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62
  • 잘 차려진 음식도 그릇이 부실하면 맛과 멋을 살릴 수 없다. 기업이나 정부가 공들여 만든 정책·시스템·매뉴얼은 훌륭한 요리 레시피나 다름없지만, 결국 이를 담아내고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다. 정책과 시스템은 내용이고, 사람은 그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릇이 기울어져 있거나 금이 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음식도 흘러내리기 마련이다. 조직이 높은 비용을 들여 완벽에 가까운 매뉴얼을 만들어도,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기 힘들고, 심지어 위기 상황까지 초래할 수 있다. 2018년과 2019년에 발생한 보잉 737 MAX 추락 사고는 시스템과 매뉴얼이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보잉은 기체의 기수를 자동으로 낮추도록 설계한 조정특성보강시스템(MCAS)을 도입해, 새로운 엔진 설계에 따른 비행 특성을 보완하려 했으나, 내부 보고 체계가 원활히 작동하지 않았고, 비용 절감에 매달린 나머지 조종사 교육 역시 최소화되었다. 결국 MCAS의 작동 방식과 문제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차례 추락 사고가 일어나 수백 명이 희생되고 말았다. 사고 원인 조사 보고서와 이후 드러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만약 보잉 내부에서 위험 신호가 제대로 공유되고 조종사들이 새로운 시스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받았더라면, 그토록 참혹한 결과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정책에서도 마찬가지다. 2003년 440만명 수준의 비정규직이 2007년 570만명까지 늘어나자 정치권은 불안정한 근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09년 2년 이상 초과근무시 정규직으로 전환을 강제하는 비정규직 입법에 나섰다.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지만 국회는 결국 이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2024년 비정규직 근로자수는 845만명을 넘어서면서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논란을 되짚어 보면,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에 있다는 의견이 많았고, 단순히 기간 기준으로만 입법하는 것은 한계가 크다는 점을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했었다. 그럼에도 당시 입법을 추진하던 그룹이 표결을 강행하면서 결과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길도 한층 좁아졌다. 이처럼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목표와 수단을 정확히 일치시키는 사람들의 지혜, 제도를 본래 취지에 맞게 운용하려는 사람들의 합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도 자체가 오히려 독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반면 준비된 사람들이 제도와 시스템을 잘 활용하면 어떤 결과를 보여줄 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경우도 있다. 2020년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각국 보건 당국은 감염병 대응 매뉴얼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를 제대로 실행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과학적 권고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앞서고, 현장에 있는 의료진이나 공무원들이 충분히 훈련받지 못한 상황에서 시스템이 아무리 정교해도 소용이 없었다. 반면 한국·일본·대만 등은 달랐다. 전염병 대응 시스템이라는 내용물을 잘 담아낼 만한 그릇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이들은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사태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잇따라 발생한 감염병들을 겪으며, 일련의 방역 지침과 시민들의 행동 요령을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보완해 왔다. 매뉴얼과 숙련된 현장인원은 전세계 치명율이 1%일 때 10분의 1 수준으로 사망률을 억제하여 국민들의 생명을 지켜냈다. 매뉴얼과 시스템이라는 내용물에, 사람이라는 그릇이 견고하게 맞물릴 때만이 훌륭한 결과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기업과 정부가 정책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제도·시스템·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려면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위험 신호를 누구든 눈치 보지 않고 공유하고 논의할 수 있어야 하고, 담당자들이 반복적인 시뮬레이션과 교육으로 실제 상황을 예측하고 이슈가 발생했을 때 즉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의 제도나 훌륭한 시스템이 마련되어도 올바르게 활용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반대로 아무리 유능한 인재가 있어도 체계적인 매뉴얼 없이 즉흥적으로만 대처한다면 지속가능한 성과는 요원해 진다.
    사람인가 시스템인가
    by 이보형
    2025.03.08 09:00:00
  •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은 업무의 일부를 다른 기업에 도급하고 있고, 필요에 따라 도급하는 기업의 사업장에 협력업체가 상주하며 도급받은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이처럼 협력업체(수급인)가 원청(도급인)의 사업장 내지는 원청이 지배·관리하는 장소에서 작업을 할 때가 안전보건관리의 측면에서는 가장 어렵다. 원청에게는 자신의 근로자가 아니고, 협력업체는 남의 사업장이다 보니 안전보건관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협력업체의 규모가 영세하여 안전보건관리 역량이 부족한 경우도 많다. 협력업체의 안전보건관리는 무엇이 해법일까. 첫째,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수급인 근로자가 도급인 사업장에서 작업할 때 도급인의 의무로 정한 순회점검, 안전보건 협의체, 합동점검, 안전보건교육 실시 확인 등만 실질적으로 이행하여도 반은 성공이다. 나아가 수급인 근로자에 대하여 직접 안전보건조치를 취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수급인이 안전보건조치를 취하였는지 실질적으로 점검할 수 있다면 바람직하다. 여기서의 키워드는 "실질적으로"다. 어떤 사업장에 가보면 순회점검을 실시하였다면서 점검표는 만들어놓았는데, 점검사항에는 전부 동그라미(양호)로 표시하고 개선사항에는 모두 "없음"으로 기재되어 있다. 정말 양호한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순회점검은 하나마나다. 실제 산업재해 예방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재해 발생 시에 순회점검을 실시한 것으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둘째, 협력업체의 위험성평가를 최대한 지원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다. ‘사업장 위험성평가에 관한 지침’에서는 도급 사업에서 도급인과 수급인이 각각 위험성평가를 실시하도록 정하고 있다. 즉, 수급인이 수행하는 작업이더라도 그 작업을 맡긴 도급인도 해당 작업에 관한 위험성평가를 실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만, 고용노동부가 2023년 5월 펴낸 '새로운 위험성평가 안내서'에 따르면, 사업장의 상황에 따라 도급인과 수급인이 함께 위험성평가를 실시하고 각자의 위험성평가 실시규정에 따라 위험성평가 결과를 관리한다면 각각 위험성평가를 실시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중요한 점은 협력업체에 위험성평가 하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끝이 아니라, 그 위험성평가 결과를 원청이 검토하여 유해·위험요인이 충분히 파악되었는지, 그 유해·위험요인에 대한 개선대책이 적절히 수립되었는지, 개선대책이 실제로 이행되었는지를 확인·점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협력업체의 위험성평가만 충실히 이루어져도 중대재해 발생의 위험을 또 절반 이상 줄일 수 있다고 본다.
     협력업체의 안전보건관리 무엇이 해법일까
    by 김동현
    2025.03.08 09:00:00
  • 최근 경제 전문가들은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을 넘어 다시 살아날 것인가에 관심이 높다. 19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달린 일본 경제는 1990년대 초반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해 이후 30년 동안 회복하지 못한 채 초장기의 경제침체를 겪고 있다. 최근 일본 주식시장이 회복되고 일부 기업들의 혁신경쟁력이 살아나면서 경제부활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과거 일본은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철강, 전자제품, 자동차와 같은 주요 산업에서 세계 시장을 주도할 만큼 강력한 혁신경쟁력을 나타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부터 일본경제는 급격히 침체되기 시작한다. 그 계기는 미국이 일본과의 무역 불균형을 개선하기 위해 엔화의 평가절상을 요구한 플라자 합의(1985년)라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급격한 엔고 상황이 일본 기업의 수출경쟁력 하락에 영향을 미치자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는 양적 완화정책을 펼쳤고 넘치는 돈이 몰린 부동산과 주식의 자산버블이 꺼지면서 일본경제가 침체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당시 일본과 함께 플라자 합의의 대상이었던 독일 경제가 2000년대 초반에 회복되었던 것과 달리 일본의 경제침체는 유독 길게 지속되고 있다. 일본 경제가 오랜 시간 침체된 원인으로는 노동생산성 부진, 관치금융의 후진성, 기업의 혁신부족과 같은 경제구조적 문제에서부터 고령화와 저출산 등 사회구조적인 문제들까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 중에서 혁신이 성장의 원천인 점을 고려할 때 일본혁신시스템의 경쟁력 하락이 중요한 원인일 수 있다. 1980년대 영국의 혁신경제학자 프리만(Christopher Freeman)은 서유럽을 능가하는 일본 경제의 성공 원인으로 일본의 국가혁신시스템 경쟁력에 주목했다. 특히 일본 통상산업성(MITI)이 강력한 산업정책을 통해 전략산업을 발굴하고 해당 기업들의 기술개발을 지원하는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강조한다. 이러한 일본의 국가적 협력체계는 국가혁신시스템이라는 새로운 개념 등장의 토대가 될 만큼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혁신환경이 변화하면서 과거 일본혁신시스템이 가진 특징과 장점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단점으로 나타난다. OECD(2006)의 일본혁신시스템에 대한 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대 초까지 일본기업의 기술혁신은 다른 나라의 제품과 공정을 모방하는 공정혁신과 점진적 제품혁신 중심으로 큰 성과를 이루었으며 이런 혁신은 기업 내부에 한정된 폐쇄적 혁신활동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세계화에 따른 개방형 네트워크 지식 증가에 폐쇄적인 일본 기업들이 대응하지 못했다. 일본은 혁신시스템의 복잡성이 커지면서 정부의 정책개입도 효과적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의 혁신시스템은 연구개발 투자가 높지만 성과 창출이 낮았다. 여기에는 산학연 협력의 경직성과 시장의 높은 규제, 서비스 부문의 낮은 생산성 등이 연계된다. 정부정책은 과학과 기술에 집중되고 교육, 제품과 노동시장, 경쟁정책과 연결이 약해 혁신을 강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혁신시스템을 지배해 온 사회문화적 관성은 기본 다지기에 충실하지만 변화 대응이 느리고 위험 회피적이라는 특징이다. 여기에 경직적이고 관료화된 조직문화가 기업까지 퍼져있다. 이러한 속성은 소재부품처럼 오랜 시간과 장인정신이 필요한 분야 발전에는 유리하나 파괴적이고 빠른 혁신속도를 가진 기술 분야에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일본이 IT기술 수용에 취한 소극적인 태도와 디지털 전환 지체는 기업경쟁력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혁신 기반을 약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20여년에 걸쳐 과학기술 중심에서 혁신까지 확대하는 정책전환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그러나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개편 수준에 머물러 실질적인 혁신시스템 변화를 창출하지 못하였다. 국가혁신시스템을 규정하는 구조적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과감한 정책혁신과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선도형 혁신으로 시스템 전환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 정부의 전략적 혁신 역량과 리더십이 부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일본 정부는 혁신정책에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뒤늦게 디지털사회 대전환을 추진하고 경제안보전략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 부활에 적극 나서고 있다. 정부가 혁신리더십을 발휘해 새로운 민관 협력관계를 도모하는 모습이다. 아직 그 성과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혁신성과 창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는 이미 저성장의 길에 들어섰다. 우려스럽게도 고령화, 인구감소 등 사회문제뿐만 아니라 혁신 규제, 투자 대비 낮은 혁신성과 등 혁신시스템의 문제들까지 일본과 유사하다. 구조화된 침체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관성을 깨는 실질적이고 과감한 혁신이 필요하다. 기존 혁신시스템의 한계를 넘는 획기적인 제도혁신과 시스템 전환 창출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일본의 뒤늦은 혁신, 과연 성공할 것인가
    by 이민형
    2025.03.05 13:48:10
  • 22. 결핍의 정자 내 아파트 단지 앞에는 육각형의 나무 정자(亭子)가 있다. 옆 동과 중간지점이어서 사선으로 눈길이 가는 곳이다. 아침부터 창문을 열어놓고 자꾸 그곳을 쳐다보았다. 급기야 시선이 그곳에 머물러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자 옆에는 벤치들도 드문드문 놓여 있다. 새벽이건 밤이건 사람들이 쉬는 곳은 주로 벤치쪽이었다. 벤치에서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음악을 듣거나 했다. 벤치에는 혼자 앉아 있어도 자연스럽지만, 정자에는 혼자 앉아 있기에 쑥스러운 공간 같았다. 옛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담소하던 공동의 공간이어서 그럴 것이다. 노인들도 제법 있었지만, 서로 대화 나눌 만큼 친분이 없는지 정자에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정자는 그저 풍경에 그쳤다. 그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정자에 내가 왜 끌림을 느꼈을까. 정확하게는, 정자가 아니라 정자 곁의 한 모퉁이 빈터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 빈터는 …… 그 여자가 … 서 있었던 곳이다! 쓰레기 수거 날이었으니, 2주 전 수요일이었다. 옆 동 앞에 빈 종이상자들과 신문지 등 종이무더기가 산을 이루며 쌓이고, 그 곁으로 플라스틱류나 비닐류로 채워진 거대한 포대기가 작은 섬들처럼 놓여 있던 날이었다. 그 전날인 화요일부터 시작된 분리수거는 운반 트럭이 오는 수요일 아침까지 이어졌다. 나는 내 아파트 안에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 7시 40분경에 대형 크레인이 들어섰다. 트럭이 멈추자 뒤쪽에서 무시무시한 철제집게가 땅으로 내려왔다. 순간 화들짝 놀라서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었다. 강력한 철제집게가 나무 정자 옆에 서 있는 한 여자의 머리를 쳤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 작은 비명을 질렀는데 ……, 여자는 아무 탈이 없었다. 내 시선의 위치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대형 크레인은 무자비하게 종이상자들과 종이 쓰레기들을 움켜쥐고 마치 외계 비행선으로 옮기는 것처럼 하늘로 끌고 올라갔다. 여자의 시선이 집게발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서 고개가 뒤로 젖혀졌고, 나는 쭉 휘어지고 뻗은 여자의 라인을 보려고 창밖의 몸이 아래서 더 내려갔었다. 짧은 반바지에 푸른 티셔츠의 여자! 나는 그곳에 서 있던 여자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젊은 여자가 짧은 반바지를 입은 풍경은 신선했다. 프랑스에서 조깅하러 나온 여자의 모습과 유사했다. 챙이 긴 모자를 쓴 것으로 보아 진작 운동을 하러 나온 것인지도 몰랐다. 모자 때문에 얼굴은 전혀 알 수 없었는데, 모자를 벗어도 모르는 여자였을 것이다. 그녀의 스타일로만 봐도 이전에 보았다면 기억했을 것이다. 하늘로 끌려 올려지는 쓰레기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며 몸이 뒤로 휘는 모습이 눈을 휘감았었다. 다들 바쁜 아침에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여자가 있구나 싶어서 여운이 남았었다. 그런데,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이 안개처럼 사라져 가버린 지금, 안개 뒤의 나타난 선명한 물체처럼 그 여자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은연중에 나는 본능적으로 여자에게 끌리는 남자로 되돌아온 것이다. 정자의 모퉁이 빈터에 서 있던 여자의 실루엣이 너무나 생생해서 착각이 일 정도였다. 보이지 않지만 보였다. 보였지만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쓰레기 수거 날도 아니고, 여자가 그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쓰레기 수거 날이라도 그날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녀를 생각하자, 몸 안의 수컷 정서가 춤을 추듯 흔들렸다. 한 마디로, 여자가 그립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애도해야 하는 시기에, 인간의 육체적 메커니즘은 이렇게 터무니가 없다. 부도덕하게 느껴져서 심란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파티에서 만난 국내외 커리어우먼, 영화 레드카펫을 걸었던 아름답고 화려한 배우들, 외교계나 예술계의 세련되고 심지어 특이한 여자들을 무수히 수첩에 적어두고서도, 세상의 쓰레기에 매료되어 눈을 떼지 못하는 한 여자에게 빠진 나의 취향이 당황스러운 것이다. 세상에서 추락하니 여성에 관한 취향도 저절로 바뀐 것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녀가 어떤 여자이건 간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찾아온 감정이었다. 문제는 미치도록 보고 싶은 것이다. 갑자기 몸 안으로 도파민이 폭발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닥뜨렸던 상황에서 강렬한 아드레날린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면, 당연한 수순처럼 도파민이 이어서 폭발했다. 새로운 동기부여나 목표물을 찾아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나오는 몸의 신경전달 물질이었다. 불안과 좌절에 침체 되었던 인간이 다시 희망을 찾으려는 본능 때문에 솟구치는 도파민! 그런데 그것이 여자 쪽으로 흘렀다. 세상의 명예나 돈 그리고 물질에서 이미 가치를 상실한 인간이 다시 동일한 분야에서 동기나 목표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라도, 세상의 멋진 여자가 아니라 전혀 모르는, 몰라도 되는 미지의 여자를 새로운 동기부여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이런 분석은 불필요한 것이다. 몸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욕정이 다시 돌아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여전히 기억의 저장고에 남아 있는 여자 S. 육각 정자 모퉁이의 여자가 S와 뭔가 공통점이 있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눠보지도 않았는데, 처음 본 순간부터 광기에 빠져버리는 징후가 비슷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운명의 상대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첫눈에 반하는, 소위 운명의 상대라고 빠져드는 남녀관계의 위험성을 이미 S를 통해 체험했다. 그 위험한 운명이 다시 시작되었다면, 저 정자의 모퉁이에서였을 것이다. S와의 광기 어린 경험이 끝나고 나는 여자에게 관심을 잃었다. 그런 강렬한 감정과 몸정을 대신할 여자가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자에게 안정감을 주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성향을 갖지 못했다. 여자들이 원하는 충분한 시간과 다정함과 배려를 주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아름답지만 쉬크하게 자신에게 집중하는 여자와 연인처럼 지내다가 스스로 떠나가면 끝을 맺곤 했다. 그래서 끊어진 관계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워서, 다시 연락하면 다시 만나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지금, 나는 쓰레기에 반한 여자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지금 느끼는 정욕은 그래서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결핍에 가까웠다. 내가 바람둥이여서가 아니다. 나는 짧은 시간에 물질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고, 생애 처음으로 최고의 결핍 상태이다. 모든 것이 충족되던 과거의 시간은 사라졌고, 충족했던 시간 속에 있던 여자들도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반면에 세상의 보석이나 명품 가방이 아니라 세상의 쓰레기를 바라보며 서 있던 여자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세상의 쓰임새를 다하고 버려지던 쓰레기에 시선을 맞추고 있던 여자! 어쩌면 나도 세상의 쓰레기에 시선을 맞추고 매료된 채 살아온 것 같았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서 나의 페르소나를 보았다. 그녀가 집게발의 철퇴를 맞는 듯한 순간에, 창밖으로 내밀었던 내 몸에 어떤 에너지가 강렬하게 휘감았었다. 여자를 끊임없이 더듬고 있는 것은, 내가 나를 찾고 싶어서일 것이다.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는, 내가 나와 다시 한 몸이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결핍의 정자는 보통의 성욕보다 강했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온 후 아들의 온몸은 생명을 갈구했고, 가장 쉽게 여자를 탐하고 싶었다. 뱀과 새 사이의 유혹의 계략이 이런 것이었다. 뱀과 새의 실험에서 나는 새였다. 나는 케이지 안에서 혼자 자유롭게 날고 있었는데, 이어서 뱀이 내 케이지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고 밑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자 새는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나는 그 여자가 궁금해서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고 싶다. 아니 가까워지고 싶다. 나는 꿈틀거리는 뱀의 관능적인 몸을 접촉하고 싶다. 만지면 매우 매끄럽고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낮은 가지로 점점 내려가서 여자 앞까지 가고 싶다. 더 다가가고 싶다. 그리고 그 여자의 쩍 벌린 입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정말이지, 삼켜지고 싶다!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종의 기원  <22회>
    by 김다은
    2025.03.04 09:00:00
  • 트럼프 취임 이후 각종 정책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무기화된 미국의 관세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오로지 미국 국익만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뿐이다. 전통적 우방이나 동맹도 예외는 아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미국의 관세 공격에 무방비 상태다. 특히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그 타격이 더욱 크다. 한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 경제는 소비와 투자 등 구조적 내수 부진 속에서도 수출을 유일한 성장 엔진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미국의 관세 공격이 본격화되면 수출 부진이 불가피하고, 한국 경제 성장률이 단숨에 1%대 초반으로 떨어질 만큼 강력한 역풍을 몰고 올 것이다. 한국은행이 환율 걱정을 뒤로하고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하는 것도 이러한 경제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대응 중 하나다. 당연히,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통행식 관세정책 강행에 부분적으로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제적 이익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조치일 뿐만 아니라,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인해 글로벌 경제의 지속 성장에도 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유무역의 보편적 원칙을 거스르는 이러한 정책변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자유무역을 신봉해왔다. 그렇게 배워왔고, 이는 한국인의 경제적 사고방식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수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자유무역 개념이 더욱 강하게 뿌리내렸다. 자유로운 교역이 국가 간 후생을 증가시킨다는 이론적 기반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고, 마치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반화된 경제 작동원칙이 하루 아침에 부정당하는 데 대한 심리적 저항과 불안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두고, 중국이 이미 양명학으로 대체했음에도 조선은 뒤늦게까지 당시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론인 성리학에 매달렸던 역사적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자유무역 이론을 전세계에 수출했던 미국이 이제는 이를 거둬들이고 새로운 실리를 취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역설이기도 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대외경제 변화 속에서 한국의 대응 전략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현재 금융시장에는 글로벌 자금이동을 직접적으로 제한하는 토빈세(Tobin tax) 같은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출 중심의 실물 경제가 도전에 직면한 지금, 금융자본의 해외진출 전략을 구조적으로 재정비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축적된 금융자본을 활용한 해외자산 구축이 한국경제의 미래를 대비하는 핵심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의 개인투자자들은 ‘서학개미’로 불리며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과거 일본의 ‘와다나베’ 부인처럼 해외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으며, 최근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국가간 이중과세 방지 세제 개편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도 이러한 움직임과 맞물려 있다.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성장 가능성이 높은 해외시장과 기업에 대한 투자는 개인 차원에서도 불가피한 선택이 되고 있다. 개인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고령화가 심화되면서 연금과 보험 중심의 장기 자금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국내에서 이를 소화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고 있다. 기관 투자자의 해외 자산 투자 수요 역시 필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고령화 시대를 먼저 경험한 일본의 경우를 보면 ‘와다나베 부인’과 같은 개인투자자의 해외투자뿐만 아니라 기관 중심의 글로벌 인프라자산 투자 확대도 전략적으로 성공한 사례로 평가된다. 이를 한국에 적용한다면, 한국의 중소중견 및 대기업이 ESG 기반 인프라 수출을 확대하는 플랫폼을 정부가 마련하고 민간금융기관의 장기자금이 후속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적 지원이 요구된다. 환경부 및 국토부 등 정부 부처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있는 이러한 해외투자 민관협력 생태계를 더욱 강화하고 확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에 맞춰 미국의 지속가능 인프라 구축에 한국의 장기 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 한국의 고령화 자금의 효율적인 운용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예봉을 완화시키는 전략적 수단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즉, 미국과의 협력 강화와 한국 금융 자산의 글로벌 확장을 동시에 도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가 심화되는 환경에서 수출중심의 성장전략을 보완할 새로운 해법으로서, 민관협력 기반에서 금융자본이 지속 가능한 인프라 구축을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확장 전략을 적극 추진한다면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을 장기적으로 보강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의 예봉 꺾을 민관협력 인프라 금융수출 전략   
    by 김세중
    2025.03.04 08:30:00
  • 유로지역이 재정위기로 혼란스러웠던 2011년부터 3년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근무했었다. 때가 때인지라 역내 국가의 대표자들이 회의 테이블에 모인다는 뉴스를 자주 접했다. 유로(Euro)라는 같은 화폐만 사용했을 뿐 경제적으로 크게 다른 남북의 국가들 간에 제대로 협상이 이루어질까 싶었다. 그러나 전통적 민주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공동체 목표에 집중하고 고도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는 모습이 꽤 기억에 남는다. 유럽이 작금 처한 여건은 유럽재정위기 당시에 못지않아 보인다. 세계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에 트럼프가 재등장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후유증은 유럽을 뒤흔들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가치관이 충돌하면서 정치 세력 간 분열이 조장되고 기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중심의 안보질서도 흔들린다. 독일의 조기총선 결과는 유럽 전체의 정치적 지형의 불확실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이런 위기 앞에서 과연 유럽은 경제 회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까. 지난 1월 다보스포럼에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지금 유럽은 위기를 통감하며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유럽통합의 아버지 장 모네는 불가능해 보이던 유럽통합을 강조하면서 “유럽은 위기를 통해 건설될 것이요, 필요하면 변화를 받아들이고 위기가 닥치면 필요를 인식할 수밖에”라고 했다. 이들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사실 유럽은 이미 변화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2024년 4월과 9월에 나온 두 개의 보고서는 그 시작을 알리는 경종이었다. 엔리코 레타 전 이탈리아 총리의 ‘하나의 시장 그 이상(Much more than a market)’과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유럽 경쟁력의 미래(The future of European competitiveness)’. 두 현인(賢人)의 보고서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EU를 한층 심화된 단일시장으로 업그레이드하여 생산성 제고를 통해 유럽의 경쟁력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시큰둥한 초기 반응이 없을 수 없었지만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EU 집행위가 이를 중장기 전략으로 완성시켰고 올해 들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실행 단계로 옮기고 있다. 위기의 급박함이 만들어낸 원동력이다. 트럼프의 관세를 앞세운 공격이 더 거세지고 불확실성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EU는 단일 시장의 이점을 살려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EU 27개 국가들의 총 수출액 중에서 역내 국가에 대한 수출 비중은 62%에 달하는 반면 대미 수출규모는 8%에도 못 미치기 때문이다. 대미수출에서 입은 타격을 충분히 다른 쪽 수출 증대로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로지역의 통화 및 재정 정책은 미국보다 완화적인 스탠스를 펼치기에 훨씬 유리하다. 미국보다 안정적인 인플레이션 상황은 ECB의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기대하게 한다. 그리고 미국 관세 영향이 큰 개별 국가들은 재정여력이 양호하여 경기를 뒷받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대미 수출비중이 27%로 가장 높지만 GDP 대비 정부부채 비중은 43%로 매우 낮다. 심지어 정부부채 비중이 140%가 넘는 이태리의 경우도 EU차원에서 경제회복기금(NGEU)을 대규모로 할당받을 수 있기 때문에 공공지출 여력이 나쁘지 않다. 또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와 인공지능(AI) 투자 측면에서도 유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U는 전 세계 ESG 정책을 주도하고 기업들의 착실한 준비를 장려해 왔다는 점에서 트럼프의 친환경 에너지정책 전환 포기에 따른 반사이익을 얻기에 충분하다. 또한 그동안 미국과 중국에 비해 뒤처져 있던 테크 관련 혁신에 있어서도 지난번 파리 ‘AI행동 정상회의(AI Action Sumit)’를 계기로 기술 경쟁력 강화와 투자유치 확대에 본격 나섰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아무튼 유럽에게는 쓸 수 있는 카드가 없지 않아 보인다. 다만 가시적 효과가 나오기에 시간이 꽤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리 금융변수들에 선반영시킬 것이다. 눈앞의 단기 성과에 매몰되지 않고 위기를 진단하고 이를 기회로 중장기 과제를 풀어나가려는 유럽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부러운 것은 지금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상황 때문일까.
    위기의 유럽, 변화의 유럽
    by 양석준
    2025.03.01 08:00:00
  • 내부 신고 시스템은 준법·윤리경영의 필수 요소 중 하나이다. 회사의 내부 신고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운영된다면 임직원 등의 위법 행위를 조기에 식별하여 예방할 수 있다. EU는 2019년 ‘내부 신고자 보호지침’(Whistle blowing Directive, 이하 ‘WBD’)을 채택하여 50명 이상의 임직원을 둔 기업은 의무적으로 내부 신고 채널을 설치하도록 했는데, WBD는 전문(前文)에서 “관련 정보가 문제의 근원지에서 조사 및 구제권한자에게 신속히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업무와 관련된 부정행위는 업무 관계자가 가장 잘 파악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사내 절차를 통해 신속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상당수 임직원들은 보복에 대한 우려 때문에 회사의 내부 신고 채널에 제보하기를 주저한다. 그래서 내부 신고 시스템은 기밀성 또는 익명성을 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밀성(confidentiality)은 신고자의 신원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다. EUWBD는 신고자의 신원이 사건 접수 및 조사 관계자에게만 제한적으로 공유되어야 하고, 신고자의 동의 없이 그의 신원을 직·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정보를 공개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실무적으로는 신고 접수, 상담, 조사 등에 관여하는 모든 관계자가 비밀유지서약서를 작성하도록 하고, 비밀유지 위반 시 효과에 대해 반복적으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 실제 국내 법원은 내부 신고자의 신원을 누설한 회사의 직책자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부과하기도 했다. 익명성(anonymity)의 보장은 신고자의 신원을 보호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회사가 최소한 1개 이상의 내부 신고 채널을 익명으로 운영할 것을 권고한다. 물론 익명 신고는 신뢰성이 떨어지거나 후속 조사가 어렵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다만 글로벌 기관(Navex Global)의 2020-2023년 통계에 따르면 익명 신고의 신뢰도는 약 33%로서 전체 내부 신고의 신뢰도 약 42%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익명신고서 제출 후 상담 또는 조사가 진행되는 비율은 약 23%로 밝혀졌는데, 만약 익명신고자와 추가적인 정보 검토가 가능한 전산시스템이 구축된다면 익명신고의 신뢰도가 더욱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회사는 웹기반의 익명신고 채널을 구축하거나 제3자에게 운영을 위탁하여 신고가 접수된 이후에도 익명신고자와 사실관계 확인을 위한 소통을 이어갈 필요가 있다. 내부 신고의 기밀성과 익명성을 보장하더라도 여전히 신고자 등에 대한 불이익 조치나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회사는 보복 금지 정책을 엄격히 수립하고 필요한 보호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EUWBD는 내부 신고자가 신고 당시 위반 행위 정보가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었을 경우 보호 조치를 제공하는데, 보호조치 대상자에게는 해고, 감봉, 계약 갱신 거절, 업무 또는 근무시간 조정, 부당한 성과 평가, 괴롭힘 또는 차별, 소셜미디어를 통한 평판 훼손 등 일체의 불이익 조치가 금지된다. 내부 신고자가 소송에서 불이익을 입었다고 주장하면 이를 회사의 보복행위로 추정하되 그러한 불이익이 내부 신고로 인한 보복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회사가 증명하도록 입증책임을 전환했다. 회사는 내규에 보복행위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보복행위의 가해자뿐만 아니라 내부 신고를 방해하거나 신원을 누설한 사람 등에 대한 제재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 그 밖에 내부 신고 시스템을 활성화하려면 신고자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조사 절차를 공정하게 운영해야 한다. 신고자는 제보 후 후속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자신의 신원이 보호되고 있는지, 상급자가 조사 절차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을지 염려한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는 가해자와 같은 근무 공간에 머무는 것이 고통스러워 신고 후 매일 회사의 응답을 기다리기도 한다. 미국 법무부의 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 평가지침(ECCP)은 회사가 내부 신고 조사의 신속한 대응을 위해 타임라인을 설정하는지, 조사가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진행되는지 등을 내부 신고 시스템의 효과성 평가 기준으로 제시한다. EU WBD도 회사가 일정 기간 내에 신고자에게 사건 접수 통지를 하고 후속조치 경과 등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 회사는 내부 신고 및 조사 절차의 단계별 타임라인을 공개해 신고자에게 예측가능성을 제공하고 각 단계마다 피드백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조사 및 징계 절차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안도 함께 마련한다면 회사의 내부 신고 시스템이 임직원과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부신고와 윤리경영
    by 민창욱
    2025.03.01 08:00:00
  • 프레임의 시대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과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뉴스가 소비되는 환경은 프레임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게 된다. 정부나 정치권이 이슈를 주도하려면 한 방에 꽂히는 메시지가 필수 요소처럼 여겨진다. 프레임은 복잡한 현안을 쉽게 전달해 대중적 인지와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정책 과정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으로 유명한 프레임 전문가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프레임을 ‘사고 체계를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로 정의하면서 특정 이슈가 강력한 프레임 속에 자리 잡으면, 이를 부정하려 할수록 그 프레임이 더욱 강화되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결국 프레임에 갇힌 대중이나 기업은 대안적 관점이나 다양한 가능성을 배제하고 사안을 바라볼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곧 실질적인 ‘정책 합의’보다 ‘찬반 양극화’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다. 단편적인 프레임이 야기하는 부작용은 다양하다. 첫째, 본질 왜곡이다. 프레임을 통해 이슈를 단순화하면 구조적 원인이나 다양한 이해관계가 생략되기 쉽다. 예컨대 코로나19 초기, 방역 실패의 책임을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돌리는 프레임이 확산되면서, 방역체계 자체의 한계나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하는 논의가 뒷전으로 밀려났다. 대중의 감정적 반응만 남았을 때, 정작 필요한 방역 대책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둘째, 프레임 경쟁이 조장하는 사회적 갈등이다. 기후변화 정책을 두고 ‘탄소 중립은 불가피하다’와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는 식의 극단적 구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하나의 프레임에 반대 측이 정반대 프레임으로 대응할수록, 정책 전반은 정파적 대립으로 흐르고 대중은 극단화된다. 언론과 소셜 미디어가 이 대립을 부추길수록 건설적인 논의는 점차 사라진다. 셋째, 정책 일관성과 신뢰의 훼손도 큰 문제다. 정치권이 단기적 이익을 노려 프레임을 수시로 바꾸면, 대중은 ‘정책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초기에는 ‘국민 모두를 위한 필수 안전망’이라던 복지 정책이 재정 문제가 대두되자 ‘과도한 국가 개입’이라는 프레임으로 전환된다면, 신뢰는 손상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지나친 정치화로 인한 합의 어려움이 있다. 정책 논의가 본래의 문제 해결 목적에서 벗어나 정당 간 포지션 싸움으로 치닫는 경우, 건설적 토론과 합의 도출은 힘들어진다. 공공 의료 개혁을 ‘사회주의적 의료 시스템’과 ‘시장 자유 침해’라는 이념 논쟁으로만 몰아가면 의료 인프라 개선과 같은 실질적 고민은 뒷전이 되기 쉽다. 이처럼 단편적인 프레임이 초래하는 부작용이 적지 않은 만큼, 이제는 아젠다 세팅을 통해 다층적 논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하나의 정책 과제를 ‘경제·사회·환경·제도’ 등 여러 층위로 나누어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이슈 트리(issue tree) 방식을 활용하면, 극단적 찬반 구도를 벗어나 합리적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업 친화'와 '노동자 보호’ 같은 이분법적인 노동정책을 ‘고용 안정성’ ‘노동시장의 유연성’ ‘재정의 지속 가능성’ ‘산업 구조 변화’ 등 세부 이슈를 체계적으로 살펴보는 식이다. 유연한 프레임 설정도 중요하다. ‘사회적 안전망 확충’처럼 단정적인 표현 대신 ‘미래세대를 위한 지속가능한 복지 개혁’이라는 포괄적·개방적 프레임을 제시하면 협상의 여지가 커진다. 여기에 정책 내러티브(Policy Narrative)를 적극 활용해 ‘문제 정의-해결책-기대 효과’의 구조를 갖춘 이야기로 풀어내면 대중이 문제의 맥락과 해결책, 그리고 그 영향까지 연쇄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다. 실행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다층적 협상 구조를 설계해나가는 것이다. 각 단계별로 합의 가능한 부분을 도출해 나가는 점진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사회, 전문가, 기업, 미디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갈등 조정과 중재를 담당할 수 있는 기제가 마련되어야 한다. 결국, 프레임은 한순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도구일지언정, 정책이 교착 상태에 빠지거나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는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기에 ‘프레임 전쟁’이 아니라 ‘아젠다 세팅을 통한 다층적 논의’가 정책실행을 위해 필수적인 프로세스로 자리잡아야 한다. 메시지와 이야기는 늘 강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정책이 실현되려면 프레임을 뛰어넘어 사회적 아젠다를 정책화하는 정교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이 없으면 프레임이 주는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만이 남아서 지속가능하고 예측가능한 정책을 만드는 걸 방해만 할 것이다. 결국 좋은 정책은 좋은 프레임에서가 아니라,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통해 탄생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좋은 ‘프레임'이 좋은 정책을 만드는가
    by 이보형
    2025.02.26 13:41:39
  •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세상을 떠나기 약 두 달 전에 꾼 꿈이다. ‘꿈에 그는 낯선 곳에서 볼링겐(Bollingen)에 있는 ‘그의’ 성탑으로 다가갔다. 그 성탑은 완전히 금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손에 열쇠를 쥐고 있었는데, 어떤 목소리가 ‘탑’이 완성되어 그가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완전한 고독(주위에는 사람이 없었다)과 그 장소의 절대적인 고요함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는 바닷가를 보았다. 이미 담비 한 마리가 새끼에게 물에서 헤엄을 어떻게 치는지 가르치고 있었는데, 새끼는 아직 혼자서는 헤엄을 칠 수 없었다.’ 이 꿈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볼링겐이라는 장소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 볼링겐은 스위스 취리히의 루체른(Lucerne)에 있는 호숫가 한 마을에 있는 융의 별장이다. 융에게 이 자그마한 성탑은 이미 지상의 형태로 있는 더 큰 내면의 인간, 또는 자기의 그릇이었다. 이 성탑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처음부터 성탑은 내게 성숙의 장소가 되었다. 어머니의 품이거나 어머니의 모습이며, 그 속에서 나는 다시 존재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떠하며, 어떠했으며, 어떻게 될 것인가…. 볼링겐에서 나는 나의 가장 진정한 존재 속에, 나에 상응하는 것 속에 있었다. 나는 때때로 시골 경치와 사물 속으로 뻗어나갔고, 각각의 나무 속에서, 파도가 첨벙거리는 소리 속에서, 구름 속에서, 오가는 동물 속에서, 그리고 모든 사물 속에서 살았다…” 융은 자신의 꿈을 이렇게 해석했다. “자신의 성채가 내세에 있는 그의 원래의 형태, 즉 자기(Self,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일컫는 전체 정신)의 지상에 있는 모상(模像, 모방하여 만든 상)일 뿐이다. 꿈은 이제 ‘내세에 있는’ 자신의 집이 이주할 수 있도록 완성되었음을 나에게 말한 것이다.“ 1961년, 융은 삶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86세였다. 자신의 죽음을 예지한 이 꿈에서는 평생 동안 인간의 정신을 깊이 탐구했던 달관한 학자의 인생관이 엿보인다. 꿈에서 융은 완전한 고독과 절대적인 고요함이 깃든 완성된 탑에 들어갈 것이라는 의미를 알아차린다. 아마도 그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줄 탑이 금으로 된 탑이다. 금탑은 그가 평생 쌓은 학문적으로 업적일 것이고, 금은 변하지 않고 고귀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세운 업적은 사후에도 변함없이 값진 평가를 받게 될 것임을 예지하고 있다. 1875년, 융은 스위스의 한 호수가 마을인 캐스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사였고, 어머니는 몸이 아파서 요양생활을 했기 때문에 주로 아버지와 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친절하고 정열적이며 학구적이었다. 융은 아버지에 대해 “그 시절에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1900년,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발표했던 바로 그해, 당시 25세였던 융은 의과대학을 마치고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한 정신병원에 조수로 취직했다. ‘...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트는 나에게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히스테리와 꿈의 심리학에 대한 기본적인 탐구를 그가 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트의 견해는 나에게 개별적인 사례들에 대한 보다 폭넓은 연구와 이해의 길을 열어주었다. 프로이트 자신은 정신의학자가 아니고 신경학자였지만 심리적인 문제를 정신의학에 도입했다.’ 1907년, 융은 비엔나에 있던 프로이트를 방문하고 그가 명석하고 비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09년 융은 다시 프로이트를 만났는데, 과학성과 초과학성에 대한 토론과정에서 상당한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한때 융은 프로이트의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프로이트의 성(sex)에 관한 이론과 꿈의 해석 등에 대해 회의를 품고 결국 결별한다. 융은 자신이 새롭게 창설한 학파의 이론을 ‘분석심리학’이라고 불렀다. 1916년에 무의식의 구조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 페르소나, 아니마, 아니무스, 개성화 등의 개념도 밝혔다. 또한, 오늘날 잘 알려져 있는 성격심리에 대한 MBTI도 융의 이론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융은 처음에 자신의 자서전 출간을 거부했으나, 자신이 죽은 후를 조건으로 동의했다. 융이 사망한 다음해인 1962년, 그의 자서전 ‘카를 융, 기억 꿈 사상’이 출판되었다. 1959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기자는 그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신을 믿었습니까?” “예, 믿었습니다” “지금은요?” “...나는 신을 압니다”
    금으로 만든 성탑에 들어가는 열쇠를 쥔 융
    by 국경복
    2025.02.25 10:01:30
  • 21. 반려 내 집에 십자매 한 쌍이 들어온 계기는 친구의 외국 여행 때문이었다. 잠깐 맡기겠다고 하더니, 웬일인지 여행을 마치고도 차일피일 되찾아가지 않았다. 그 사이, 새 부부는 하얀 알을 낳더니, 꼬물꼬물 새끼가 나왔다. 마흔 중반의 미혼 남자가 생명 탄생의 순간을 직접 볼 일이 없었기에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친구를 재촉하지 않았다. 도리어 새끼들이 태어나면서 주인이 애매해졌다고 농담을 했더니, 아예 주인이 바뀌고 말았다. 그렇게 수년에 걸쳐 새끼가 새끼를 낳아 7마리까지 불어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와 ‘도리’ 한 쌍만 남은 상태였다. 몇 대 손(孫)인지 알 수 없다. ‘그리’의 본래 짝은 ‘도리’가 아니라 ‘왕비’였다. ‘왕비’는 몇 년 전에 죽었다. ‘왕비’라고 부른 이유는 워낙 도도한 자태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새들은 하루에 한 번 목욕하는 습관이 있다. ‘그리’는 매일 물통에 들어가서 목욕했지만, ‘왕비’는 절대로 스스로 목욕하지 않았다. ‘그리’가 깃털로 물방울을 열심히 튀겨주면, ‘왕비’는 온몸에 떨어지는 물방울들로만 몸을 단장했다. ‘그리’가 자신의 반려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깃털로 물방울을 날려주는지 보고 있노라면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보석 같은 투명한 작은 물방울을 맞으며 몸을 단장하는 ‘왕비’의 자태는 나의 웃음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 도도함이 몸의 불편함에서 나온 것임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어느 날 ‘왕비’가 사시나무 떨듯이 떨어서 살펴보니, 한쪽 다리가 거무스름하게 변한 상태였다. 동물병원에 가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며칠이 지나자 그을린 성냥개비처럼 새까맣게 변했다. 치료할 방법을 찾아 헤매는 사이, 한순간에 검은 다리의 절반이 절단되고 말았다. 아마 물에 발을 담그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변에 물어보니, 근친교배를 계속하면 장애가 점점 생겨난다고 했다. ‘그리’와 ‘왕비’도 같은 배에서 나온 오누이지만, 반려였다. 새들은 날아다니다가 발가락으로 나뭇가지를 움켜잡아야만 쉴 수 있다. 나뭇가지를 잡을 수도 없으니 ‘왕비’는 제대로 날지 못했다. 한쪽 다리가 절반으로 잘라나간 상태니 바닥에도 제대로 설 수 없었다. 며칠을 넘기지 못할 줄 알았는데, ‘왕비’는 절단되지 않은 다리를 쭉 뻗은 상태에서 절단된 다리로 총총 뛰면서 움직였다. 바닥에서 맴돌며 먹이를 주워 먹었다. ‘왕비’가 위험한 상태에 놓이면 ‘도리’가 나에게 울음으로 SOS를 청하기도 했다. 밤이 문제였다. 내가 퇴근해서 돌아오면, 둘 다 둥지 안에 들어간 날도 있지만, ‘왕비’가 들어가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어둠 속에 ‘왕비’ 혼자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깃털로 물방울 목욕을 시킬 순 있어도, ‘그리’도 ‘왕비’를 업어 옮기지 못했다. 나는 종일 뻗어 있어야 하는 ‘왕비’의 긴 다리를 마사지해서 둥지 안에 넣어주곤 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둥지에서 꺼내어 주었다. 왕비님은 결국 8개월 만에 죽었다. 그렇게 해서 혼자가 된 ‘그리’의 짝으로 데려온 것이 ‘도리’였다. 같은 배에서 나온 새가 아니라 다른 배에서 나온 어린 새를 사 와서 외롭지 않게 짝을 맞춘 것이다. 청계천에서 여러 상점을 돌아다니며 암컷을 구했다. 대부분 도리질을 했고, 웃돈을 주고 겨우 산 암컷이 ‘도리’였다. 의심스러운 것은 ‘도리’의 목소리가 암컷치고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알을 낳지 않았다. 나는 새 장수에게 속아 그렇게 ‘그리’에게 남자 반려를 만들어주고 말았다. 그들은 서로를 무척 위했기에 다시 떼어놓기에도 너무 늦었다. 더구나 ‘그리’는 나이가 들어서 이미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였고, ‘도리’는 그런 ‘그리’를 잘 돌봤기 때문이다. ‘왕비’는 절름발이로, ‘그리’는 장님으로, 그리고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나는 ‘도리’가 ‘그리’의 죽음을 인지하도록 하루 정도 그대로 둘 생각이었다. 베란다의 푸른 슬리퍼 안에 놓아두었다. 나는 여러 번 새의 죽음을 겪었는데, 이번에는 이전과 달랐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도리’는 ‘그리’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죽은 ‘그리’를 새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계속 주변을 돌며 꼭꼭 쪼았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여느 때와 달리, 끊임없이 콕콕 쪼며 밤이 깊어도 혼자 들어가지 않았다. 해결책이 없었다. 나는 참다 못해서 죽은 ‘그리’를 새장의 둥지 안에 넣어주었다. ‘도리’는 그렇게 죽은 ‘그리’와 자신들의 둥지 안에서 하룻밤을 잤다. 아침에 번쩍 눈을 뜨자 뭔가 이상했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을 보니, 습관적으로 깨는 시간이 훌쩍 지났지 싶었다. 나는 언제나 ‘도리’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깨곤 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리’는 내가 여태 키운 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새였다. 악기보다 놀라운 음색이었다. 시계를 보니, 내가 깨어야 하는 시간보다 한 시간 반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새의 정원 쪽 베란다 문을 열었다. 나를 반기는 ‘도리’의 부산한 움직임도 들리지 않았다. 새장 안 지푸라기 둥지에는 죽은 ‘그리’만 굳어 있었다. 고개를 드니, 도리는 여느 아침처럼 높은 포도나무 가지 위에 올라가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해도 이름을 불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나를 반갑게 맞이하던 깃털의 날렵한 움직임도 사라져버렸다. 노래는커녕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어젯밤 둥지 안에 죽은 ‘그리’를 함께 넣은 것을 후회했다. 자신의 반려가 죽었다고 목소리를 잃어버린 새 이야기를 누가 믿을까.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내 모습이 ‘도리’에서 보였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나도 ‘그리’처럼 충격을 받고 상심해서 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혹여 벌레라도 생길까 봐 이전의 새들은 반드시 바깥에 묻었다. 그런데 ‘그리’의 사체가 완전히 사라지면 ‘도리’가 창문에 머리라도 박을까 봐, 자살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나는 ‘도리’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선택한 마지막 배려는 ‘그리’의 사체를 바깥에 내버리지 않고 베란다 정원의 흙에 묻어 주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아버지를 묻듯이 ‘그리’를 땅에 묻었다. 눈물이 비로소 줄줄 흘렀다.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종의 기원  <21회>
    by 김다은
    2025.02.24 12:33:00
  • 겉과 속이 다른 일본인을 이해하는 게 어렵다고 한다. 또 과도한 친절과 모호한 언어습관에 주의해야 한다고 한다. 흔히 회자되는 일본인을 규정하는 국민성이다.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하지만 일본인만의 특성은 아니다. 일본인에게서 유달리 이런 정서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를 배려한 듯싶지만 애매모호하기까지 한 언어습관과 국민성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 본심과 겉치레 정도로 쓰이는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는 일본인의 특징을 설명할 때 쉽게 인용한다. 권력자나 공권력에 순종적인 일본인과 달리 한국인은 저항 기질이 강하다. 경제대국 중국과 일본을 ‘뙤놈’, ‘쪽바리’로 부르는 나라는 한국인이 유일하다. 또 왕조시대 숱한 민란부터 현대사회 대규모 집회까지 한국인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국가권력과도 기꺼이 맞섰다. 숨죽이며 순응하는 일본인과 크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일본 전문가들은 혼네(본심)와 다테마에(겉마음), 그리고 과도한 친절을 이해하는 코드로 ‘사무라이 문화’와 ‘와(和) 문화’에서 찾는다. 일본은 1185년 수립된 가마쿠라 막부부터 1868년 붕괴된 에도 막부까지 무려 700년 동안 사무라이가 지배한 칼의 나라였다. 사무라이 집단은 칼을 상시 휴대하고 걸핏하면 사람을 죽였다. 살벌한 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본심을 감춰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도하고 장수까지 누리는 사회는 흔치 않다.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따돌림 당한다. 하물며 목숨이 오가는 사무라이 시대, 공동체를 깨뜨리는 튀는 언행은 죽음을 의미했다. 공동체에 순응하는 ‘와(和) 문화’ 또한 겉치레에 능한 다테마에로 이어졌다. 촌락 공동체에서 마을의 질서를 어길 경우 가해지는 집단 따돌림을 뜻하는 ‘무라하치부(村八分)’는 가혹했다. 유령인간으로 취급하는 이지메를 피하려면 싫어도 좋은 척, 과장된 친절을 통해 공동체에 자신을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혼네와 다테마에는 이런 문화적 산물이다.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사무라이 정권, 공동체와 조화를 꾀해야 하는 와 문화는 일본 국민성의 원형질이다. 과도하다 싶은 친절 또한 여기에서 비롯됐다. 칼 든 사무라이 앞에서 살아남는 길은 면종복배와 위장된 친절, 웃음이었다. 본심은 감추고 비위를 맞춰야 생존 확률은 높았다. 일본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쓰미마센(미안합니다)”은 정말 미안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언어습관에 불과하다. 일본인들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에도 “쓰미마센”이라고 한다. 40년 전 처음 일본에 갔을 때는 “쓰미마센”을 진심으로 여겨 주변에 ‘일본은 친절한 나라’라고 했다. 언제부터인지 일본에서 듣는 “쓰미마센”은 공허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는 혼네와 다테마에가 다른 일본인을 쉽게 믿지 말라는 편견으로 확장됐는데, 일본인조차 “쓰미마센”을 정말로 미안하다는 뜻으로 여기는 이가 있을까 싶다. 혼네와 다테마에를 떠올릴 때마다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30여 년 전 가나자와(金澤) 시 초청으로 이시카와(石川) 현을 공식 방문했을 때다. 다다미가 깔린 전통 요정에서 만찬이 있었고, 가나자와 시장은 10분정도 늦었다. 그는 만찬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여닫이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수차례 허리를 굽혀 “쓰미마센”이라며 사과했다. 그는 6선 시장으로서 머리 희끗한 70대 초반이었다. 누구도 그가 예의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 정도는 늦을 수 있다고 여겼기에 우리 일행은 다소 당황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예의가 바르다’고 탄복했는데, 훗날 그때 행동은 보여주기 위한 다테마에는 아니었는지 혼동됐다. 정치인으로서 사무라이 관습대로 사과한 것은 아닌지 싶었다. 아마 사무라이 시대였다면 그는 영주가 주관하는 회의에 늦었다는 이유로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좀처럼 속내는 보이지 않는 국민성 때문인지 일본인을 친구로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중국인은 첫 만남에서도 “따거(형님)”라며 쉽게 마음은 여는 반면 일본인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다. 가깝게 지내는 일본인 가운데 주한 일본대사관 소속 외교관들이 있었다. 그들과 나는 매월 돌아가며 식사비용을 부담하며 1년 넘게 만남을 이어갔다. 허물없는 관계라고 여길법했건만 그들과 끝내 호형호제를 못한 채 헤어졌다. 그들은 내 호칭을 “임상”으로 부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났다. 이따금 SNS를 통해 안부를 주고받지만 끈끈한 인관관계를 중요시하는 한국인으로서는 왠지 허전했다. 대학 시절 연수 때도 느꼈지만 선을 넘지 않는 평행선을 유지는 일본의 국민성을 거듭 확인한 계기였다. 그들이 나를 다테마에로 대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전 주한 일본대사 또한 기억에 남는 관료다. 그가 대사로 있을 때 정세균 전 총리와 오찬을 주선했다. 아이보시 대사는 리모델링한 일본대사관도 소개할 겸 솜씨 좋은 일본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측은 일본대사관에서 오찬이 불러올 구설을 우려한 나머지 다른 장소를 제안하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후 다시 잡자고 했으나 본국으로 귀국하는 바람에 지키지 못한 약속으로 남았다. 한국 근무만 세 차례, 우리말이 유창한 아이보시 대사는 외교가에 이름난 친한파다. 여러 자리에서 한국에 대한 그의 진심을 숱하게 접했기에 나는 한국에 대한 그의 혼네를 의심치 않는다. 오히려 반일정서를 의식해 오찬 장소마저 흔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가 다테마에는 아니었는지 돌아본다. 한국인의 저항정신과 겉치레 또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쓰미마센'의 뿌리 '다테마에'
    by 임병식
    2025.02.23 08:07:38
  • 위기에 처한 기업들이 회생 신청을 망설이는 경우가 있다. 인식이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회생 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낙인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회생을 하게 되면 채무자회생법이라는 단체법의 엄격한 구속하에 경영의 자율성이 제한되는 측면은 불가피하다. 절차에 있어 상대적으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것도 단점이다. 이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회생을 망설이고 있는 기업들은 법원이 운용하고 있는 ARS 프로그램을 고려해볼 만하다. 자율구조조정제도(ARS제도)는 회생절차 개시의 원인이 확정적으로 발생하기 이전 법원이 채무자 기업에 대한 지원조치를 통하여 자율적인 구조조정 또는 그와 관련된 협의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함으로써 회생기업의 발생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이다. 법원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자율을 최대한 존중하고 채무자가 원하는 경우 절차가 가능한 공개되지 않도록 ARS 프로그램을 운용한다. 2023년 12월 이와 관련된 실무준칙이 개정됨으로써, 현재 법원은 이러한 제도 운용에 매우 적극적인 입장이다. 채무자 기업이 ARS 신청을 하게 되면, 법원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결정으로 회생절차 개시 여부 결정 기간을 일정 기간 보류한다. 그와 같은 기간 동안에 법원의 포괄적 금지명령을 통해 채권자들의 개별적 강제집행이 중지되는 것은 회생절차와 마찬가지다. 즉, 채무자 기업은 채권자들의 강제집행을 일정 기간 피하면서 채권자들과의 자율적 협상에 나설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또한, ARS 프로그램 하에서는 채무자 기업과 채권자들 사이의 자율구조조정 협의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절차 주재자를 두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절차 주재자는 보전관리인, CRO 또는 변호사, 회계사 등이 될 수 있다. 절차 주재자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채무자 기업과 채권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합리적인 자율구조조정안이 수립되는 것을 돕는다. 즉, 채무자 기업은 일정 기간 방어막을 형성해 놓고, 법원이라는 공적인 장을 통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채권자들과 협상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구조조정안이 타결되면, 채무자 기업은 회생기업이 되지 않고도 재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수행한 사건 중, 담보 신탁된 부동산의 대주단 중 일부가 대출 채무 만기 연장에 부동의하여 만기 도래 채무의 지급불능 사태가 임박한 경우가 있었다. 일부 대주단에 대한 설득과 협의만 가능하다면, 회생을 피해갈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 ARS 제도는 최적의 솔루션이 될 수 있다. 설령 ARS 제도를 통해 자율적인 구조조정안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작성된 구조조정안은 채무자 기업의 사전 회생계획안이 될 수 있다. 사전 회생계획안은 피 플랜(Pre-Packaged Plan)이라고도 불리는데, 법원의 회생절차 개시 결정 전에 제출하는 회생계획안이다. 피 플랜을 활용하면 일반 회생절차의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이처럼 ARS 제도는 채무자 기업이 회생으로 가는 것을 예방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회생으로 가더라도 신속히 회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므로, 위기에 처한 채무자 기업의 훌륭한 옵션이 될 수 있다.
    ARS 제도를 아시나요
    by 이응교
    2025.02.22 09:00:00
  • 법이란 일반적으로 법률을 의미한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법률로만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법률에 구체적인 모든 내용을 직접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법률에서 위임한 사항과 법률을 집행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을 대통령령(주로 ‘시행령’)이나 총리령·부령(주로 ‘시행규칙’)으로 정하게 된다. 이는 법규명령이라 하며, 법률을 근거로 해 국가적 범위의 구속력을 발휘한다. 이를 ‘법규성’이라 하며, 법과 법규명령을 함께 ‘법령’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법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법령해석’을 의미한다. 법령해석이란 법령을 특정 사실에 적용하기 위해 그 의미를 명확히 밝히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 사안을 확정하는 것이다. 해결해야 할 법적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단계에서 혼란을 겪거나 길을 잃기도 한다. 둘째, 적용 가능한 법령을 발견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5000개가 넘는 법령이 존재한다. 이들은 일반법과 특별법의 관계를 맺고 있거나 각종 준용 규정을 통해 연결돼 있다. 심지어 한 법령에서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개념을 다른 법령에서 찾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국회의 논의 자료를 검토해 입법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이렇듯 법령 발견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상당한 경험과 전문성이 필요한 고난도의 작업이다. 셋째, 법령해석 방법에 따라 구체적인 해석작업을 펼치는 것이다. 대표적인 해석 방법으로는 문리해석, 체계적 해석, 역사적 해석, 목적론적 해석이 있다. 문리해석은 법령 규정의 문자를 그대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로 인해 의미가 하나로 고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 법령이 제정된 시점과 현재의 언어적 의미가 다를 수도 있다. 따라서 문리해석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체계적 해석은 법 체계 전체와 다른 법령과의 관계, 법 규정의 조문 구조 등을 고려해 법령의 의미를 도출하는 방법이다. 특히 행정법령의 경우, 다른 법령과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 해석은 법령이 제정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입법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입법이유서, 국회 의사록 등의 자료를 분석해 법령이 만들어진 배경과 목적을 밝히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입법자의 의도가 현재의 법 현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역사적 해석만을 절대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목적론적 해석은 법의 목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이다. 단순히 입법자의 의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입법자가 지향한 법의 정신을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이다. 특히 대법원은 이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법이 현실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하도록 하고 있다. 목적론적 해석을 통해 법의 이념과 가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합목적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법령해석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문리해석이다. 법령의 언어나 법 제정상의 한계로 인해 문리해석이 불확실하거나 부조리를 초래할 경우에만 다른 해석 방법을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문리해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다양한 해석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그리고 해석 방법에 따라 결론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이처럼 법령해석은 단순한 문구 해석을 넘어 법의 본질과 목적을 밝히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령해석은 사법작용의 핵심적인 작업이며,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법률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법의 의미를 밝히는 법
    by 안성훈
    2025.02.22 08:00:00
  • 대선 때만 되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대선 캠프이다. 대통령의 꿈을 갖고 있는 정치인들은 선거 즈음하여 정책 공약의 개발과 선거전략의 수립을 위해 캠프를 차린다. 캠프라 부르는 이유는 임시로 마련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고산 정복을 위해 등반가가 꾸리는 베이스캠프와 같다. 이런 캠프에 대선 후보가 직접 관여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무실 운영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고 사람 관리하는 것이 번거로워 후보가 할 일이 아니다. 불나방처럼 자원자가 많이 몰려들어 구성이 잡다한 캠프에 후보가 깊이 개입하면 불필요한 잡음이나 구설에 휘말릴 수도 있다. 어차피 대선 한 철에만 생겼다가 없어지는 소모품인 캠프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 낙선하면 소용이 없고, 당선되면 부담이 되는 조직이다. 그러니 후보로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측근을 통해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통상 한 후보가 여러 캠프를 거느린다. 유력한 후보일수록 캠프가 많이 만들어진다. 주로 국회의원, 장·차관, 교수 출신의 친위계 인사가 좌장 노릇을 하며 하나씩 캠프를 맡아 세력 확대에 기여한다. 대선은 입신양명을 노리는 기회주의자들에게 큰 장이 열리는 ‘대목’이다. 대선 후보와 연분을 쌓아 고속출세할 수 있는 지름길이 대선 캠프에 참여하는 것이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보의 캠프에 이름을 걸어 놓으면 논공행상에 끼어 한자리 받을 수 있다. 로또보다 당첨 확률이 높다. 당연히 당선 가능성이 큰 후보의 캠프가 늘어나고 문전성시를 이룬다. 유명 브랜드의 인기 아파트 분양 현장에 떴다방이 난립하고 대박을 노리는 투기꾼들이 몰려들 듯이 말이다. 문제는 떴다방과 같은 캠프에서 만들어지는 공약이 날림으로 급조된다는 것이다. 대선 공약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국가를 어떻게 이끌고 나가겠다는 정책에 관한 약속이다. 당선자의 대선 공약은 차기 정부의 국정과제로 채택돼 우선적으로 추진된다. 부동산, 세금, 노동, 환경, 에너지 등에 관한 공약은 경제정책으로 전환되어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부 부처와 공공 기관은 대선 공약 과제에 예산과 인력을 집중해 달성도를 높이고자 노력한다. 국민들은 이런 공약과제가 탐색되고 수립되는 과정이 매우 체계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몇십 년 동안 여러 정부에서 추진한 정책과 해외 사례를 치밀하게 살펴보고 치열한 토론을 거쳐 정교한 공약이 개발될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 후보를 둘러싼 캠프 간에 연계나 협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협력보다 경쟁 관계가 두드러진다. 캠프의 인력 구성이나 운영 방침은 좌장에 따라 다르며 좌장들은 후보의 주목을 받아 실세로 떠오르기 위해 경합한다. 대권을 노리는 후보의 주변 캠프들 사이에서도 작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조율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캠프 안에서도 경쟁이 치열하다. 공약을 논의할 때 각자 자기가 내세운 정책 과제가 부각되도록 애쓴다. 다른 사람이 새롭고 신선한 정책을 발표하면 마치 논문 심사하듯이 조목조목 비판하며 흠집을 내려 한다. 사실 대선 공약을 개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이미 알려졌거나 이전 정부에서 이행한 정책은 신선도가 떨어진다. 다른 후보의 공약과 유사하면 차별성이 약하다. 과거와도 다르고 남과도 다르면서 유권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공약을 개발하려면 골머리가 아프다. 이미 다 파먹은 금광을 더 깊게 파서 금맥을 찾는 것과 같다. 그래서 캠프마다 정책의 연관성이나 실효성보다 차별성을 더 중요시하며 무엇인가 톡톡 튀는 공약과제를 발굴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진 공약이 나오기도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한 후보가 서로 상충하는 공약을 주장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요즘 대선 주자 선호도 1위인 원내 제1당의 대표가 ‘기본소득’에서 ‘기업성장’으로 서로 대립되는 정책을 주장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원래 전 국민에게 1인당 25만 원을 주는 민생회복지원금을 강조하다 갑자기 첨단기술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 6개를 만들어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주52시간 근무 예외’를 포함한 ‘반도체특별법’도 통과시키지 못하면서 삼성전자급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구호는 코미디라는 취급을 받았다. 지지층의 확장을 위해 새롭고 다양한 메시지를 제시하는 것은 이해된다. 그래도 상충된 공약을 쏟아내 갈팡지팡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상하다. 아마 기본소득파와 신성장파 등 각기 다른 캠프에서 제안한 공약을 한꺼번에 던지다 보니 충돌이 난 꼴이 아닌가 싶다. 이전 정부에서도 엇나가는 정책들을 동시에 추진해 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많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가 혼재되는 양상을 보였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 둘 다 추구하려다 어느 것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도 의료, 교육, 노동, 연구개발, 부동산 등의 정책에서 오락가락하다 국민의 지지를 잃고 총선에서 패배해 자멸했다. 결국, 한 정당이 계속 집권하지 못하는 근본적 원인은 어설픈 정책의 실패에 있다. 대통령은 한번 하고 물러나면 그만이다. 정당이야 서로 번갈아 정권을 잡으면 된다. 그러나 그 시행착오의 대가로 경제가 망가져 민생고에 시달리는 국민만 불쌍하다. 한 나라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대선 공약이 졸속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니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떴다방 대선 캠프의 '급조 공약'
    by 임채운
    2025.02.22 08:00:00
  • 교육방송 EBS의 유명한 다큐 중 하나인 ‘건축탐구-집’은 2019년에 처음 방송을 시작해 세 번째 시즌까지 이어지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집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람, 공간,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시청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끌어내고 있다. 프로그램에 나오는 집마다 건축주의 개성과 삶이 담겨 있다. 표준화된 ‘아파트 공화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저 집은 나중에 어떻게 팔지?”라는 걱정을 많이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 집을 그대로 보는 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파트는 면적, 연식, 구조(판상형·타워형) 정도로만 구분돼서 거래되다 보니, 현장을 가서 보는 게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매도자 우위의 시장에서는 급한 마음에 집을 보지도 않고 계약금을 먼저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거주’보다는 ‘투자 자산’의 가치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 상황이다. 이런 거래가 많아질수록 의사결정에 필요한 시간도 짧아지고 시세 반영 속도는 더 빨라진다. 서울시가 12일 토지거래허가구역을 일부 해제한 직후 강남 3구 핵심 아파트 단지에서는 단기적인 호가 급등에도 불구하고 수요자가 물밀듯 몰려드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송파구의 2월 3주차 주간 아파트 가격 상승률은 지난해 9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으며 잠실 엘리트(잠실엘스·리센츠·트리지움) 아파트는 30억 원(전용면적 84㎡)이라는 가격 기준선을 넘었다. 하루 아침에 집값이 2억 원, 3억 원씩 급등하는 시장은 정상적인 시장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번에 구입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절대로 상급지로 이동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최근 시장을 지배하고 있고, 이러한 시장의 불안감이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 즉 ‘소외 불안 증후군’이나 ‘고립 공포 증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트렌드 용어들은 주로 마케팅 영역에서 시작된다. FOMO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한정 판매’나 ‘매진 임박’이라는 문구를 사용해서 불안감과 공포감을 자극하는 홈쇼핑을 들 수 있다. FOMO 현상을 심화시킨 주요 요인은 무엇일까? 우선 SNS 등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정보유통 속도 상승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관련 소식을 듣지 못했더라면 몰랐을 사실들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이를 자신과 비교하게 되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다양한 채널을 통해 들어오는 소식들은 주로 성공 사례에 집중되기 때문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할까?”라는 불안감이 증폭 되는것이다. 부동산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부동산이라는 재화의 특성상 가격 진입장벽이 높지만 “나도 지금이라도 내 집을 마련해야 하는가?”라는 불안감은 ‘영끌’을 만들어내고, 여기서 나타나는 부동산 가격의 변동성은 ‘투자 실패’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조모(JOMO)는 무엇일까? JOMO는 'Joy of Missing Out'의 약자로, 어떤 일을 선택하지 않고 놓치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아웃사이더’라는 말이 비슷할 수도 있다. 최근 MZ세대가 ‘칠(Chill)’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여유롭고 차분하며 외부 요인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런 용어들이 유행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외부에서 오는 영향보다는 자신의 내면에서 삶의 만족을 찾으려는 경향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JOMO라는 단어를 들으면 ‘건축탐구-집’의 건축주들이 떠오른다. 주변에서 무엇이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뜻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는 사람들. 진정으로 부동산 시장에서 FOMO가 아닌 JOMO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강남 신축 아파트 매수 후기보다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개성에 맞춘 집들이 더 ‘Chill 해 보이는’ 시대를 기대해 본다. /서경IN
    혼돈의 부동산 시장, FOMO와 JOMO 사이에서 균형 잡기
    by 윤수민
    2025.02.22 07:00:00
  • 살기 좋은 정주 공간과 쾌적하고 여유로운 농촌다움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촌공간정비사업이 몇 년째 진행 중이다. 이달초 2025년도 1차 신규 지원 대상 지구 12곳이 선정돼 새롭게 변모할 농촌 공간 조성지역에 대한 기대가 크다. 악취·소음 발생, 오염물질 배출 등 주민 삶의 질을 저해하는 난개발 시설을 정비·이전해 주민들을 위한 쉼터나 생활시설을 조성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다. 이러한 변화들로 ‘농촌다움’이 보존되고 경관의 시각적 효과와 환경의 쾌적성, 농업의 다양한 가치 부각과 경제적 부활로 생활 서비스는 높아지고, 삶의 질은 향상될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전남 영광군 묘량면은 또 다른 현재 농촌 모습을 대변한다. 2007년부터 17년간 지역의 고령 농민들과 공동 영농을 통해 소득 분배를 해 온 사회적 농장 ‘여민동락공동체’가 작년 12월 휴경을 결정했다. 설립 당시 평균 연령 72세의 농민들이 2023년 평균 연령 78.5세로 고령화가 주된 원인이었다. 청년층의 유입이 없는 정주민의 고령화는 ‘마을의 절멸’로 이어진다. 농촌 관련 정책 설계에 대한 주도권이 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와 현장으로 옮겨지면서 ‘농촌 지역 공동체’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지역의 문제를 논의하며 그에 필요한 일을 실행할 귀농·귀촌에 가치 지향적인 젊은 일꾼의 필요성은 절실하고, 이들의 정착에 필요한 안정적인 주거 공간 확보는 큰 숙제이다. 시골에서 집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로 정부의 빈집 개보수 정비사업이 시행되고 있지만, 현장 실정은 녹록치 않다. 농촌 공간 정비사업을 통해 기능을 상실한 채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농촌 지역의 각종 시설 공간들을 다양한 규모의 주거 공간으로 재구조화해 부족한 주거 공간 해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 일에 마을 공간 계획을 성공시킨 독일의 비트브르크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트브르크는 농림산업이 주축인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50년간 농민 90%가 감소했지만, 주민과 정보 교류를 통한 마을 공간계획의 효과로 12년 동안 약 10% 인구가 늘어나는 대반전을 이루었다. 234개 마을 중 180여 개 마을은 인구 500명 이하이고, 전체 마을의 절반은 주민 200명을 넘지 않는다. 이들은 다시 돌아오게 하는 농촌을 만들고 마을을 재생시키기 위해 주민들과 논의하며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하나씩 개선해 나갔다. 문화재로 지정된 주택의 전통을 살리면서 시설 이용이 편리하도록 기능 개선에 초점을 맞춰 정비된 도로 등은 쾌적함으로 찾는 이들을 환경에 매료시켰다. 농촌 마을 공간계획 실행으로 뛰어난 정주환경과, 영유아 보육에서부터 양로원 등 노인 돌봄의 사회적 공동체가 활발한 비트부르크 프룀 지역의 사례가 이번 농촌 공간 정비사업의 신규 지원 대상 지구에 선정된 12곳에 선기능(先機能) 요소로 적용되기 바란다. 또한 농업 현장에 AI 신기술이 도입된 상황 속의 농촌다움의 모습과 미래세대가 생각하는 농촌다움의 모습들이 주민의 공감을 통해 반영된 설계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물성매력(Experienceing the Physical: the Appeal of Materiality)의 물성(物性·Materiality)은 사전적으로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뜻한다. AI로 인해 힘들이지 않고 쉽게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간편한 세상, 디지털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실제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물성에서 감성적 매력을 느낀다. 농촌 마을 공간 재생에 지역 특산 건축 재료들이 활용되고, 건물과 자연환경이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 친화적 설계를 적용하여 전통과 현대 기술의 융합으로 마을의 전통과 문화가 이어지고, 생활의 편리함이 증가하는 주거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다양한 자연의 재료들을 통해 촉각적, 시각적 경험을 제공함으로 물리적 감각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공간조성으로 농촌에서 거주의 기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매력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지역 특성과 창조적 상상력이 융합된 농촌다움의 환경 조성은, 봄이면 우리 대한민국 농촌에 살구꽃 복숭아꽃이 만발한 물성매력의 성지가 될 것이다.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물성매력' 농촌
    by 조금평
    2025.02.19 16:56:34
  • III. 유혹의 계략 20. 뱀의 치명적 유혹 커다란 새장 안에 나뭇가지들을 장식하고, 새 한 마리를 넣었다. 작은 새가 그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즈음, 뱀 한 마리를 다시 새장에 들어가게 했다. 자기 몸집보다 몇십 배나 큰 뱀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모습을 본 새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오갈 바를 몰라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푸드덕거렸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가장 높은 가지 위로 올라갔다. 뱀은 즉각 새를 공격하지 않았다.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아래쪽에 꼼짝 않고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간 지나자, 새는 윗가지에서 아래 가지로 조금씩 내려왔다. 심지어 호기심을 가지고 뱀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새가 코앞까지 가깝게 다가오자, 드디어 뱀은 입을 크게 쩍 벌렸다. 새는 스스로 뱀의 입안으로 들어갔고, 뱀은 간단하게 먹이를 삼켰다. 차창으로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장례식장에 갈 때도 비가 내렸는데, 돌아오는 길에도 비가 내렸다.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부모님 댁에서 거의 1주일을 머물러야 했다. 10일 만에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동안 내 존재에 대한 가치가 천지 차이로 변해버린 듯했다. 새와 뱀에 관한 한 과학적인 실험이 떠오른 것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장례식장에 가기 전, 나는 프랑스 작가와의 대담으로 명예와 자존심을 다쳐 1주일가량 두문불출했던 상태였다. 당시 내 최악의 모습을 보고 있다고 여겼고 처참했다. 그때 곡기를 끊었던 것도 나를 다시 회복시킬 자신이 있었기에 벌인 발악이었다. 장례식장에 갈 때만 해도, 내가 나를 믿던 시절의 나의 비참함을 나름 즐겼을 것이다. 본래의 나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다. 비참한 모습이었지만 확실하게 ‘나’라는 존재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는 존재를 자각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도 나는 장례식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스스로 진저리가 쳐졌다. 아픈 아버지와 집안일을 돌보던 어머니가 실상 돌봄을 받아야 하는 건강상태임을 깨달았고, 비로소 나는 몰인정하고 무심하고 독선적인 자의 자만을 보았다. 내가 알던 나의 멋짐이나 명예가 오만이었고 부끄러움이었다. 여태 뭔가 착각을 하면서 산 것 같았다. 든든한 보호자이자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가 공급하던 영혼의 에너지가 끊겼는지 머리가 텅 빈 듯하고 먹먹했다. 다시 아파트로 돌아가는 지금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예 내 안의 ‘나’가 빠져나가 버린 듯 허망하고 허전했다. “어디로 갔어?” 내가 무심코 작은 소리를 지른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기사가 자동차 백미러로 나를 살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심한 아들의 돌발적인 언행이라고 느꼈는지 캐묻지 않았다. “키우는 새들이 제대로 있는지 갑자기 생각나서요.” 나는 스스럼없이 거짓말을 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아니 나는 이런 식으로 항상 나 자신을 방어하며 보호해왔을 것이다. 말을 하고 나자 비로소, 집에 남겨둔 ‘그리’와 ‘도리’가 떠올랐다.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그대로 포기하면 아파트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내가 없으면 더 목숨을 이어갈 수 없는 존재들! 이런 존재가 가족이라고 아버지가 말했었다. 나는 그들을 키우는 보호자였다. 나의 아버지가 나의 의지처이자 보호자였듯이. 순간 울컥하는 심정이 올라왔다. 아버지의 죽음에도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한갓 새들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슬픔을 느끼는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새를 기르세요?” “십자매!” “그렇게 바쁘신데도 생명을 키우시네요. …… 십자매라면 독수리 종류인가요?.” “아하, 십자매는 참새 크기의 새입니다. 몸의 길이가 10㎝ 정도 되는 작은 새예요. 십자‘매’라는 표현 때문에 사람들이 아주 큰 매 종류를 생각하기도 하죠. 제가 독수리를 키운다는 소문이 퍼진 적도 있었지요. 사람들은 실제를 보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이나 공상으로 뭔가를 만들어내죠.” 막상 말하고 나니 기사를 비난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내가 나의 실제를 보지 못하고 내 생각으로 만든 공상의 산물로 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말씀하셨으면 제가 아파트에 한두 번 들러서 먹이와 물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한 달 정도는 나 없이도 지낼 수 있게 조치가 되어 있어요. 새장에서 마음대로 나와서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리는 물통의 물을 먹을 수 있고, 먹이도 충분히 공급되어 있으니까요. 여행이나 출장을 가도 신경 쓰이지 않도록 베란다 하나를 완전히 개조하여 새의 정원을 만들었거든요. 두 마리 중에 한 마리가 나이가 많아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데, 괜찮나 걱정이 되네요. 보통 5년 정도 사는 새인데, 거의 10년을 살았으니까요. 사람 나이로 치면 백 살쯤 되었죠.” “앞이 보이지 않는데 …… 새가 날아다닐 수가 있나요?” “10년을 같은 공간에서 살았으니 기억에 의존해서 조금씩 날고, 나뭇가지나 벽을 타고 다니고, 보통은 바닥에서 돌아다녀요. ‘그리’의 짝인 ‘도리’가 소리로 길을 안내하기도 해요. 제법 두 마리가 도우며 잘 살아요.” 차는 조금씩 막히기 시작했다. 기사는 앞을 묵묵하게 바라보았다. 막상 이야기를 꺼내니, 빨리 ‘도리’와 ‘그리’가 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들이 뱀에게 잡아 먹히는 상상으로 이어지자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고 갑자기 ‘그리’가 불안해졌다. 창밖에 비가 멎은 듯했다. 새와 뱀의 실험!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들었을 당시에는 천적의 관계만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천적을 만나면 몸이 마비되어 저항이나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잡아먹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실험이 천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유혹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유혹에 이끌리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데도, 그것에 시선을 맞추기 시작하면 점점 그것에 매혹당하는 것이다. 스스로 이끌리고,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가간다. 커다란 뱀 앞으로 스스로 다가가서 총총거리며 뽐내고 즐긴다. 그때 기다리던 뱀은 입을 쩍 벌리고 새가 스스로 그 안으로 날아드는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에 삼켜지려는 순간처럼 갑자기 다급해졌다. 아파트로 들어가자마자 베란다 문을 급하게 열었다. 나는 맨발로 베란다로 뛰어나가 ‘그리’와 ‘도리’의 이름을 마구 불렀다. 하얀 깃털의 ‘도리’가 나를 알아보고 부산하게 울었다. 하지만 회색 깃털의 ‘그리’의 울음은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 그리’는 평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가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울었다. ‘그리’가 어디 있는지, 새장 안에도 찾아보고, 수돗가의 물항아리 주변도 찾아보고, 그들의 정원을 샅샅이 살펴도 보이지 않았다. 베란다 창문은 닫혀 있기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나는 ‘도리’에게 ‘그리’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지만, ‘그리’는 울기만 했다. 떨어진 나뭇잎 아래까지 아무리 뒤져보고도 찾을 수가 없어서 목말라하며 거실로 막 들어오려는 순간이었다. 거실 유리문 앞에 놓인 베란다용 슬리퍼 안에 뭔가가 주저앉아 있었다. 새들이 내 슬리퍼 위에 올라올 때는 나를 보고 싶을 때였다. 나를 기쁘게 하거나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슬리퍼 위에 와서 놀았다. 내가 생활하는 거실과 자신들이 거주하는 베란다를 이어지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오! 그리!” 나는 푸른 슬리퍼 안쪽에 웅크리고 있는 ‘그리’를 손으로 집어 올렸다. 아무런 저항도 반가움도 표현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온기로 보아 목숨은 붙어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마치 작은 솜뭉치같이 가벼웠다. 반면에, ‘도리’는 나의 귀가에 매우 기뻐하며 베란다 천장을 힘차게 날아다녔다. 안도와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울었다. 내가 ‘그리’를 돌보면 회복하리라고 여길지도 몰랐다. “그리! 그리! 기운 내. 내가 왔어.” 나는 ‘그리’의 이름을 마구 불렀다. ‘그리’는 닫히지 않은 남은 한쪽 눈꺼풀 안의 동공으로 나를 보았다. 장님 새의 동공이었지만, 그리는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를 향한 검은 동공은 여린 빛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리’의 애틋한 홍채를 바라보며 마지막 순간임을 직감했다. 죽음에 삼켜지기 전에, 나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끝까지 버틴 것이다. 순간, 소설 ‘인공낙원의 문’의 버려져 있던 아기가 떠올랐다. 관 안의 아기의 열린 실눈이 온 생명을 다해 단테를 바라보던 모습이 기억났다. 결국, 악당들은 돈벌이가 되는 여자 사체를 포기하고 골칫거리가 될 생명을 안고 달아났다. 그 실눈 안의 눈빛 때문에 아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관에서 건져 올리라고 말하던 악당 두목 단테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 떠올랐다. 나도 단테처럼 ‘그리’의 생명을 연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는 나를 보고 죽기 위해 마지막까지 기다린 것이다. 아버지도 이런 심정으로 나를 기다렸을까. 비로소 눈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나를 마지막으로 보고 가려고 온몸으로 버티셨을 것이다. 내가 아파트에 숨어서 뒹굴며 곡선의 시간을 사는 동안에도 아버지가 얼마나 나를 간절히 기다렸을지 비로소 느껴졌다. ‘그리’를 품에 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도리’가 울면서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나를 보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듯 마지막 실눈을 스르르 감았다. 내가 손에 안아 올린 지 3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리’는 몸이 굳더니 고개를 뚝 떨구었다.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종의 기원  <20회>
    by 김다은
    2025.02.17 13:53:45
  • 지난주 미일 정상회담 직후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의 ‘아부 외교’가 화제가 됐다. 뉴욕타임스는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저항’ 대신 ‘아부’를 택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에 대한 첫인상을 묻는 질문에 이시바 총리는 “TV에서 본 유명인을 직접 만나게 돼 기뻤다”면서 “무섭고 강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매우 진지하고 강력하며 미국과 전 세계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며 한껏 치켜세웠다. 외신은 트럼프 대통령의 입은 귀에 걸렸고, 회담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아부’라는 단어를 중립적 의미로 사용했다. 국제무대에서 듣기 좋은 말로 환심을 사는 이유는 국익을 위해서다. 칭찬을 마다할 정치인은 없기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유효한 외교 수단이다. “일본에 전할 메시지는 무엇이냐”는 취재진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사랑해요”라고 했다니 아부 외교는 남는 장사였다. 외신과 달리 국내언론은 이시바 총리의 외교적 수사를 다소 부정적 뉘앙스로 전했다. 동일한 사안을 전하면서도 일본 이슈라면 무조건 비판부터 하고보는, 국내 정서를 뛰어넘지 못한 관성에서 비롯된 보도였다. 정도를 넘어선 외교적 수사는 자칫 굴종으로 비춰질 수 있기에 신중해야 하지만 국익을 위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 용인할 수밖에 없다. 이시바 총리의 ‘아부’는 치밀한 준비를 바탕으로 한 실리외교라는 점에서 많은 걸 시사한다. 일본 외무성은 아베 전 총리의 부인을 지난해 12월 마러라고에 보내 트럼프와 대화 물꼬를 열었다. 이어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을 통해 1,000억 달러(약 145조원) 투자 선물 보따리를 제공함으로써 장사꾼 트럼프를 효율적으로 공략했다. 사소한 것 같지만 황금 투구 선물 또한 면밀하게 계산된 결과물이다. 투구를 제작한 곳은 이시바 총리의 고향 돗토리 현이고, 주문 시기는 지난해 11월이니 트럼프 당선 직후부터 준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정상 외교가 멈춘 한국 상황에서 일본이 대미 관계를 선점한 건 아픈 대목이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 일본의 실리외교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시바 총리는 미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 달 전부터 공부 모임을 갖는 등 치밀하게 준비했다. 외무상을 지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물론 외무성·경제산업성 간부들과 함께 ‘트럼프 식 맞춤형’ 문답을 만들고, 또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감소하고 있음을 표로 정리해 제시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얼마나 설득됐는지는 몰라도 향후 미일관계를 예상할 수 있다. 자세를 낮추는 일본 외교는 일본인 특유의 치밀함을 반영한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할복도 마다하지 않는 사무라이 문화를 미덕으로 삼는 일본에서 아부는 계산된 행동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로 있다가 권력을 손에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화가 상징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겨울날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고 있다가 따뜻한 신발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는 일본사회에서 아부가 아닌 미담으로 회자된다. 히데요시의 행동은 주군을 위한 충성이며, 훗날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은 이유마저 여기에서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러니 진영을 떠나 이시바 총리의 언행을 시비할 일본인은 없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마저 내려놓는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패전 이후 빛을 발했다. 미군정하에서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상은 맥아더 극동사령관의 비위를 맞춰 미군 직접통치에서 간접통치로 전환시켰다. 이로써 일본은 경제 부흥에 집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 일본은 미국과 코드를 맞춰 정상국가로 이행이라는 실리를 취했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1951년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한 뒤 안전보장은 미국에 맡기고 경제부흥에 집중하는 ‘요시다 노선’을 1980년대 초까지 견지했다. 이런 기조 아래서 이케다 수상 재임 당시 일본 경제는 9~10%대 고도성장을 달성하며 GATT와 IMF, OECD에 가입하며 사실상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패전 19년 만인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치른 배경에는 스스로를 낮춘 외교가 있었다. 일본이 록펠러센터와 콜롬비아 영화사를 매입하고 대규모 대미 무역흑자를 기록하면서 미국이 일본 때리기에 나서자 일본은 다시 엎드렸다. 일본은 ‘플라자 합의’에 이어 1985년 ‘마에다 리포트’를 토대로 10년 간 430조 엔에 달하는 재정지출과 미국 내수 시장 확대를 뒷받침했다. 또 경제구조를 바꾸고 시장을 개방하라는 미국의 압박을 따랐다. 당시 협상 항목만 200개에 달해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일본은 힘의 역학 관계를 인정하면서 보통국가로 보폭을 넓혔다. 이 결과 일본은 미국에 의존하던 국가안보에서 벗어나 자국이 공격 받거나 동맹국이 요구하면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에 참여하는 보통국가로서 지위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일본 외교는 철저하게 실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시바 총리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과 협력이 미국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 트럼프를 추켜세울 것,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준비했다. 나아가 정적이었던 아베 전 총리의 외교 방식까지 수용했다. 일본을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아부라고 폄하할 일도 아니다. 자신을 한껏 낮추는 일본 외교는 그런 기회조차 갖지 못한 한국 정치를 돌아보게 한다. 과시용 허세를 내려놓고 국익을 위해 아부를 자처하는 일본 정치를 주목한다. /서경IN
    이시바 총리의 계산된 '아부외교'
    by 임병식
    2025.02.15 11:33:28
  • 지난 달 트럼프 취임 이후 글로벌 금융 시장은 크고 작은 변동을 겪고 있다. 주식시장에서는 전력기기, 원전, 우주국방, 로봇, 소프트웨어 등 ‘소프트 AI’ 관련 종목들이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보였다. 이는 단순한 단기 흐름이 아니라 시장이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며 AI 인프라 구축(스타게이트 프로젝트), 에너지 정책(전력·원전 확대), 우주국방 투자 확대 등을 핵심 정책으로 내세운 만큼, 해당 섹터의 성장세는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딥시크 쇼크’ 이후 AI 관련 주식들이 급등락을 반복하며 시장의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도 이런 변동성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시장의 중심에는 AI, 그중에서도 ‘소프트 AI’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소프트 AI’(AI 활용 산업)는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전력·원전·로봇·우주 등 다양한 산업과 결합하며 경제 전반을 변화시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역시 AI 산업을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어, 관련 정책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주식시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금리와 환율의 방향성이다. 트럼프 1기 때와 마찬가지로 국채 금리는 취임 전 불확실성 때문에 급등했지만, 취임 이후 정책이 나오면서 다시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도 같은 흐름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즉 금리는 하향 안정될 가능성이 높다. 환율도 비슷한 패턴이다. 취임 전에는 정책 불확실성으로 인해 달러 강세, 원화 약세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취임 이후 정책이 가시화되면서 불확실성이 줄어들고 다시 원화 강세 및 달러 약세 흐름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물론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 현실화되면 환율 변동성이 커질 가능성도 있지만 큰 틀에서는 원화가 강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흐름은 금융시장에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시장의 가장 큰 리스크는 ‘악재’가 아니라 ‘불확실성’이라는 점이다. 불확실성이 해소되면 시장은 자연스럽게 안정을 찾아간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변동성에 휩쓸리지 않고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읽는 것이다. AI 중심의 변화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며, 단기적인 조정을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전략적 시각이 필요하다.
    가장 큰 리스크는 '불확실성'…답은 바뀌지 않았다
    by 서진환
    2025.02.15 08:00:00
  • 상장법인이 영업활동을 통해 손실을 기록하는 것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성장 과정에서 일시적인 손실이 발생할 수 있고, 새로운 사업 기회를 위한 투자 과정에서 손실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속적이고 상당한 규모의 손실이 발생하는 경우는 다르다. 이는 관리종목 지정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결국 상장적격성 실질심사까지 받게 될 수 있다. 상장규정에 따르면, 최근 3사업연도 중 2사업연도에 각각 사업연도말 자기자본의 50%를 초과하면서 동시에 10억원 이상의 법인세비용차감전계속사업손실이 발생하고, 최근 사업연도에도 법인세비용차감전계속사업손실이 발생한 경우 관리종목으로 지정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손실의 '규모'와 '빈도'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한다는 것이다. 자기자본의 50%를 초과하면서 동시에 절대적 금액으로도 10억원 이상이어야 하며,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최근 3년 중 2회 이상 발생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관리종목 지정 기준에는 예외가 있다. 기술성장기업(우량기업부 기업 제외)의 경우 상장일이 속한 사업연도를 포함하여 3개 사업연도 동안, 이익미실현 기업의 경우는 상장일이 속한 사업연도를 포함하여 5개 사업연도 동안 이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혁신 기업들의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초기 단계에서의 손실을 용인하여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취지로 이해된다. 관리종목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더 엄중한 결과가 따른다. 관리종목 지정 이후 다음 사업연도에도 동일한 사유가 지속되면, 즉 자기자본의 50%를 초과하고 10억원 이상의 법인세비용차감전계속사업손실이 다시 발생하면, 이는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사유가 된다. 관리종목 지정은 일종의 '경고'이며, 이후에도 손실이 지속되면 상장 유지 자체를 재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상장법인이 이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선 관리종목 지정을 피하기 위해서는 수익성 개선을 위한 선제적 조치가 필요하다. 비용 구조를 재검토하고, 수익성 높은 사업 부문을 강화하거나, 필요한 경우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의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만약 이미 관리종목으로 지정되었다면, 다음 사업연도에는 반드시 손실 규모를 축소하여 실질심사 사유 발생을 피해야 한다. 결국 법인세차감전계속사업손실 문제는 기업의 존속 가능성과 직결되는 중요한 지표이다. 특히 관리종목 지정 이후에는 상장적격성 실질심사라는 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만큼, 경영진의 면밀한 관리와 함께 필요한 경우 전문가의 조력을 받아 종합적인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법인세비용차감전계속사업손실과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by 정성빈
    2025.02.0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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