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정치 구호 대신 '원피스 깃발' 든 시위대…전세계는 '젠지 혁명' 중 [글로벌 왓]

지난달 3일(현지 시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경찰이 저지른 폭력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린 가운데 한 시위 참여자가 일본 인기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밀짚모자가 새겨진 해골 이미지가 그려진 깃발 앞에 서있다. AP연합뉴스지난달 3일(현지 시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경찰이 저지른 폭력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린 가운데 한 시위 참여자가 일본 인기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밀짚모자가 새겨진 해골 이미지가 그려진 깃발 앞에 서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5일 네팔에서 부패 정부에 대한 분노로 폭동 수준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대통령 관저를 비롯한 국회의사당과 대법원을 불태운 시위대는 결국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임시 정부를 세웠다. 이번 시위를 주도한 핵심 인물은 바로 Z세대(199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에 태어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였다.



네팔 시위를 시작으로 올 들어서만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필리핀, 모로코 등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전세계 Z세대는 왜 분노하고 있으며 그들의 시위가 이토록 폭발적인 까닭은 무엇일까.

전세계 뒤덮은 Z세대 시위 물결…정치 구호 대신 ‘원피스 깃발’ 든 이유


네팔 수도 카트만두 국회의사당 앞에서 지난달 8일(현지 시간) 한 시위자가 정부의 SNS 차단과 부패를 규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AFP연합뉴스네팔 수도 카트만두 국회의사당 앞에서 지난달 8일(현지 시간) 한 시위자가 정부의 SNS 차단과 부패를 규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여름부터 전 세계에서는 Z세대의 분노에서 촉발된 반정부 시위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 지난 8월 말에는 인도네시아에서 국회의원 특혜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해 방화와 약탈 등이 벌어졌고, 경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오토바이 배달 기사를 포함해 10명이 숨지고 20명이 실종됐다. 9월 네팔에서도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행정 수반인 총리가 교체됐고, 경찰관 3명을 포함해 72명이 숨지고 2113명이 다쳤다. 최근 필리핀에서는 정치권의 비리 의혹이 제기되면서 지난달 21일 수도 마닐라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외에도 모로코, 페루, 파라과이, 마다가스카르, 에콰도르 등 동남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 남미까지 확산하는 추세다.

흥미로운 점은 세계 곳곳의 시위에 공통적으로 등장한 깃발이다. 밀짚모자를 쓴 해골이 그려진 깃발은 바로 일본의 인기 만화 ‘원피스’에 등장하는 ‘해적기’다. 이 깃발은 네팔과 인도네시아, 페루 등에서 ‘저항의 상징’ 역할을 했다.



원피스는 1997년부터 30년 가까이 연재된 일본 만화가 오다 에이치로의 작품이다. 주인공 몽키 D루피가 동료들과 함께 ‘밀짚모자 해적단’을 꾸려 부패한 세계 정부와 지배자들에 맞서 싸우며 자유를 찾아 항해한다. 등장 인물들은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지만 자신만의 정의와 동료를 위해 싸운다. 이러한 스토리는 대중 문화와 각종 밈(Meme)에 익숙한 Z세대에게 익숙하면서도 익살스러운 저항의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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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어나는 Z세대 시위에 특정한 구심점이 없다는 점도 원피스 깃발이 휘날린 배경이다. 과거에는 정당이나 사회 단체를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최근의 반정부 시위에는 구심점이 없다. 당연히 대표하는 상징이나 구호도 없기에 이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해적기를 올리게 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과거 시위는 야당, 베테랑 정치인 또는 노동조합이 조직하고 주도했지만 Z세대의 시위에는 지도자가 없으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며 “그들은 시스템 내에서 일하면서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믿는 구세대 정치인들의 어떤 역할도 거부한다”고 짚었다.

Z세대 시위의 또 다른 공통점은 ‘속도’다. 최초의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Z세대 시위의 원동력은 SNS다. 케냐 인권 변호사 기토부 이만야라는 “Z세대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감시자가 됐다”며 "그들은 웹사이트를 면밀히 조사하고, 숫자를 교차 확인하며, 실시간으로 부패를 폭로하고 있다"고 평했다. 또한 Z세대는 스마트폰과 어플을 통해 인공지능(AI)가 생성한 밈과 음악, 유머, 릴스 등으로 당국을 조롱하고 비판하며 현장 정보를 빠르게 확산 시킨다. WP는 “Z세대가 대중 시위를 재정의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밀레니얼도 쉽지 않았지만 Z세대는 더 어렵다


TOPSHOT - Members of the security forces detain a protester during a youth-led demonstration demanding reforms in the healthcare and education sectors in Sale on October 1, 2025. Two people were killed when officers opened fire on a group of people attempting to ">TOPSHOT - Members of the security forces detain a protester during a youth-led demonstration demanding reforms in the healthcare and education sectors in Sale on October 1, 2025. Two people were killed when officers opened fire on a group of people attempting to "storm" a police station in Morocco on October 1, state media said, as protests sometimes violent roil the north African nation. Demonstrations have convulsed Morocco for several days, urged on by the GenZ 212 group, a recently formed collective based on the Discord web platform whose organisers remain unknown. (Photo by Abdel Majid BZIOUAT / AFP)


Z세대 시위의 정확한 도화선은 모두 달랐지만 근본 원인은 비슷하다. 지배계급은 부패를 저지르고 사치를 부리는 반면 청년들은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양극화된 현실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국회의원들에게 월 3000달러(약 420만 원)의 주택 수당을 지급하기로 하면서 청년층의 시위를 촉발 시켰다. 네팔에서는 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Z세대의 불만이 커지자 정부가 X, 왓츠앱, 인스타그램을 포함한 SNS를 전면 금지한 것이 촉발 계기였다. 케냐에서는 식용유, 기저귀, 생리대 및 기타 가정용품에 세금을 인상하는 법안이 통과하며 Z세대의 폭발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모든 세대가 “나 때가 가장 힘들었다”지만 Z세대의 현실은 실제로 녹록지 않다. WP는 지난해 ‘밀레니얼은 재정적으로 힘들었지만, Z세대는 더 나쁠 수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같은 나이로 비교했을 때 Z세대는 밀레니얼 세대보다 주거비는 31% 더 많이 지출하고, 자동차 보험은 2배 이상, 건강보험은 46% 더 지불했다. 신용카드, 자동차 대출, 주택담보대출 등 모든 종류의 부채가 더 많고 소득 대비 부채 비율도 16%로 밀레니얼의 12%보다 높았다.

AI의 발전은 기회보다 불안 요소에 가깝다. 올해 8월 스탠퍼드 대학에서는 AI 발전으로 22~25세 청년층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고객 서비스, 회계, 소프트웨어 개발 등 AI 노출도가 높은 직종에서 2022년 이후 해당 연령대 고용률이 13% 감소했다. 반면 간호조무사 같은 AI 노출도가 낮은 직업은 모든 연령대에서 고용이 증가했다. 연구진은 AI가 정규 교육으로 습득 가능한 지식을 대체할 수 있어 젊은층에 특히 취약하다고 분석했다. 노령 근로자나 AI를 보완적으로 활용하는 근로자의 일자리는 오히려 증가해, AI의 영향이 불균형적임을 보여준다.

불공정한 현실에 분노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Z세대가 정치와 사회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케냐의 대통령은 논란이 된 재정 법안을 보류했고,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에 대한 수익성 좋은 주택 수당을 철회했다. 네팔에서는 총리가 축출되고 의회가 해산됐다. WP는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렵지만 작동하는 정부로 교체하는 것은 더 어렵다”며 “어느 시점에서 개혁을 제도화하려면 Z세대가 시스템에 합류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시위자에서 정책 입안자로, 외부 선동가에서 내부 주체로 전환할 수 있어야 시위는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박윤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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