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열풍이 미국 회사채 시장을 달구고 있다. 내년 미국 투자등급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 규모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듯하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내년 미국 기업들이 2조 2500억 달러(약 3300조 원)에 달하는 회사채를 발행할 것으로 내다봤다. 올해보다 30% 이상 늘어난 규모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기업들이 생존 자금을 끌어모았던 2020년보다도 4500억 달러나 많다.
미국 기업들이 빚내는 이유는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가 경기 침체에 대비한 방어였다면 지금은 공격이다. 빅테크 기업들은 AI 데이터센터와 전력 인프라, 반도체 확보를 위해 앞다퉈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올해 발행된 회사채의 30%는 AI 인프라 구축에 쓰였다. AI 관련 인수합병(M&A)까지 더해지며 차입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틱톡의 모회사 바이트댄스는 내년에만 1600억 위안(약 33조 8000억 원)을 투자해 AI 모델과 애플리케이션 개발용 첨단 반도체를 확보할 계획이다.
한국 기업들은 미래를 위해 과감히 빚내는 미국·중국 기업들과 사뭇 다르다. 환율 급등과 금리 불안 탓인지 자금 조달 때 몸 사리기에 급급하다. 올해 기업금융 시장에서 회사채 등 장기 자금은 뒷전이고 기업어음(CP)과 단기사채만 늘었다. 회사채를 발행해도 대부분 채무 상환에 쓰였다. 올 들어 11월까지 발행한 회사채 54조 원 가운데 79.8%가 채무 상환에 사용됐고 시설 투자 비중은 3.9%에 그쳤다. 미국과 중국 기업들이 미래를 위해 빚내는 동안 우리는 현재를 버티기 위해 빚을 돌려막는 실정이다.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 같은 정책 자금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이 스스로 미래에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다. 환율과 금리의 변동성과 함께 정부의 기업 정책이 하루가 다르게 흔들리면 기업은 방어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생산적 금융의 출발은 기업의 자금 조달이 미래 투자로 이어지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