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68
  • AI는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새로운 질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표방한 ‘국민주권정부’는 통치의 정당성이 국민의 일상적인 참여와 피드백의 순환 구조 안에서 재확인되는 거버넌스로 이해된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진짜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가치를 상징한다. 이는 AI 기본사회가 지향하는 원칙인 기술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누구도 기술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접근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AI 기반 기술은 대표성과 통제를 동시에 구현하기 어려웠던 기존 행정 시스템의 구조를 바꾸는 참여적 전환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컨대 ‘국민 AI 비서’는 단순한 정보 제공 기능을 넘어서, 시민이 행정에 질문하고 반론하며 제안할 수 있는 양방향 인터페이스로 작동할 수 있다. 정책 결정의 배경이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을 때, 국민은 AI 시스템을 통해 “왜 이 정책이 필요한가”, “다른 대안은 무엇인가”를 실시간으로 묻고 응답받을 수 있다. 이는 설명가능성이라는 기술 원칙이 정치적 책임성과 민주적 숙의의 확장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또한 AI는 참여의 기술적 진입장벽을 낮추고 디지털 주권의 실질화를 촉진한다. 온라인 공론장, 국민제안 플랫폼, 정책투표 시스템 등은 고도화된 언어 처리, 감정 분석, 요약 기술을 통해 누구나 쉽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정책으로 반영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한다. 과거의 행정이 선택된 전문가의 언어로 구성되었다면, AI는 다양한 언어와 감정, 삶의 맥락을 인식하고 조직화하는 능력을 통해 다층적인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모두의 AI가 정부의 도구가 아니라 ‘국민의 도구’로 작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참여민주주의는 단순히 정보를 소유하거나 열람할 수 있는 권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핵심은 시민이 그 정보에 기반해 정부 정책에 대해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며, 실제로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제도적 통로를 갖추는 데 있다. 이재명 정부의 국민주권정부 구상은 기술과 정치, 권리와 참여가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을 제시하며, AI 기본사회는 이러한 구조를 제도와 기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구체화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헌법 개정 시 디지털 국가 원리가 헌법의 통치 이념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결국 기술은 통치의 수단이 아니라, 국민의 참여를 구성하는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 AI를 통해 실현되는 기본사회는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체제가 아니라, 더 많은 시민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확장판이다. 그것은 이제 선언이 아니라 설계와 실천의 문제다.
    AI 기본사회와 국민주권정부
    by 김윤명
    2025.06.12 08:47:33
  • ‘사람은 공간을 만들지만,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이 1943년 독일의 런던 폭격으로 파괴된 국회 의사당의 재건을 약속하면서 한 말이다. 처칠은 우리가 만들어낸 공간과 환경이 결국 우리의 삶, 사고방식, 공동체의 구조까지도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공간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에 거주하며, 그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를 넘어 기억과 감정, 만남과 회복, 사유와 상상의 터전이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거주함(Dwelling)’이라 했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의미 있게 거주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더 나은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정부는 ‘범정부 빈집 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 등 4개 부처가 공동으로 빈집 문제 해결에 나섰다. 국가 차원의 빈집 관리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농어촌빈집정비특별법’과 ‘빈건축물정비특별법’ 제정을 통해 국가와 소유자의 책무를 명확히 하고, 농어촌 빈집 리모델링을 통해 생활인구와 귀농·귀촌 예정자, 청년 등을 위한 주거·업무·문화공간으로의 재활용을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단순한 주거환경 개선을 넘어, 마을공동체의 회복과 지역 균형발전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감자꽃이 피던 지난달 24일, 충북 옥천군 ‘옥천공동체 허브 누구나’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작년에 개장한 안남면 최초의 마을 공중목욕탕 소식을 접했다. ‘목욕 한 번 하려면 버스 타고 읍내까지 30분을 가야 하고, 버스 시간 맞추려면 큰맘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는 안혁관 할머니(89세. 청정리)와 마을에 목욕탕이 생길 거라고 꿈도 꾸지 못하였다는 마을 어르신의 감회는 마을의 지속을 위한 필요 요소가 무엇인지 분명한 자각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마을의 목욕탕은 단순한 위생 공간을 넘어 마을에 사라진 온기를 되살리는 공동체의 심장이 되었다. 충남 서천군 마서면 ‘여우네 작은 도서관’도 같은 사례이다. 귀농한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위한 돌봄과 놀이공간이 없던 마을에 도서관을 구상하였다. 주민들의 협조로 마을의 유휴 공간을 활용해 만든 도서관은, 아이들을 돌보며 방과 후 아이를 맡길 수 있게 된 이들에게 마을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마을의 작은 도서관은 아이들과 주민들이 함께 숨 쉬는 공간으로 마을의 미래를 준비하는 디딤돌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사람과 공간과 시간은 곧 지역의 문화가 된다. 이렇듯 공간의 재탄생은 문제 해결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고 농촌의 회복력을 되살리는 시작점이 된다. 무위당 장일순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 했다. 그는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가진 생명력을 통해 풀뿌리 문화의 확장성을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 농촌에서 무위당의 생명 운동과 정신이 다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주민 스스로 공간을 회복하고, 마을의 필요를 채우며 문화의 싹을 틔울 때, 진정한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농촌의 빈집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엔 수많은 기억과 시간이 쌓여 있다. 빈집을 그저 철거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쓰임을 부여하고 마을에 맞는 방식으로 재생할 때, 비로소 공간은 사람을 살리고, 마을을 살리는 힘이 된다. 빈집 관리는 곧 사람을 위한 일이다. 이는 단지 행정적 정비가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체 회복을 위한 문화적 과제이다. 정부의 정책이 현장에서 실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손과 주민의 땀방울이 만나는 접점이 필요하다.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어 마을의 미래를 함께 그릴 수 있을 때, 정책은 지속 가능한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하얀 감자꽃이 말을 한다. ‘이곳에도 여전히 삶이 있다’라고.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소리 없이 무너져온 농촌 마을들을 돌아보며, 공간의 소중함을 되새겨 본다. 감자꽃은 풍요와 수확의 상징이라고 한다. 꽃이 수고를 다 하는 동안 감자가 땅속에서 튼튼하게 영글듯, 빈집과 공간 개선 정책도 현장의 필요와 그를 위한 지원이 이어질 때 진정한 수확으로 이어질 것이다. 감자꽃이 피는 지금, 공간 정비와 함께 우리가 꿈꾸는 더 나은 세상을 농촌에서 피워 보자. 우리의 시선을 도시를 넘어 농촌에 머물게 하자. 그곳이 곧 다시 회복해야 할 우리의 미래이다. /서경IN
    “감자꽃이 피었습니다”
    by 조금평
    2025.06.09 16:47:27
  • 최근 ‘도시의 마음’이란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 김승수는 전주시장을 지낸, 각별한 후배다. 그는 시장 재임 당시 책 읽는 시민들이 도시의 품격을 결정한다며 ‘책이 삶이 되는 책의 도시 전주’를 디자인했다. 시장 취임과 함께 시청사 로비를 책 읽는 공간으로 전환하고, 특색 있는 도서관을 신축 또는 리모델링함으로써 정책을 현실로 옮겼다. 10여년이 흘러 전주는 도서관 도시로써 입지를 굳혔다. 도서관을 찾는 발길이 급증하자 전주시는 아예 도서관 투어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저자가 꿈꾸었던 전주다움을 인정받고, 지역경제 활성화도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둔 것이다. ‘도시의 마음’은 안목과 관점을 일깨운다. 저자는 “도시가 바뀌면 시민들 삶도 바뀐다. 정책의 차이가 삶의 차이를 만든다. 도시에 마음을 담으면 시민들에게 반향이 일어나고, 그 반향은 도시와 사람을 동시에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저자는 책과 도서관으로 시민들 삶과 도시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반대 여론에 직면했다. 그는 시민들을 설득하고 공직사회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냈다. ‘도시의 마음’에는 이런 안목과 관점을 담았다. 책을 읽는 내내 일본 이시카와(石川) 현립도서관과 21세기 미술관, 다케오(武雄) 시립도서관, 시마네(島根) 현립미술관을 떠올렸다. 세 도시 모두 공공건축물을 통해 도시를 바꿨다. 잘 지은 미술관 하나, 도서관 하나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소멸을 막는다. 이들 도시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나라 지방도시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도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특색 없는 도시경관 일색이다. 매력적인 도시, 활력 있는 도시와 거리가 멀다. 무엇이든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일본은 매년 전국 47개 광역단체를 대상으로 매력도를 발표한다. 지난해 10월 발표한 ‘2024 매력도 랭킹’에서 1위는 홋카이도(北海道), 47위는 사가(佐賀) 현이었다. 그런데 사가 현에 한국인 관광객이 몰린다니 그 이유가 궁금하다. 사가 현 다케오는 인구 5만 명이 채 안 되는 소도시다. 수령 3000년 녹나무가 유명하지만 여행자들이 궁벽한 다케오를 찾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다케오 시립도서관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연간 100만 명이 다케오 도서관에 다녀간다. 도대체 어떤 도서관이기에 도시 인구의 20배 넘는 여행자들이 도서관을 찾을까. 2013년 문을 연 다케오 도서관은 책 읽고, 물건 사고, 커피 마시는 복합공간이다. 시민들은 이곳에서 책 읽고 수다를 떤다. 다케오 도서관은 ‘도서관은 조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부터 깼다. 24시간 연중 운영하니 지역주민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커뮤니티 공간이다. 주변 지형과 어울린 외관 설계 또한 인상적이다. 처음 다케오 도서관을 방문한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노을에 물든 도서관은 황홀했다. 뒷산을 배경으로 둥근 활시위 형태로 설계한 도서관은 위압적인 여느 도서관과는 달리 편안했다. 내부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숍과 잡화 코너도 독특했다. 이곳에서는 문구류부터 지역 특산물, 심지어 전통 술까지 판다. 도서관에서 웬 술이냐고 하겠지만 다케오 도서관에서는 가능하다. 2층은 책 읽는 공간이다. 시민들은 도서관에서 책 읽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지역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울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은 다케오 도서관을 벤치마킹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회자되는 이시카와 현립도서관은 2022년 7월 개관 이후 2년 9개월 만에 내방객 300만 명을 기록했다. 도서관은 짧은 기간에 21세기 미술관과 함께 가나자와를 대표하는 명소로 부상했으니 놀랍다. 빼어난 설계 덕분인데 지난해 일본 도서관협회 건축상을 받았다. 로마 콜로세움을 떠올리는 지붕 설계는 인상적이다. 이곳은 도서관 본래 기능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기능까지 수행한다. 3층까지 이어지는 360도 책으로 둘러싼 중앙 홀을 따라 올라가는 통로는 압권이다. 이곳에서 하루 종일 책에 파묻혔으면 했다. 시마네 현립미술관 또한 지역을 살린 공공건축물이다. 매끈한 우주선 모양을 한 미술관은 넓은 신지 호수에 접해 입지부터 남다르다. 호수와 어우러진 미술관은 시마네 시민들에게 자부심이다. 시민들은 일부러 동트는 새벽 또는 해질 무렵 미술관을 찾아 시간을 보낸다. 시마네 현은 이웃 돗토리 현과 함께 일본에서 인구가 가장 적다. 그런데도 여행자들이 시마네를 버킷리스트에 담는 건 미술관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이곳에서 우키요에 작품을 관람하며 느꼈던 감동은 여전하다. 다녀온 지 1년여가 흘렀지만 호수를 품은 미술관 풍광이 잊히지 않는다. ‘도시의 마음’에서 저자는 “공공은 성공의 기쁨과 자부심보다는 실패의 책임과 두려움을 먼저 생각한다. 여기에서 늘 마찰이 일어난다.”며 “적당한 성공은 철저한 실패보다 위험하다. 적당한 성공은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다. 적당한 성공으로는 누구의 마음도 흔들 수 없다.”고 했다. 공직사회가 실패의 책임과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면 다양한 정책을 기대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감사원의 정책감사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새로운 시도에 활기를 불어넣을지 기대된다.
    일본 소도시를 바꾼 공공건축물
    by 임병식
    2025.06.09 13:31:34
  • 2022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상업위성 미)Starlink, Capella, 핀란드)ICEYE 등 활용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지난 3월, 트럼프와 젤렌스키 대통령의 종전 협상 회담이 결렬되자 미국은 위성영상 정보지원을 즉시 중단하며 우크라이나를 압박했다. 이 위성영상은 미 국가정찰국(NRO)이 상업우주 활용 프로그램으로 확보한 것이다. 오늘날 상업위성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여 지난해 4월, 미 국방부와 우주군은 각각 ‘상업 우주 통합 전략(Commercial Space Integration Strategy)’과 ‘상업 우주 전략’을 발표했다. 미 행정부의 ‘상업 우주 통합 전략’은 안보와 상업을 통합하려는 시도로 민간의 상업용 우주 솔루션 활용이 군사 작전 영역에서 효용성을 높을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하며, 우주상업 파트너십을 확보하고 육성하기 위한 전략을 상세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전략은 민간 우주 산업의 기술과 능력을 군사 및 국가 안보 분야에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우주에서의 위협을 감소시키고, 상업적 솔루션이 군사 작전에 효용성을 높이는 것을 추구한다. 주요 내용은 첫째, 상업 우주 솔루션의 군사 작전 분야 활용을 확대하기 위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둘째 상업 우주 산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혁신적인 상업 문화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셋째 상업 우주 산업의 개발 기간 단축과 시장 동향 파악을 통해 정부와 민간 부문 간의 협업 장벽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미 국방부는 상업 우주 산업의 활용 가능 분야를 파악하고 정부가 맡아야 할 역할을 설정한다. 미 우주군은 상업 우주 솔루션 사용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상업 부문과 지속적으로 협력한다. 이러한 실행 사례로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 위치한 미우주시스템사령부 소속의 ‘Innovation Hub VT-ARC’는 국가안보에 상용 우주솔루션을 활용하는 방안을 구현하는 곳으로 우주 우방국의 상용 우주업체 대상으로 위성통신, 우주감시, 우주정보, 항법(PNT) 분야의 순으로 미 우주군 사업 참여도 유도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민군협력진흥원에서 ‘민 · 군기술협력사업촉진법’에 따라 민·군겸용기술(Spin-up)의 개발과 국방기술의 민간이전(Spin-off), 민간기술의 국방 활용(Spin-on) 등의 민·군 기술협력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전담기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민·군 기술협력에 대한 사업·제도적 한계로 실질적으로 소요군의 활용이 필요한 소프트웨어 분야 개발까지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냉전 종식 후 군비를 축소해 온 유럽과 달리, 우리는 방위사업에 꾸준히 투자해 왔다. 최근 K-방산 수출이 괄목 성장한 계기가 되었다. 수출국이 실제 사용하지 않는 무기를 구매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러니 K-방산의 핵심 경쟁력은 적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우리 군이다. 국산화를 참고 기다려 준 우리 군 덕분에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서 오늘날 글로벌 방산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오늘날 미 행정부의 ‘상업 우주 통합 전략’은 정부 주도 우주 개발을 선택과 집중으로 전환하고, 우주 자산의 회복력 강화를 위한 경쟁 우위 모색에 방점이 있다. 국가가 민간 우주 자산을 활용하는 사례가 확대하고 있어 우리도 관련 사안에 대한 검토와 안보 환경 변화에 맞는 우주 생태계 구축 전략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즉, 미 우주군은 “구매할 수 있는 것은 구매하며 반드시 필요한 것은 구축한다”는 접근방식으로 상업 우주부문의 혁신을 유도하고 있다. 우리도 저비용 단기간으로 우주자산을 획득하고 소프트웨어 분야에 상업우주를 접목하는 ‘한국형 상업 우주전략’ 수립을 제언해 본다. 이와 함께 우주청과 방사청 컨트롤이 가능하고, 국가 안보를 고려한 민-군 우주안보 통합 전략 수립이 가능한 상위기관의 설립과 우주 생태계 구축을 위해 국방우주산업을 기반으로 민간우주산업을 육성화하는 전략적 접근도 필요하다. 또한, 글로벌 우주 협력을 통한 한국의 우주 산업 기반 강화와 우방국과의 우주 안보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K-방산을 ‘K-우주방산’으로 도약시키는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K-우주 방산’ 전략을 만들 때다   
    by 최성환
    2025.06.04 17:20:30
  • 지금 세계는 AI 전쟁 중이다. 이는 비유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이다. 데이터나 알고리즘이 총알이고, GPU가 무기이며, 언어모델(LLM)은 군수물자이다. 누가 먼저 기술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산업과 경제, 외교의 질서까지 판가름 나는 전면적 충돌의 시기다. 미국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반도체와 AI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중국은 국영자본을 동원한 기술독립 전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AI 규제법과 산업정책을 동시에 설계하며 주도권 확보에 나섰다. 이 판에서 우리나라는 어디에 서 있는가. 문제는 우리가 AI를 여전히 산업진흥이나 창업지원의 영역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데 있다. 국가 전략이 아니라 부처 단위의 ‘과제’ 수준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AI는 더 이상 기술개발지원이나 규제완화로 대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책’이 아니라 ‘전략’이다. 그리고 전략은 혼란이 아니라 일관성 위에서만 가능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감이다. 미국 코로나 백신 개발 프로젝트인 ‘Operation Warp Speed’처럼, 실패는 허용하되 속도는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정부는 대통령 직속의 ‘AI 국가전략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현행 국가AI위원회는 폐지해야 한다. 기획재정부도, 과기정통부도, 산업부도 이 전쟁의 지휘부가 될 수 없다. 그들은 병참본부로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전략은 기술을 이해하는 자가 짜야 하며,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행정가나 경영자가 아닌 야전형 기술 사령관이다. AI 전쟁의 리더는 현장에서 알고리즘을 만지고, 모델을 훈련하고, 틀을 이해하는 AI 기술 전문가여야 한다. 국가 AI 전략의 리더십이 기술에서 멀어질수록, 전략은 문서만 남고 실행은 흐려진다. 우리가 수년간 목격한 것은 바로 이 ‘전략 부재의 반복’이다. 수십 개 부처가 서로 다른 로드맵을 내고, 이름만 다른 지원 사업이 중복되고, 정작 기업들은 GPU 하나 수급하지 못해 개발을 포기하는 일이 벌어진다. ‘AI 강국’을 외치면서도 기반 기술과 생태계에 대한 투자는 여전히 표류 중이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국가AI연구소를 설립하여 국가 차원의 기술축적과 인재양성 시스템을 통합하고, 산발적인 R&D 과제를 전략적으로 정렬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보여주기식 정책’에 허비해 왔다. 스타트업 몇 곳 지원했다는 성과, AI 경진대회 몇 회 개최했다는 홍보, 국제기구 몇 곳 참여했다는 외교적 수치로 국가전략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환상을 걷어내는 일이다. 설명가능한 AI(XAI)와 같은 기술적 허상에 매달릴 시간에, 실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기술을 키워야 한다. 우리가 투자해야 할 것은 발표용 슬라이드가 아니라, 실제 코드를 짜고, 모델을 훈련하며, 국제 생태계에서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는 실전형 기술과 기업이다. AI 강국은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가 기술을 이해하고, 기술이 전략을 이끄는 체계 위에서만 가능하다. 전략이 없는 국가에겐 승리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AI는 전 세계에서 진화를 멈추지 않고 있다. 전장을 외면한 채 회의실에서만 전략을 짜는 나라에겐 미래가 없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시간은 지금이며, 준비해야 할 대상은 기술 그 자체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야전군은 기업의 AI 기술자들이다. 그들을 불러 모아야할 때이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한 몇 가지 전략을 제안한다. 첫째, K-LLM 전담 전투팀을 꾸려야 한다. 대한민국도 이제 말뿐인 K-모델이 아니라, 글로벌 수준에서 실제로 싸울 수 있는 자체 고성능 언어모델(K-LLM)을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가 GPU와 데이터를 책임지고, 민간 기술자가 주도하는 전담 전투형 개발팀을 구성하라. 산업현장에서 즉시 투입 가능한 실전형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전략 없는 기술은 무기 없는 군대와 같고, 기술 없는 전략은 말잔치일 뿐이다. 둘째, AI 연산 인프라를 민간에 개방해야 한다. AI는 연산이 곧 전투력이다. 스타트업이 GPU 부족으로 무너지는 동안 정부는 여전히 보고서만 쓴다. 국가가 수천 장의 GPU를 보유한 전용 AI 클러스터를 구축해 민간에 개방하고, 슬라이드가 아니라 소스코드로 평가하는 실전 배치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누구에게 총을 쥐여줄지, 그 기준은 문서가 아니라 코드로 정해야 한다. 셋째, 국가 전략데이터 API 개방이다. 모델이 아무리 정교해도 데이터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공공과 민간이 보유한 고품질 데이터셋을 ‘국가 AI 전략 자산’으로 편성하고, 기술자에게 API 형태로 실시간 개방해야 한다. 특히 한국어·법률·교육·의료 등 전문분야 데이터는 한국만의 전장을 열 수 있는 무기다. 데이터는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사용하는 연료다. 네째, 민간 기술자를 실전에 투입해야 한다. 국가 프로젝트는 더 이상 회의실에서 회의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기업은 물론, 스타트업 CTO, 시니어 개발자, 현업 알고리즘 설계자를 국가 AI 전투현장에 직접 투입하고, GPU·인증·전략 자원을 집중 제공하라. 민간 기술자는 보고용 명단이 아니라 전장을 돌파할 진짜 전투원이다. 현장에 기술자를 보내는 나라만이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마지막으로 실시간 테스트베드를 구축해야 한다. 모델의 품질은 실험실이 아니라 현장 사용 중 오류로 증명된다. 민원 시스템, 의료 요약, 행정 자동화 등 공공 영역에 AI 모델을 즉시 배치하고, 실시간 피드백과 오류 리포트가 돌아오는 AI 실전 테스트 플랫폼을 구축하라. 기술자는 매일 실전에서 싸우고, 모델은 매일 실전에서 진화해야 한다. 그게 전쟁이다.
    새 정부는 ‘AI국가전략위' 만들어야
    by 김윤명
    2025.06.03 11:09:38
  • 기업의 퍼블릭 어페어즈(Public Affairs) 활동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정부 관료를 만나고 국회의원을 설득하면 정책은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여전히 정치권이지만, 정책을 움직이는 힘은 시민단체, 전문가, 이익단체, 미디어 등 ‘제3자 그룹’으로 분산되고 있다. 권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흩어졌을 뿐이다. 정책은 법과 제도, 그리고 예산이라는 형식으로 실현된다. 그러나 그 형식을 실질적으로 만드는 본질은 ‘사람’과 ‘이해관계’다. 과거처럼 관료나 국회의원만을 겨냥한 일방향 설득으로는 설 자리가 없다. 여론을 선점한 시민단체 하나가 기업의 시장을 송두리째 흔들고, 학회 성명 하나가 법안의 생사를 갈라 놓는 시대다. 사회적 설득력이 없는 정책은 제도화되지 못하고, 제도화되지 못한 정책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환경·보건·플랫폼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 같은 흐름은 더욱 뚜렷하다. ‘탈플라스틱’ 캠페인으로 출발한 일회용 컵 규제는 몇몇 시민단체와 소비자단체의 꾸준한 이슈 제기와 언론 연계로 국회까지 연결됐고, 법제화로 이어졌다. 기업들은 규제가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본질을 인식했다. 문제는 사후 대응이 아니라, 초기의 무관심이었다. 제약업계의 약가제도 개편 역시 마찬가지다. 환자단체와 전문가 그룹이 ‘신약 접근권’이라는 공공성을 앞세우자 정책 프레임은 완전히 전환됐다. 정책을 앞당긴 건 정부가 아니라, 정책 바깥에서 문제를 구조화한 이들이었다. 정당성과 긴급성을 확보한 제3자가 정책 결정의 흐름을 바꾼 셈이다. ICT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일명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은 정부나 기업이 아니라 소상공인 단체와 소비자 권리단체들의 요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알고리즘의 투명성, 입점 수수료 문제 등을 제기하며 여론을 장악했고, 국회는 이 흐름을 외면하지 못했다. 플랫폼 기업들은 법안의 정합성에 대해 반박했지만, 사회적 정당성을 넘지 못한 반론은 정책의 벽을 막지 못했다. 이제는 정책의 권력 구조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해관계자는 정부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점점 더 조직화되고 다층화되고 있다. 이제 소셜폴리틱스의 시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기업이 생존하려면 이들과의 관계설정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 누구를 설득하고, 누구와 협력하며, 누구의 반발을 예측할 것인가. 이 복잡한 지형을 해독하는 도구가 바로 ‘살리언스(Salience) 모델’이다. 살리언스 모델은 이해관계자의 속성을 세 가지 기준으로 분류한다. ‘권력을 가졌는가’ ‘정당한가’ ‘긴급한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따라 기업은 대응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 목소리가 크다고 반드시 설득해야 할 대상은 아니며, 영향력이 낮다고 무시해도 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정당성과 긴급성을 가진 ‘의존적 이해관계자’는 언론과 여론을 움직이는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 그룹이다. 환경단체, 환자단체, 소비자단체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이들과의 조기 협력은 사회적 지지와 정책 우군 확보의 핵심이 된다. 반대로, 권력과 긴급성을 동시에 가진 ‘위험한 이해관계자’는 사전 대응 없이는 돌이킬 수 없는 리스크로 번질 수 있다. 정치권 핵심 인사나 거대노조, 언론 권력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단순한 메시지로는 설득할 수 없으며, 신뢰 기반의 대화 채널을 사전에 확보해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많은 기업들이 여전히 정부와 국회라는 공식 경로에만 의존한다. 변화한 환경을 읽지 못하고, 전략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설득의 기술을 넘어, 조율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해관계자의 언어를 읽고, 갈등을 구조화하며, 공통의 정책목표를 재설계하는 일. 퍼블릭 어페어즈의 본령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해관계자 맵핑은 결코 고비용 전략이 아니다. 포럼 하나, 리서치 하나, 소규모 자문그룹 운영만으로도 충분한 데이터와 신호를 얻을 수 있다. 관건은 이를 전략으로 축적할 수 있는 체계와 의지다. 정책은 언제나 사람의 손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지금 그 손은 점점 더 정부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퍼블릭 어페어즈 전략의 타깃은 넓어져야 한다. 정부청사나 국회만이 아니라, 거리의 시민사회, 기자실의 여론, 전문가의 보고서가 기업을 둘러싼 정책 환경을 바꾸고 있다. 이들을 이해하고, 구분하고, 조율하지 않으면 기업의 논리는 정책의 언어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정책이 되지 못한 논리는 곧 시장에서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소셜폴리틱스’ 시대가 왔다
    by 이보형
    2025.06.03 08:26:45
  •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기본’과 ‘모두’라는 개념은 AI 시대에 들어서며 그 의미가 전면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단지 용어의 재정의가 아니라, 헌법 질서의 구조 전환을 요구하는 사유의 출발점이다. 우리 시대의 ‘기본’은 더 이상 최소 생존의 보장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기본’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이해되었다. 식량, 주거, 교육, 의료, 노동 등은 이러한 생존 중심의 복지국가적 기본권 체계에서 핵심 구성요소였다. 그러나, 오늘날 AI 기술은 인간의 삶에 대한 조건을 ‘기술적 참여’ 여부에 따라 차별화하고 있으며,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사회적 소속과 판단 능력 자체를 좌우한다. AI가 인간의 의사결정 구조를 대체하거나 보조하는 환경에서 ‘기술의 비접근’은 곧 ‘사회적 배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새로운 ‘기본’은 기술로부터의 보호가 아닌, 기술을 통한 실질적 참여의 보장이어야 한다. ‘모두’는 형식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접근을 뜻한다. ‘모두’라는 단어는 겉보기에 포용적이고 평등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할 위험도 있다. 기술 인프라와 교육, 언어 능력, 경제력, 지역 격차 등은 AI 기술에 대한 접근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모두의 AI’가 단순히 서비스를 개방한다는 의미에 그친다면, 사회적 약자는 여전히 소외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의미의 ‘모두’는 형식적 평등을 넘어, 실질적으로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디지털 접근권, AI 리터러시 보장, 맞춤형 공공 서비스 등 적극적 정책수단이 동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두의 AI는 국민 모두가 AI 서비스를 이용함에 있어서 제한이나 차별을 받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AI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실질적이고, 사회적 권리로서 AI 기본권이 인정될 필요가 있다. 이처럼, AI 시대의 ‘기본’은 기술과 권리의 결합이다. 기본은 더 이상 사회보장 제도의 내부 개념이 아니라, 기술 사회 전반에 대한 설계 원칙이 되어야 한다. 이는 권리 없는 기술 도입이 아니라, 권리를 전제로 한 기술 사회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AI는 인간의 삶을 매개하고 판단을 구조화하는 도구이기에 기술 자체가 헌법적 의미를 띠는 존재 조건으로 기능한다. 즉, ‘AI 기본사회’란 AI 기술에 대한 접근·통제·이용·설명요구·이의제기 등이 보편적으로 보장되는 디지털 사회계약의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사회계약이 노동구조에 따른 근간이었다면 기본사회에서의 사회계약은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계약내용을 구성하여야 한다. AI를 통해 구현되는 세상이라는 점에서 AI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경우, 경쟁에서 배제될 수 있다. AI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과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볼 때, AI는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차이가 차별로 확대되지 않도록 AI 기본권의 실질적 보장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법과 헌법은 ‘기술 없는 기본’을 넘어야 한다. 기존의 헌법 이론은 기술을 외부적 요인으로 간주해왔으며, 대부분은 기술로부터의 보호라는 ‘방어적 권리 모델’에 기반해 왔다. 하지만 AI 사회에서는 기술이 기본권 실현의 수단이자 조건이 된다. 교육 받을 권리도 AI 튜터 없이 실현되기 어렵고, 행정 정보도 AI 기반으로 제공되는 시대에는 기술에 접근할 수 있어야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즉, AI는 권리의 내용이자 방법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법은 이제 기술 없는 기본권 논리에서 벗어나 기술로부터 권리를 확장하는 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 ‘모두의 AI’는 새로운 사회계약의 조건이다. 전통 사회계약은 ‘세금과 복지’, ‘노동과 안전망’이라는 교환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AI 사회의 기본계약은 ‘데이터와 권리’, ‘접근과 참여’, ‘기술과 책임’이라는 새로운 조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때 ‘모두의 AI’는 AI 기술이 일부 기업이나 국가 권력의 소유물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동등하게 접근하고 설계에 참여하며 책임을 공유하는 공공 자산임을 선언하는 개념이다. 법률과 정책은 이 새로운 계약의 문법에 따라, 기술의 공공화와 시민 참여의 제도화, 공정 분배의 원칙을 명시적으로 내장해야 한다. ‘모두’와 ‘기본’은 AI 시대의 헌법적 기초다. 결국 ‘모두’는 기술 포용의 대상을, ‘기본’은 기술로 구성된 삶의 조건을 재정의하는 개념이다. 국민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두에게 기본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AI 기본사회는 이러한 ‘모두’와 ‘기본’의 재발견을 바탕으로, 기술과 권리의 관계를 재설계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는 시도다. 이 개념의 전환을 제도화하지 못한다면, AI 기술은 권리의 도구가 아니라 배제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국민 모두가 AI를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는 사회인 AI 사회의 큰 의미는 AI에 대한 접근과 이용의 제한없는 AI 기본권의 보장이어야 한다. 앞으로, AI 기본권은 모든 정책·입법의 철학적·헌법적 기반이 되어야 한다.
    AI 시대 ‘모두’와 ‘기본’의 재발견
    by 김윤명
    2025.05.30 14:42:28
  • 최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올해 국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0.8%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저성장 흐름이 나타났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유사한 0%대의 낮은 성장률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미국의 관세전쟁에 의한 수출 감소가 주요 원인이라 하지만 반도체, 자동차, 이차전지와 같은 국내 주력 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이 흔들리고, 미래 혁신성장 동력인 AI 혁신경쟁에서 뒤처지는 모습들은 경제성장 멈춤에 대한 불안감을 높인다. 인간과 대화하는 인공지능(AI) 챗GPT는 불과 2년 만에 초기의 경이로움 단계에서 사용자가 5억 명에 이를 만큼 성장하고 있다. AI 발전에 필요한 기반 기술인 AI 반도체나 대규모 데이터 처리기술도 빠른 속도로 발전해 AI 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혁신 산업들이 움트고 있다. 로보택시, 휴먼로봇 등 새로운 개념의 기술혁신이 가시화되고 있고 특히 로보택시는 이미 상용화단계에 접어들어 새로운 이동혁신 서비스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로보택시는 운전자 없이 스스로 주행할 수 있는 자율주행기술 레벨 4의 기술을 탑재하고 운행되는 이동수단이다. 글로벌 로보택시 시장은 2030년까지 연평균 60% 이상 성장해 수천 억 달러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력과 규제 완화를 통해 미국과 중국의 기업들은 이미 기술혁신과 시장 선점을 위한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구글의 자회사인 웨이모(Waymo)는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운행서비스 중이며 테슬라는 운전대와 패달이 없는 자율주행차 운행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은 바이두(Baidu Apollo Go)가 베이징, 우한 등 10개 도시에서 유료 서비스 운행을 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은 세계 주요 도시들로 운행 범위를 넓히는 경쟁을 이미 시작했다. AI 기반 로보택시의 상용화에는 핵심기술 확보뿐만 아니라 여러 중요한 요소들이 갖춰져야 한다. 안전하고 혁신적인 자율주행기술에 도시 인프라 구축, 규제 완화 등 관련 제도 및 법제 정비가 필수적이다. 나아가 기존 자동차 산업 및 고용구조의 대개편을 유발해 산업 전환에 따른 대응과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해야 한다. 즉, 소유에서 공유로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자동차산업의 속성이 바뀌고 그에 따른 고용구조의 대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특히 운전 직종 수요 감소와 소프트웨어 중심 고용구조 전환에 따른 고용시장 혼란과 갈등을 조정할 재교육제도 및 사회 안전망 확충이 필요하다. 현재 국내 로보택시의 혁신경쟁력은 미중 선두기업들에 뒤처지고 있다. 국내 기업이 미국에 로보택시용 전기차 제공 및 운행 서비스 실시가 예정되어 있고 일부 스타트업들이 자율주행기술개발에 참여하고 있지만 핵심기술과 운영 플랫폼 경쟁력이 뒤처진다는 평가이다. 특히 국내 자율주행시스템은 일부 지역(서울 강남, 세종 등)에서만 소규모의 시험 운행을 하는 단계에 있다. 무인 운전 금지에 대한 규제가 여전하고 사회적 수용도가 낮아 자율주행 혁신경쟁에 장애가 되고 있다. 로보택시는 AI 기술을 적용한 혁신의 상징이자 산업구조 재편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국내 자동차산업은 제조업 총생산의 12%를 차지하고 직접 고용인력 33만명을 포함해 약 150만명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주력산업이다. 규제개혁과 사회적 수용성 미비로 신산업 혁신경쟁에 뒤처지면 새로운 혁신성장 동력 확보에 실패할 위험이 높다. 이미 ICT 혁신경쟁에서 낙오된 일본과 유럽의 사례는 혁신 격차가 경제성장에 치명적임을 제시한다. 로보택시로의 전환에는 자율주행 핵심기술 확보부터 서비스 관련 기술이 통합된 기술플랫폼과 고용, 제도, 규제, 도시인프라 설계까지 통합된 혁신체계가 필요하다. 즉, 기술개발, 규제개혁, 사회적 수용성, 산업구조 전환 전략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종합적인 정책패키지 접근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지금 정부의 과학기술혁신체계로는 통합된 관리가 어렵다. 현재 과학기술혁신체계는 기술개발에서 개발 기술의 사업화 이전을 주로 다룬다. 또한 기술 개발이 여러 부처에 분산관리돼 조정이 어렵다. 자율주행기술개발 관리도 산업부, 과기부, 국토부, 경찰청 등 여러 부처에 분산되어 있다. 더구나 관련 규제개혁, 제도 구축, 고용 등은 기술개발체계와는 별도로 다루어진다. AI 시대의 혁신 특징은 발전 속도가 빠르고 파괴적이다. 단순 기술혁신이 아닌 산업재편, 경제사회시스템 전환까지 유발한다. 지금의 과학기술혁신 관리체계로는 AI 시대의 기술개발과 혁신의 속성을 수용하기가 어렵다. 기술개발에서 산업구조 개편, 규제개혁, 노동시장 개편, 사회시스템 개혁의 연결성을 고려한 통합적 혁신정책체계의 구축과 이를 이끌어갈 거버넌스 개편이 필요하다. 단순히 부총리제 도입이 아니라 과학기술정책과 AI 혁신정책과의 연계를 위한 새로운 혁신거버넌스 체계를 설계해야 한다.
    AI 시대, 통합된 혁신체계가 답이다
    by 이민형
    2025.05.28 15:36:39
  • 대한민국은 기술의 전환점을 지나고 있다.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산업의 도구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필수조건’으로 변화하고 있다. 행정은 AI로 자동화되고, 교육은 AI 튜터와 함께 이뤄지며, 의료와 돌봄도 AI 기반 플랫폼 위에서 작동한다. 문제는 이 기술 전환이 과연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로 주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 기술의 혜택은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왔다. 고소득층과 대도시는 AI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지만, 농어촌 주민, 고령자, 장애인, 저소득층은 여전히 ‘기술 밖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인공지능은 기회의 문이지만, 통제되지 않으면 또 하나의 격차가 된다. 이제 우리는 이 기술을 모두의 삶을 위한 기반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AI 기본사회의 출발점이다. AI 기본사회는 기술로 국민의 기본적 삶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AI는 더 이상 소수의 자산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향유해야 할 권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제안한 기본사회는 주거, 의료, 교육, 돌봄, 교통, 정보 접근 등 국민 삶 전반을 헌법상 권리로 실현하겠다는 선언이며, 기술 역시 그 일부로 포함된다. 국가는 이제 기술 기반 삶까지 책임지는 방향으로 거버넌스를 전환해야 한다. 기존 복지제도가 ‘일할 수 있어야 지원받는다’는 전제에 기반했다면, AI 기본사회는 ‘기술이 노동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시대’를 전제로 한다. 탈락자를 보조하는 정책이 아니라,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디지털 기반 안전망이 핵심이다. AI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며, 국민의 존엄을 지탱하는 사회적 인프라다. 그러나 기술 인프라만으로는 기본사회가 실현되지 않는다. AI 기본사회는 기술, 제도, 참여라는 세 축 위에 세워져야 한다. 첫째, 기술의 축으로는 공공이 주도하는 AI 인프라가 필요하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국민 AI 비서, 지역 기반 디지털 도움센터, 공공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RAG 시스템 등이 핵심이다. 특정 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개방형 모델과 공공데이터의 결합으로 모두의 AI를 실현해야 한다. 공공데이터는 국민의 것이며, 그것을 통해 제공되는 서비스 역시 공공이어야 한다. 둘째, 제도의 축으로는 ‘AI 기본권 헌장’ 제정과 ‘기본사회위원회’ 설치가 요구된다. AI 접근권, 이용권, 설명요구권, 포용권 등 새로운 사회권을 법제화하고, 이를 실행할 전담 기구를 통해 지속가능한 정책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 위원회는 소득, 돌봄, 교육, 주거 등 복지 각 분야의 정책을 AI 시대에 맞게 재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셋째, 참여의 축으로는 기술 통제를 기술자에게만 맡기지 않는 참여형 AI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시민, 기술자, 법률가, 정책가가 함께 참여하는 AI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공공 알고리즘의 투명성, 영향평가, 사전 인증 및 사후 모니터링 제도를 통해 기술의 공공성과 책임성을 확보해야 한다. 기술 민주주의는 선언이 아니라 구조화된 참여 설계로 가능하다. AI는 인간의 삶을 돕는 도구여야 한다. 경쟁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존엄한 삶을 위한 기술이 되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두고 기술이 주변을 채우는 사회가 바로 AI 기본사회다. 기술복지(tech-welfare)는 단순한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AI는 교육, 건강, 노동 등 인간다운 삶의 전 영역을 지지하는 공공 기반이 되어야 한다. 단절 없는 돌봄, 개인화된 교육, 데이터 기반 복지는 AI 없이는 실현되기 어렵다. 따라서 AI 기본권은 선택이 아닌 새로운 사회권으로 제도화되어야 한다. 지금은 기술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AI 기본사회로 나아가야 할 때다. 기술이 진보할수록 우리는 그 기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더 날카롭게 물어야 한다. AI 기본사회는 그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사회 비전이며, ‘모두의 AI’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 전략이다. AI가 갖는 가치는 기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국민의 권리이기도 하다.
    AI기본사회는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by 김윤명
    2025.05.25 12:03:56
  • 일본에서는 엑스포(EXPO)를 ‘반파쿠’로 부른다. 만국박람회를 줄인 ‘만박(萬博)’의 일본어 발음이 반파쿠다. ‘천하의 부엌’ 오사카(大阪)에서 엑스포(4월 13~10월 13일)가 한창이다. 일본은 앞서 1970년 오사카, 2005년 아이치(愛知)엑스포를 개최한 바 있다. 등록박람회를 한 번도 열지 못한 우리와 달리 일본은 벌써 세 차례다. 5년마다 6개월간 개최하는 등록박람회는 세계 최대 규모다. 1993년 대전엑스포는 체급이 작은 인정박람회였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엑스포를 통해 패전국에서 벗어나 선진국 반열에 올랐음을 알렸다. 이후 한동안 일본은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지켰다. 오사카엑스포 주최 측은 55년 전 6,400만여 명에 비해 2,800만 명으로 관람객을 낮춰 잡았지만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지금이야 스포츠를 비롯한 메가 이벤트가 흔전만전하지만 19세기만 해도 볼거리는 흔치 않았다. 세계 최초 박람회는 1851년 런던박람회다. 일본이 국제사회에 처음 얼굴을 내민 것도 박람회를 통해서였다. 사쓰마(가고시마) 번은 1867년 파리박람회에 도자기를 첫 출품했다. 사쓰마 도자기는 유럽인들을 사로잡았고, 단박에 자포니즘(Japonism) 열풍을 불렀다. 유럽인들은 앞 다퉈 도자기를 사들였고 사쓰마 도자기는 최고 사치품이 됐다. 사쓰마는 도자기 판 돈으로 대포와 군함을 사들였고 조슈(야마구치)와 손을 잡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아이러니한 건 도자기 산업의 주인공이 조선도공이라는 점이다. 임진왜란 포로로 끌려간 조선도공들은 오늘날 반도체와 맞먹는 하이테크 산업을 주도하며 일본 개화에 기여했다. 쓰라린 역사다. 오사카는 한반도와 밀접한 곳이다. 원조 한류인 조선통신사와 연결 지어 생각하면 한층 각별하다. 지금도 오사카는 재일 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조선통신사의 주된 통로였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관계 개선을 위해 요청한 평화사절단이다. 한양을 떠난 통신사는 육로와 해로를 따라 에도로 향했다. 한양~에도는 왕복 4,600km에 이르는 거리다. 부산항부터 오사카까지 바닷길만 840km다. 오사카는 일본 본토 첫 기착지였다. 에도 막부는 통신사 행렬이 시모노세키에 들어서면 오사카까지 뱃길을 안내했다. 지난 11일 부산항을 출발해 보름여 만에 오사카에 도착한 조선통신사 재현 선 역시 세토내해 전통항해협의회 도움을 받았다. 비로소 본토에 오른 통신사는 요도우라(淀浦) 강을 거슬러 에도로 갔다. 지난해 자동차를 이용해 시모노세키부터 구레, 토모노우라, 히로시마를 다녀왔다. 선조들이 말과 배를 타고 이동했을 소도시 곳곳에서 조선통신사 행적을 만났다. 최근 엑스포 한국관에서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됐다. 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261년 만에 연 행사는 여러모로 뜻깊었다. 관람객들은 조선통신사 선박과 통신사 행렬에 흥미를 나타냈다. 조선통신사는 단순한 외교 사절을 뛰어넘은 평화와 문화 사절이었다. 1607~1811년까지 200여 년 동안 12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신뢰를 상징한다. ‘믿음을 통하는 사절단’이란 명칭 또한 일본으로 가는 사절단에만 사용했다. 통신사의 주요 임무는 도쿠가와 쇼군에게 국서를 전달하고 답서를 받아오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쇼군을 만나 국서를 교환함으로써 신뢰를 쌓았다. 통신사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다이묘들은 숙식과 행정편의를 제공하며 극진히 환대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과도한 접대로 지방재정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에도 막부는 조선통신사를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유용한 창구로 인식했다. 일본 지식인들은 통신사 행렬이 머무는 숙소를 방문해 밤새워 필담을 나누고 글씨와 시를 받는 것을 특별한 기쁨으로 여겼다. 서울역사박물관은 6월 29일까지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을 주제로 조선통신사 특별전을 열고 있다. 전시장에서는 친밀한 교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대와 하룻밤 이야기하는 것이 십 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는 일본 학자의 글은 인상적이다. 비록 불행한 근현대사를 공유하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에도 호우시절은 있었다. 대륙과 단절된 섬나라 일본에게 조선통신사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엑스포였다. 통신사가 머무는 동안 문화와 물물이 섞이고 지식은 확장됐다. 통신사 일원으로 다녀온 이언진은 ‘오사카는 큰 도회지라 진기한 보물은 용궁의 보물을 털어낸 듯, 페르시아 상인들도 눈부셔하고 절강의 처자들도 빛이 바래네’라며 오사카의 번화함을 묘사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상륙(1543년)해 서구 문물을 전하기 전까지 조선통신사는 유일한 문화 유입 창구였다. 어쩌면 조선과 일본의 악연도 조선통신사가 끊기면서 시작됐는지 모른다. 통신사는 1811년, 12차 사행을 끝으로 중단됐다. 이로부터 불과 65년 뒤 일본은 강화도조약(1876년)을 시작으로 조선침략을 본격화했다. 신뢰가 끊긴 자리에서 전쟁이 싹텄다. 에도 시대 외교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성신이라는 것은 진실 된 마음을 뜻하며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을 갖고 교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일 양국에 필요한 말이다. 2025년 오사카엑스포 한국관의 주제는 ‘연결’이다. 한일 양국이 새로운 미래로 나가는 것 또한 새로운 연결에 있다.
    오사카에서 만나는 ‘새로운 연결’
    by 임병식
    2025.05.19 15:54:44
  • 인공지능(AI)은 산업과 경제를 넘어 교육, 복지, 노동, 행정 등 사회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동시에 AI는 점점 더 인간의 외양과 감각, 행동을 모사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형태로 구현되며, 기술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기술은 사람을 닮아가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오래된 문제가 새로운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AI는 본질적으로 기술이지만, 이제는 인간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핵심 사회 인프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이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주어지고 있지는 않다. 고령자, 저소득층, 장애인, 농어촌 주민 등 디지털 소외계층은 AI 기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기술의 진보가 오히려 새로운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술보다 먼저 사회적 계약의 내용과 방식부터 다시 써야 한다. ‘모두의 AI’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정책 비전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주요 정책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AI 접근권, 이용권, 설명요구권, 차별금지권 등을 포함한 ‘AI 기본권 헌장’을 제정하고, 이를 법제도 전반에 반영해야 한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사회권 체계를 구축하는 핵심이다. 둘째, ‘국민 AI 비서’와 같은 공공 AI 플랫폼을 구축해 복잡한 공공서비스를 통합 제공하고, 국민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개방형 디지털 복지 체계를 조성해야 한다. 셋째, 디지털 소외계층을 위한 AI 바우처 제도와 지역 기반 디지털 도움센터를 운영하여 기술격차를 완화해야 한다. 넷째, AI 시대에 필요한 역량을 국민이 갖출 수 있도록 생애주기별 AI 리터러시 교육을 제도화하고, 이를 평생학습 체계에 편입시켜야 한다. 다섯째, AI로 인한 기술 실업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주 4일제 도입 등 노동시간의 재구조화를 포함한 새로운 사회 안전망 전략이 필요하다. 이는 생산성 향상으로 확보된 잉여 시간을 삶의 질 향상으로 전환하는 사회적 분배 방식이다. 여섯째, 이러한 변화를 지속 가능하게 뒷받침할 수 있도록 시민, 기술자, 법률가, 산업계 등이 함께 참여하는 참여형 AI 기본사회 거버넌스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기술의 통제는 기술자만의 권한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AI가 점차 인간의 감정과 판단을 흉내 내는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구현되고 있는 오늘날,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거나 우위에 놓이는 상황에 대한 윤리적·법적 대응 또한 긴요하다. 기술은 사람을 모방할 수 있어도 인간 존재의 의미를 대신할 수는 없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다움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정치와 제도는 그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기존의 사회계약은 노동 중심의 산업사회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시민은 일하고 세금을 내며 국가에 참여했고, 국가는 그 대가로 복지와 보호를 제공했다. 그러나 AI가 인간의 노동을 재구성하고, 기술과 데이터가 새로운 부의 원천이 되는 시대에는 이 계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 ‘AI 중심의 지능정보사회’에 맞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다시 써야 할 시간에 서 있다. 이러한 사회계약의 재구성이 실질적인 정책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분배와 성장이 균형을 이루는 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모두의 AI’는 분배의 비전이지만, 그 실현은 지속가능한 성장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공공은 디지털 기술에 대한 투자와 인프라를 확충하고, 민간은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공공 LLM, 개방형 API, AI 바우처와 같은 정책은 민간 기업의 기술 진입을 유도하고, 기술 확산이 곧 생산성 향상과 신산업 창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분배는 성장 없이 가능하지 않고, 성장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기술 기반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기술 기반의 공공 혁신과 민간 생태계의 균형 있는 선순환이 구축될 때, AI로 창출된 부가 사회 전체로 환류되는 구조를 실현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포용적 분배의 전제이다. 이것이 바로 ‘모두의 AI’가 지향하는 가치이며, 기술과 인간의 공존을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의 실질적 내용이다.
    ‘모두의 AI’를 위한 길
    by 김윤명
    2025.05.16 13:47:41
  • ‘현대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야쿠시마(屋久島) 달린다’ 얼마 전 ‘서울경제신문’과 ‘연합뉴스’에 실린 흥미로운 기사 제목이다. 요지는 현대차에서 생산한 전기 버스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야쿠시마 섬을 운행한다는 것이다. 최근 장재훈 부회장을 비롯한 현대차 임원들은 야쿠시마를 방문해 무공해 전기 버스 5대를 인도했다. 고작 5대를 팔기 위해 그들이 먼 길을 간 이유가 궁금했다. 동행한 김정훈 상무(상용 품질담당)는 “‘바다 위 알프스’로 불리는 청정한 야쿠시마에 현대차가 달린다는 것은 전기 버스 강자로서 경쟁 우위를 선점하는 한편 일본 시장에서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듣고 보니 현대차의 야쿠시마 진출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야쿠시마와 인접한 다네가시마(種子島)에 관심이 끌렸다. 두 곳은 가고시마를 갈 때마다 마음에 둔 섬이다. 섬 전체가 세계자연유산인 야쿠시마는 1993년 유네스코에 등재됐는데 일본 최초였다. 유네스코가 야쿠시마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때 묻지 않은 원시림에다 신령스러운 삼나무 때문이다. 제주도 4분의 1 크기인 이곳에는 1000년을 넘긴 삼나무가 즐비하다. 특히 수령 7000년으로 추정되는 조몬스기는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일본에서만 관람객 1,300만 명을 기록한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에도 나오는 조몬스기와 이끼 숲은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원령공주’는 환경파괴의 위험을 그린 수작으로 야쿠시마에 친환경 버스가 필요한 이유다. 영화를 제작한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은 챗GPT가 그리는 지브리 풍 만화의 원조인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야오 감독은 오랫동안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해 왔는데 ‘원령공주’ 외에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벼랑 위의 포뇨’ 등으로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을 경고해 왔다. 지난해 다녀온 히로시마 현 토모노우라(鞆の浦) 역시 감독이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소재로 삼은 작은 어촌 마을이다. 하야오는 훼손 위기에 처한 토모노우라를 배경으로 ‘벼랑 위의 포뇨’를 제작했다.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히로시마 지방법원은 도로 건설계획을 중지했다. 토모노우라가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하게 된 것은 하야오 감독 덕분이다. 야쿠시마로 가는 길은 간단치 않다. 후쿠오카 또는 가고시마 공항으로 이동한 뒤 다시 쾌속선을 타고 2시간을 달려야 한다. 탐방객들이 원행을 마다하지 않는 건 독특한 식생을 보기 위해서다. 야쿠시마는 아열대 기후부터 설산까지 보기 드문 섬이다. 연평균 강우량은 2,500~1만mm로 ‘한 달에 35일 비가 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짙은 이끼가 섬을 뒤덮고 수 천 년 된 삼나무 숲을 형성했다. ‘원령공주’에 등장하는 이끼 숲길은 탐방객들에게 최고 코스다. 탐방객들은 원시림과 이끼 숲을 헤치며 섬의 주인은 숲이고, 인간은 손님에 불과함을 깨닫고 돌아간다. 지척에 있는 다네가시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다네가시마는 일본에 처음 화승총이 전해진 곳으로, 과장되게 말하자면 근대 일본의 시발점이다. 1543년 9월 23일 다네가시마에 상륙한 포르투갈 상인 100여 명은 훗날 전쟁 판도를 바꾼 화승총을 에도막부에 전했다. 다네가시마 도주 도키타카는 이들로부터 2000냥을 주고 화승총 두 자루를 구입했다. 오늘 날 수 억 원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액수도 놀랍지만 당시 도키타카는 15살에 불과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화승총이 지닌 위력을 간파한 것이다. 도키타카는 화승총을 철포(鐵砲·뎃포)로 개량했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철포를 실전에 투입해 천하를 통일했다. 이후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조선을 유린하고 근대 일본으로 가는 종자돈을 마련했다. 다네가시마에 포르투갈 상인이 상륙한 뒤, 임진왜란까지 걸린 시간은 49년에 불과했다. 그동안 조선도 화승총을 받아들일 기회가 있었지만 조선 지식인들은 변화에 둔감했다. 1653년 또 한 차례 기회가 왔지만 역시 흘려보냈다. 그해 제주에 표류한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 상인 38명은 조선에 13년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그들을 전국에 분산한 채 구경거리로만 소비했다. 앞선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일본의 실용주의와 조선의 탁상공론은 훗날 지배와 피지배라는 치욕스러운 역사로 귀결됐다. 정치하는 이들의 책임이 그때나 지금이나 가볍지 않은 이유다. 전국시대 뎃포(鐵砲)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철포도 없이 싸우는 무모함을 빗댄 말이 ‘무대포(無鐵砲)’다. 조선은 한동안 정신 승리에만 골몰한 중국 소설속의 아Q처럼 무댓포 시대를 지냈다. 도요타 자동차는 글로벌 메이커 1위다. 현대 전기 버스가 일본에 상륙한 건 뎃포로 무장한 실력 덕분이다. 일본 최초 화승총을 받아들인 다네가시마, 일본 첫 세계유산 야쿠시마에 현대 전기차의 첫 상륙은 의미 있다. 우리나라 전기 버스가 일본 열도를 뒤덮는 날이 온다면 반도체에 이은 기술의 승리일 것이다. 역사는 반복한다는데, 이번에는 어떤 형태로 변주될지 궁금하다. 조만간 두 섬에 다녀오고 싶다.
    천년 삼나무 일본 섬에 상륙한 현대차
    by 임병식
    2025.05.08 16:03:30
  • 기업의 위기관리 컨설팅을 하다 보면 늘 긴장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위기 상황에서 임원들이 모여 심각하게 회의를 거듭하지만, 정작 고객과 직접 맞닿아 있는 현장의 목소리가 빠지는 경우가 많다. 고객센터 상담원, 세일즈 담당자, 이들의 경험과 통찰이 회의실 문턱을 넘지 못하면, 결정은 어김없이 현장과 어긋난다. 그렇게 2차, 3차 위기가 시작된다. 위기관리를 위한 결정이 새로운 위기를 낳는 아이러니다. 정책 수립도 다르지 않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 환경과 대내외 경제의 변동성 속에서 정부가 정책을 세우는 일은 늘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규제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과거의 틀에 갇혀 있고, 새롭게 떠오른 기술과 서비스는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시장에 나오지도 못한 채 사라진다. 무엇이 이 벽을 넘게 할 수 있을까. 결국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기업의 목소리에 정부가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답이다. 영국 금융감독청(FCA)의 규제 샌드박스는 좋은 예다. 핀테크 산업이 급성장하던 2016년, FCA는 기존 금융 규제가 신기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규제를 무턱대고 없애기보다는, 기업들에게 제한된 환경에서 신기술을 시험할 기회를 주었다. 기업이 시장에서 직접 서비스를 실증하고, 그 데이터를 정부와 공유하며 규제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구조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168개 기업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시장에 진입했고, 참여 기업들은 기존보다 50% 이상 더 많은 자금조달에 성공했다. ‘선구매 후결제(Buy Now Pay Later)’ 모델을 실험한 질치(Zilch)는 그 대표적 사례다. 기존 규제의 틀에서는 서비스를 내놓을 수 없던 질치는 FCA 규제 샌드박스에서 소비자 보호 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지 시험했다. 실증 결과, 400만 명의 고객과 20억 달러 기업가치를 가진 회사로 성장했다. 한국도 2019년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는 등 나름의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특히 기술 변화 속도가 가장 빠른 인공지능(AI) 분야만 봐도 그렇다. 수년 전부터 AI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했지만, AI 활용에 관한 규제와 정책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오랜 논의 끝에 인공지능기본법이 가까스로 통과됐지만, 이미 글로벌 기업들은 한국보다 한참 앞서 달리고 있다. 단지 AI만의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 산업, 모빌리티, 원격의료 등 어느 분야를 보더라도 혁신은 시장에서 앞서가고, 규제는 뒤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왜 이토록 우리의 정책은 현실을 따라잡지 못할까. 결국 답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은 누구보다 기술의 변화와 시장의 반응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존재다. 그들의 경험과 데이터를 정책에 담아냈다면, 이렇게 뒤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기업과 정부의 협력을 ‘야합’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적 정서에 갇혀 있다. 정부가 기업의 의견을 수용하면 어김없이 따라붙는 ‘특혜’, ‘재벌 편들기’라는 비난이 발목을 잡는다. 결국 귀를 닫고 안전한 길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두려움을 버려야 할 때다. 혁신 기술이 시장을 이끄는 시대, 정부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면,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담아야 한다. 기업과의 협력은 야합이 아니라, 혁신을 현실로 만드는 동반자 관계다. 규제는 시장을 지키는 울타리다. 하지만 그 울타리가 너무 높으면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된다. 울타리는 지키되, 그 안에서 새로운 길을 낼 유연성이 필요하다. 기술과 시장, 정책과 규제가 함께 움직일 때, 혁신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정부가 기업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 바로 여기에 있다.
    규제 개혁, 결국 현장에 답이 있다
    by 이보형
    2025.05.07 14:08:51
  • 책무구조도 도입은 요 근래 금융업권의 주요 화두이다. 과거에 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금융회사의 내부통제 부실 문제가 지적되었다. 금융회사와 임직원들을 어떠한 근거로 어디까지 제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무상 논란도 있었다. 개정「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책무구조도 도입 의무가 마련된 것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한 것이다. 책무구조도는 영국 금융서비스 및 시장법(Financial Services and Markets Act 2000: FSMA)상 고위 경영자 및 인증제도(Senior Managers and Certification Regime, SM & CR)에 근거하고 있는 고위 경영자 및 거버넌스에 대한 책임지도(responsibilities map)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책무구조도 도입에 따라 금융회사 임원별로 소관 영역에 대한 내부통제 ‘책무’가 명확하게 식별, 배분되어야 한다. 임원은 소관 영역에서 내부통제·위험관리 기준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관리조치를 이행해야 한다. 대표이사는 전사적 내부통제체계를 구축하고 임원들의 내부통제 활동을 감독하는 내부통제 ‘총괄’ 관리 의무를 부담하며, 임원별 내부통제 책무를 배분한 ‘책무구조도’를 작성해서 금융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대표이사와 고위임원들에게 중징계가 부과될 수 있기 때문에 세간에서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에 따라 책무구조도를 도입해야 하는 기한은 업권별로 다르다. 은행·금융지주회사는 올해 1월 책무구조도 제출을 완료했다. 금융투자업자·보험사는 자산총액·운용재산 규모에 따라 올해 7월 또는 내년 7월까지, 여신전문금융회사·저축은행은 자산총액 규모에 따라 내년 7월 또는 후년 7월까지 책무구조도를 도입해야 한다. 책무구조도 도입을 준비하는 금융회사들은 고충이 많다. 각자의 영업, 내규와 조직 현황을 전반적으로 점검해서 법의 취지에 맞게 내부통제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직 개편, 업무 분장·조정, 인사이동이 수반되는 경우가 생긴다. 내규도 정비해야 하고 전산시스템과 업무 프로세스를 변경해야 한다. 간단한 일이 아니고 전사적인 역량이 투입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금융당국도 새로운 제도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책무구조도 시범운영 제도를 시행해서 업권별 책무구조도 도입 기한 전에 참여를 희망하는 금융회사로부터 책무구조도를 조기에 제출받아 사전 컨설팅을 해주고 있다. 시범운영 기간 중에는 내부통제 관리 의무가 완벽하게 이행되지 않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 등 인센티브도 준다. 컨설팅 과정에서 금융회사들에 공통적으로 발견된 실무상 쟁점에 대해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려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당분간은 시행착오가 불가피할 것이다. 축적된 실무가 많지 않고 금융회사마다 경영 여건과 조직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금융당국이 제공하는 컨설팅이나 가이드라인에만 의존해서 개별 회사들이 내부통제 시스템을 단기간에 완결적으로 보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금융회사의 적극적인 실행 의지와 금융당국의 적정하면서도 유연한 감독권 행사가 결합되어 책무구조도 도입이 대형 금융사고를 예방하고 금융회사의 내부통제 시스템이 한층 고도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책무구조도, 내부통제 고도화를 위한 성장통
    by 유정한
    2025.05.07 12:38:00
  • 대한민국에서 검찰개혁은 미완이다. 권력기관 개혁을 이야기할 때마다 검찰이 우선적으로 거론되었지만, 그 실상은 절반에 불과하다. 검찰은 수사와 기소권을 가진 한 축이지만, 그 결과를 판단하는 법원 역시 사법권력의 또 다른 축이다. 검찰만 변화한다고 해서, 사법 구조 전체가 새롭게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둘러싼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파기환송 결정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은 무죄를 기대했지만, 이는 지나치게 나이브했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만약 검찰개혁이 실질적으로 이뤄진다면, 그 다음 개혁의 방향은 어디로 향할까. 법원이다. 검찰 권력이 줄어들면, 사법부 권력에 대한 문제 제기는 자연스러운 수순이 된다. 판결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무관해야 한다는 이상론은 누구나 동의하지만, 현실에서 법원이 권력기관의 일부로 작동해온 역사적 경험은 무시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오랜 기간 동안 정권의 변화에 맞춰 온건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권력의 흐름에 편승해왔다. 이 상황에서 법원이 개혁의 칼날이 자신을 향할 가능성을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법원은 검찰개혁 이후 ‘개혁의 다음 타깃’이 될 것을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움직임을 정치적, 제도적 차원에서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재명 후보 사건은 그런 긴장 관계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번 대법원의 파기환송은 단순한 법리 검토의 결과로만 해석할 수 없다. 사법부가 자신들의 기존 권력을 방어하는 첫 신호로 읽어야 한다. 민주당은 무죄를 기대했지만, 이는 대한민국 사법권력의 구조를 냉정히 바라보지 못한 순진한 희망에 불과했다. 정치는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이다. 이재명 후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권력기관 개혁은 이제 2막을 맞고 있다. 검찰개혁이 미완이라면, 법원개혁이 기다리고 있다. 법원은 이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반발한다. 진정한 사법개혁을 원한다면, 이제는 법원이라는 성역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더 과감한 대안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 판사의 한계와 권력적 이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정한 범위에서는 인공지능(AI) 판사의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소액사건이나 반복적 사건의 경우, AI를 통한 예측적 판결이 실험되고 있다. AI 판사는 인간과 달리 정치적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고, 동일한 법률 기준에 따라 일관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최종 판단은 인간이 해야겠지만, 사법절차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AI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사법의 신뢰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단순한 제도 수정을 넘어, 기술을 활용한 구조적 혁신이 필요하다. 법원개혁은 인간 판사의 권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사법 신뢰를 회복하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제는 법조 엘리트의 폐쇄적 성역을 깨고, AI라는 새로운 도구를 통해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사법체계를 고민해야 할 때다.
    사법절차 정의를 위한 AI
    by 김윤명
    2025.05.06 10:11:36
  •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해법은 제도와 정책을 넘어, 삶의 기억을 품은 공간과 사람의 회복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올해 4월 현재 대한민국 수도권의 인구는 약 2,600만명으로 이는 전국 총인구의 50%를 차지한다. 도시 집중화로 인한 수도권 인구 밀집과 지방 소멸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 만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잃어버린 일자리와 사람들을 다시 지역으로 불러 들이는 ‘리쇼어링(Reshoring)’은 과연 가능할까. 고착된 도시 생활과 일상의 안정성을 포기하고, 낯선 지역으로의 귀환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질문의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답은 ‘사람’과 ‘공간’, 그리고 그곳에서 피어나는 ‘상상력’에 있다. 지난달 26일, 농촌유토피아대학원 학생들과 경주 불국사 인근 진현동을 찾았다. 수학여행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세월의 격랑 속에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폐허로 방치되었다. 지역을 강타한 지진과 코로나19 팬데믹, 인구 감소의 삼중고 속에 문화와 역사마저 침묵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최근 지역 주민들과 문화 재생의 뜻을 함께하는 민간인들의 노력으로 ‘불리단길 형성’이라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변화의 현장을 수업으로 마주했다. 수업이 진행된 ‘주오일장’은 과거의 포장마차 감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실내 포차 공간이다. 평소에는 저녁에만 문을 여는 곳이, 이날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나의 강의장이 되었다. 지역의 유휴 공간이 ‘교육과 사유(思惟)’의 장소로 탈바꿈된 것이다. 이는 농촌유토피아를 실행하는 학생들의 발표와 토론장으로 ‘로마드대학원(nomad+campus)’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상상력을 창조하라’는 주제로 지역에 방치된 폐 공간을 살려 지역 활성화를 이루고 있는 젬스톤 F&B(주) 이창렬 대표의 강의는 현장이 학문을 도전하게 하고, 이론이 실천으로 검증되었다. ‘도시에서 지역으로’라는 말이 물리적 이동이 아닌,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이동임을 실감하게 했다 스페인 자치공동체 마리날레다를 이야기한 ‘우리는 이상한 나라에 산다’에 “빵과 장미”라는 구절이 있다. 인간에게는 생존을 위한 빵뿐 아니라, 존엄과 꿈을 위한 장미도 필요하다는 의미다. ‘주오일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방치된 공간을 공동체의 가치와 지역 청년들의 소통을 담아낸 ‘장미’와 같은 공간이다. 농촌유토피아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수업에 참여한 대학원생 조윤지씨는 “여러 분야에서 이미 각자의 재능으로 전환을 향해 나아가는 분들을 보며 많이 배웠다”며 “비록 지금은 일개 도시민이지만, 도시와 지역의 모습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데 일조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또 대학원생 박수진씨는 “현장을 통해 우리 젊은 청년들의 조용하지만 힘찬 움직임을 보며 많은 것을 깨달았다”며 현장 수업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들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한 의지로 다져졌다. 농촌유토피아대학원이 추구하는 교육은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닌, 현장을 교과서로 삼는 실천적 배움이다. 지역 사람들의 삶과 공간, 그리고 역사와 문화 유지를 통해 상상력을 창조하는 인재를 육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농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실제적 대안인 것이다. 진현동의 불리단길, 주오일장, 그리고 이곳을 찾는 청년들의 발걸음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지역’의 희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공간 활용의 기술을 넘어 가능성에의 도전과 사람을 품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변화다. 지역은 누군가의 삶터이며, 기억의 저장소다. 지역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한 인구 감소의 문제가 아닌 삶의 방식과 역사, 공동체의 가치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농촌유토피아는 농촌을 살리자는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어떤 공동체를 꿈꾸는지를 묻는 질문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유토피아는 멀리 있는 이상향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가능성의 씨앗이 심어진 곳, 그곳이 도시든 농촌이든, 삶이 숨 쉬는 곳이 바로 유토피아다. ‘리쇼어링’의 열쇠는 정책 이전에 사람이고, 공간이며, 상상력이다. 지역이 살아나는 현장에 농촌유토피아는 강한 생명의 꽃을 피울 것이다.
    빵과 장미 그리고 ‘리쇼어링’
    by 조금평
    2025.05.01 13:00:36
  • 작년 국내 과학기술계는 두 가지 큰 사건을 겪었다. 하나는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이 전례 없이 삭감된 것으로, 그간 한번도 경험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라 연구현장에 미치는 충격과 혼란이 사뭇 컸다. 다른 하나는 유명 학술지인 네이처 인덱스(Nature index)가 특집기사를 통해 한국이 높은 연구개발 투자에 비해 연구개발 성과가 놀라울 정도로 낮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성격과 방식으로 발생했지만 그 배경에는 모두 연구개발 성과가 저조하다는 문제 인식과 비판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공공연구개발 투자 대비 성과가 낮다는 비판은 이미 10년 전부터 제기되었다. 더욱이 GDP 대비 정부연구개발투자 비중이 세계 1~2위 수준임에도 연구개발 저생산성 구조는 개선되지 못하고 고착화되는 양상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는 ‘한국형 R&D 패러독스’라는 부정적인 별칭으로 불린다. 그동안 정책적 노력으로 일부 성과 개선이 있었지만 여전히 연구개발투자 증가율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질적인 성과 개선이 더디다. 네이처 인넥스는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공동연구의 확대, 여성 연구인력의 확대, 산학협력 강화 등을 제언했지만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선 ‘별로 와닿지 않는다’라는 반응이다. 이유는 우리나라만이 지닌 독특한 구조적 관성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정부 주도로 경제발전을 추진해 왔고 과학기술은 그 과정에서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역할을 해 왔다. 정부의 높은 관심과 기대는 연구개발 투자 확대로 이어졌지만 그에 비례해 정부가 연구생태계에 미치는 지배적 영향력도 두드러지게 큰 특징이 있다. 그동안 대학과 공공연구기관 등 주요 연구주체들은 연구예산의 대부분을 정부 재원에 의존해 왔다. 그런데 정부는 공공연구기관을 연구개발의 특수성을 고려해 별도로 예외적 관리하기보다는 일반 공공기관과 유사하게 예산투입관리를 강화하는 방식을 적용해 왔다. 이로 인해 연구주체들은 실질적 성과창출보다 정부의 형식화된 요구와 규율에 맞추는 데에 집중하게 되었고, 연구현장은 점점 관료화라는 덫에 빠지게 되었다. 관료화된 연구환경에서 연구자들은 성과가 불확실한 도전과제보다는 예측가능한 안전한 연구를 선택하며, 실질적인 필요성보다는 형식적 요건을 충족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데 집중하게 된다. 경쟁이 곧 효율이라는 인식은 과잉 경쟁과 폐쇄적 문화를 낳아 개방과 협력생태계 형성을 어렵게 한다. 성과관리는 객관성이 강조되어 정량평가에 의존하게 되고 전문성에 기반한 정성 평가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연구성과 창출의 핵심요소인 도전성, 유연성, 창의성을 잃게 해 혁신적인 성과창출과 질적인 제고를 방해한다. 그동안 연구생태계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다. 정부는 과잉경쟁 환경을 완화하기 위해 경쟁 중심의 예산제도인 PBS(Project Based System) 개선을 추진해 왔고 과도한 평가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들도 일부 시행해 왔다. 또한 출연연구기관의 자율적 운영을 제약했던 공운법(공공기관운영에 관한 법률)적용도 어렵게 해제되었다. 문제는 이런 조치들이 일부 파편화된 개선에 머물거나 또 다른 제도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제도 개선의 구조적 한계 즉, 정부의 권한 축소나 관리 노선에서 예외를 요구하는 자율과 책임 운영방식은 수용되기 어려운 경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도래와 기술패권 경쟁 심화로 과학기술의 혁신적인 성과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핵심요소가 되었다. 이제 연구성과는 단순한 과학적 성과를 넘어 국가안보와 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전략적 자산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연구성과를 창출하는 주체들의 현장 생태계가 도전적이고 창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지 못한다면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더라도 혁신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다. 국가간 혁신경쟁의 치열함 속에서 경쟁력의 핵심은 적합한 전략개발 능력과 인재의 탁월성에 있다. 그래서 우수한 전문인력들이 집결해 있는 공공연구기관의 연구환경을 선진화하는 것은 극한의 혁신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다. 핵심기술의 전략 개발에 필요한 통찰력도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접근과 연구를 통해서 길러지고 확보된다. 우리나라는 외형적으로는 경제규모(GDP) 세계 12위, 수출규모 6위라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 규모(GDP 대비 정부연구개발비 비중)도 글로벌 선두권이다. 그런데 국가 혁신 소프트웨어인 운영시스템과 연구생태계의 질적 수준은 지난 20년간 선진화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단순한 투자 확대를 넘어 연구생태계의 선진화 혁신을 통해 한국형 R&D 패러독스 구조를 극복하고 과학기술혁신 강국으로 변화해야 한다.
    ‘한국형 R&D 패러독스’ 어떻게 극복할까
    by 이민형
    2025.04.29 11:03:58
  • 노인복지관의 풍경을 그려본다. 스마트폰을 꺼내 AI 챗봇으로 건강 상담을 받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어르신들과 정작 컴퓨터 전원 버튼조차 낯설어하는 분들이 공존하는 풍경은 역설적이었다. “AI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삶이 훨씬 편리해진 건 확실해요.” 누군가가 말했지만, 그 편리가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는 현실은 분명한 문제다. AI는 이제 ‘선택의 기술’이 아니다. 교육, 의료, 복지, 고용·금융 심사 등 우리 일상의 구석구석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기술 혜택을 누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간극은 내내 커져만 간다. AI 활용 능력이 곧 생존 능력이고, 디지털 리터러시는 존엄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행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이하 AI 발전법)은 산업 진흥과 규제 완화에만 골몰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 법은 1년여간 유예되어 2026년 시행 예정이다. 기업 지원, 연구개발 촉진, 신시장 창출 등 성장 전략은 촘촘해 보이지만, AI로 인한 차별·편향·사생활 침해에 대응할 장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제안한 ‘모두의 AI’를 뒷받침하기 위한 ‘AI 기본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AI 기본권의 내용은 첫째, AI 접근권이다.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AI 서비스·교육·인프라에 균등히 접근할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도서관·복지관 등 공공장소를 ‘AI 교육 거점’으로 삼고, 온라인·오프라인 AI 리터러시 강좌를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 둘째, AI 공정성과 설명권이다. 자동화된 결정의 영향 요인과 알고리즘 핵심 논리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시각자료로 설명받을 권리를 법에 명시해야 한다. 셋째, AI 고른 혜택이다. AI로 인한 과실을 누구나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개인의 데이터가 제공되었다면 그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후보가 추진했던 ‘경기도 데이터 배당’은 이러한 정치철학이 담겨진 것이다. 이처럼 실질적 권리로서 AI 기본권을 법률에 새겨야만, 기술 발전의 과실이 소수에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AI가 그리는 세상은 법과 제도가 일관되게 뒷받침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AI 기본권의 보장 없이 무분별한 산업 성장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AI 기본권은 곧 ‘AI 기본사회’라는 더 큰 비전으로 이어진다. AI 기본사회란 일부 계층이 아닌 모두가 AI 혜택을 체감하는 포용적 사회를 뜻한다. 교육 격차 해소를 위해 초·중·고 교육 과정에 AI 리터러시 과목을 도입하고, 지방·도서벽지에도 동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디지털 복지 강화를 위해 취약 계층 대상 AI 건강 모니터링·맞춤형 복지 서비스를 구축하되, 개인정보 보호 장치를 철저히 마련한다. 공공서비스 혁신 차원에서 AI 도입 시 시범사업·사전영향평가·국민 의견 수렴 절차를 의무화한다. 이를 현실로 만들려면, 법제와 거버넌스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 우선, 현행 AI 발전법은 문제의 정의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AI라는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산업성장을 위한 가치도, 국민의 AI 기본권에 대한 가치도 담겨있지 않다. AI와 입법을 위한 문제정의가 처음부터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지금 하위법령 작업중이나 이 또한 이해관계에 휩쓸리고 있다. 입법과정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방안을 제시한 사람은 시행령 작업에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AI 기본법과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제대로 입법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행 AI 발전법은 ‘AI 산업법’으로 개정하여 기술개발과 혁신을 전담토록 한다. 기업 지원·데이터 시장 활성화·규제 완화는 이 법에서 다루는 것이 맞다. 산업진흥과는 별개로, AI 기본권과 AI 기본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내용은 ‘AI 기본법’을 제정하여 구체화해야 한다. 법이 바뀌면, 제도를 운영할 거버넌스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AI 기본권을 구체화하고 AI 거버넌스로서 현재 산업 중심으로 짜인 ‘국가AI위원회’를 ‘AI기본사회위원회’로 확장 개편하는 것이다. 위원회는 산업영역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영역까지 포괄하고, 정책의 심의·조정 권한 및 예산권까지 갖는 위원회로 성격을 변모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등 관련 위원회의 역할과 거버넌스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기술 발전과 함께, 그 기술을 공정하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새 정부는 AI 기본권과 AI 진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AI는 생활, 교육, 산업, 문화, 상거래 등 모든 영역에서 기본 인프라가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별로 AI를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통령 소속으로 ‘AI 국가전략위원회’를 두고 글로벌 ‘AI TOP 3’를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 수장은 행정가나 경영자 출신이 아닌 AI 기술 전문가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AI 기본법은 특정 부처의 특정 과를 위한 ‘과법’이 아닌 대한국인의 ‘모두의 법’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AI는 기업이나 국민 모두의 AI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AI 기본권 없이 AI 성장은 없다
    by 김윤명
    2025.04.28 17:17:16
  • 433년 전 4월 13일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서막이 오른 날이다. 1592년 이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봉장으로 하는 왜군 17만여 명은 조선 침략 길에 올랐다. 규슈 남단 가라쓰(唐津)에서 출항한 왜군은 12시간 만에 부산진항에 상륙했다. 왜군은 다시 육로를 따라 한양까지 무인지경으로 내달았다. 무능한 선조는 2주 만에 안방을 내준 채 의주로 도주했고, 분노한 백성들은 도성을 휘저으며 곳곳에 불을 놓았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가 불탔고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수많은 문화유산은 잿더미가 됐다.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에 걸쳐 왜군이 출진했던 가라쓰에 다녀왔다. 임진왜란 직전 축조한 이곳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은 왜군이 출진에 앞서 호흡을 가다듬었던 곳이다. 지금은 텅 빈 성터만 있다.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였던 나고야 성터를 돌아보는 내내 눈부신 벚꽃 아래서 착잡했다. 후쿠오카를 빠져나와 규슈 북서부에 위치한 사가(佐賀) 현 가라쓰로 가는 길은 한적하다. 교통체증으로 번잡한 후쿠오카와 달리 해안도로는 여유롭다. 50km, 1시간여를 달려 가라쓰에 접어들면 무지개 솔밭으로 불리는 국가명승 ‘니지노 마쓰바라(虹の松原)’가 눈에 들어온다. 가라쓰 성에 오르자 지나온 솔밭과 바다를 낀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과거 가라쓰는 대륙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살려 조선, 중국과 교역을 통해 흥성했다. 지금은 여느 지방 소도시와 다를 바 없지만 433년 전 가라쓰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무라이들로 북적였다. 나고야 성 주변으로 130여 개에 달하는 진영이 섰다니 엄청난 전쟁특수를 짐작할 수 있다. 나고야 성터와 나고야 성 박물관은 불행한 과거를 돌아보는 한편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히젠’은 규슈 서부를 일컫는 옛 행정 명칭이다. 우리나라 호남, 영남, 호서와 같다. 나고야(名護屋) 성은 혼슈 중부에 위치한 나고야(名古屋) 성과는 발음만 같을 뿐 다른 성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는 조선 침략을 앞두고 이곳에 축성을 지시했다. 전국 통일 후 도요토미는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는데, 조선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도요토미가 궁벽한 가라쓰에 축성을 지시한 건, 조선과 최단 거리(140km)에다 배를 숨기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쾌속선을 이용하면 부산에서 가라쓰까지 2~3시간이면 충분하다. 왜군은 이곳에 진을 치고 조선 침략을 논했다. 당파로 갈린 조선 정부가 전쟁 가능성을 놓고 대립할 때 도요토미는 대륙 침략에 필요한 전쟁 수행을 마쳤던 것이다. 도요토미는 명나라 정벌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조선침략도 포함돼 있었다. 사무라이의 칼과 기치로 숲을 이뤘을 나고야 성은 이제 쓸쓸한 폐허다. 가라쓰에는 당시 10만여 명이 몰려 오사카에 이은 제2 도시였다. 50만 평, 둘레 6km에 달하는 방대한 성터를 돌다보면 세월이 덧없다는 걸 실감한다. 떠들썩한 함성은 간데없고 거친 바람만 웅성댄다. 왜군이 빠르게 한양을 접수하자 조선정부는 갈팡질팡했다. 시기와 질투에 눈먼 선조는 판단력마저 상실했다. 의병과 이순신에 힘입어 가까스로 나라를 보존했음에도 그는 이순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역사는 선조를 어리석고 비열한 군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무능한 왕을 꼽을 때마다 선조는 인조, 고종과 함께 거론된다. 당파 싸움에 매몰된 조선은 언제 무너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일본 정황을 살피고 돌아온 동인 김성일과 서인 황윤길은 전혀 다른 정세 판단을 내놓았다.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이 침입할 것”이라며 경계를 촉구한 반면 김성일은 “사려 깊지 못한 허풍”으로 일축했다. 도요토미에 대한 인물평 역시 “눈빛이 반짝반짝하며 담과 지략이 있다”와 “쥐새끼와 같아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된다”며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훗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당파싸움의 폐해를 경계했지만 진영싸움은 오늘도 여전하다. 나와 내 편만 옳다는 확증편향으로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막대한 사회갈등 비용은 성장 동력을 갉아먹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대주의는 심화됐다.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의해 조선은 다시 태어났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앞세우며 속국을 자처했다. 자신들의 무능으로 국토가 유린됐음에도 통렬한 반성 대신 중국을 떠받드는 것으로 합리화했다. 무능한 나라에 무능한 기득권층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400여 년 전 임진왜란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주춧돌과 성곽만 남은 나고야 성터에서 자문했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에 자신 없다. 12.3 계엄 이후 망가진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국민을 중심에 두는 정치가 절실하다. 다시 횃불을 든 분노한 시민들이 아른거린다.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 ‘나고야 성’
    by 임병식
    2025.04.14 13:33:44
  • 최근 글로벌 혁신시장은 기술패권화 흐름과 함께 국가 간 혁신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글로벌 혁신 강자인 미국은 미래기술을 앞세워 질주하고 중국이 맹렬히 추격하는 G2 중심의 혁신경쟁체제가 펼쳐지는 중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기술력을 앞세워 신산업과 시장을 선점하자 이들과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유럽 및 아시아 선진국들은 파괴적 혁신을 창출하는 첨단기술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그 돌파구로 각광받는 대안이 미국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Defenc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모델이다. DARPA는 구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 충격을 계기로 1958년에 설립된 미국 국방부(DOD) 산하의 연구개발 기획평가관리기관이다. 이 기관은 미국의 기술적, 전략적 우위 선점을 목표로 도전적인 과제를 발굴하고 해결해 뛰어난 혁신성과를 창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군의 레이다망을 피하기 위한 스텔스 전투기를 비롯해 무인항공기, 군사용 로봇과 같은 국방전략기술의 확보뿐만 아니라 기술이전을 통해 인터넷, GPS, 인공지능(Siri), 드론, 자율주행, 의료용 백신 등과 같은 파괴적 혁신기술들을 탄생시켰다. 그로 인해 혁신강국인 미국에서 DARPA는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한 영국, 독일, 일본 등 혁신경쟁국들은 미중과 벌어지는 혁신격차를 줄이기 위해 DARPA를 모방한 혁신적인 연구개발제도를 경쟁적으로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국가마다 구체적인 방식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들 모두 도전적인 연구개발을 통한 첨단기술 확보와 획기적인 혁신성과 창출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대부분 기대했던 혁신성과 창출이 잘 보이지 않는다. 원인은 도전적인 연구개발에 집중한 기술 확보만으로는 파괴적 혁신 창출에 요구되는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DARPA 제도를 도입한 국가들은 임무 달성을 위한 도전적인 연구개발 추진이나 연구개발 수행에 전권을 가진 PM(Project Manager) 제도와 같은 연구관리 방식에 주목한다. 정작 중요한 도전 임무의 설정 조건은 간과된다. DARPA는 일반적인 공공수요가 아닌 군사전략적 우위 확보를 위해 현장에서 확보되어야 하는 명확한 필요수요를 도전 임무로 설정한다. 그리고 이를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로 해결한다. 국방에 필요한 사항이 민간에도 통용되는 것이면 개발된 기술은 민간에 이전되고 거대한 시장수요로 이어진다. 일례로 핵 공격에 대비한 안전한 정보관리를 위해 서버를 여러 곳에 분산 배치해야 하는데 이를 연결하기 위해 개발된 알파넷(ARPAnet)은 민간의 연결 네트워크 수요와 만나면서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인터넷으로 발전되었다. DARPA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분야와 달리 거대한 조달시장을 통해 혁신적인 제품을 수용하는 것이다. 안정적인 혁신시장은 기업에게 기술혁신 참여를 유인하고 조달가능한 수준으로 신기술의 완결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또한 개방적인 연구네트워크는 민간으로 첨단기술의 이전을 촉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이러한 안정적인 혁신시장의 존재와 개방적인 협력 체계, 시장의 혁신 수용이 DARPA의 차별적인 혁신성과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처럼 DARPA는 일반적인 공공연구개발과 유사한 과정을 거치지만 그 내용은 완전 차별적이다. 특히 도전의 필요성과 내용이 명확하고 쉽게 제시되고, 기술개발 및 개발 기술의 사업화 과정은 모두 혁신을 향해 유연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성과 창출 여건에도 최근의 혁신환경 변화에 대응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사업화 성과 창출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 첨단기술의 상업화 중요성은 전 구글 최고경영자(CEO)인 에릭 슈미트가 설립한 미국의 민간 싱크탱크인 SCSP(Special Competitive Studies Project)의 미중 간 주요 전략기술분야 경쟁력 분석 보고서(Welcome to the Arena, 2025)에서도 제기된다. 미국이 주요 기술분야에서 앞서가고 있지만 중국은 제조업 역량을 기반으로 상업화에 집중하는 전략을 통해 격차를 줄이거나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첨단 기술혁신 경쟁에서 기술개발 전략 못지않게 상업화와 시장전략이 중요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술패권화에 따른 글로벌 혁신경쟁체제에서 혁신 강국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략적 위치를 점검하고 재설정해야 한다. 특히 도전적인 연구개발체계를 넘어 시장의 혁신전략 강화를 포함하는 국가혁신체계의 재구성을 추진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 여건에 맞는 독창적인 혁신전략으로 우리만의 혁신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G2 잡으려면 국가혁신체계 다시 짜야
    by 이민형
    2025.04.03 11: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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