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306
  • 인공지능(AI)은 산업과 경제를 넘어 교육, 복지, 노동, 행정 등 사회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동시에 AI는 점점 더 인간의 외양과 감각, 행동을 모사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형태로 구현되며, 기술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기술은 사람을 닮아가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오래된 문제가 새로운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AI는 본질적으로 기술이지만, 이제는 인간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핵심 사회 인프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이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주어지고 있지는 않다. 고령자, 저소득층, 장애인, 농어촌 주민 등 디지털 소외계층은 AI 기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기술의 진보가 오히려 새로운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술보다 먼저 사회적 계약의 내용과 방식부터 다시 써야 한다. ‘모두의 AI’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정책 비전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주요 정책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AI 접근권, 이용권, 설명요구권, 차별금지권 등을 포함한 ‘AI 기본권 헌장’을 제정하고, 이를 법제도 전반에 반영해야 한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사회권 체계를 구축하는 핵심이다. 둘째, ‘국민 AI 비서’와 같은 공공 AI 플랫폼을 구축해 복잡한 공공서비스를 통합 제공하고, 국민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개방형 디지털 복지 체계를 조성해야 한다. 셋째, 디지털 소외계층을 위한 AI 바우처 제도와 지역 기반 디지털 도움센터를 운영하여 기술격차를 완화해야 한다. 넷째, AI 시대에 필요한 역량을 국민이 갖출 수 있도록 생애주기별 AI 리터러시 교육을 제도화하고, 이를 평생학습 체계에 편입시켜야 한다. 다섯째, AI로 인한 기술 실업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주 4일제 도입 등 노동시간의 재구조화를 포함한 새로운 사회 안전망 전략이 필요하다. 이는 생산성 향상으로 확보된 잉여 시간을 삶의 질 향상으로 전환하는 사회적 분배 방식이다. 여섯째, 이러한 변화를 지속 가능하게 뒷받침할 수 있도록 시민, 기술자, 법률가, 산업계 등이 함께 참여하는 참여형 AI 기본사회 거버넌스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기술의 통제는 기술자만의 권한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AI가 점차 인간의 감정과 판단을 흉내 내는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구현되고 있는 오늘날,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거나 우위에 놓이는 상황에 대한 윤리적·법적 대응 또한 긴요하다. 기술은 사람을 모방할 수 있어도 인간 존재의 의미를 대신할 수는 없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다움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정치와 제도는 그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기존의 사회계약은 노동 중심의 산업사회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시민은 일하고 세금을 내며 국가에 참여했고, 국가는 그 대가로 복지와 보호를 제공했다. 그러나 AI가 인간의 노동을 재구성하고, 기술과 데이터가 새로운 부의 원천이 되는 시대에는 이 계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 ‘AI 중심의 지능정보사회’에 맞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다시 써야 할 시간에 서 있다. 이러한 사회계약의 재구성이 실질적인 정책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분배와 성장이 균형을 이루는 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모두의 AI’는 분배의 비전이지만, 그 실현은 지속가능한 성장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공공은 디지털 기술에 대한 투자와 인프라를 확충하고, 민간은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공공 LLM, 개방형 API, AI 바우처와 같은 정책은 민간 기업의 기술 진입을 유도하고, 기술 확산이 곧 생산성 향상과 신산업 창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분배는 성장 없이 가능하지 않고, 성장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기술 기반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기술 기반의 공공 혁신과 민간 생태계의 균형 있는 선순환이 구축될 때, AI로 창출된 부가 사회 전체로 환류되는 구조를 실현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포용적 분배의 전제이다. 이것이 바로 ‘모두의 AI’가 지향하는 가치이며, 기술과 인간의 공존을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의 실질적 내용이다.
    ‘모두의 AI’를 위한 길
    by 김윤명
    2025.05.16 13:47:41
  • ‘현대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야쿠시마(屋久島) 달린다’ 얼마 전 ‘서울경제신문’과 ‘연합뉴스’에 실린 흥미로운 기사 제목이다. 요지는 현대차에서 생산한 전기 버스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야쿠시마 섬을 운행한다는 것이다. 최근 장재훈 부회장을 비롯한 현대차 임원들은 야쿠시마를 방문해 무공해 전기 버스 5대를 인도했다. 고작 5대를 팔기 위해 그들이 먼 길을 간 이유가 궁금했다. 동행한 김정훈 상무(상용 품질담당)는 “‘바다 위 알프스’로 불리는 청정한 야쿠시마에 현대차가 달린다는 것은 전기 버스 강자로서 경쟁 우위를 선점하는 한편 일본 시장에서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듣고 보니 현대차의 야쿠시마 진출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야쿠시마와 인접한 다네가시마(種子島)에 관심이 끌렸다. 두 곳은 가고시마를 갈 때마다 마음에 둔 섬이다. 섬 전체가 세계자연유산인 야쿠시마는 1993년 유네스코에 등재됐는데 일본 최초였다. 유네스코가 야쿠시마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때 묻지 않은 원시림에다 신령스러운 삼나무 때문이다. 제주도 4분의 1 크기인 이곳에는 1000년을 넘긴 삼나무가 즐비하다. 특히 수령 7000년으로 추정되는 조몬스기는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일본에서만 관람객 1,300만 명을 기록한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에도 나오는 조몬스기와 이끼 숲은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원령공주’는 환경파괴의 위험을 그린 수작으로 야쿠시마에 친환경 버스가 필요한 이유다. 영화를 제작한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은 챗GPT가 그리는 지브리 풍 만화의 원조인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야오 감독은 오랫동안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해 왔는데 ‘원령공주’ 외에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벼랑 위의 포뇨’ 등으로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을 경고해 왔다. 지난해 다녀온 히로시마 현 토모노우라(鞆の浦) 역시 감독이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소재로 삼은 작은 어촌 마을이다. 하야오는 훼손 위기에 처한 토모노우라를 배경으로 ‘벼랑 위의 포뇨’를 제작했다.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히로시마 지방법원은 도로 건설계획을 중지했다. 토모노우라가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하게 된 것은 하야오 감독 덕분이다. 야쿠시마로 가는 길은 간단치 않다. 후쿠오카 또는 가고시마 공항으로 이동한 뒤 다시 쾌속선을 타고 2시간을 달려야 한다. 탐방객들이 원행을 마다하지 않는 건 독특한 식생을 보기 위해서다. 야쿠시마는 아열대 기후부터 설산까지 보기 드문 섬이다. 연평균 강우량은 2,500~1만mm로 ‘한 달에 35일 비가 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짙은 이끼가 섬을 뒤덮고 수 천 년 된 삼나무 숲을 형성했다. ‘원령공주’에 등장하는 이끼 숲길은 탐방객들에게 최고 코스다. 탐방객들은 원시림과 이끼 숲을 헤치며 섬의 주인은 숲이고, 인간은 손님에 불과함을 깨닫고 돌아간다. 지척에 있는 다네가시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다네가시마는 일본에 처음 화승총이 전해진 곳으로, 과장되게 말하자면 근대 일본의 시발점이다. 1543년 9월 23일 다네가시마에 상륙한 포르투갈 상인 100여 명은 훗날 전쟁 판도를 바꾼 화승총을 에도막부에 전했다. 다네가시마 도주 도키타카는 이들로부터 2000냥을 주고 화승총 두 자루를 구입했다. 오늘 날 수 억 원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액수도 놀랍지만 당시 도키타카는 15살에 불과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화승총이 지닌 위력을 간파한 것이다. 도키타카는 화승총을 철포(鐵砲·뎃포)로 개량했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철포를 실전에 투입해 천하를 통일했다. 이후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조선을 유린하고 근대 일본으로 가는 종자돈을 마련했다. 다네가시마에 포르투갈 상인이 상륙한 뒤, 임진왜란까지 걸린 시간은 49년에 불과했다. 그동안 조선도 화승총을 받아들일 기회가 있었지만 조선 지식인들은 변화에 둔감했다. 1653년 또 한 차례 기회가 왔지만 역시 흘려보냈다. 그해 제주에 표류한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 상인 38명은 조선에 13년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그들을 전국에 분산한 채 구경거리로만 소비했다. 앞선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일본의 실용주의와 조선의 탁상공론은 훗날 지배와 피지배라는 치욕스러운 역사로 귀결됐다. 정치하는 이들의 책임이 그때나 지금이나 가볍지 않은 이유다. 전국시대 뎃포(鐵砲)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철포도 없이 싸우는 무모함을 빗댄 말이 ‘무대포(無鐵砲)’다. 조선은 한동안 정신 승리에만 골몰한 중국 소설속의 아Q처럼 무댓포 시대를 지냈다. 도요타 자동차는 글로벌 메이커 1위다. 현대 전기 버스가 일본에 상륙한 건 뎃포로 무장한 실력 덕분이다. 일본 최초 화승총을 받아들인 다네가시마, 일본 첫 세계유산 야쿠시마에 현대 전기차의 첫 상륙은 의미 있다. 우리나라 전기 버스가 일본 열도를 뒤덮는 날이 온다면 반도체에 이은 기술의 승리일 것이다. 역사는 반복한다는데, 이번에는 어떤 형태로 변주될지 궁금하다. 조만간 두 섬에 다녀오고 싶다.
    천년 삼나무 일본 섬에 상륙한 현대차
    by 임병식
    2025.05.08 16:03:30
  • 우리나라의 잠재 경제성장률 하락이 심각하다. 관세 충격을 반영하면,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경제성장률 하락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그 동안의 경제성장 기여도를 분해해보면 이를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내수 위축으로 인해 순수출 성장에 의존해왔다. 내수 요소인 건설 및 설비투자, 민간소비의 기여도는 줄곧 축소되어 왔다. 급기야 수출이 성장기여의 절반의 몫을 차지한 것이다. 트럼프 관세 정책의 결말과 그 효과는 아직 불확실한 영역에 있다. 다만 트럼프 관세가 글로벌 자유무역 기조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수출환경에 우호적일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구 구조 변화의 충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수출 감소의 마이너스 효과를 국내 수요가 보완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과거에는 일시적 대외요인으로 소매판매 등 내수가 침체되더라도 다음 해에는 반드시 V자형 반등세를 보였지만 지금은 내수침체 국면이 장기간 지속되는 구조적 침체기에 접어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수와 관련된 성장 동력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 동안에는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내수 부진이었지만, 앞으로는 베이비부머의 출산율 하락이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시기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출산율 하락이 인구 오너스(Onus) 우려를 야기시키는 정도를 넘어 앞으로는 내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 2000년대 이후 출산율이 급감했는데, 절반 가까이 줄어든 출생 세대가 30대가 되어 주요 소비계층, 또는 주택 구매 세력으로 등장하는 시기부터는 신규 내수가 현저하게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의 주체로서 기업 부문의 역할 변화도 예의 주시해야 한다. 과거 산업화 시기에는 대기업 집단이 한국의 경제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대기업 주도로 투자와 고용창출을 통한 성장모멘텀을 확충하기가 어렵다. 내수시장이 협소할 뿐 아니라 글로벌 경쟁에서 중국, 인도 등과의 기술 격차가 빠르게 축소되고 있으며 핵심산업인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이 이미 글로벌 성숙산업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를 극복할 혁신성도 부족하다. 수출이 한국경제 성장을 이끌기 어려운 대외 환경 속에서 내수마저 고령화와 출산율 부진으로 인해서 구조적 침체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 집단이 성장을 주도하기도 어려운 시대이다. 이러한 정체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혁신성장 기업이 필요하다. 기존 대기업, 제조업 중심의 성장시스템이 한계를 노출하기 시작할 때 AI, 로봇, 바이오 등 미래 성장산업 육성을 위해서 고위험-고성장 스타트업 투자가 필요하고, 그를 위한 모험자본 공급이 절실하다. 즉, 기술창업 생태계 구축과 자산운용 시장에서의 모험자본 공급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부 지원책으로 인해 기술 창업 생태계가 확충된 것은 사실이다. 양적 비교에서 정부의 벤처자금 지원규모를 국가별 GDP 비중으로 보면 결코 타국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질적 성장에서는 스타트업이 중견기업 및 대기업으로의 성장하거나 또는 그 생태계로 편입되어 글로벌 혁신기업으로 성장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다. 자산운용 시장에서도 대규모 장기자금을 운용하는 연기금이나 보험사 등이 VC나 PE 등 장기 모험자본의 공급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 엔비디아, 테슬라, 애플 등 혁신성장 기업이 경제를 이끌고 있는 미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참고할 만하다. 미국의 스타트업 성장은 대학에서 시작된다. 대학에서 혁신기업 창업자가 나타나고 대학은 이를 충분히 검증한 상태에서 VC를 통해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혁신기업들이 스탠포드나 MIT와 성장궤도를 함께 해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장기 운용을 하는 미국의 대학기금들은 자산배분에서 VC 비중이 최소 20%에 달할 정도이다. 장기운용을 하는 기관들이 장기 모험자본 시장에서 큰 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KAIST와 각종 정부 연구소가 즐비한 대전 지역에서 혁신 기업이 얼마나 육성되고 있는지를 보면 극명하게 대비된다. 또 위험계수 상향 등 각종 규제로 인해 대학기금, 연기금, 보험사 등 장기자금을 운용하는 기관들의 자금배분에서 PE, VC를 통한 모험자본 공급비중이 극히 미미하다는 점도 모험자본 육성에서 양국간 큰 차이점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 과연 경쟁력 있는 AI기업, 로봇기업이 있는가. 기업 경쟁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상황에서 장기투자를 할 수 있는가. 정책기관인 모태펀드마저 VC 만기가 8년에 불과한데, 민간이 이를 넘어 확대 집행할 수 있을까. 모험자본 투자에 대한 위험계수가 과도하게 높은 상황에서 위험조정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대안이 있는가. PE 등의 모험자본이 사회적 순기능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등등의 반대 질문이 부지기수로 등장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모험자본 시장 육성을 위해서 정교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이지, 그것이 흐름을 되돌리거나 막아서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될 시점이다.
    경제 회복의 열쇠는 모험자본 육성
    by 김세중
    2025.05.07 14:25:39
  • 기업의 위기관리 컨설팅을 하다 보면 늘 긴장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위기 상황에서 임원들이 모여 심각하게 회의를 거듭하지만, 정작 고객과 직접 맞닿아 있는 현장의 목소리가 빠지는 경우가 많다. 고객센터 상담원, 세일즈 담당자, 이들의 경험과 통찰이 회의실 문턱을 넘지 못하면, 결정은 어김없이 현장과 어긋난다. 그렇게 2차, 3차 위기가 시작된다. 위기관리를 위한 결정이 새로운 위기를 낳는 아이러니다. 정책 수립도 다르지 않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 환경과 대내외 경제의 변동성 속에서 정부가 정책을 세우는 일은 늘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규제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과거의 틀에 갇혀 있고, 새롭게 떠오른 기술과 서비스는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시장에 나오지도 못한 채 사라진다. 무엇이 이 벽을 넘게 할 수 있을까. 결국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기업의 목소리에 정부가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답이다. 영국 금융감독청(FCA)의 규제 샌드박스는 좋은 예다. 핀테크 산업이 급성장하던 2016년, FCA는 기존 금융 규제가 신기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규제를 무턱대고 없애기보다는, 기업들에게 제한된 환경에서 신기술을 시험할 기회를 주었다. 기업이 시장에서 직접 서비스를 실증하고, 그 데이터를 정부와 공유하며 규제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구조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168개 기업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시장에 진입했고, 참여 기업들은 기존보다 50% 이상 더 많은 자금조달에 성공했다. ‘선구매 후결제(Buy Now Pay Later)’ 모델을 실험한 질치(Zilch)는 그 대표적 사례다. 기존 규제의 틀에서는 서비스를 내놓을 수 없던 질치는 FCA 규제 샌드박스에서 소비자 보호 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지 시험했다. 실증 결과, 400만 명의 고객과 20억 달러 기업가치를 가진 회사로 성장했다. 한국도 2019년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는 등 나름의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특히 기술 변화 속도가 가장 빠른 인공지능(AI) 분야만 봐도 그렇다. 수년 전부터 AI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했지만, AI 활용에 관한 규제와 정책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오랜 논의 끝에 인공지능기본법이 가까스로 통과됐지만, 이미 글로벌 기업들은 한국보다 한참 앞서 달리고 있다. 단지 AI만의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 산업, 모빌리티, 원격의료 등 어느 분야를 보더라도 혁신은 시장에서 앞서가고, 규제는 뒤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왜 이토록 우리의 정책은 현실을 따라잡지 못할까. 결국 답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은 누구보다 기술의 변화와 시장의 반응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존재다. 그들의 경험과 데이터를 정책에 담아냈다면, 이렇게 뒤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기업과 정부의 협력을 ‘야합’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적 정서에 갇혀 있다. 정부가 기업의 의견을 수용하면 어김없이 따라붙는 ‘특혜’, ‘재벌 편들기’라는 비난이 발목을 잡는다. 결국 귀를 닫고 안전한 길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두려움을 버려야 할 때다. 혁신 기술이 시장을 이끄는 시대, 정부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면,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담아야 한다. 기업과의 협력은 야합이 아니라, 혁신을 현실로 만드는 동반자 관계다. 규제는 시장을 지키는 울타리다. 하지만 그 울타리가 너무 높으면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된다. 울타리는 지키되, 그 안에서 새로운 길을 낼 유연성이 필요하다. 기술과 시장, 정책과 규제가 함께 움직일 때, 혁신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정부가 기업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 바로 여기에 있다.
    규제 개혁, 결국 현장에 답이 있다
    by 이보형
    2025.05.07 14:08:51
  • 책무구조도 도입은 요 근래 금융업권의 주요 화두이다. 과거에 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금융회사의 내부통제 부실 문제가 지적되었다. 금융회사와 임직원들을 어떠한 근거로 어디까지 제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무상 논란도 있었다. 개정「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책무구조도 도입 의무가 마련된 것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한 것이다. 책무구조도는 영국 금융서비스 및 시장법(Financial Services and Markets Act 2000: FSMA)상 고위 경영자 및 인증제도(Senior Managers and Certification Regime, SM & CR)에 근거하고 있는 고위 경영자 및 거버넌스에 대한 책임지도(responsibilities map)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책무구조도 도입에 따라 금융회사 임원별로 소관 영역에 대한 내부통제 ‘책무’가 명확하게 식별, 배분되어야 한다. 임원은 소관 영역에서 내부통제·위험관리 기준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관리조치를 이행해야 한다. 대표이사는 전사적 내부통제체계를 구축하고 임원들의 내부통제 활동을 감독하는 내부통제 ‘총괄’ 관리 의무를 부담하며, 임원별 내부통제 책무를 배분한 ‘책무구조도’를 작성해서 금융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대표이사와 고위임원들에게 중징계가 부과될 수 있기 때문에 세간에서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에 따라 책무구조도를 도입해야 하는 기한은 업권별로 다르다. 은행·금융지주회사는 올해 1월 책무구조도 제출을 완료했다. 금융투자업자·보험사는 자산총액·운용재산 규모에 따라 올해 7월 또는 내년 7월까지, 여신전문금융회사·저축은행은 자산총액 규모에 따라 내년 7월 또는 후년 7월까지 책무구조도를 도입해야 한다. 책무구조도 도입을 준비하는 금융회사들은 고충이 많다. 각자의 영업, 내규와 조직 현황을 전반적으로 점검해서 법의 취지에 맞게 내부통제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직 개편, 업무 분장·조정, 인사이동이 수반되는 경우가 생긴다. 내규도 정비해야 하고 전산시스템과 업무 프로세스를 변경해야 한다. 간단한 일이 아니고 전사적인 역량이 투입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금융당국도 새로운 제도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책무구조도 시범운영 제도를 시행해서 업권별 책무구조도 도입 기한 전에 참여를 희망하는 금융회사로부터 책무구조도를 조기에 제출받아 사전 컨설팅을 해주고 있다. 시범운영 기간 중에는 내부통제 관리 의무가 완벽하게 이행되지 않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 등 인센티브도 준다. 컨설팅 과정에서 금융회사들에 공통적으로 발견된 실무상 쟁점에 대해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려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당분간은 시행착오가 불가피할 것이다. 축적된 실무가 많지 않고 금융회사마다 경영 여건과 조직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금융당국이 제공하는 컨설팅이나 가이드라인에만 의존해서 개별 회사들이 내부통제 시스템을 단기간에 완결적으로 보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금융회사의 적극적인 실행 의지와 금융당국의 적정하면서도 유연한 감독권 행사가 결합되어 책무구조도 도입이 대형 금융사고를 예방하고 금융회사의 내부통제 시스템이 한층 고도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책무구조도, 내부통제 고도화를 위한 성장통
    by 유정한
    2025.05.07 12:38:00
  • 대한민국에서 검찰개혁은 미완이다. 권력기관 개혁을 이야기할 때마다 검찰이 우선적으로 거론되었지만, 그 실상은 절반에 불과하다. 검찰은 수사와 기소권을 가진 한 축이지만, 그 결과를 판단하는 법원 역시 사법권력의 또 다른 축이다. 검찰만 변화한다고 해서, 사법 구조 전체가 새롭게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둘러싼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파기환송 결정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은 무죄를 기대했지만, 이는 지나치게 나이브했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만약 검찰개혁이 실질적으로 이뤄진다면, 그 다음 개혁의 방향은 어디로 향할까. 법원이다. 검찰 권력이 줄어들면, 사법부 권력에 대한 문제 제기는 자연스러운 수순이 된다. 판결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무관해야 한다는 이상론은 누구나 동의하지만, 현실에서 법원이 권력기관의 일부로 작동해온 역사적 경험은 무시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오랜 기간 동안 정권의 변화에 맞춰 온건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권력의 흐름에 편승해왔다. 이 상황에서 법원이 개혁의 칼날이 자신을 향할 가능성을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법원은 검찰개혁 이후 ‘개혁의 다음 타깃’이 될 것을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움직임을 정치적, 제도적 차원에서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재명 후보 사건은 그런 긴장 관계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번 대법원의 파기환송은 단순한 법리 검토의 결과로만 해석할 수 없다. 사법부가 자신들의 기존 권력을 방어하는 첫 신호로 읽어야 한다. 민주당은 무죄를 기대했지만, 이는 대한민국 사법권력의 구조를 냉정히 바라보지 못한 순진한 희망에 불과했다. 정치는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이다. 이재명 후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권력기관 개혁은 이제 2막을 맞고 있다. 검찰개혁이 미완이라면, 법원개혁이 기다리고 있다. 법원은 이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반발한다. 진정한 사법개혁을 원한다면, 이제는 법원이라는 성역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더 과감한 대안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 판사의 한계와 권력적 이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정한 범위에서는 인공지능(AI) 판사의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소액사건이나 반복적 사건의 경우, AI를 통한 예측적 판결이 실험되고 있다. AI 판사는 인간과 달리 정치적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고, 동일한 법률 기준에 따라 일관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최종 판단은 인간이 해야겠지만, 사법절차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AI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사법의 신뢰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단순한 제도 수정을 넘어, 기술을 활용한 구조적 혁신이 필요하다. 법원개혁은 인간 판사의 권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사법 신뢰를 회복하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제는 법조 엘리트의 폐쇄적 성역을 깨고, AI라는 새로운 도구를 통해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사법체계를 고민해야 할 때다.
    사법절차 정의를 위한 AI
    by 김윤명
    2025.05.06 10:11:36
  • 최근 국제금융시장에서 미국 달러화 가치가 상당 폭 떨어진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환율 수준은 하락폭이 크지 않다. 글로벌 미 달러화의 가치를 나타내는 통화바스켓(basket)의 지수(dollar index)는 올해 1~4월 중 8% 넘게 하락했다. 이는 한마디로 국제금융시장을 풍미하던 미국 예외주의(exceptionalism)가 힘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무역과 금융질서를 개편하려는 트럼프의 어설픈 움직임이 무역 상대국보다 미국의 경제 기초체력(펀더멘털)에 더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안전자산 및 기축통화로서의 미 달러화의 신뢰를 훼손시키고 있다. 이에 반해 원·달러 환율은 같은 기간 3%대 하락에 그쳤다. 누군가 1400원대가 뉴노멀(새로운 기준)이라고 해서일까. 환율이 떨어지다가도 1400원에 근접하면 적잖은 달러 매수세가 등장한다. 과거에는 원·달러 환율 변동 정도는 글로벌 미 달러화 가치의 변동 폭을 상회했던 적이 많았는데 최근의 변동 폭은 이례적이다. 글로벌 달러화 움직임과 동조되지 않고 높은 환율수준에서 ‘안정적인 듯 안정적이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지목된다. 첫째 원·달러 환율이 중국 위안화의 대미달러 환율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중간 경제적 밀접성을 감안할 때 과거부터 그래 왔었다. 중국 위안화는 올해 중 심리적 경계선인 달러당 7.3위안을 넘나들면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미·중 간 무역전쟁 아래 위안화의 약세 압력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둘째 안타깝지만 국내 정치적 불확실성은 원·달러 환율 움직임이 글로벌 달러의 움직임과 괴리되는 요인으로 일부 작용했다. 최근 불확실성이 완화되고는 있으나 큰 정치 일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전환기에는 경제정책 추진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경제성장 동력에 대한 불안감이 적잖이 근저에 깔려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셋째 국내 거주자의 해외투자로 인한 수급요인이 환율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다. 최근 외국인 투자자들의 국내 주식 순매도 확대에 못지않게 국내 거주자들의 지속적인 해외투자가 환율 하락을 제약하고 있다. 아직 이들에게 글로벌 미 달러화 약세와 미국 주가 조정 양상은 해외투자 선호를 약화시키기 보다는 저가매수의 좋은 타이밍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이와 같이 원·달러 환율의 하방경직성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앞으로 글로벌 달러화 가치가 상승 반전될 경우 원·달러 환율이 동반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트럼프의 관세정책이 크게 후퇴하여 그간 훼손된 미 달러화의 위상이 회복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 가능하다. 그리고 미국이 강경한 관세정책을 지속한 결과 미국보다 여타국의 성장이 더욱 부진해질 경우에도 그럴 수 있다. 게다가 국제통화체제에서 미달러화를 대체할 통화가 마땅치 않다는 점도 미 달러화가 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달러화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인다. 트럼프 관세정책의 운명과 무관하게 이미 세계는 다극화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의 약진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러한 여건 아래 필자는 종합적으로 볼 때 원·달러 환율은 적어도 올해 시계(time horizon)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승보다는 하락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첫째 단기적으로는 원·달러 환율의 하락을 제약시켜 온 미·중 간 무역 갈등이 더 이상 극단으로 치닫지만 않는다면 원·달러 환율은 아주 조그만 긍정적 실마리에도 이를 빠르게 반영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내 정세가 더욱 안정감을 찾으면 하락압력은 더 높아질 것이다. 둘째 국내 거주자의 외환수급 측면에서 볼 때 어떤 이유에서든 국내 거주자들의 해외투자 심리가 일시적이라도 약화된다면 부지불식간에 환율은 급락할 수 있다. 그것이 한미 협상과정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만일 미국이 원화 강세를 강하게 요구할 경우 시장 참가자들 간에 일단 환율이 충분히 떨어지기를 지켜보자는 심리가 빠르게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중기적으로 트럼프 관세정책의 불확실성과 그 영향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면 보다 펀더멘털 측면에 집중하면서 미국 경기둔화 가능성과 그에 따른 미 연준 금리인하 이슈가 다시 화두가 될 것이다. 즉 글로벌 미 달러화 약세의 흐름에 따라 원·달러 환율의 동반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앞으로 환율이 오를지 내릴지 누가 감히 자신하겠냐마는 무언가 방향을 전환하기 전의 정중동(靜中動)이 느껴지는 때인 것 같다.
    최근 환율 움직임에 대한 단상
    by 양석준
    2025.05.03 08:00:00
  • 올해 들어 국내 전세시장은 상승과 하락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불안정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세가격은 상승세를 보이고 있으나, 지방에서는 하락 또는 정체 현상이 나타나며 매매 뿐만 아니라 전세 가격 측면에서도 지역 간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전국 주택 전세가격은 완만한 상승세를 이어가며 지난해와는 다소 다른 변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 전세가격 상승에는 몇 가지 뚜렷한 요인이 있다. 첫째, 2년 전 전세가격 하락에 따른 임차인 우위의 상황에서 재계약이 많았던 시기와 달리, 최근에는 보증금 상향에 따른 계약갱신청구권 사용이 늘면서 시장에 유통되는 전세 물량이 줄어들었다. 이렇게 세입자들이 갱신권을 사용해 기존 주택에 머무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신규 전세 매물이 감소하고, 수급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둘째, 서울을 비롯하여 울산 등 일부 지방에서는 신축 아파트 입주 물량이 예년 대비 크게 줄어들었다. 실제로 울산의 2025년 2월 4주 아파트 전세가격은 지난주 대비 0.07% 상승해 전국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 서울 역시 0.03%의 상승세를 보였다. 신축 공급 부족이 전세가격 상승을 자극하는 대표적 사례로, 단기간에 공급이 확대되기 어려운 부동산의 특성상 이들 지역 전세가격은 장기간 완만한 상승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셋째, 전세 수요가 아파트로 집중되는 현상도 가격 상승을 부추긴다. 빌라 등 비아파트 전세사기 이슈로 인해 세입자들이 아파트 전세를 선호하면서 아파트 전세가격만 상승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반면 전세가격의 하락 또는 상승 억제 요인도 뚜렷하다. 가장 큰 요인은 전세대출 규제 강화다. 2025년 들어 전세보증 인정 비율이 90%로 축소되고, 1주택자 전세대출 금지, 주택 소유자 변경 시 대출 제한 등 대출 문턱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시장금리 하락에도 불구하고 세입자들의 전세대출 수요가 크게 늘지 못하고 있다. 또한 2030세대 등 주요 전세 수요층이 전세금 마련 대신 주식 등 투자에 자금을 분산하는 경향도 전세시장 수요를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실제로 전세 대신 월세를 선택하는 수요가 늘며, 월세가격이 전세보다 더 빠르게 오르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반전세(보증부월세) 증가 역시 전세가격 상승폭을 제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지역별 주택 전세시장은 공급이 감소하는 추세 속에서 대출 규제 등과 함께 수요도 함께 감소하는 시장으로 분석되며, 이로 인한 파급 효과가 월세 가격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세가격 상승 폭이 크지 않다고 해서 시장이 안정적이라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월세를 포함한 전체 임대차 시장의 가격 불안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택의 매매 수요는 실거주 수요와 투자 수요로 구분한다. 투자 수요가 풍부한 지역은 전세 가격의 변동성보다 매매 가격에 비교한 전세가율이 중요한 지표로 작용한다. 반면 투자 수요보다 실거주가 중심이 되는 지역에서는 전세 가격의 흐름이 더 중요한 요인으로 판단된다. 전세 가격이 오르면 실수요자들은 주거 불안정성을 느끼고 매매 시장으로 이동하려는 심리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심리적 불안은 내 집 마련을 위해 대기 중인 2030세대의 주택 매수 수요를 직접적으로 자극한다. 그래서 투자 수요보다 실거주 수요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는 지방에서는 지역별 전세 가격의 변동성을 주택 시장 내 실수요자의 심리 변화를 판단하는 지표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2025년 국내 전세시장은 공급과 수요, 정책과 시장 심리가 복합적으로 얽혀 불안정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단순히 전세가격의 상승폭만을 보고 시장이 안정됐다고 판단하기보다는, 월세를 포함한 전체 임대차 시장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임차인은 주거 전략을 신중히 세우고, 임대인은 수요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결국 전세 시장은 실수요자의 심리와 시장 구조 변화에 따라 언제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025년의 전·월세 동반 불안이 시사하는 것은?
    by 윤수민
    2025.05.03 07:00:00
  •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해법은 제도와 정책을 넘어, 삶의 기억을 품은 공간과 사람의 회복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올해 4월 현재 대한민국 수도권의 인구는 약 2,600만명으로 이는 전국 총인구의 50%를 차지한다. 도시 집중화로 인한 수도권 인구 밀집과 지방 소멸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 만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잃어버린 일자리와 사람들을 다시 지역으로 불러 들이는 ‘리쇼어링(Reshoring)’은 과연 가능할까. 고착된 도시 생활과 일상의 안정성을 포기하고, 낯선 지역으로의 귀환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질문의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답은 ‘사람’과 ‘공간’, 그리고 그곳에서 피어나는 ‘상상력’에 있다. 지난달 26일, 농촌유토피아대학원 학생들과 경주 불국사 인근 진현동을 찾았다. 수학여행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세월의 격랑 속에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폐허로 방치되었다. 지역을 강타한 지진과 코로나19 팬데믹, 인구 감소의 삼중고 속에 문화와 역사마저 침묵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최근 지역 주민들과 문화 재생의 뜻을 함께하는 민간인들의 노력으로 ‘불리단길 형성’이라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변화의 현장을 수업으로 마주했다. 수업이 진행된 ‘주오일장’은 과거의 포장마차 감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실내 포차 공간이다. 평소에는 저녁에만 문을 여는 곳이, 이날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나의 강의장이 되었다. 지역의 유휴 공간이 ‘교육과 사유(思惟)’의 장소로 탈바꿈된 것이다. 이는 농촌유토피아를 실행하는 학생들의 발표와 토론장으로 ‘로마드대학원(nomad+campus)’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상상력을 창조하라’는 주제로 지역에 방치된 폐 공간을 살려 지역 활성화를 이루고 있는 젬스톤 F&B(주) 이창렬 대표의 강의는 현장이 학문을 도전하게 하고, 이론이 실천으로 검증되었다. ‘도시에서 지역으로’라는 말이 물리적 이동이 아닌,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이동임을 실감하게 했다 스페인 자치공동체 마리날레다를 이야기한 ‘우리는 이상한 나라에 산다’에 “빵과 장미”라는 구절이 있다. 인간에게는 생존을 위한 빵뿐 아니라, 존엄과 꿈을 위한 장미도 필요하다는 의미다. ‘주오일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방치된 공간을 공동체의 가치와 지역 청년들의 소통을 담아낸 ‘장미’와 같은 공간이다. 농촌유토피아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수업에 참여한 대학원생 조윤지씨는 “여러 분야에서 이미 각자의 재능으로 전환을 향해 나아가는 분들을 보며 많이 배웠다”며 “비록 지금은 일개 도시민이지만, 도시와 지역의 모습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데 일조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또 대학원생 박수진씨는 “현장을 통해 우리 젊은 청년들의 조용하지만 힘찬 움직임을 보며 많은 것을 깨달았다”며 현장 수업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들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한 의지로 다져졌다. 농촌유토피아대학원이 추구하는 교육은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닌, 현장을 교과서로 삼는 실천적 배움이다. 지역 사람들의 삶과 공간, 그리고 역사와 문화 유지를 통해 상상력을 창조하는 인재를 육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농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실제적 대안인 것이다. 진현동의 불리단길, 주오일장, 그리고 이곳을 찾는 청년들의 발걸음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지역’의 희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공간 활용의 기술을 넘어 가능성에의 도전과 사람을 품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변화다. 지역은 누군가의 삶터이며, 기억의 저장소다. 지역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한 인구 감소의 문제가 아닌 삶의 방식과 역사, 공동체의 가치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농촌유토피아는 농촌을 살리자는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어떤 공동체를 꿈꾸는지를 묻는 질문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유토피아는 멀리 있는 이상향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가능성의 씨앗이 심어진 곳, 그곳이 도시든 농촌이든, 삶이 숨 쉬는 곳이 바로 유토피아다. ‘리쇼어링’의 열쇠는 정책 이전에 사람이고, 공간이며, 상상력이다. 지역이 살아나는 현장에 농촌유토피아는 강한 생명의 꽃을 피울 것이다.
    빵과 장미 그리고 ‘리쇼어링’
    by 조금평
    2025.05.01 13:00:36
  • ‘빨리빨리’ 문화는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한국 전쟁 직후 1인당 국민 소득이 100달러에 불과할 만큼 가난했던 국가는 빨리빨리 근성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구며 현재 명목 GDP를 기준으로 세계 12위 규모의 경제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반세기 만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모두 달성하며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던 단 기간의 고도성장의 배경에는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내고자 하는 한국인 특유의 근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에서조차 빨리빨리가 강조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여 국가 발전의 근본 초석인 교육을 백 년 앞을 내다볼 수 있는 큰 계획으로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부모들은 우리의 아이들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있다. 자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뒤처지는 것을 견디지 못해 하며, 어차피 배울 것이라면 빨리빨리 배워야 한다는 인식으로 선행학습에 열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빨리빨리 선행학습이 과연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한 일일까. 얼마 전, 4세 고시, 7세 고시란 말이 뉴스에 등장해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발달과 성장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과도한 선행학습으로 자녀를 압박하는 일부 부모들의 잘못된 모습이 사회적 논란을 가져온 적이 있다.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야 할 자녀에 대한 걱정으로 빨리빨리 교육을 실행한 것이겠지만, 아이들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일이 ‘빨리빨리’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의 행복 지수가 높은 선진국들을 보면, 빨리빨리 선행학습을 해서 배울 것을 미리 익히고 더 수준 높은 지식을 쌓기 위해 교육을 강제하는 우리의 교육과는 사뭇 다르다. 미국이나 스위스, 스웨덴 등의 아동교육은 강제적인 학습, 과도한 선행학습 대신 아이들의 창의력과 자율성을 강조한 교육이라는 점에서 놀이가 중심이 된 교육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놀이 중심 교육, 사회성과 정서 발달에 중점을 둔 자율적인 교육 환경에서 아이들은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자신만의 반짝거리는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는다. 경쟁하는 법만을 배우는 우리의 아이들과 사회성과 창의성을 함양하며 성장하는 선진국의 아이들. 누가 더 행복하고, 누가 더 미래 사회에 필요한 인재일까. 미국의 영유아들은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학습 방식인 몬테소리라든가 레지오 에밀리아, 발도르프 등의 교육 체계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경험하며 자신의 재능을 발굴해 나간다. 천편일률적으로 입시에 필요한 지식만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이 보장되고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자연스럽게 창의력을 증진할 수 있는 것이다. 스위스의 경우에는 만 7세 이전의 아동들에게 문자나 수학 등을 강제로 학습시키지 않는다. 대신 숲 유치원과 같이 자연 친화적인 교육 환경 속에서 자발적인 탐구의 기회를 가지며 의미 있는 경험을 쌓는다. 스웨덴에서는 초등학교 입학 전의 아동들에게 읽기, 쓰기에 대한 강요가 금지된다. 스웨덴의 모든 아동은 경제적 격차로 인한 차별을 받지 않고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며 놀이를 통해 사회성을 발달시킬 수 있다. 이렇게 선행학습을 강요하지 않고, 인성이나 사회성 발달, 자율과 창의력 증진 등에 중점을 둔 선진국의 아동교육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치며 구축된 교육 체계이다. 이들 국가의 부모들은 자녀의 관심사에 관심을 두고, 자녀의 창의력을 높일 수 있게끔 자율적인 학습을 선호한다. 자녀의 성공을 위해 희생하며 투자하는 부모들의 모습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과도한 경쟁 속에 이른 나이부터 경쟁하는 법,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하는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성취의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교육 문화는 결코 아이들의 행복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면, 도전을 통해 성장할 기회를 만들지 못한다. 부모의 조바심이나 희생은 결국 자녀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급한 교육 문화로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몰 것이 아니라, 다양한 도전과 실패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부모가 되어주는 것이 어떨까.
    ‘기다려주는 교육’의 힘
    by 한서정
    2025.04.30 10:50:59
  • 작년 국내 과학기술계는 두 가지 큰 사건을 겪었다. 하나는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이 전례 없이 삭감된 것으로, 그간 한번도 경험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라 연구현장에 미치는 충격과 혼란이 사뭇 컸다. 다른 하나는 유명 학술지인 네이처 인덱스(Nature index)가 특집기사를 통해 한국이 높은 연구개발 투자에 비해 연구개발 성과가 놀라울 정도로 낮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성격과 방식으로 발생했지만 그 배경에는 모두 연구개발 성과가 저조하다는 문제 인식과 비판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공공연구개발 투자 대비 성과가 낮다는 비판은 이미 10년 전부터 제기되었다. 더욱이 GDP 대비 정부연구개발투자 비중이 세계 1~2위 수준임에도 연구개발 저생산성 구조는 개선되지 못하고 고착화되는 양상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는 ‘한국형 R&D 패러독스’라는 부정적인 별칭으로 불린다. 그동안 정책적 노력으로 일부 성과 개선이 있었지만 여전히 연구개발투자 증가율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질적인 성과 개선이 더디다. 네이처 인넥스는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공동연구의 확대, 여성 연구인력의 확대, 산학협력 강화 등을 제언했지만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선 ‘별로 와닿지 않는다’라는 반응이다. 이유는 우리나라만이 지닌 독특한 구조적 관성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정부 주도로 경제발전을 추진해 왔고 과학기술은 그 과정에서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역할을 해 왔다. 정부의 높은 관심과 기대는 연구개발 투자 확대로 이어졌지만 그에 비례해 정부가 연구생태계에 미치는 지배적 영향력도 두드러지게 큰 특징이 있다. 그동안 대학과 공공연구기관 등 주요 연구주체들은 연구예산의 대부분을 정부 재원에 의존해 왔다. 그런데 정부는 공공연구기관을 연구개발의 특수성을 고려해 별도로 예외적 관리하기보다는 일반 공공기관과 유사하게 예산투입관리를 강화하는 방식을 적용해 왔다. 이로 인해 연구주체들은 실질적 성과창출보다 정부의 형식화된 요구와 규율에 맞추는 데에 집중하게 되었고, 연구현장은 점점 관료화라는 덫에 빠지게 되었다. 관료화된 연구환경에서 연구자들은 성과가 불확실한 도전과제보다는 예측가능한 안전한 연구를 선택하며, 실질적인 필요성보다는 형식적 요건을 충족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데 집중하게 된다. 경쟁이 곧 효율이라는 인식은 과잉 경쟁과 폐쇄적 문화를 낳아 개방과 협력생태계 형성을 어렵게 한다. 성과관리는 객관성이 강조되어 정량평가에 의존하게 되고 전문성에 기반한 정성 평가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연구성과 창출의 핵심요소인 도전성, 유연성, 창의성을 잃게 해 혁신적인 성과창출과 질적인 제고를 방해한다. 그동안 연구생태계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다. 정부는 과잉경쟁 환경을 완화하기 위해 경쟁 중심의 예산제도인 PBS(Project Based System) 개선을 추진해 왔고 과도한 평가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들도 일부 시행해 왔다. 또한 출연연구기관의 자율적 운영을 제약했던 공운법(공공기관운영에 관한 법률)적용도 어렵게 해제되었다. 문제는 이런 조치들이 일부 파편화된 개선에 머물거나 또 다른 제도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제도 개선의 구조적 한계 즉, 정부의 권한 축소나 관리 노선에서 예외를 요구하는 자율과 책임 운영방식은 수용되기 어려운 경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도래와 기술패권 경쟁 심화로 과학기술의 혁신적인 성과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핵심요소가 되었다. 이제 연구성과는 단순한 과학적 성과를 넘어 국가안보와 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전략적 자산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연구성과를 창출하는 주체들의 현장 생태계가 도전적이고 창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지 못한다면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더라도 혁신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다. 국가간 혁신경쟁의 치열함 속에서 경쟁력의 핵심은 적합한 전략개발 능력과 인재의 탁월성에 있다. 그래서 우수한 전문인력들이 집결해 있는 공공연구기관의 연구환경을 선진화하는 것은 극한의 혁신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다. 핵심기술의 전략 개발에 필요한 통찰력도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접근과 연구를 통해서 길러지고 확보된다. 우리나라는 외형적으로는 경제규모(GDP) 세계 12위, 수출규모 6위라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 규모(GDP 대비 정부연구개발비 비중)도 글로벌 선두권이다. 그런데 국가 혁신 소프트웨어인 운영시스템과 연구생태계의 질적 수준은 지난 20년간 선진화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단순한 투자 확대를 넘어 연구생태계의 선진화 혁신을 통해 한국형 R&D 패러독스 구조를 극복하고 과학기술혁신 강국으로 변화해야 한다.
    ‘한국형 R&D 패러독스’ 어떻게 극복할까
    by 이민형
    2025.04.29 11:03:58
  • 노인복지관의 풍경을 그려본다. 스마트폰을 꺼내 AI 챗봇으로 건강 상담을 받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어르신들과 정작 컴퓨터 전원 버튼조차 낯설어하는 분들이 공존하는 풍경은 역설적이었다. “AI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삶이 훨씬 편리해진 건 확실해요.” 누군가가 말했지만, 그 편리가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는 현실은 분명한 문제다. AI는 이제 ‘선택의 기술’이 아니다. 교육, 의료, 복지, 고용·금융 심사 등 우리 일상의 구석구석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기술 혜택을 누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간극은 내내 커져만 간다. AI 활용 능력이 곧 생존 능력이고, 디지털 리터러시는 존엄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행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이하 AI 발전법)은 산업 진흥과 규제 완화에만 골몰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 법은 1년여간 유예되어 2026년 시행 예정이다. 기업 지원, 연구개발 촉진, 신시장 창출 등 성장 전략은 촘촘해 보이지만, AI로 인한 차별·편향·사생활 침해에 대응할 장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제안한 ‘모두의 AI’를 뒷받침하기 위한 ‘AI 기본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AI 기본권의 내용은 첫째, AI 접근권이다.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AI 서비스·교육·인프라에 균등히 접근할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도서관·복지관 등 공공장소를 ‘AI 교육 거점’으로 삼고, 온라인·오프라인 AI 리터러시 강좌를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 둘째, AI 공정성과 설명권이다. 자동화된 결정의 영향 요인과 알고리즘 핵심 논리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시각자료로 설명받을 권리를 법에 명시해야 한다. 셋째, AI 고른 혜택이다. AI로 인한 과실을 누구나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개인의 데이터가 제공되었다면 그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후보가 추진했던 ‘경기도 데이터 배당’은 이러한 정치철학이 담겨진 것이다. 이처럼 실질적 권리로서 AI 기본권을 법률에 새겨야만, 기술 발전의 과실이 소수에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AI가 그리는 세상은 법과 제도가 일관되게 뒷받침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AI 기본권의 보장 없이 무분별한 산업 성장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AI 기본권은 곧 ‘AI 기본사회’라는 더 큰 비전으로 이어진다. AI 기본사회란 일부 계층이 아닌 모두가 AI 혜택을 체감하는 포용적 사회를 뜻한다. 교육 격차 해소를 위해 초·중·고 교육 과정에 AI 리터러시 과목을 도입하고, 지방·도서벽지에도 동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디지털 복지 강화를 위해 취약 계층 대상 AI 건강 모니터링·맞춤형 복지 서비스를 구축하되, 개인정보 보호 장치를 철저히 마련한다. 공공서비스 혁신 차원에서 AI 도입 시 시범사업·사전영향평가·국민 의견 수렴 절차를 의무화한다. 이를 현실로 만들려면, 법제와 거버넌스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 우선, 현행 AI 발전법은 문제의 정의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AI라는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산업성장을 위한 가치도, 국민의 AI 기본권에 대한 가치도 담겨있지 않다. AI와 입법을 위한 문제정의가 처음부터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지금 하위법령 작업중이나 이 또한 이해관계에 휩쓸리고 있다. 입법과정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방안을 제시한 사람은 시행령 작업에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AI 기본법과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제대로 입법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행 AI 발전법은 ‘AI 산업법’으로 개정하여 기술개발과 혁신을 전담토록 한다. 기업 지원·데이터 시장 활성화·규제 완화는 이 법에서 다루는 것이 맞다. 산업진흥과는 별개로, AI 기본권과 AI 기본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내용은 ‘AI 기본법’을 제정하여 구체화해야 한다. 법이 바뀌면, 제도를 운영할 거버넌스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AI 기본권을 구체화하고 AI 거버넌스로서 현재 산업 중심으로 짜인 ‘국가AI위원회’를 ‘AI기본사회위원회’로 확장 개편하는 것이다. 위원회는 산업영역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영역까지 포괄하고, 정책의 심의·조정 권한 및 예산권까지 갖는 위원회로 성격을 변모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등 관련 위원회의 역할과 거버넌스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기술 발전과 함께, 그 기술을 공정하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새 정부는 AI 기본권과 AI 진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AI는 생활, 교육, 산업, 문화, 상거래 등 모든 영역에서 기본 인프라가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별로 AI를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통령 소속으로 ‘AI 국가전략위원회’를 두고 글로벌 ‘AI TOP 3’를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 수장은 행정가나 경영자 출신이 아닌 AI 기술 전문가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AI 기본법은 특정 부처의 특정 과를 위한 ‘과법’이 아닌 대한국인의 ‘모두의 법’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AI는 기업이나 국민 모두의 AI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AI 기본권 없이 AI 성장은 없다
    by 김윤명
    2025.04.28 17:17:16
  • 나는 내 이름이다. 태어나서 이름을 가진 다음에야 하나의 인격이 되고 그 인격을 바탕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내 이름이 고유의 내 이름대로 불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권에 적히는 '로마자 이름'에 관한 이야기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는 최근 여권 로마자 성명 변경 불가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쟁점은 이름 중 ‘태’의 로마자 표기였다. 원고는 여권을 신청하며 ‘TA’로 표기했지만, 접수 당국은 이는 국어 로마자 표기법에 맞지 않는다며 ‘TAE’로 정정해 여권을 발급했다. 원고는 영어권에서는 ‘TA’가 자연스럽고 널리 쓰이는 표기라며 원래 신청대로 변경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 소송에 나섰다. 법원은 ‘국어 로마자 표기법’은 어디까지나 대외적 구속력이 없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일 뿐이라며 상식적으로도 ‘cap(캡)’, ‘nap(냅)’, ‘fan(팬)’ 등 모음 ‘A’를 ‘애’로 발음하는 단어를 무수히 찾을 수 있다고 하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우리 사회에서 이름은 대개 한자로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순수한 우리말로만 짓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특정 영어 단어나 발음을 염두에 두고 아예 영어 이름을 우리말로 표기해 이름을 짓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이름이 여권 발급 과정에서 원래 의도한 영어 표기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국어 로마자 표기법은 한국어를 로마자로 바꾸는 데 유용하긴 하다. 하지만, 실제 음성과 어감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권법령은 이름을 로마자로 바꿔쓰는 기준의 원칙으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제시하고 있다. 출입국 심사 관리나 우리 여권에 대한 대외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기준을 지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합리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고시가 오래도록 개정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양한 발음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어를 로마자로 단순하게 치환시키는 데는 효과적이나 유연성이 떨어진다. 반대로 영어 등을 한국어로 바꾸는 것에는 기능을 다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Hermione’를 발음해보면 헤르미온느, 헤르미오네 등으로 읽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실제로 발음할 때는 ‘헐마이오니’라고 읽는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헐마이오니를 동경하는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헐마이오니라고 지었다면, 국어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어떻게 써야 할까? Heolmaioni다. 허마이오니라고 지었다면, Heo Maioni라고 적어야 한다. 헤르미오네, 헤르미온느로 짓는다고 해서 Hermione라는 로마자 표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Hereumione, Hereumionneu, 이렇게 적힌다. 이런 한계 때문에 유연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여권법 시행규칙 제2조의2 단서는 로마자로 표기하는 외국식 이름 또는 외국어와 음역이 일치할 경우는 그 외국식 이름 또는 외국어를 여권의 로마자 성명으로 표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애초에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먼저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의 경우 다시 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경우에 잘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6월에 태어난 아이라는 점을 기념하고자 ‘June’이라는 영어 이름을 먼저 짓고, 이것을 우리말 이름으로 ‘주은’이라고 지은 게 바로 그런 사례다. 이 사안에서도 외교부는 여권이름 기재를 불허했지만 행정심판위원회에서 그 결정을 바꾸었다. 그런데 이번 판결처럼 애초에 우리말로 ‘태’가 들어가는 이름을 짓고 이를 영문으로 ‘TA’로 기재하는 것은 위와 같은 유연한 규정이 적용되는 상황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이에 법원은 ‘로마자 표기법’을 기준으로 하는 것 자체가 법규적 효력이 없다면서 ‘원하는 이름표기를 가질 권리’에 더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름의 영문 표기 기준을 정하는 이유는 국가행정의 효율성과 여권의 대외 신뢰도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름 사용의 맥락이 점차 넓어지고 개인의 정체성과 자율성을 실현하는 방식이 다양해지는 지금의 시대에 영문 이름 짓기에 관해 지나친 엄격성만을 일관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보인다.
    원하는 영어이름을 사용할 권리
    by 안성훈
    2025.04.27 08:00:00
  • 도산절연(Bankruptcy Remoteness). 기업금융이나 부동산금융 구조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이는 특정 자산이 채무자의 도산 또는 회생절차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법적 구조를 설계하는 기법을 말한다. 흔히 부동산담보신탁, 자산유동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에서 활용된다. 최근 필자가 검토한 사안은 이 ‘도산절연’ 구조가 실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복합상영관을 운영하는 A사는 채무자의 점포 중 하나를 임차해 오랜 기간 영업해 왔다. 해당 부동산은 은행을 수탁자로 하여 담보신탁이 되어 있었고, A사는 임대차보증금의 반환을 담보하기 위해 그 전에 이미 임차권 등기와 근저당권 설정을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채무자가 회생절차에 돌입하며 A사의 보증금반환채권을 회생채권으로 분류해 회생채권자 목록에 기재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A사의 채권은 회생계획에 따라 감액될 수 있고, 채권자로서 집합적으로 변제를 받아야 할 위치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안의 핵심은, A사가 담보권을 설정한 대상이 ‘채무자 소유의 부동산’이 아닌 ‘신탁된 제3자 소유의 부동산’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산절연의 법리가 작동한다. 채무자회생법 제250조 제2항 제2호는 “채무자 외의 자가 회생채권자 또는 회생담보권자를 위하여 제공한 담보에 대하여는 회생계획이 효력을 미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채무자가 아닌 제3자가 소유한 재산에 설정된 담보권은 회생계획에 따라 변경되거나 실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리는 대법원 판례(대법원 2007. 4. 26. 선고 2005다38300 판결)에서도 명확히 확인된다. 해당 판례는 회생채권이 회생계획에 따라 실권되더라도, 제3취득자에 대한 담보권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곧, 회생절차라는 강력한 집단적 채무조정 장치조차도 제3자 소유의 신탁자산에 설정된 담보권까지는 침범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시한 것이다. 따라서 A사의 경우, 신탁된 부동산의 공매처분 등 사후 절차를 통해 담보권자로서 우선변제를 받을 수 있다. 회생계획에서 감액된 채권액과 무관하게, 신탁부동산의 환가금액 범위 내에서는 보증금을 회수할 수 있는 구조다. 이런 사안을 처음 접하는 채권자들이 ‘채권자 목록에 내 채권이 회생채권으로 등재되었다’는 점만 보고 불안해하거나, 이의신청 등의 절차적 대응을 고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본 도산절연 구조와 관련 법리에 따르면, 이러한 회생채권 분류 자체는 임차인의 실질적 권리 행사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의신청을 통해 채권 성격을 다툴 실익도 거의 없다. 회생절차는 집단적인 구조조정 수단이지만, 법적으로 보호되는 담보권의 벽은 쉽게 넘지 못한다. 도산절연 구조는 단순한 금융기법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도 권리를 방어하는 법적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담보권의 설정과 구조에 조금 더 정교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산절연 구조 속 채권자의 권리와 회생절차의 경계
    by 이응교
    2025.04.26 08:00:00
  • 우울증을 겪고 있는 어느 여성 환자의 꿈이다.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심한 눈보라가 몰아쳤습니다. 나는 급히 집으로 들어가 남편에게로 갔기 때문에 다행히 거기에서 도망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나는 남편이 신문 광고란에서 적당한 일자리를 찾아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다음은 심리학자인 아플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의 해석이다. 이 꿈은 남편과 화해하고 싶다는 감정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그녀는 안락한 가정생활을 구축하는데 실패한 남편의 무력감과 연약함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꾼 꿈의 의미는 ‘혼자서 난관에 부딫치기 보다는 남편의 곁에서 있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것이었다. 한편, 이 꿈에는 그녀가 혼자 있을 때의 위험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또한 그녀가 용기와 독립과 협동을 드러내고 시행하는 일에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임을 보여준다. 그녀는 이 꿈의 분석을 통해서 자신의 심리적 상태와 앞으로의 삶의 방향성을 정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 아들러는 말한다. “꿈의 목적은 꿈이 불러일으키는 감정 속에 내재해 있다. 개인이 창출하는 감정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생활양식(life style)와 일치한다.” 그의 이러한 심리적 관찰은 탁월한 통찰이라고 본다. 어떤 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 인지, 행동 등을 포함하는 생활양식을 재현한 것이며, 그 안에 자신의 감정이 꿈으로 투사 된 것이다. 꿈으로 드러난 내용은 과거 기억(memory)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에 감정이 이입되고 투사된 회상(recollection)이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꿈에는 자신의 무의식적이고 주관적인 감정이 반영되어있다. 참고로, 뇌과학의 발전으로 렘수면에서 꾸는 꿈은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강하게 활성화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들러는 1870년 비엔나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들러는 병약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의사가 되고자 결심했다. 아들러의 유년기 특징은 여러 형제자매 속에서 병약함과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투쟁과정이었다. 아들러는 초등학교 시절 공부를 못해서 담임교사가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구두수선공 수련을 받게 하라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교사의 조언을 일축하고 아들을 격려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의 이론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동기는 어린 시절에 최초로 경험한 부적절감,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월성 또는 완전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은 생물학적 조건과 환경적 제약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창조할 수 있다. 1902년부터 1911년까지 아들러는 프로이트와 교류하면서 정신분석 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견해 차이로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난 후 독자적인 이론체계인 개인심리학을 발전시켰다. 1930년대 독일의 나치세력이 오스트리아에서도 점차 강해지자 아들러는 고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였다. 1937년 5월 28일 아들러는 스코틀랜드 애버딘의 한 대학에서 강연을 앞두고 산책을 하던 중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여성은 왜 눈보라를 피해 남편에게 갔을까
    by 국경복
    2025.04.23 11:06:56
  • 대공황 당시를 연상시켰던 트럼프의 고율관세 집행이 90일간 유예되고 있지만 여전히 일관된 기대를 하기 힘들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부분의 국가에 대한 10%의 기본관세 부과를 고집하고 있고, 중국에게는 대공황 당시에도 경험하지 못한 145% 관세로 협상 압박을 하고 있다. 만약 트럼프의 높은 관세율이 실제로 집행된다면, 글로벌 경제는 신자유주의 흐름에 의해 형성된 자유무역시대와 작별해야 할 지도 모른다. 대공황이 있었던 100년 전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이다. 당시 스무트홀리(Smoot-Hawley Tariff Act)법에 의해서 미국은 캐나다, 유럽 등에서 수입되는 제품에 대해 최고 59%의 관세를 부과했다. 지금도 미국은 당시 유럽, 캐나다와 같은 경계대상 국가로 중국을 지목하고 당시보다 훨씬 더 높은 145% 관세 부과를 경고하고 있다 지난해 ECB 총재 라가르드는 고율 관세와 대공황 연계성을 경고한 바 있다. 최근 금융시장의 반응도 미국의 강한 경기침체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고율관세 부과 발표 이후 주식시장은 미국 나스닥 중심으로 급락했고, 미국의 달러 인덱스는 이례적으로 하락했다. 상위소득자에 의해 편중적으로 소유된 미국 증시(상위 10% 가계가 전체 주식 및 뮤추얼펀드 자산의 89% 소유) 보다도 트럼프가 더욱 관심을 갖는 채권시장에서 미국 10년물, 30년물 국채금리는 고율 관세가 불러올 물가상승 위험을 반영하여 오히려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이처럼 고율 관세가 심각한 경기침체의 촉매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이것은 일방적 해석일 수 있다. 1930년대 대공황은 고율관세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과에 가깝다. 당시 농업이든 제조업이든 산업내 심각하게 존재했던 공급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의 재정투입 등 적극적 노력이 필요했고, 그 효과가 반감되지 않도록 수입을 억제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오히려 1930년대의 대공황은 직전인 1920년대에 있었던 미국 경제의 대호황이 만든 결과이다. 1920년대 미국은 신기술에 의해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당시 에디슨이 발견한 전기가 산업과 가정에 보급되었다. 자동차는 포드의 대량생산 시스템이 공장에 적용되고, 자동차의 대량 생산에 의한 대중화 시대를 맞이했다. 라디오의 확산이 말하듯, 가전과 통신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신기술 도입과 경제의 팽창을 경험한 10년이었다. 대개 신기술의 도입과 확산은 옆으로 누운 S자 커브의 궤적을 따라간다. 신기술 도입 초기에는 기술의 확산이 천천히 이루어진다. 검증과 확신 단계를 거치면 신기술 제품이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지지부지하던 시장침투율이 크게 치솟는다. 일종의 특이점(Singularity)을 지나면 실생활 확산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미국 신기술은 1920년대 중반 특이점을 지나 후반에 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침투했다. 문제는 신기술이 생산성 향상을 촉발하면서 경제가 팽창하지만, 대중화 진행 이후에는 공급은 증가하는 반면 이를 뒷받침해 줄 수요가 부족해진다는 점이다. 주식시장도 생산성 향상과 기업수익 개선을 확인하고 점진적으로 상승하다가 기술에 대한 과잉 기대로 급상승하고 나면 급기야 버블이 터지고 만다. 버블이 터지고 나면 부족한 유효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 재정이 동원된다. 자국의 재정을 동원한 유효수요 창출이 대외요인에 의해 희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율관세가 필요해진다. 과거 경험을 지금의 상황에 대입해보면, 우려와 달리 트럼프의 고율관세가 대공황 발생 위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1920년대처럼 신기술에 의해 실물 팽창과정이 있고, 주식시장이 과잉 기대를 반영하여 버블을 만들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현재 신기술로 주목받는 분야는 기술적 발전을 거듭하며 대중에게 확산되고 있는 AI이다. AI 기술로 인해 급상승한 미국의 나스닥 지수를 주목함으로써, 현재 주식시장이 버블 상태인지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 AI가 특이점을 지나 대중화와 공급과잉 단계를 거치고 있는지, 주식시장 급락이 이를 반영한 결과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척도로 AI 공급과잉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겠지만 데이터센터 투자 동향이 하나의 가늠자가 될 수 있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AI 시대 도래를 예상하며 데이터센터 투자규모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왔다. 데이터센터 투자가 확대될수록, AI 작동에 필수적인 GPU를 공급하는 엔비디아 주가는 치솟았다. 하지만 최근에 마이크로소프트는 데이터센터 투자 계획을 조정하고 있고, 엔비디아 주가는 고점에서 25%가 물러나 있는 상태이다. 우려를 자극하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우려와 달리 AI의 확산이 특이점을 지나 팽창기를 지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딥시크 출범 이후 기존 AI 작동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발생하는 과도기적인 대응과정으로 본다. 딥시크 출현으로 AI 기술은 더욱 효율화될 것이고, 생활 속에서 생산성을 더욱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크다. 기존 AI방식이 인간의 뇌를 모방하는 형태의 매우 효율적인 방식으로 급격하게 전환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경제 대공황 발생 위험도 경계해야 하지만, AI 기술 변화의 과도기 속에서 어떻게 기술발전을 주도할 지가 더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은 시대가 요구하는 AI 기술 발전을 위해서 민관역량 강화와 AI생태계 주도권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또 전략적 준비를 서둘러야 할 때이다.
    AI 공급 과잉? 아직 논할 때 아니다  
    by 김세중
    2025.04.14 13:54:57
  • 433년 전 4월 13일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서막이 오른 날이다. 1592년 이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봉장으로 하는 왜군 17만여 명은 조선 침략 길에 올랐다. 규슈 남단 가라쓰(唐津)에서 출항한 왜군은 12시간 만에 부산진항에 상륙했다. 왜군은 다시 육로를 따라 한양까지 무인지경으로 내달았다. 무능한 선조는 2주 만에 안방을 내준 채 의주로 도주했고, 분노한 백성들은 도성을 휘저으며 곳곳에 불을 놓았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가 불탔고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수많은 문화유산은 잿더미가 됐다.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에 걸쳐 왜군이 출진했던 가라쓰에 다녀왔다. 임진왜란 직전 축조한 이곳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은 왜군이 출진에 앞서 호흡을 가다듬었던 곳이다. 지금은 텅 빈 성터만 있다.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였던 나고야 성터를 돌아보는 내내 눈부신 벚꽃 아래서 착잡했다. 후쿠오카를 빠져나와 규슈 북서부에 위치한 사가(佐賀) 현 가라쓰로 가는 길은 한적하다. 교통체증으로 번잡한 후쿠오카와 달리 해안도로는 여유롭다. 50km, 1시간여를 달려 가라쓰에 접어들면 무지개 솔밭으로 불리는 국가명승 ‘니지노 마쓰바라(虹の松原)’가 눈에 들어온다. 가라쓰 성에 오르자 지나온 솔밭과 바다를 낀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과거 가라쓰는 대륙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살려 조선, 중국과 교역을 통해 흥성했다. 지금은 여느 지방 소도시와 다를 바 없지만 433년 전 가라쓰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무라이들로 북적였다. 나고야 성 주변으로 130여 개에 달하는 진영이 섰다니 엄청난 전쟁특수를 짐작할 수 있다. 나고야 성터와 나고야 성 박물관은 불행한 과거를 돌아보는 한편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히젠’은 규슈 서부를 일컫는 옛 행정 명칭이다. 우리나라 호남, 영남, 호서와 같다. 나고야(名護屋) 성은 혼슈 중부에 위치한 나고야(名古屋) 성과는 발음만 같을 뿐 다른 성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는 조선 침략을 앞두고 이곳에 축성을 지시했다. 전국 통일 후 도요토미는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는데, 조선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도요토미가 궁벽한 가라쓰에 축성을 지시한 건, 조선과 최단 거리(140km)에다 배를 숨기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쾌속선을 이용하면 부산에서 가라쓰까지 2~3시간이면 충분하다. 왜군은 이곳에 진을 치고 조선 침략을 논했다. 당파로 갈린 조선 정부가 전쟁 가능성을 놓고 대립할 때 도요토미는 대륙 침략에 필요한 전쟁 수행을 마쳤던 것이다. 도요토미는 명나라 정벌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조선침략도 포함돼 있었다. 사무라이의 칼과 기치로 숲을 이뤘을 나고야 성은 이제 쓸쓸한 폐허다. 가라쓰에는 당시 10만여 명이 몰려 오사카에 이은 제2 도시였다. 50만 평, 둘레 6km에 달하는 방대한 성터를 돌다보면 세월이 덧없다는 걸 실감한다. 떠들썩한 함성은 간데없고 거친 바람만 웅성댄다. 왜군이 빠르게 한양을 접수하자 조선정부는 갈팡질팡했다. 시기와 질투에 눈먼 선조는 판단력마저 상실했다. 의병과 이순신에 힘입어 가까스로 나라를 보존했음에도 그는 이순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역사는 선조를 어리석고 비열한 군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무능한 왕을 꼽을 때마다 선조는 인조, 고종과 함께 거론된다. 당파 싸움에 매몰된 조선은 언제 무너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일본 정황을 살피고 돌아온 동인 김성일과 서인 황윤길은 전혀 다른 정세 판단을 내놓았다.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이 침입할 것”이라며 경계를 촉구한 반면 김성일은 “사려 깊지 못한 허풍”으로 일축했다. 도요토미에 대한 인물평 역시 “눈빛이 반짝반짝하며 담과 지략이 있다”와 “쥐새끼와 같아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된다”며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훗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당파싸움의 폐해를 경계했지만 진영싸움은 오늘도 여전하다. 나와 내 편만 옳다는 확증편향으로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막대한 사회갈등 비용은 성장 동력을 갉아먹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대주의는 심화됐다.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의해 조선은 다시 태어났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앞세우며 속국을 자처했다. 자신들의 무능으로 국토가 유린됐음에도 통렬한 반성 대신 중국을 떠받드는 것으로 합리화했다. 무능한 나라에 무능한 기득권층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400여 년 전 임진왜란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주춧돌과 성곽만 남은 나고야 성터에서 자문했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에 자신 없다. 12.3 계엄 이후 망가진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국민을 중심에 두는 정치가 절실하다. 다시 횃불을 든 분노한 시민들이 아른거린다.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 ‘나고야 성’
    by 임병식
    2025.04.14 13:33:44
  • 감사의견 미달은 상장폐지의 대표적 사유 중 하나다. 최근 5년(2020~2024년) 간의 통계를 보면 상장폐지 사유 중 감사의견 미달이 236건으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횡령·배임(71건), 불성실공시(27건)가 따르고 있다. 그동안 감사의견 미달과 관련된 상장폐지 절차는 다소 완화되어 운영돼 왔다. 감사의견 미달은 이의신청이 허용되는 형식적 상장폐지 사유로 분류되는데, 통상 이의신청 시 개선기간이 부여됐다. 또한, 개선기간이 도과한 이후에 추가적인 개선기간이 부여되거나 '속개' 제도를 통해 다다음 사업연도까지 개선기간이 사실상 연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운영 방식을 악용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자본잠식이 우려되는 기업이 즉각적인 상장폐지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감사의견 미달을 선택하는 경우다. 자본잠식은 즉시 상장폐지 사유이지만, 감사의견 미달의 경우 1년 정도의 개선기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금번에 상장폐지 제도 개선방안은 이러한 감사의견 미달에 대한 규제 강화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핵심적인 변화는 감사의견 미달이 2회 연속 발생할 경우 즉시 상장폐지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감사의견 미달 사유 발생 이후 다음 사업연도에도 감사의견 미달(사업보고서 미제출 포함)이 발생하는 경우, 이에 대한 이의신청이 불가하도록 하여 곧바로 상장폐지가 결정된다. 다만, 회생·워크아웃 기업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 추가 개선기간(1년)이 허용된다. 이는 ① 회생·워크아웃 계획이 최종 승인되었고, ② 계속기업 가정의 불확실성에 따른 감사의견 미달일 것(회계부정이나 감사증거 확보의 어려움 등은 제외), ③ 회생·워크아웃 종료 후 감사의견 변경이 가능하다는 감사인의 의견서가 제출된 경우에 한한다. 또한, 주목할 만한 변화는 감사의견 미달 '해소'를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사유로 추가한 것이다. 이는 코스닥 시장에는 이미 도입되어 있던 제도로, 2025년 2월 27일자 유가증권시장 상장규정 시행세칙 개정으로 코스피 시장에도 도입됐다. 즉, 감사의견 미달을 해소하더라도 즉각 매매거래를 재개하지 않고 해당 기업의 상장적격성을 종합적으로 한 번 더 심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 변화는 기업들에게 재무제표의 신뢰성과 회계 투명성 확보가 더욱 중요해졌음을 시사한다. 상장기업들은 감사의견 미달이 발생하지 않도록 내부회계관리제도를 강화하고, 외부감사인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하는 등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 만약 불가피하게 감사의견 미달이 발생한 경우라면, 신속하게 원인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의 조력을 받아 체계적인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감사의견 미달, 이제는 더 엄격해진다
    by 정성빈
    2025.04.12 11:00:00
  • 그린워싱이란 기업이 환경 친화적으로 보이기 위해 모호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장을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친환경(green)과 세탁(white washing)의 합성어인 그린워싱(greenwashing)은 1986년 환경운동가 제이 웨스터벨트가 처음 사용했다. 2000년대 이후 친환경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그린워싱이 급격히 확대되었는데, 2009년 환경 마케팅펌 테라초이스(Terra Choice)는 환경성을 주장한 상품의 98%에 그린워싱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글로벌 ESG 데이터 기업 렙리스크(RepRisk)도 지난 10년(2012-2022) 동안 그린워싱 사례가 유럽과 미주 지역 중심으로 꾸준히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그린워싱은 질적으로도 진화하고 있다. 2023년 발간된 <그린워싱 3.0> 보고서는 그린워싱의 발전 단계를 3단계 모델로 제시한다. 그린워싱 1.0은 기업이 소비자에게 상품의 친환경성을 일방향으로 광고한 단계다. 기업은 ‘무공해’ 등의 모호한 표현이나 녹색 포장재 등을 사용해 친환경 이미지를 홍보했다. 그린워싱 2.0은 기업이 소비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전략적 메시지를 내는 단계다. 기업은 NGO 등의 비판에 대응하고자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거나 환경 인증을 취득했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그린워싱이 더욱 정교해졌다. 그린워싱 3.0은 기업이 현재의 상품이나 서비스가 아닌 중장기적 환경 성과에 대한 ‘미래 세탁’(future washing)을 시도하는 단계다. 기업은 투자자들의 요구에 따라 ‘2050년 탄소중립’ 계획을 선언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 이행 계획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린워싱에 대한 규제도 함께 발전했다. 초기에는 기업이 상품 등을 표시·광고할 때 소비자를 오인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일반적인 소비자 보호 규제를 통해 그린워싱을 규율했다. 시장에서 그린워싱 기법이 정교해지면서, 환경성 주장이 포함된 표시·광고에 대해 명확성·실증성·전 과정성·완전성 등의 세부 원칙을 요구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이제 기업은 상품의 생애주기 전반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고려하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환경적 효과를 설명해야 한다. 나아가 ESG 시대가 도래하면서 소비자뿐만 아니라 투자자 등 여러 이해관계자에게 기업의 환경 성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는 규제들이 등장했다. 녹색 경제활동을 분류하고, 이에 유입되는 자금을 별도로 공시하게 함으로써 자본시장에 대한 그린워싱 감독도 강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선 자사 상품이나 브랜드와 관련된 환경성 주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지난해 대한상공회의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100대 기업 중 43%가 그린워싱 기준을 잘 모른다고 답했다. 기업은 대외에 공개되는 자료 중 어떠한 표현이 환경 관련 표시·광고에 해당하여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전과정성 원칙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공급망의 환경정보를 수집해야 하는데, 국내외 규제상 공급업체에 확인을 요청할 수 있는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명확히 구분한 뒤 환경성 주장을 개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환경경영 목표를 수립할 때에는 이사회에서 이행계획의 근거와 타당성을 객관적으로 검토한 후 승인하는 절차를 갖출 필요가 있다. 환경부가 발표한 ‘친환경 경영활동 표시·광고 가이드라인’에서도 환경경영 목표에는 기간별 또는 단계별 세부계획이 제시되어야 하며, 이행을 뒷받침할 인력과 자원 확보 방안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린워싱 규제가 강화될수록 기업이 환경 경영에서 후퇴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굳이 불명확한 선언이나 광고로 비판받을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미국 미시건대 라이언(Lyon) 교수는 기업이 반발을 우려해 환경성 주장 자체를 회피한다면 오히려 중요한 비즈니스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린워싱 규제가 개별 상품 차원을 넘어 경영 일반으로 확대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환경 성과와 시스템을 차분히 축적해온 기업은 오히려 시장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환경 정보에 관한 인프라가 보다 체계적으로 구축되고, 책임있는 마케팅 관행이 정착되어, 진정으로 환경 친화적인 기업이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그린워싱의 진화
    by 민창욱
    2025.04.07 15:54:00
  • 25. 게으른 출발자 간밤에 비가 왔는지 공기가 축축하다. 똥 마려운 강아지 모양 어제 종일 맴돌던 정자 옆은 눈길도 주지 않고, 아파트 정문 밖으로 나왔다. 도로변을 따라 걷다가, 개천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우산까지 챙겨 든 노인들이 몇 보였다.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부지런히 걷는 모습이었다. 신속함을 잃어버린 노년의 부지런한 걸음은 애잔하고 감동적이었다. 몸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저마다 다른 꿈틀거림으로 걸었다. 순간, 나는 껑충 한 발을 건너뛰었다. 발아래 뭔가 꿈틀했기에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분홍과 고동색이 뒤섞인 지렁이가 수분이 말라가는 시멘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밟지 않고 반사적으로 피한 것이 다행이었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결국 다행이지 않을 성싶었다. 아침 해가 점점 올라오는 중이었다. 시멘트 바닥은 점점 뜨거워질 것이다. 지렁이가 왔던 길로 도로 돌아가거나 건너편 흙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몸은 점점 말라붙고 말 것이다. 주변의 마른 나뭇가지를 찾아 지렁이를 흙 쪽으로 던져 주었다. 나는 지렁이처럼 아파트에서 꿈틀대다가 아침 산책을 나왔다. 새벽 5시가 훌쩍 넘었으니 밤을 홀딱 새운 셈이다. 정신은 멀쩡했다. 침대에 든다고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외아들에게 유일하게 남긴 유산이 책 한 권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아서만은 아니다. 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재산을 세상에 기부했다. 재산뿐만 아니라 당신의 신장과 각막 등 몸에서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다른 이에게 기부했다. 관 안에 들어간 아버지는 그러니까 만신창이가 된 시체였다. 입관할 때 본 아버지의 멀쩡한 모습은 교묘하게 보완 물로 꾸민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마지막 재산 기부는 비밀리에 이루어졌지만, 세상에 다 알려졌다. 생전의 익명 기부도 여기저기서 밝혀졌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위해 비밀리에 유산을 남겨 놓았다는 전언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이중적인 행위를 하실 분이 아니었다. 그럴 마음조차 먹지 못할 분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와 진욱을 통해서 은밀하게 유산에 관한 언급이 있었기에 막연하게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부동산이나 현금은 나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못내 궁금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하고 귀한 것을 남기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관으로 평생 사신 분이니 세계를 두루 다니시며 얻은 귀한 것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귀한 자료나 그림 그리고 아버지가 귀하게 여기신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밤새 하얀 가죽표지의 책 한 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새벽 산책을 나온 것이다. 아버지가 비밀리에 나에게 유산을 별도로 줄 분이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남기려고 한 것이 재물이 아니라 책 한 권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진욱이는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조가대의 여자를 통해 흰 가죽표지의 책 한 권을 나에게 전했다. 여자가 자신의 출간 책을 홍보하기 위해 장례식장에까지 들고 온 줄 알고, 나는 그 책을 입관실에서 슬그머니 놓아버렸다. 그런데 여자는 그것을 장례식장 식당까지 가져와서 다시 전해주었다. 나와 그 여자 사이에 어머니의 주선이 있었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유일한 유산을 전하신 것이다. 어, 나는 다시 발걸음을 멈춰섰다. 산책로에 지렁이가 여기저기 보였다. 시멘트 바닥의 물기는 거의 빠졌고 아침 햇살이 비치자, 말라가는 피부를 어쩌지 못해 힘없이 비틀거렸다. 풀숲으로 다시 던져 주는 것이 돕는 것인지, 반대로 진로를 방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지나치다가, 나는 혀를 찼다. 자전거 바퀴나 인간의 뒤꿈치가 무심코 눌러버린 지렁이의 머리가 납작하게 시멘트에 말라붙은 상태인데, 끔찍하게도 남은 몸쪽이 파충류답게 아직도 살아남아서 움직였다.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에 얻은 특이한 증상 중의 하나가 다시 나타났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지렁이들은 왜 안전한 땅속 거처를 포기하고 길을 떠났을까. 시멘트 산책로를 가로질러서 이쪽 흙에서 저쪽 대지로 건너가는 것이 그들의 최대 모험인 걸까. 인간과 함께 이 산책로를 끝없이 따라가는 것이 수도승 지렁이들의 선택인 것일까. 일부 지렁이들은 왜 일부러 길 위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일까. 프랑스에서 있을 때는 아침 조깅을 즐기곤 했는데, 프랑스의 잔디밭에는 남자 엄지손가락만한 달팽이들이 눈에 띄었다. 지중해 기후여서 야생 달팽이가 많이 돌아다녔다. 프랑스는 달팽이 요리가 유명한 나리이기도 했다. 어느 날 내가 조깅을 하다가 무심코 풀숲의 달팽이 집을 밟아 까뭉개버렸다. 그 곁에 같이 있던 달팽이가 짝을 잃은 것 같아 미안해서 데려와서 유리병 안에 한동안 키웠다. 재미있는 것은 달팽이에게 당근을 주면 분홍색 똥을 싸고, 오이를 주면 푸른 똥을 쌌다. 달팽이에 관한 정보를 찾다가 같은 파충류들에게 대한 정보들을 습득하게 되었다. 달팽이도 지렁이도 자웅동체였다. 자웅동체이지만 그들은 짝을 통해 알을 교환했다. 짝을 찾기 어려울 때 달팽이는 스스로 교배했다. 하지만 지렁이는 암수 동체여도 교배를 통해 알을 교환한다니, 어쩌면 생식을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생식 때문이 아니라면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을 것이다. 생명을 위해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경우가 무엇일까. 목숨을 걸고 목숨을 구해야 하는 도전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지렁이는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산책로의 중간지점에서, 나는 방향을 틀었다. 지렁이도 흙 속에 남아 있는 것들과 떠나는 것들이 있듯이, 인간도 두 종류가 있다. 쉽게 떠나는 인간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인간. 나는 여태 전자에 속했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필요한 절차를 몸이 이미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자동차로 갈 곳이 아니라면 비행기나 기차 예약을 번개처럼 빠르게 할 수 있었다. 옷가지와 여행에 필요한 기본 용품이 들어 있는 여행 가방을 끌고 나서기만 하면 되었다. 여행 목적에 맞는 준비 서류나 선물들만 추가하면 되니, 그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서류가 미비하면 비행기 안에서 하면 되었다. 필요한 선물은 집에 마련되어 있는 몇 개를 집어넣으면 되고, 그래도 부족하면 비행기 안에서 사고, 아니면 공항의 면세점 안에서 사면 된다. 그렇게 쉽게 떠나던 여행자가 이번에는 쉽게 떠나지 못하고 미적거린다. 여섯 시가 다가오자, 아침 산책자의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적거리는 사람을 나는 게으른 출발자라고 불렀다. 떠나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게으름을 피웠다. 특히 연인들이 그랬다. 결국은 헤어져야 하는 인연인 줄 알면서 질질 끌며 버티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게으른 이별은 고통만 더할 뿐이었다. 반면에 쉽게 떠나는 자들은 결단력 있는 이별을 선택했다. 그래야 새로운 출발에서 강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나는 게으른 출발자에 합류한 셈이다. 이전이라면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박차고 떠났을 것이다. 정자 옆에서 본 얼굴도 모르는 여인 때문만도 아니었다. 정말 여자가 그리우면 나를 위로하기 위해 만나길 원하는 여자들의 문자 메시지가 여러 통 와 있다. 그러므로 특정 사람에게 미련이 남아서도 아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내가 과녁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과녁을 잘못 알고 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프랑스 작가와의 대담 이전에 나는 삶의 목표가 분명했고, 그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나 선한 인간이라도 인간의 삶의 종착지가 죽음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어디로 출발해야 하는지 모르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정말 나의 과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렁이처럼 무턱대고 떠날 수 없어서 게으른 출발자가 된 것이다. 자칫 잘못 나갔다가는 시멘트 바닥에서 온몸으로 부대끼며 몸부림치다가 서서히 말라갈 것이다. 어이쿠, 나는 순간 발길을 멈추었다. 지렁이 한 마리가 온몸이 상처와 흙투성이로 범벅이 되어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소원은 내가 참 빛을 찾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소원이나 유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도 진리를 찾아 한 번은 떠나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참 빛을 찾아 떠나야 하지만, 그 빛의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참 빛은 하늘의 태양 빛도 아니다. 참 빛은 ‘길’이라고 하는데 내가 밟고 있는 시멘트나 흙 땅에 난 길도 아니다. 또한, 참 빛은 ‘생명’이라는데, 사람의 목숨도 아니다. 참 빛은 길이자 생명이라는데, 그 빛은 어디에 있고, 그 길은 어디에 있으며, 그 생명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렁이는 무엇을 찾아 떠났을까. 빛을 찾아 떠났다가 빛에 말라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길을 찾아 떠났다가 길 위에서 바짝 말라가고 있는 것일까. 생명을 찾아 떠났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게으른 출발자가 된 것은 지렁이 같은 결과를 예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종의 기원  <25회>
    by 김다은
    2025.04.07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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