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동향

105개국이 재정준칙 도입…韓만 역주행[재정중독, 벌어진 악어의 입]

◆ 재정중독, 벌어진 악어의 입-<3> 뒷걸음질 치는 '재정준칙'

李 정부 확장재정 기조에 재정준칙 논의 뒷전으로

OECD 국가 중 韓·튀르키예만 재정준칙 미도입

"재정 취약 시 신용등급 강등 우려…중장기 계획 세워야"

IMF "韓, 신뢰할 수 있는 '재정 앵커' 도입 필요" 지적

라훌 아난드(왼쪽) 국제통화기금(IMF) 한국미션 단장이 지난달 2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IMF-한국 연례협의결과 브리핑에 앞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라훌 아난드(왼쪽) 국제통화기금(IMF) 한국미션 단장이 지난달 2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IMF-한국 연례협의결과 브리핑에 앞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투입 기조가 이어지면서 재정준칙과 관련한 논의는 뒷걸음질 치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재정을 마중물로 성장률을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지만, 그만큼 국가채무비율이 빠르게 늘어나면 결국 정부 재정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재정준칙을 도입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 두 곳 뿐으로 국가채무가 늘어도 제도적인 억제책은 없는 상태다.



7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8월 발표한 ‘2025~2029 국가재정운용계획’에 ‘재정준칙’이라는 표현을 담지 않았다. 재정준칙은 국가채무나 나라살림 수준을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와 같은 재정 건전성 지표가 일정한 수준을 넘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한 규범이다. ‘재정준칙’이라는 표현은 매년 발표되는 국가재정운용계획에 2020년부터 4년 연속으로 포함됐지만 올해는 담기지 않았다.

한편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더욱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애초 국가채무 비율은 2028년 50%를 돌파할 전망이었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가 ‘성장’을 내세우고 확장재정 정책을 펼치면서 국가채무 비율은 이보다 2년 빠른 2026년에 50%를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애초 우리나라는 국가채무비율의 마지노선을 40%대로 잡아왔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은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체결하면서 참가 조건으로 국가채무비율 60%를 내걸었다. 한국은 이를 기준점으로 저출생·고령화 인구구조와 분단국가의 특성을 고려한 통일비용을 고려해 각각 10%의 완충 구간을 둬 마지노선을 더 낮춰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2019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OECD 국가채무비율 평균이 100% 이상인데 우리나라만 40%가 마지노선인 과학적 근거가 무엇이냐”라고 반문하며 40%라는 수치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로부터 2주 뒤 홍 부총리가 “국가채무비율이 45%까지 갈 수 있다”고 발언하며 사실상 정부가 국가채무비율을 더 늘릴 수 있다는 입장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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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도 재정준칙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 재정을 투입해 경제를 살리겠다는 기조를 강조하고 있는 만큼 국가채무비율을 보수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에 대해선 언급을 자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부가 제시한 2026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중기 국가채무 비율은 2026년 51.6%를 찍어 50% 선을 넘긴다. 이후 △2027년 53.8% △2028년 56.2% △2029년 58% 등으로 증가한다. 기재부는 내년도 예산안을 통해 “국가채무 비율은 2029년 50% 후반 수준으로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구윤철(왼쪽 세번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8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2026년 예산안 당정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구윤철(왼쪽 세번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8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2026년 예산안 당정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


재정준칙은 국가신용도를 지키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최근 국제신용평가사 피치가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하향조정한 바 있다.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한 시스템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프랑스는 EU에 속해있어 EU 재정준칙인 ‘재정적자 GDP의 3% 이내’를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재정적자 비율이 5.8%를 기록했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올해 1분기 113.9%를 기록했다. 국가채무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자 국가신용등급 강등으로 이어진 것이다. 염명배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도 재정이 취약해지면 국가신용도가 낮아질 수 있다”며 “신용등급이 강등되면 외국에서 들어온 투자 자본이 한순간에 빠져나가고 환율이 폭등하는 등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지출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2일 열린 전국 단위 노조 연합 시위 중 한 시위자가 붉은 조명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 노동조합들은 정부가 추진 중인 긴축 정책안에 반대하며 전국적인 파업과 시위를 조직했다. EPA연합뉴스프랑스 파리에서 2일 열린 전국 단위 노조 연합 시위 중 한 시위자가 붉은 조명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 노동조합들은 정부가 추진 중인 긴축 정책안에 반대하며 전국적인 파업과 시위를 조직했다. EPA연합뉴스


국제기구도 한국 정부에 제도적으로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 전세계에서 105개국이 재정준칙을 도입하고 있지만 한국은 재정준칙을 도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라훌 아난드 국제통화기금(IMF) 연례협의단 단장은 지난달 24일 한국과의 연례협의 결과를 발표하면서 “연금개편, 재정수입 확충, 지출 효율성 제고와 함께 신뢰할 수 있는 재정 앵커 도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재정 앵커는 재정준칙과 같이 국가채무비율이나 재정적자 한도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장치를 의미한다. 아난드 단장은 “고령화로 인한 장기 지출 압력에 대응할 수 있는 재정 여력을 확보하기 위해 구조적인 재정개혁이 중요하다”면서 “올 3월 연금보험료율이 상향 조정됐지만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도 확장재정 정책을 펼치더라도 재정 건전성을 관리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돼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염 교수는 “돈이 계속 풀리면 물가도 오르고 이자율도 올라 취약계층이 더 큰 피해를 입게된다”며 “취약계층 지원을 위해 재정을 푼다지만 오히려 더 힘든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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