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볼리비아에서 약 20년 동안 장기 집권했던 좌파가 중도 우파에 정권을 내줬다. 경제난과 민심 이반이 심각한 중남미에서 ‘핑크 타이드(온건 좌파 정부의 득세)’가 속속 뒤집히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9일(현지 시간) 치러진 볼리비아 대선에서 친기업 성향인 중도 우파 기독민주당의 로드리고 파스(58) 후보가 52.2%를 득표해 47.8%를 얻은 자유민주당(우파) 소속 호르헤 키로가(65)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하이메 파스 사모라(1989~1993년 재임) 전 대통령의 아들인 파스 당선인은 대선 국면이 본격화하기 전만 해도 지지율이 3~4위권에 그쳤지만 시간이 갈수록 돌풍을 일으켰고 결국 대권을 거머쥐었다. 러닝메이트로 나선 에드먼 라라의 인기가 파스의 승리에 도움을 줬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찰 출신인 라라는 경찰의 부패를 고발하는 동영상으로 ‘틱톡’에서 큰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이로써 2006년 최초의 원주민 출신 국가수반인 에보 모랄레스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현 루이스 아르세 대통령까지 좌파 사회주의운동당(MAS)이 20년 가까이 이어온 정권이 종료됐다. MAS 소속 에두아르도 델 카스티요 후보는 올 8월 1차 투표에서 3%대 득표에 그쳐 일찌감치 대선 레이스에서 이탈했다.
전문가들은 볼리비아의 심각한 경제위기에 분노한 유권자들이 장기 집권을 해온 MAS에 등을 돌렸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최근 1년 동안 볼리비아 물가 상승률은 23%를 넘었고 대외 부채는 지난해 기준 133억 달러(약 18조 8900억 원)로 불어났다. 외환보유액은 2014년 약 150억 달러에서 현재 20억 달러로 뚝 떨어졌다. 경제를 천연가스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볼리비아에서 모랄레스 전 대통령은 집권 초 천연가스 생산을 국유화해 재정 수입을 늘리는 등 일시적 성장을 거두기도 했지만 이후 뚜렷한 경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블룸버그는 “볼리비아는 재정지출을 조달할 능력 자체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외신들은 파스 당선이 중남미 다른 국가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남미는 멕시코와 브라질·콜롬비아 등 다수 국가들에 좌파 정부가 들어서 있다. 그러나 2023년 4월 파라과이에서 산티아고 페냐가 이끄는 콜로라도당이 집권에 성공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전기톱 유세로 유명세를 얻은 하비에르 밀레이(자유전진당)가 당선되는 등 최근 핑크 타이드가 주춤한 상황이다. 에콰도르에서는 최연소 대통령인 우파 다니엘 노보아 대통령이 2023년 연임에 성공했다. 다음 달 16일로 예정된 칠레 대선에서도 불법 이민자 추방을 공약한 극우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마약 단속을 명분으로 중남미 국가들을 거세게 압박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도 좌파 득세의 위축을 예상하는 요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루스소셜에 콜롬비아의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을 가리켜 ‘불법 마약 수장’이라고 부르며 콜롬비아에 대한 마약 밀매 퇴치 지원금 지급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또 카리브해에서 마약 운반을 이유로 지금까지 선박 7대를 공습하는 등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정권을 압박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두 국가 모두 좌파 정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은 이들 국가의 정권 교체를 노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