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은 뜨겁다. 주말마다 도심은 서로 다른 깃발과 구호를 든 인파로 뒤덮인다. 이것은 단순한 인상이 아니다. 최근 수년간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등의 국제 조사에서 한국은 빈부 격차와 이념 등 주요 갈등 항목에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갈등 공화국’이라는 오명이 국제적인 통계로 입증된 셈이다. 표면적으로 한국 사회는 의사 표현이 넘쳐나는 듯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소통’은 실종됐다. 광장에는 자기주장만 쏟아내는 거대한 ‘목소리’들만 공명할 뿐, 상대를 이해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숙의(Deliberation)’는 자취를 감췄다. 지금 우리 사회의 공공정책 결정 과정은 합리적 토론의 장이 아니라, ‘진영 논리’의 전장(戰場)으로 변질되었다. 정책의 타당성이나 사실(Fact) 관계보다 “누가 제안했는가”가 찬반을 가르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 정부는 반대편을 설득할 생각 없이 일방통행하고, 야당은 대안 없는 반대로 국정의 발목을 잡는다. 내가 지지하는 진영의 정책은 선(善)이고, 상대방은 타도해야 할 악(惡)으로 규정되는 이 적대적 공생 관계 속에서 행정의 본질은 길을 잃었다.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고 갈등을 넘어설 해법은 결국 ‘공공가치(Public Value)’의 회복에 있다. 공공가치란 정부가 일방적으로 던져주는 시혜가 아니라, 시민과 정부가 함께 규정하고 합의해 나가는 사회적 가치의 총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진영이 이기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우리 공동체를 위한 공공가치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물론 모든 사안을 숙의할 수는 없다. 재난 대응이나 긴급한 경제 위기 앞에서는 리더의 신속한 결단이 곧 공공가치다. 하지만 연금 개혁, 에너지 정책, 의료 문제 등 사회 구조를 바꾸는 거대한 난제들은 속도전으로 풀 수 없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절차적 정의’와 ‘공정성(Fairness)’이다. 이는 단순히 시간을 끄는 요식행위가 아니라, 공공가치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기둥이다. 국민은 결과가 다소 불만족스러워도 그 결정에 이르는 과정이 공정하고 자신의 목소리가 경청되었다고 느낄 때 결과를 수용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 정치권의 대응은 공공가치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갈등이 터지면 정부는 사후 약방문식으로 수습하거나 형식적인 위원회 뒤에 숨고, 야당은 이를 정쟁의 도구로만 삼는다. 이는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훼손하는 공범 행위다. 숙의를 생략한 채 효율성만을 앞세운 정책은 당장은 빨라 보일지 몰라도, 결국 거센 저항에 부딪혀 사회적 비용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비효율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 이제 행정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정부는 단순한 법 집행자를 넘어, 공공가치를 창출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정책 설계 단계부터 이해관계자를 참여시키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반대파를 국정 운영의 걸림돌이 아닌, 정책의 사각지대를 비춰주고 공공가치를 더 풍성하게 만드는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 숙의는 시끄럽고, 지루하며,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때로는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치열하게 토론하고 조금씩 양보하며 합의의 경험을 축적해 나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공가치 창출이다. 행정은 정답을 강요하는 권력이 아니라,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관리하며 공공가치를 구현하는 서비스여야 한다. 정부와 야당 모두 진영의 논리를 넘어, 공공가치 중심의 숙의의 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것만이 분열된 광장의 소음을 화합의 선율로 바꾸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