청 생활안전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1년 만인 2018년 12월 경남경찰청장으로 자리를 이동한 뒤 7개월 뒤인 2019년 7월 치안정감으로 승진해 부산경찰청장으로 간 김 전 청장은 11개월 후 경찰 총수 자리인 경찰청장으로 파격 승진한 바 있다. 김 청장 또한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치안비서관실 행정관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반복하다 보니 치안 조직의 인사는 진보와 보수 정권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이 경찰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다. 국민의 안전을 담당하는 경찰 인사는 정치에 휘둘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정치권 관계자가 “정부가 가장 컨트롤 하기 좋은 부처 인사는 경찰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현실은 정 반대다. 검찰이나 다른 부처에 비해 경찰이 정부의 입김에 훨씬 많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내년에 검찰청이 사라지고 행안부 내에 중대범죄수사청이 신설된다면 ‘한 지붕 두 가족’ 구조 속에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의 권한도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권의 개입이 심해질수록 수사 독립성이 약화되는 것은 물론 경찰의 평생 숙원 사업인 ‘청찰청장 장관급 격상’도 갈수록 멀어지게 된다. 우리나라 치안을 담당함과 동시에 공무원 조직 중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는 경찰의 수장이 차관급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이유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정치적 논리에 따라 추진 동력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4월 17일 정청래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등 민주당 의원 등 17명이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조직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하면서 경찰청장인 치안총감을 장관급으로 치안정감을 차관급으로 승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검찰개혁이 탄력을 받으면서 장관급 격상 논의는 사실상 쏙 들어갔다. 검찰개혁에 나선 민주당이 검찰과의 기싸움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경찰을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목소리가 단순히 우려에 그치지 않은 상황이다. 과거에도 민주당은 경찰청장을 격상시키고 검찰총장을 차관급으로 끌어내리는 법안을 동시에 발의했다 흐지부지 된 바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뒤바뀌는 여야는 경찰 고위직 인사가 단행되면 서로를 향해 ‘코드·보은 인사’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경찰관들이 정치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정치권이 만들고 있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경찰이 경찰 본연의 임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능력과 성과, 내부 평가에 따른 인사가 이뤄지기를 경찰 모두가 바라고 있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한 고위직 경찰관은 “경찰은 정권이 바뀌면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조직이라는 불명예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며 “경찰은 엄연한 국민을 위한 독립 치안기관이고, 인사에서도 정권의 입김이 닿지 않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