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넘치는 작품, 사라지는 미술 연구

전승보 경기도미술관장





미술 시장에서 작품의 명성과 가격을 움직이는 힘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거래만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작품을 해석하고 역사 속에 위치 짓는 학문적 비평 연구의 언어가 존재해왔다. 뉴욕과 런던, 베를린의 미술 시장은 단순한 자본의 집합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비평과 연구의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반면 오늘날 한국 미술계에서 이 중요한 매개의 역할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해외 사례를 보면 미술 관련 연구는 미술 시장의 외곽이 아니라 핵심 인프라임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아트포럼’과 ‘옥토버’가 더 이상 시장을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매체는 아니지만 작가와 작품을 제도와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영향력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 민간 미술관의 소장품 연구에 관한 열의와 그 규모 또한 말할 나위가 없다. 독일 역시 미술관 큐레이터와 미술사가의 연구가 전시 기획과 출판으로 이어지며 작가의 위치를 장기적으로 안착시키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작품의 가치는 단기적 유행이 아니라 해석의 축적을 통해 형성돼간다. 일본 또한 미술관과 대학, 출판계가 긴밀히 연결된 연구 구조가 기본이다. 국공립 미술관의 경우 장기간 연구를 기반으로 작가 연구서를 꾸준히 출판하며 전시를 선보인다. 비평 역시 학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해 작가를 시장 이전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임무를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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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한국 미술계는 호황기 전시와 판매가 넘쳐나지만 이를 연구자의 눈으로 읽고 기록하는 체계는 취약하다. 비평은 점차 홍보용 문구로 대체되고 미술사는 시장과 ‘긴장과 협력의 관계’를 맺지 못한 채 학술 영역에 고립된다. 장기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제도와 연구비는 부족하고 평론가·연구자는 생계와 지속성의 문제 앞에서 속절없이 현장을 떠나며 청년 연구자들에게 진입 장벽은 높아만 간다. 그 결과 한국 미술은 현장에서 충분한 맥락 없이 이미지와 트렌드 중심으로 소비되며 시장 또한 깊이를 잃어가고 있다.

현상의 원인은 분명하다. 미술 연구에 대한 투자가 직접적인 수익을 창출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기 때문이다. 단기간의 판매와 홍보에 유리한 텍스트는 늘어나지만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비평과 미술사 연구는 ‘비용’으로 취급된다. 특히 공공 영역에서 연구 지원은 단발성 사업에 머물고 장기적 아카이브 구축이나 연구 생태계를 유지할 구조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 비평과 연구가 빈약해진 미술 시장은 결국 자기 소모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해석의 축적 없이 소비만 반복되는 작품은 쉽게 잊히고 작가 역시 일회성 유행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정부 또한 비평과 미술사 연구에 대한 인식을 ‘지원 대상’이 아닌 ‘필수 공공 자산’으로 전환해야 한다. 미술 선진국들이 장기 연구를 기반으로 전시와 아카이브를 운영하듯 한국 역시 그나마 조금 있는 출판 중심의 성과 위주 지원에서 연구 축적까지 목표하는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동시에 미술관과 대학, 독립 연구자를 연결하는 협력 구조를 강화하고 미술 시장 또한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갤러리와 컬렉터가 단기적 가격 정보가 아닌 전문 연구자들의 평가를 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을 때 미술계는 풍성해질 수 있다. 미술 연구는 시장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아니라 한국 미술의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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