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정밀 지도를 반출해서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구글의 요청에 대해 정부가 다시 한 번 결정을 미뤘다. 구글 측의 서류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설명이다. 다만 업계는 지도 반출에 따른 안보 문제가 여전한 데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정부가 신중한 행보를 보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시점 정부가 고정밀 지도 반출을 허용할 경우 후폭풍은 불가피하다. 구글이 아직 정부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안보 불안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 더불어 구글에 허용할 경우 애플은 물론 중국 등 해외 플랫폼 업체들도 고정밀 지도 반출을 요구할 수 있어 추가 안보 논란도 예상된다. 지도 서비스를 하는 국내 산업계의 반발도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고정밀 지도 반출을 불허할 경우 미국 정부의 문제 제기와 후속 조치 우려가 불거질 수 있다. 특히 두 나라가 아직 한미 관세 협상의 ‘팩트시트(공식 설명자료)’를 발표하기 전인 만큼 미국의 문제 제기가 있을 경우 한미 관세 협상 자체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남아있다. 정부의 이번 지도 반출 심의 보류 조치는 결국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외교·안보·산업 측면의 후폭풍을 최소화하기 위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정부 요구 추가 수용한다고? 말 아닌 문서로 제출하라’…정부, 구글에 서류 보완 지시
국토교통부는 11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에 있는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국방부와 국가정보원, 외교부, 통일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행정안전부, 산업통상자원부 등이 참여하는 ‘측량 성과 국외 반출 협의체’ 회의를 열고 구글이 신청한 1대 5000 고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 심의를 보류했다. 동시에 구글에 서류 보완을 요구했다. 구글이 반출을 요청한 1대 5000 축척 지도는 실제 거리 50m를 지도상 1㎝로 줄여 표현한 지도다. 앞서 구글은 지난 2월 국토부에 1대 5000 축척 지도의 해외 반출을 요청했지만 협의체는 지난 5월과 8월에 잇달아 결정을 유보하고 처리 기한을 연장한 바 있다. 이번이 세번째 결정 시한이었지만 정부가 사실상 심의 보류를 통해 결정을 다시 한 번 연기한 셈이다.
정부는 구글이 언론이 대외적으로 밝힌 지도 관련 입장의 변화를 정부에 문서화한 형태로 제출하지 않아 심의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협의체는 “구글은 지난 9월 9일 열린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영상 보안처리와 좌표 표지 제한에 대해 수용 의사를 밝힌 바 있지만 해당 내용을 포함한 보완된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며 “대외적 의사표명과 신청 서류간 불일치로 정확한 심의가 어려워 서류 보완을 위한 기간을 60일 부여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구글이 보완 신청서를 추가로 제출하면 다시 협의체를 열어 고정밀 지도 반출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계획이다.
구글은 2011년과 2017년도에도 고정밀 지도 반출을 요청했다가 우리 정부로부터 불허 결정을 받은 바 있다. 모두 안보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정부는 안보 우려를 덜기 위해 구글 측에 △주요 안보 시설 흐림·가임 처리 △주요 시설 좌표 노출 제한 △지도 관련 서비스용 데이터센터 국내 운용 등을 지도 반출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다. 구글은 올 2월 지도 반출 신청 이후 안보시설 흐림처리와 좌표 노출 제한 요구는 수용하기로 했다. 정부의 이날 유보 조치는 여전히 구글이 해당 요구를 수용한다는 입장을 서류 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만큼 공식적인 결정을 위한 보완히 필요하다는 취지다. 정부 협의체 관계자는 “해당 사안은 결정이든 불허든 파급력이 큰 사안”으로 ”이런 중요한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결점을 남길 수는 없다는 쪽으로 협의체 위원들의 의견이 모였다”고 설명했다.
지도 반출 허용시 “애플·바이두도 달라할 것”…‘로컬 AI에이전트’ 빅뱅 불가피
업계에서는 그동안 정부가 구글의 고정밀 지도 반출을 허용하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는 평가가 계속됐다. 무엇보다 안보우려가 여전하다. 구글은 3대 안보시설 가림 처리와 좌표 노출 금지에 대해서는 수용 의사를 밝혔지만, 국내 데이터센터 설치에 대해서는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정부 측은 그동안 데이터센터를 핵심 요구로 보고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안보 위협이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봤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 반출을 허용할 경우 애플을 비롯한 다른 기업들의 반출 요구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 정보기술(IT)업계 관계자는 “애플 등 미국 기업은 물론이고 바이두 등 중국 기업도 데이터센터를 자국이나 제3국 등 우리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든 곳에 두고 고정밀지도 반출을 요구하면 거부할 명분이 없어지는 것”이라며 “단순히 구글이 우리 고정밀 지도를 쓴다는 차원이 아니라 해외 각국의 주요 서비스가 우리의 주요 안보 관련 정보를 확보하고 운용할 수 있게 된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국내 산업계의 불만과 주장에도 귀를 기울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디지털 지도를 기반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의 경우 20년 이상에 걸쳐 천문학적 비용을 투자해왔다. 만약 정부가 구글에 대한 고정밀 지도 반출을 허용할 경우 구글은 이같은 과정없이 일거에 정밀 서비스를 위한 지도를 손에 넣게 돼 형평성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업계는 고정밀 지도 반출이 결국 미래 공간서비스의 주도권을 구글이나 애플 측에 뺏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업계는 지도 서비스가 인공지능(AI)과 결합해 결국 ‘로컬 AI에이전트’로 발전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정 지역의 필요 시설을 찾는 것을 넘어 해당 시설을 예약하고 결제하는 식이다. 필요하다면 해당 시설로 가기 위한 모빌리티 예약·결제도 지역 기반 AI에이전트에서 가능해질 수 있다.
이미 네이버 지도는 최근 위성항법장치(GPS) 없이도 실내 공간에서 정확한 길 안내를 사용할 수 있는 ‘실내 증강현실(AR)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출시했다. 동시에 전국 주요 랜드마크를 생생하게 탐색 가능한 ‘플라잉뷰 3D’ 기능도 함께 선보였다. 카카오맵 또한 최근 카카오톡에 접목된 오픈AI의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와 연동되는 등 AI 기능 고도화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올해 하반기부터 AI 메이트 로컬 서비스를 통해 취향이나 조건에 맞는 장소를 AI를 통해 추천받을 수 있게 됐다. 티맵모빌리티도 최근 AI를 결합해 음성으로 원하는 지역을 찾거나 추천받는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업계에서 단순 지도 플랫폼에서 로컬 AI 에이전트로 진화가 시작된 셈이다.
이런 서비스를 개발하는 데도 2D 고정밀 지도는 기반이 된다. IT업계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의 공간 서비스는 3D 디지털 공간정보의 중요성이 커지지만 이를 위한 출발점은 여전히 2D 지도”라며 “특히 고정밀 지도는 골목단위의 정밀한 정보 제공이 가능한 지도로 허용 시 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한미 관세 협상 안끝났다’…2월 5일 재연기 가능성도 남아
지도 반출 결정 시 예상되는 후폭풍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불허대시 심의 보류를 결정한 데는 한국과 미국의 관세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관측도 나온다. 한미 간 관세·안보 분야 협상의 결과를 담은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발표돼 여러 조건이 명문화되기 전까지는 불허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는 관측이다.
미국 정부는 앞서 각국과의 관세 협상에 있어 눈에 보이는 관세율은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역 장벽, 즉 ‘비관세 장벽’도 중요 요소로 삼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가운데 한국에 대해서는 디지털 규제를 주요 비관세 장벽으로 꼽았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USTR) 지명자는 올 2월 인사청문회에서 EU와 한국 등의 온라인 플랫폼 기업 독과점 규제 움직임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올 9월 미 국무부가 발행한 연례 투자환경보고서에서는 “한국이 규제 장벽을 낮추는 것은 미국 서비스 및 관련 산업의 시장 접근성 극대화와 투자 환경 개선에 매우 중요하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이는 2021~2014년까지의 보고서에서는 없던 내용이다. 관련 서비스 산업으로는 핀테크와 법률 서비스, 교육기술를 꼽았다. 아직 직접적으로 지도에 대한 공개 언급은 없었지만 그동안 국내외 통상 전문가들은 △네트워크 망 사용료 △핵심 시설의 외국 클라우드 제한 △온라인 플랫폼법과 함께 고정밀 지도 반출 규제를 미국이 주목하는 비관세 장벽으로 꼽았다. 자칫 협상 마무리 직전 반출 불허 조치가 미국 정부를 자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정부는 이에 대해 한미 관세협상을 고려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협의체는 법률에 기반해 국가 안보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심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구글 측이 보완된 서류를 제출하는 대로 협의체를 열어 결정을 내린다는 입장이지만 다시 결정이 유보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날 정부의 결정에 따라 반출 심의는 총 60일 중 59일 째 중단됐다. 이에 구글이 2월 6일 이전 서류를 제출할 경우 정부는 서류를 접수한 다음 날까지 반출 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다만 이 때 추가 보완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결정은 2월 6일 이후 다시 미뤄질 수 있는 구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