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가 “한국 경제에는 아직도 강자의 ‘갑질’과 혈연·지연·학연 등이 만연하다”며 “이 관계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경제 혁신을 이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이재명 대통령의 ‘경제 멘토’로 잘 알려진 주 후보자가 대기업에 대한 쇄신 의지를 내비치면서 재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미국이 제동을 걸고 있는 온라인플랫폼법 제정에는 일단 유보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주 후보자는 14일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중구 한국공정거래조정원으로 처음 출근하며 기자들과 만나 “소수에게 집중적으로 특권을 부여하고 의존하는 방식으로 발전한 선진국 전례는 절대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주 후보자는 면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등장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 후보자는 “약자들이 성실하게 노력하고 투자해 만든 결과를 물거품으로 만든다면 경제는 발전할 수 없다”며 “경제적 강자가 갑질을 해 약자들의 혁신적 성과를 가로막으면 아무도 혁신을 하려 하거나 기업가정신을 발휘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국정기획위원회도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안을 발표하고 5대 국정 목표 중 하나로 ‘모두가 잘사는 균형 성장’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안에는 △공정·상생 플랫폼 생태계 구축 △경제적 약자의 협상력 강화 △대기업집단의 사익 편취 근절 등의 내용이 담겼다.
주 후보자는 과거부터 각종 기고나 인터뷰 등을 통해 ‘반재벌’ 진보 성향을 드러내왔다. 2021년 한 언론 기고에서 “중소기업이 동반 성장을 하면 혁신과 성장의 잠재력을 키워 모두에게 이롭지만 대기업은 단기적 이익을 좇는 약탈적 행동으로 힘의 불균형을 재생산한다”며 “극소수의 대기업과 중견기업, 대다수의 소기업으로 구성된 뾰족한 압정 모양의 기형적 기업 생태계가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말했다. 올해 4월 또 다른 언론 기고에서는 “재벌가의 2세·3세 경영의 특권 질서가 혁신적 중소벤처기업의 기회를 박탈한다”고 썼다.
다만 주 후보자는 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온플법 제정에는 “현재 우리 독자의 온플법이 나아가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의회가 온플법 제정을 반대하고 나서자 당장 추진하기는 어렵다고 한발 물러선 것이다.
앞서 미 하원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달 24일(현지 시간) 짐 조던(공화) 위원장 명의로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에게 관련 서한을 보낸 바 있다. 미 하원은 서한을 통해 유럽연합(EU) 디지털시장법(DMA)을 모델로 한 한국의 온플법이 구글이나 애플·메타 등 미국 기업을 부당하게 표적으로 삼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도 3월 말 국별 무역장벽(NTE) 보고서에서 온플법을 무역장벽으로 꼽았다.
주 후보자는 “온플법의 경우 현재 통상 이슈가 있기 때문에 협상의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며 “독점 규제와 관련해서는 현행법과 공정위가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개선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주 후보자는 이날 공정위 조직 운영에 대한 구상도 밝혔다. 주 후보자는 “경제 규모가 커진 것에 걸맞게 공정위가 역할을 다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조직 역량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