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 소피텔레전드메트로폴호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틀간의 회담에서 평행선만 달린 뒤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먼저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을 영구 폐기하겠다”고 했으나 트럼프는 “규모가 큰 다른 핵시설도 있지 않느냐”고 맞섰다.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의 가치를 강조하며 “현 신뢰 수준에서 최대의 비핵화 조치”라고 했으나 트럼프는 “다른 핵시설에다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폐기하면 엄청난 미래를 보장하겠다”고 유혹했다. 여기에 존 볼튼 백악관 국가보좌관은 생화학무기까지 폐기해야 한다고 가세했다. 미 측은 아예 영변 핵시설 폐기 대상마저 ‘전체가 아닌 일부’라고 주장했다. 트럼프가 사업가 출신답게 요구 조건을 담은 서류에 부동산 사업 등을 언급하자 김정은은 “체제 보장 장치가 제대로 담겨 있지 않다”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결국 김정은은 “유엔 결의 중 경제와 인민 생활에 지장을 주는 5건만 해제해달라”며 ‘스몰딜’을 주장했으나 트럼프는 “전면적인 제재 완화 요구나 다름없다”며 ‘빅딜’을 고수했다.
두 사람은 앞서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첫 회담을 갖고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평화 체제 구축’이라는 공동성명을 채택했으나 모두 소용없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운전자론’을 내세우며 2018년 4·5·9월 남북 정상회담을 3차례 진행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남북미 정상은 2019년 6월 트럼프의 방한 길에 판문점에서 즉석 회동을 갖기도 했으나 별다른 성과로 연결하지 못했다.
이러는 사이 북한은 ‘핵무기 없이는 체제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며 핵탄두와 ICBM을 크게 늘려왔다. 북한의 우라늄·플루토늄 핵탄두가 지난해 총 127~150발, 2030년 최대 243발이 될 것이라는 추정치가 나올 정도다. 북측은 우크라이나가 1994년 미국·러시아·영국의 ‘안보 보장’ 약속을 믿고 러시아에 핵무기를 이전한 뒤 어떻게 됐는지 목도한 데다 최근 미국의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압송 사태까지 겹치면서 핵에 더욱 매달릴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북미 관계 정상화의 길도 더욱 복잡한 고차방정식으로 변한 셈이다.
그렇다고 북미 정상회담의 가능성이 아예 낮은 것만은 아니다. 먼저 김정은은 ‘하노이회담처럼 빈손으로는 절대 트럼프와 만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나 내심 대미 관계 개선 욕구가 크다. 중국과는 무역의 95%나 의존할 정도로 ‘혈맹 관계’이나 실상 냉온탕을 오갈 때가 많고 러시아와의 관계도 언젠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게 되면 소강 상태로 다시 들어설 것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결국 극심한 경제난과 반쪽 외교에서 벗어나기 위해 트럼프를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여기에 노벨평화상에 대한 의지가 강한 트럼프가 지난해 여러 차례 김정은을 ‘핵보유국 지도자’라고 칭한 것을 보면 하노이회담에 비해 탄력적으로 대처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할 때를 전후해 북미 대화 재개의 계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 과거 북미 정상회담을 할 때도 김정은은 사전에 시진핑과 협의했었다. 따라서 미중 정상회담 뒤 한미 정상이 같이 평양을 방문하는 시나리오도 추진해볼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은 입장에서 미중 정상회담에 스포트라이트를 뺏길 것을 염려할 것이라는 점에서 북미 간에 ‘보텀업’ 방식으로 대화하다가 연내 적절한 시점에 정상회담을 하는 것도 괜찮다. 김정은도 올해를 넘기면 트럼프가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우리 쪽에서는 북한의 ‘통미봉남’을 우려할 것이 아니라 한미 동맹과 자주 국방을 바탕으로 실용적인 대북 접근에 나서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한 대로 트럼프에게 ‘피스메이커’를 맡기되 9·19 군사합의 복원과 인도적 교류 타진 등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 저성장 기조 고착화에서 벗어나 더 크게 웅비하는 토대가 될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의 골든타임이 많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