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이돌 그룹 뉴진스 멤버들과 소속사의 전속계약 분쟁이 큰 화제를 모았다. 이 사건은 오늘날 K팝 산업에서 전속계약 분쟁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초기 아이돌들의 전속계약 분쟁은 존재 자체가 드러나기 어려웠다. 불공정하다고 느끼면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조차 없던, 이른바 ‘침묵의 시대’였다. “잠잘 시간 없이 일했지만 손에 쥔 돈이 없었다”는 회고가 상징하듯 당시에는 계약서 사본조차 받지 못한 채 수년간 활동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소속사에 항의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 흔했다.
이러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든 계기는 2009년 동방신기 멤버들의 전속계약 무효 소송이었다. 무려 13년에 달하는 계약기간과 중도해지 시 과도한 위약금이 알려지며 ‘노예 계약’ 논란이 본격화되었고, 법원은 해당 조항들이 아티스트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한다며 일부 무효로 판단했다.
이 사건은 결국 공정거래위원회의 표준 전속계약서 도입으로 이어졌고 K팝 산업에 큰 전환점을 남겼다. 표준계약서는 계약기간을 최대 7년으로 제한하고 정산 주기와 방법을 명확히 하며, 부당한 위약금 조항을 금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다만 표준 전속계약서가 업계의 기준으로 정착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도입이 강제되지 않았던 탓에 아예 사용하지 않거나 일부만 반영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대해 법원은 계약기간이나 위약금 등 핵심 조항이 표준계약서보다 불리한 경우 잇달아 무효 판단을 내렸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쳐 표준계약서는 비로소 업계의 ‘최소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계약서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수익 배분과 정산의 투명성 문제로 인한 분쟁도 많았다. 이승기와 전 소속사 간의 분쟁 역시 이런 경우다. 이승기는 데뷔 후 18년간의 음원 수익 정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법적 분쟁을 겪었다. 이러한 정산의 불투명성은 소속사의 대형화·글로벌화와 함께 점진적으로 개선되었고 현재의 K팝 전속계약은 과거에 비해 상당한 수준의 공정성을 확보한 상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의 뉴진스 사태는 또 다른 국면을 보여준다. 뉴진스 멤버들은 계약기간이나 정산 등 전통적인 ‘경제적 불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함께 일해온 대표이사의 해임, 모기업 산하 레이블 간 갈등 등 비경제적 요소가 전속계약상 의무 위반 또는 신뢰 관계의 파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주장의 타당성이나 배경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뉴진스 사태는 전속계약 분쟁의 중심축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쟁의 핵심이 더 이상 ‘돈’에만 머물지 않고, 매니지먼트의 전문성, 세심한 배려, 원하는 프로듀서와의 협업, 안정적인 활동 환경 등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과 일하는 방식을 지키기 위해 회사를 떠나 1인 소속사를 설립하는 아이돌들도 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전속계약의 본질적 성격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과거 전속계약이 투자자(소속사)와 상품(아이돌)의 관계를 규율하는 문서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장기간의 파트너십을 설계하는 계약이어야 한다. 불공정 조항의 제거를 넘어 신뢰를 어떻게 유지하고 커리어를 어떻게 함께 설계할 것인가가 핵심 과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몇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소속사는 눈높이가 높아진 아티스트에게 겉만 화려한 계약서를 내미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안정적인 활동 환경, 전문적인 매니지먼트, 투명한 의사결정 등 ‘매니지먼트의 질’을 실질적으로 높여야 한다. 아티스트에 대한 투자비 회수가 소속사의 중요한 과제임은 분명하지만 그 방식이 아티스트에 대한 과도한 통제로 이어질 경우 관계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섣불리 가르지 않고 계속 잘 보살펴서 장기간 협력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이다.
아이돌 지망생이나 신인 아티스트 역시 유의할 점이 있다. 현재의 전속계약서는 이미 상당히 고도화된 문서이기에 한 번 서명하면 되돌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실무에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의뢰인이 “그때 제대로 읽어볼 걸”이라며 뒤늦게 후회할 때다. 계약서는 서명과 동시에 법적 효력을 갖는 문서이며 ‘몰랐다’거나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정은 법정에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특히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협업 방식이나 활동 조건은 반드시 계약서에 명문화해야 한다. 해외 진출이나 특정 프로듀서와의 협업을 기대하며 불리한 조건을 감수했음에도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약속이 무시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분쟁에서 중요한 것은 증거이지 마음속 기대가 아니다.
K팝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에 발맞추어 이제는 최저 기준을 보장하던 표준계약서를 넘어 개별 아티스트의 환경과 가치, 커리어에 맞춘 맞춤형 계약을 논의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뉴진스 사태는 그 과도기적 진통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보인다. 소속사와 아티스트가 상생을 넘어 압도적인 시너지를 창출하는 새로운 K팝 계약의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