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60
  • 디지털트윈(Digital Twin)은 현실 세계의 객체, 시스템, 프로세스를 가상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시뮬레이션하는 기술입니다. 이를 통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트윈의 개념은 단순한 '디지털'과 '트윈(쌍둥이)'이라는 직관적인 단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오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디지털트윈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고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디지털트윈은 단순한 정보 제공 시스템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IT 기반의 정보 시스템은 데이터를 가공하고 전달하는 역할에 그치지만, 디지털트윈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실행 가능한 해법을 도출할 수 있는 ‘지혜의 도구’입니다. 지혜는 단순한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능력입니다. 디지털트윈은 다양한 시뮬레이션과 분석을 통해 단순한 데이터 이상을 제공하며, 궁극적으로 지혜를 구하는 도구로 작용합니다. 디지털트윈 기술은 AI 개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디지털트윈 기반 가상실험을 통해 AI를 만드는 데 필요한 데이터를 무한정 생성할 수 있습니다. 현실 세계를 가상으로 재현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함으로써, AI 모델 학습에 필요한 방대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데이터는 Agent AI와 Physical AI를 실현할 수 있는 핵심 기술입니다. Agent AI와 Physical AI는 인간의 개입 없이 실제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자율적으로 일을 수행하는 AI입니다. 디지털트윈은 현실 세계를 정밀하게 모델링하고 시뮬레이션하며, 그 데이터로부터 AI가 자율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게 해줍니다. 디지털트윈이 제공하는 정확한 현실 재현은 AI가 실시간으로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자율적으로 동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합니다. 디지털트윈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PoC(Proof of Concept, 개념 증명)가 필요합니다. PoC는 디지털트윈 기술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데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실험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 기술적 실현 가능성을 입증하고, 고객의 요구에 맞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PoC는 디지털트윈의 실제 적용 가능성을 확인하고, 기술 개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디지털트윈 기반의 PoC는 AI 모델을 위한 데이터를 생성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통해 Agent AI와 Physical AI의 구현 가능성을 테스트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고객의 요구사항을 면밀히 분석하고, 실제 데이터를 활용하여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PoC의 목표는 단순히 기술을 시연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기술이 실제 문제 해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디지털트윈은 AI 혁신의 핵심 기술로, 데이터를 무한정 생성하고 이를 통해 Agent AI와 Physical AI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인 PoC는 디지털트윈이 실제 환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검증하고, 기술적 실현 가능성을 입증하는 과정입니다. 디지털트윈을 통해 AI 혁신을 가속화하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트윈은 ‘지혜의 도구’
    by 양영진
    2025.03.31 14:51:41
  • 우리도 그렇지만 일본 또한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이 있었다. 메이지유신을 즈음해 궁벽한 시골에서는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쏟아졌다.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기 전까지는 시골 출신이라도 신분상승을 꿈 꿀 수 있었다. 이제 ‘개천 용’은 옛말이 됐다. 일본에서 ‘개천 용’이 많이 난 지역은 하나같이 외진 시골이다. 가고시마 가지야초(加治屋町)와 야마구치 하기(萩)가 대표적인데, 모두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깡촌이다. 이곳에서 메이지유신을 전후해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무더기로 나왔는데, 총리대신은 물론이고 해군대장과 육군대장, 교육‧정치 사상가가 줄을 이었다. 남쪽 끝 가지야초에서는 ‘유신 3걸’ 중 오쿠보 도시미치(총리)와 사이고 다카모리(참모 총장)를 비롯해 총리 2명, 육군대장 3명, 해군 대장 6명이 나왔다. 가지야초 ‘유신의 길’에는 이곳 출신 인물 18명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는데 면면이 빼어나다. 모두 반경 500m에서 나고 자랐다. 하기(萩) 또한 마찬가지다.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요시다 쇼인을 정점으로 이토 히로부미(총리)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육군 대장), 기도 다카요시(유신 3걸), 다카스키 신사쿠(회천 대업 주역), 가쓰라 다로(육군 대신과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총리와 조선 총독)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인구 4만 명에 불과한 곳에서 총리 5명과 대신, 육군대장이 배출됐으니 그야말로 ‘개천 용’의 성지다. 인물 경쟁에서 오이타(大分)현 기쓰키(杵築) 시를 빼놓을 수 없다. 구니사키(國東) 반도에 속한 기쓰키 또한 규슈 북동쪽에 위치한 한적한 바닷가다. 그런데도 일본 근대사를 추동한 숱한 ‘개천 용’이 나왔다. 지난주 구니사키 반도를 일주하면서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은 쇠락했지만 한때 일본 근대사를 쥐락펴락한 인물들이 쏟아졌다는 게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일본인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 대부분은 우리와 악연이라서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일관계가 제대로 보인다. 김종필 총리는 “한·일 역사를 넘나들면 영웅이 역도(逆徒)가 되고 역도가 영웅이 된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앞서 소개한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카타 아리토모, 데라우치 마사다케, 가쓰라 다로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조선 침략과 직접 연관돼 있다. 오이타가 배출한 최고 스타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다. 게이오(慶應)대학을 설립하고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쿠자와는 뛰어난 계몽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당대 일본 지식인과 근대화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후쿠자와는 700여 년 동안 지속된 막부 정치를 끝내고 서양문물을 수용하자고 역설한 선각자였다. 김옥균을 비롯해 유길준,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윤치호 등 조선의 개화파 사상가들도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후쿠자와는 갑신정변에도 개입했다. 요시다 쇼인과 함께 일본 근대화를 언급할 때마다 나란히 거론되는 후쿠자와는 얼마 전까지 일본 최고액 1만 엔 권을 장식하기도 했다. 정한론과 주변 국가 침략을 부추긴 죄과가 있지만 그에 대한 오이타 시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오이타가 배출한 또 다른 인물은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1887~1957)다. 그는 태평양 전쟁 당시 외무대신을 지냈고 천황을 대신해 항복문서에 날인했다. 10여 년 전 처음 기쓰키 성에서 시게미쓰와 조우했는데 예상치 못했다. 인근 무사마을을 돈 뒤 오른 기쓰키 성에서 전시물 가운데 시게미쓰 유품이 눈에 뜨였다. 윤봉길 의사 사진과 그가 입었다는 혈흔이 묻은 해진 옷, 그리고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사진 등이다. 윤 의사가 왜 이곳에 있을까하는 의문은 사진 설명을 읽고 풀렸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기념식장에서 윤 의사가 던진 폭탄에 오른 발을 잃었다. 너덜너덜한 옷은 그때 입었던 것이다. 그는 1945년 8월 15일에는 미주리 전함에서 일본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날인했다. 유튜브 영상에서 나레이터는 ‘일본 대표단을 이끄는 시게미츠 외무상은 수년 전 상하이에서 한국인 애국자에 의해 부상을 입었으며, 한쪽 다리는 의족이다.(They are headed by Agent Mamoru Shigemitsu, Foreign Minister of the Japanese surrender Cabinet, who was wounded by a Korean patriot in Shanghai years ago and walks on an artificial leg.)’고 소개한다. 기쓰키 시가 시게미쓰 유품을 전시한 의도는 자랑스러운 출향 인사임을 알리기 위해서였겠지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불편한 역사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쓰키 성에서 ‘상하이 의거’ 관련 유품이나 항복문서 서명 사진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기쓰키를 찾는 한국인들 감정을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인지 알 수 없다. 지난주 방문에서도 시게미쓰가 쓴 휘호와 저서, 가족사진으로 새롭게 꾸민 전시물만 확인했다. 이외 기쓰키 출신으로 조선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南次郎, 1874~1955)와 연합함대 사령관을 역임한 해군 대장 도요다 소에무(豊田副武, 1885~ 1957), 호세이(法政)대학 설립자 가네마루 데쓰(金丸鐵)와 이토 오사무(伊藤修), 그리고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1924~) 총리가 있다. 소도시치고는 대단한 인맥이다. 어쩌면 기쓰키 시민들은 이들을 통해 더는 ‘개천 용’을 기대할 수 없는 상실감을 달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니사키 반도에서 만난  ‘개천 용’
    by 임병식
    2025.03.31 10:54:57
  • 24. 아버지의 유일한 유산 “진욱아.” 십자매 한 쌍의 본래 주인이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 담자야.” 핸드폰을 통해 전해오는 진욱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진중했다. 장례식장에서도 진정 위로가 되었던 목소리였는데, 그때보다 따뜻함이 더 묻어 있었다. “아버지 장례식에 와서 긴 시간 함께 해주어서 고맙다. 아버지는 항상 네가 내 곁에 친구로 남아 있기를 바라셨지.” “나야말로 아버님을 많이 좋아하고, 아버님을 가장 존경했잖아. 아버님 덕분에 내가 그나마 사람이 된 것 같아. 곁에 안 계셨으면 부정(父情)을 모르고 자랄 뻔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늘 아버님께 감사하며 살았다. 등록금이 없어서 쩔쩔맬 때도 아버님은 나에게 일을 시키고 돈을 주시곤 했지. 공짜로 주지 않으신 이유를 어른이 되니까 알겠더라. 그건 그렇고, 많이 힘들었지. 너를 좀 더 챙겨야 했는데, 아내 출산 때문에 미처 그러지 못했구나.” “어, 아기가 나왔냐?” “엄마를 닮은 이쁜 공주님이 나왔어.” “그랬구나. 네 목소리가 본래 다정하지만 뭐랄까 부드러우면서도 생명력이 더 느껴졌거든. 정말 축하한다. 많이 기다린 아기잖아. 이럴 때, 친구로서 어떻게 기쁜 마음을 전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꽃다발은 도리어 아기의 호흡에 해가 될 것 같고, 과일이 산모에게 유익한가? 아, 유모차가 필요한가?” “아직 유모차를 탈 시기는 아냐. 미란 씨가 몸을 좀 추스르면 너 보러 갈게.” “그것보다 내가 부탁할 것이 있어서. 새를 좀 부탁할까 하고, 여행 가려고.” “그렇구나. 지금 몇 마리지?” “한 마리 남았어. 아버지 장례식에서 돌아오니, ‘그리’가 거의 죽어가고 있더라고.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리’가 죽자 남은 ‘도리’가 목소리를 잃어버렸어. 이놈을 보고 있으려니 너무 괴롭고 애처롭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내가 6년 전 해외여행 떠나면서 너에게 맡긴 새들의 후손인데, 당연히 내가 맡아야지. 그런데 미란 씨가 임신하면서부터 내 결정력이 없어졌어. 아기에게 해로운 것은 어떤 것이건 허용되지 않아서. 아내가 아끼며 키우던 개도 친정집으로 돌려보냈거든. 아기에게 해롭다고 일체 동물을 못 들이게 해서……미란 씨에게 물어보고 대답해도 될까?” “그렇구나. 그렇다면 내가 다른 곳에 알아볼게. 출산한 곳에 기쁜 것을 보내주어야 하는데 노래도 부르지 않는 우울한 새를 보내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렸거든. 하지만 너에게 맡기지 않고 다른 곳에 맡기면 네가 섭섭해할 것 같아서 먼저 물어본 거야.” “그럼 어디에 맡기려고?” “어머니 댁에. 어머니도 적적하실 테니 새가 가면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어머니는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능력이 있으시니까 어쩌면 새의 마음도 풀어줄 수 있을지도.” “어머님을 두고 떠나려고? 어머니 곁에 당분간 있는 것이 좋을 듯한데.” “어머니와 1주일을 같이 보냈어.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으신 것 같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내가 계속 분주해 보인다고 하시더라고. 1주일이 지나자 내 아파트로 돌아가라고 하시더라.” “…….” “이상하지. 어머니와 있을 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내가 계속 분주하다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어.” “지금은 어때? 네 아파트에 있으니까 분주하니 아니면 조용하니?” “오늘 종일 아파트 빈터를 왔다 갔다 한 것이 전부야.” “네가 매우 분주하게 살긴 했지. 그것을 갑자기 멈추니까 공허해서 그럴 거야. 다시 일을 시작하면 지금 느끼는 허망함이나 슬픔은 점점 가라앉을 거야. 한 생명이 가면 다른 생명이 오는 것이 인생이더라고. 나도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고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내 몸에서 새로운 생명이 왔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지 몰라.” “네 집에서는 아기 울음소리가 드높겠구나. 나는 여태 혼자 살면서도 외로움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고, 집안이 조용하게 유지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집안이 조용한 것이 아니라 끔찍한 침묵 속으로 점점 빠져드는 느낌이야. 새가 울지 않다니! 사람이 울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끔찍해.” “담자야! 어머님도 울지 않는 새를 바라보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우리 집에는 아기 울음이 있으니 도리어 새가 울 수도 있을 것 같아. ” “아니야. 울지도 않는 새 한 마리를 아기 출생 축하 선물로 보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머니는 도리어 새를 회복시키기 위해 애쓰시면서 슬픔을 잊을 수도 있을 거야. 어머니는 그런 분이시잖아. ” 새 한 마리 때문에 여행을 떠나기도 힘든 것이 인간인데, 아버지는 어떻게 나나 어머니를 두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무섬증이 들었다. “진욱아, 아버지가 그립다. 너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는데, 어떻게 견뎠니? 내가 그런 감정을 전혀 몰라서 너를 돌아보지 못했다.” “무슨 소리! 아버님이 나를 아들처럼 대해도 너는 질투도 잘난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에야 말하지만, 미란 씨를 만나게 된 것도 네 덕분이잖아. 이쁜 아기를 얻은 것도 네 덕분이야. 네가 내 짝을 찾아주었으니, 내가 네 짝을 찾아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으련만.” “하하. 아버지가 되더니 농담도 다 하네. 네가 내 짝을 찾아주다니…….” 갑자기 목이 메었다. “새도 짝을 잃었다고 울지 않는 것을 보니 짝의 의미가 처음으로 진하게 다가오긴 한다.” “그런데 왜 떠나려고 해. 공식적인 일로 떠나는 거야?” “내 삶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어. 세계적인 작가와의 대담에서 완전히 실패하면서 내가 많이 무너졌거든. 그렇게 간단하게 나를 무너뜨린 것은 단 한 문장 때문이었어.” 나는 그것이 성경에 있는 한 문장이라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그래서 버릴 것은 버리고 떠나기로 마음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여행이 스톱 된 거야.” 나의 대담을 보시고 아버지가 충격받아서 돌아가셨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그랬구나!” “아버지 생전에 원하는 것을 이루어드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내가 참빛을 찾기를 원하셨어. 진리 말이야.” 내 말을 들은 진욱이 움찔 놀라는 움직임이 전해져왔다. 진욱은 더 가라앉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담자야. 아버님이 병원에 계시는 기간에 전화로 나에게 부탁한 것이 있었어. 그것을 네게 전해 줘야 할 것 같아.” 순간, 나에게 남겨진 유산이 진욱에게 맡겨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다운 결정이었다. 아버지는 나뿐만 아니라 진욱에게도 필요한 만큼의 유산을 남겼을 것이다. 진욱은 나의 의형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버님이 너에게 꼭 남기고 싶은 책 한 권이 있다고 하시더라.” “책 한 권?” “아마 유산에 관한 정보가 있나 봐. 그 안에 모든 보화가 들어 있다고 하시더라.” “네가 가지고 있니?” “아니. 아버님은 네게 말을 전하기만 하라고 하셨어.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는 것 아닐까.” “어머니는 너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긴 했지만, 책인 것조차도 알지 못하셨어. 아버지가 나에게 전해지도록 조치해놓으셨을 것이라고만 하시더라.” “분명 책 한 권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안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이나 전달할 사람을 나도 알지 못해.” “…….” “언론을 통해 아버님이 전 재산을 다른 이들을 위해 기증했다는 소식은 나도 읽었어. 너에게 남긴 유산은 비밀인 셈이지. 걱정하지 마. 다른 사람에게는 밝히지 않을게. 하얀 가죽으로 싼 책이라고 했어. 너에게 어떤 식으로 건 전달되도록 해두셨을 거야.” ▶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종의 기원  <24회>
    by 김다은
    2025.03.31 09:00:00
  •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페이스북·인스타그램의 운영사인 메타에 부과한 과징금은 총액이 1000억 원에 달한다. 과징금은 행정청이 법령상 의무 위반에 대해 부과하는 금전적 제재로 해당 행위가 위법하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메타는 어떤 이유로 큰 법적 리스크를 지속적으로 안고 있는 것일까. 지난 2020년 11월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메타가 페이스북 로그인 기능을 제공하면서 사용자에게 별도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로그인에 필요한 범위를 넘어선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했다고 판단해 약 67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위원회 조사 결과, 330만 명 이상의 이용자 정보가 동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 없이 1만여 개 제3자 앱에 제공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메타가 제공한 정보에는 사용자의 ‘친구’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위원회는 해당 정보는 친구 본인의 개인정보이기도 하므로 별도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메타는 사용자의 자발적 동의가 있었고, 공개된 정보만 활용한 것이라며 법적 책임이 없다는 취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1심인 서울행정법원(2021구합57117),과 2심(서울고등법원 2023누64906), 대법원(2024두55440)까지 모두 메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징금 부과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2021년 8월, 동의 없이 얼굴 인식 정보를 수집·활용한 혐의로 약 64억 원의 과징금이 부과됐고, 2022년 9월에는 ‘온라인 행태정보’를 사전 동의 없이 수집·제공했다는 이유로 약 308억 원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온라인 행태정보란 이용자의 웹사이트 방문 이력, 앱 사용 패턴, 검색 및 구매 이력 등으로, 개인의 흥미와 기호, 성향을 분석할 수 있는 정보다. 온라인 행태정보에 관한 과징금 부과 취소 소송에서 메타는 이러한 정보 수집의 주체는 웹·앱 운영자이며, 자신은 광고주로부터 정보를 위탁받는 입장일 뿐이므로 동의를 받을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메타가 관련 도구를 직접 제작·배포하고, 이용자 식별자를 생성·수집·보관한 점에 주목했다. 특히 행태정보 수집·전송 과정에서 웹·앱 운영자들은 해당 정보를 직접 취득하지 않았으므로, 동의를 받아야 할 주체는 메타라고 판단했다. 법원은 이번에도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손을 들어주었고(서울행정법원 2023구합54259), 현재 항소심(서울고등법원 2025누6020)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11월에도 또 한 번의 과징금 부과가 이어졌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메타가 국내 이용자 약 98만 명의 종교적 신념, 정치 성향, 동성 결혼 여부 등 민감정보를 사전 동의 없이 수집하고, 이를 광고 타겟팅에 활용해 약 4,000개 광고주에 제공한 사실을 적발했다. 이에 대해 약 216억 원의 과징금이 부과됐고, 메타는 이번 건에 대해서는 별도의 행정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왜 메타는 반복해서 과징금을 받을까. 메타가 반복적으로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과징금을 부과받는 데에는 단순한 절차상 실수 이상의 구조적 요인이 있다. 메타의 비즈니스 모델은 사용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정교한 타겟광고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이용자의 사전 동의나 민감정보 처리에 대한 법적 요건을 엄격하게 충족시키는 데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국내 개인정보보호법은 정보 주체의 권리를 핵심에 두고 있으며, ‘동의’의 실질성과 목적 내 활용의 원칙을 엄격히 요구하기 때문에 메타의 사업 운영 방식은 반복적으로 법적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메타가 ‘제3자 제공이 아니다’, ‘광고주 책임이다’ 등으로 법적 책임의 외부화를 시도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 규제 당국과 법원은 단호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앞으로 디지털 경제가 더 정교해질수록, 개인정보 보호와 활용의 균형 문제는 더욱 복잡해질 것이고, 메타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 기업은 더 광범위한 규제적 도전과 법적 책임 앞에 맞서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도전과 책임에 관한 비용은 단지 과징금에 그치지 않는다. 신뢰의 상실, 이용자 기반의 이탈, 사업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메타가 더 건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각국의 법제와 규범을 ‘규제 리스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업 전략의 핵심 요소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국내 기업들 역시 이번 사례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개인정보 보호 규범이 곧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점을 다시금 인식해야 할 시점이다.
    메타는 왜 반복적으로 과징금을 받는가
    by 안성훈
    2025.03.30 08:00:00
  • 뒤늦은 봄비와 함께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 3월의 어느 주말, 잠실종합운동장과 인근 도로에는 이런 추위를 뚫고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마라토너들로 가득했다.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접근이 쉬운 운동인 마라톤. 최근 주요 마라톤 대회 참가 신청이 대학교 수강 신청보다 더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러닝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을 구현하는 기업의 주식을 사라”는 투자 법칙처럼 러닝 인구 증가는 관련 용품을 판매하는 회사의 실적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호카 오네오네(Deckers Outdoor) 주가는 최근 5년 평균 44%의 성장률(CAGR)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소비 패턴의 변화는 단순한 취향 변화를 넘어 자산 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며 많은 일상이 비대면을 중시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 한편, 편리함과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트렌드 변화에 따라 자동차 등록 대수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는 2629만 대로, 인구 1.95명당 1대의 차량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23년 말 대비 1.6% 증가한 수준이다. 과거에 비하면 증가율이 줄어들긴 했지만 인구 감소 추세에도 불구하고 차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1.6%라는 수치는 상당히 고무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카카오, 쏘카와 같은 모빌리티 업계에서는 주차장 서비스 산업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도심 내 심각한 주차난도 주차장에 대한 시장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2022년 기준 국내 음식점 중 주차가 가능한 곳은 44.7%로 전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농림수산식품부 통계에 따르면 서울의 경우 주차 가능한 음식점은 30.6%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통계청이 2023년 진행한 ‘향후 늘려야 할 공공시설’에 대한 설문에서도 응답자 중 14.4%가 ‘주차장 확보’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한 마디로 차량 이용을 선호하는 우리 삶의 변화에 따라 부동산 시장에서 주차장 시설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차장의 의미는 과거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과거 부동산 시장에서는 주차장을 ‘법적 규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건축법에 따르면 위락시설은 100㎡, 문화 및 종교시설은 150㎡, 근린생활시설은 200㎡당 1대의 주차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건축물의 인허가가 제한되고, 건물이 지어진 이후에도 주차대수 제한으로 인해 건축물의 용도 변경이 불가능하다. 결국 건축물의 효율적인 사용이 어려워질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도 부동산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데 ‘주차장’이 강력한 제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주차장에 대한 인식이 ‘법률적 규제 사항’에서 건물의 가치 증진을 위한 핵심 요인으로 변하고 있다. 충분하고 편리한 주차 공간의 확보는 건물의 전반적인 가치를 높인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주택 시장에서 ‘고급 아파트’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충분한 주차대수 확보가 필수적이다. 동시에 일반 아파트보다 넓은 주차 폭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근린생활시설에서도 주차장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근린생활시설은 대지면적이 200㎡, 평균 4층 이하, 연면적 500~700㎡ 정도로 소규모이다. 이러한 시설에 3~4대 정도의 주차장을 설치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제한이 많다 보니 ‘충분한 주차 공간’을 마련한 근린생활시설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주차가 충분한 건축물에 ‘희소성’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건물의 가치도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 현대의 주차장은 ‘차량 한 대를 수용하는 공간’을 넘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충족시키기 위한 인프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주차장에 대한 소비자의 시선도 ‘법적 기준’에서 ‘건물의 가치 결정 요인’으로 변하고 있다. 변화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주차장을 바라보는 부동산 투자자의 인식도 변해야 할 시기이다.
    부동산 미래를 바꾸는 숨은 키워드…주차장의 재발견
    by 윤수민
    2025.03.29 07:50:00
  • 지난 24일, 서울의 강남3구와 용산구가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토지거래허가구역을 해제한 지 약 1달 만의 조치다. 그러면 이제 한동안 강남3구와 용산구에 아파트를 사고 싶은 사람 입장에서 실거주 목적이 아니라면 아파트 매수가 불가능한 것일까. 토지거래허가구역에서 주택을 매매하려면 관할구청에 토지거래허가를 신청해 승인을 받아야 매매가 가능하다. 실무상 관할구청에서는 매수인에게 실거주할 계획인지와 자금조달계획서의 제출까지 요구하고, 실거주를 하려는 매수인이 아니라면 토지거래허가를 내어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된 지역에서는 갭투자를 목적으로 한 주택 매매가 불가하다. 하지만 토지거래허가구역의 경우에도 주택을 매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부동산 경매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부동산 경매로 집을 사는 경우에는 토지거래허가가 면제된다. 부동산 경매는 기본적으로 집주인이 은행 등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지 않아 법원이 주관해 강제로 집을 매각해 부동산 재산을 현금화하고, 그 돈을 은행과 같은 채권자들에게 배당해주는 절차다. 법원이 채무자의 집을 강제로 매각하려고 하는데 여기에 관할구청이 토지거래허가구역이라며 낙찰자의 실거주까지 요구하고 들면 도무지 적정가격에 매각되기 어렵다. 따라서 부동산 경매의 경우에는 토지거래허가구역이라도 토지거래허가 없이 매수를 할 수 있도록 예외를 허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동산 경매로 갭투자까지도 가능할까.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되면 기본적으로 갭투자가 막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부동산 경매를 이용하면 갭투자가 가능한 것처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갭투자가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갭투자가 어렵다’이다. 15억원짜리 아파트를 매매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 아파트의 임차인의 전세금은 10억원이라면, 매수인은 매도인에게 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액 5억원만 지급하면 아파트의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된다. 적은 돈만으로도 아파트의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토지거래허가구역이라면 갭투자가 불가하므로 매수인은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서라도 15억원 전액을 마련하여 매매대금을 일시불로 지급할 수 있어야 한다. 부동산 경매의 경우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부동산 경매에서는 보통 임차인을 인수하지 조건으로 매수를 하기 때문에, 매수인은 매수대금 15억원 전액을 마련하여 일시불로 경매법원에 납부해야 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관할구청의 토지거래허가가 필요하지 않고 자금조달계획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다는 점, 일반매매의 경우보다 경매의 경우가 대출이 조금 더 많이 나온다는 점은 경매의 장점이다. 또 부동산 경매는 일단 소유권을 취득하면 그 즉시 임차인을 구해 전세를 맞출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토지거래허가를 받지 않아 매수인에게 실거주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매수자금으로 투입하였던 돈을 빠른 시간 내에 회수할 수 있게 된다. 부동산 경매고수들은 낙찰받자마자 임차인을 구해 그 임차인으로부터 전세금을 받아 사실상의 갭투자를 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매수인이 경매 낙찰을 받으면 보통 경매법원에서는 매수대금을 낼 기한을 약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부여한다. 매수인은 그 사이 원래 살고 있던 임차인과 협상을 해서 적정가격에 다시 전세계약을 체결하거나 미리 새 임차인을 구해 소유권 취득과 동시에 전세금을 받는다. 이런 방법을 이용하면 매수인 입장에서는 매수자금 전액을 일시에 마련할 필요가 없으며, 임차인이 낸 전세금으로 갭투자를 할 수 있다. “부동산 경매로 집을 사면 토지거래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부동산 경매를 이용하면 갭투자가 가능하다”는 말과 동의어인 것처럼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앞서 본 것처럼 부동산 경매를 이용한 갭투자는 현장상황과 임차인과의 협상 경과에 따라 가능할 수도, 불가능할 수도 있다. 토지거래허가구역 내에 있는 주택 매수를 원하지만 자금이 부족해 갭투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부동산 경매는 분명 매매보다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단, 부동산 경매라도 잠시라도 매수자금 전액을 융통한 뒤에 임차인을 맞춰야 할 수 있으니, 자금계획을 더 철저히 점검하고 접근하길 당부한다.
    경매로 강남3구 갭투자 할 수 있을까
    by 이시훈
    2025.03.27 17:35:49
  • 우리는 지금 초연결, 초지능, 초실감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술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사회의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심화시키며, 예측의 위험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조차 부족한 상황입니다. 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이 특징인 VUCA 시대에는 기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선진국의 모델을 따라가고 최적화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롤모델조차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어떻게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 빠른 추격 전략, 지속 가능할까=한국은 과거 선진국을 빠르게 따라잡으며 경제적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검증된 기술을 빠르게 도입하고 효율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기술과 시장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어 단순한 모방과 최적화만으로는 지속적인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속도가 경쟁력이었지만, 이제는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기존 데이터만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으며,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의적 접근이 필수적입니다. 무엇보다, 빠른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켜야 합니다. ◇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 사랑과 지혜=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인간에 대한 사랑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변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단순한 의지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며, 갈등이 심화되면서 대립과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마치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구하는 도구로서 디지털트윈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 지혜를 구하는 도구, 디지털트윈=지혜는 단순한 정보나 데이터가 아닙니다. 데이터가 많다고 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잘못된 정보나 편향된 데이터는 판단을 흐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 환경에서 실험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상에서 검증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디지털트윈은 현실 세계를 가상 공간에 재현하고,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최적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기술입니다. 실제 환경에서 실험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상에서 검증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실험해 최선의 선택을 찾아내며, 불확실성을 줄이고,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습니다. 즉, 디지털트윈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불확실한 세상에서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기 위한 필수 도구입니다. ◇ 디지털트윈이 필요한 이유=VUCA 시대에서는 기존 방식으로 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제는 데이터를 넘어, 실제 문제 해결을 위한 가상실험이 필수적입니다. 디지털트윈을 활용하면, 국방에서는 미래 전장을 시뮬레이션하여 최적의 전략을 도출할 수 있고, 스마트시티에서는 도시의 복잡한 교통 문제를 예측하고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 제조업에서는 공장 운영을 최적화하고 유지보수를 예측할 수 있고, 에너지 분야에서는 효율적인 운영 방안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디지털트윈은 단순한 예측 도구가 아니라, Politics(정치), Military(군사), Economy(경제), Society(사회), Information(정보), Infrastructure(기반시설)이 엮여 있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지혜의 도구입니다. ◇탁 트인 세상을 향해=VUCA 시대, 우리는 복잡한 문제 속에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디지털트윈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불확실한 세상에서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기 위한 필수 도구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문제를 해결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을 통해 디지털트윈이 어떻게 세상과 사람을 이롭게 하는지, 복잡한 문제를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 탐구해 나가겠습니다. 춘래불사춘의 시기, 디지털트윈으로 탁 트인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갑시다. ▲탁 트윈(Tag Twin) 컬럼을 연재하는 이유 =이 칼럼을 통해, 디지털트윈이 어떻게 세상을 더 이롭게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방향을 잃고, 대립과 분열로 인한 갈등 속에서 문제 해결의 길을 찾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를 갖게 되었습니다. 디지털트윈은 단순한 시뮬레이션 도구가 아니라,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지혜의 도구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문제를 해결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특히, 탁 트윈(Tag Twin)이라는 칼럼을 연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디지털트윈 기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탁 트윈’의 ‘탁(Tag)’은 KAIST 김탁곤 교수님의 40여 년간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탁' 교수님은 디지털트윈을 활용하여 세상과 사람을 이롭게 하고, 복잡한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방법론을 정립하고 실현해 오셨습니다. 이 칼럼은 이러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탁 트인'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지혜로운 도구를 활용하여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문제를 해결하며, 모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탁 트인 세상을 위해
    by 양영진
    2025.03.27 17:19:01
  • 행복한 삶은 모든 사람들이 소망한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고 꿈꾸지만, 정작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렵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린 행복의 정의에 따르면, 행복이란 우리의 마음 상태가 좋을 때이다. 전반적으로 내 삶이 괜찮다고 판단할 수 있는 상태, 좋고 긍정적으로 감정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때가 바로 행복한 순간이 된다. 주관적인 측면에서 삶에 대해 만족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며, 삶의 의미와 목적을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바로 행복인 것이다. OECD 38개 회원 국가를 대상으로 한 ‘2024 세계 행복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는 평균 행복지수가 6.058점으로 국제 평균 6.685점보다 낮다.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최하위권에 머물러 왔던 점을 상기한다면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반면, 최상위권 국가들로는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독일 등이 있는데, 이들 국가들의 공통점은 바로 ‘아이들의 행복’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특히 행복교육으로 잘 알려져 있는 덴마크의 경우, 공교육만큼 대안교육이 활성화돼 있고, 플리스콜레라 불리는 자유학교에 이르기까지 교육 방식뿐만 아니라 교육 자체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있다. 덴마크의 아이들은 누구나 학업에 대한 부담감 없이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개발할 기회를 갖는다. 경쟁을 추구하지 않아도 되고, 각각의 아이들이 가진 개성과 의견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모두 존중받을 수 있다. 성적만으로 성공 여부를 판가름 하는 우리와 달리, 덴마크는 의무 교육 과정 내에 한 차례의 졸업 시험만 치를 뿐 수업 참여도나 교우 관계 등이 학업 성취 평가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경쟁에 내몰리지 않고, 학교생활에 즐거움을 느끼는 덴마크 아이들의 행복교육은 우리에게 ‘아이들을 위한 행복교육’의 참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독일의 경우에도 아이들을 위한 행복교육을 중시하며, 아이들을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경쟁 교육에서 벗어나 아이가 마음껏 뛰어 놀고 쉬고 행복할 수 있는 행복 교과를 교과과정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행복교과를 통해 아이들은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여 삶에서 기쁨을 찾아내는 방법이나 행복한 식습관, 자기 신체에 대한 만족감, 자아와 사회적 책임, 정신적 만족감 등을 배우고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이렇게 아이의 행복을 중시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국가일수록 아동의 행복도 뿐만 아니라 국민의 행복지수 역시 높게 나타나고 있다. 행복하게 자란 아이들은 그만큼 내일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도전하며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행복과 거리가 먼 교육 체계 속에 놓여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아동,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매우 낮은 편으로 알려져 있다. 2021년도를 기준으로 국제 아동 삶의 질 조사 결과에서 우리나라는 35개국 중 31위였고, 같은 해 이루어진 OECD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조사 결과에서도 22개 대상 국가 중 22위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2024 아동행복지수 조사 결과에서도 국내 아동 및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100점 만점에 45.3점에 불과해, 우리의 아이들이 느끼는 행복은 매우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우리의 아이들이 불행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다면, 우리나라는 불행한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은, 아이들이 즐거운 참여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그 중요도는 달라지지만, 공통적으로 행복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삶의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교육은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삶의 다양한 요소들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참여 교육이다. 참여 교육은 교육 활동의 중심에 ‘행복’을 두고, 아이들이 즐겁고 의미 있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교사와 아이들이 활발하게 상호작용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소통과 협력, 격려 속에서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 아이들은 놀이, 학습 등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고 희망을 발견하며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나라의 행복한 내일을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아이들의 행복교육의 방향성을 찾아 우리의 아이들이 희망을 품은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희망을 갖는 ‘행복 교육’
    by 한서정
    2025.03.26 16:18:11
  • 저작권법은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공정한 이용을 보장함으로써, 사회적 이익과 문화·산업 발전의 균형을 도모한다. 그러나 AI 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의 데이터 활용이 필수적이 되면서, 저작권법과 데이터 윤리 사이의 충돌이 심화하고 있다. 기계학습을 위한 데이터의 확보를 위해 텍스트·데이터 마이닝(TDM)을 입법화하거나 또는 실제 소송에 적용되고 있다. AI 모델 구축 과정에서 방대한 데이터를 이용하면서 저작권법이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학습 데이터에 적용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요구된다. 데이터 윤리는 AI 모델의 학습과 결과물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만, 윤리적 고려가 법적 규제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TDM 규정을 두고 있는 나라는 공정이용 규정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입법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독일 지방법원에서는 저작권법에 근거하여 학습데이터의 TDM에 대한 무죄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인공지능 학습을 위한 데이터 수집 과정에서 저작권법과 데이터 윤리는 밀접하게 연결된다. 빅데이터 처리와 인공지능 학습 과정에서는 데이터의 복제, 분석 등이 필수적으로 발생하며, 이를 무분별하게 활용할 경우 저작권법 위반 행위가 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 저작권법은 TDM 규정을 두고 있지 않고, 공정이용 규정만 두고 있다. 특히, TDM의 특성상 불특정하게 수집된 데이터 안에 저작물이나 개인정보가 포함될 수 있어 관련 법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순한 법적 문제를 넘어 데이터 수집의 윤리성, 프라이버시 보호, 그리고 창작자의 권리 존중과 같은 윤리적 문제와도 연결된다. 데이터 수집에서 접근에 제한된 표지(robots.txt)의 강제성이 없는 경우, 이에 대한 접근여부는 저작권법이 아닌 윤리적인 고려를 통해서 판단하여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러한 행위유형을 공정이용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이다. 공정이용은 법적인 근거를 갖지만, 일반조항이 갖는 성격상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대략적인 방향을 제시하지만, 법원은 이를 바탕으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해석론의 확장이지, 권리창설로 보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 법원이 권리를 창설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AI 윤리나 데이터 윤리가 저작권법에 지나치게 개입할 필요는 없겠지만, 윤리적 고민이 법의 해석과 향후 인간이 아닌 저작자의 등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높다. 다만, 지나친 윤리의 법화(法化)는 지양되어야 한다. 기술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법의 규제적 속성보다는 윤리적 논의가 합리적이다. 다만, 그 논의 방향은 윤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함께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한다. 데이터 윤리와 저작권법은 모두 기술혁신과 개인의 권리 보호 사이의 균형을 추구한다. 생성형 AI의 학습을 위한 데이터셋이 인터넷에 공개된 정보를 크롤링해 제작되는 과정에서, 이용 허락 조건에 맞지 않게 이용할 경우 저작권 침해나 데이터 윤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AI 기술 발전이라는 사회적 가치와 창작자의 권리 보호라는 가치 사이의 윤리적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AI와 관련하여 저작권법과 데이터 윤리는 전통적인 저작권법의 해석과 적용이라는 법적 가치만이 아닌 기술적으로 유연하게 상황을 바라보아야 한다. AI는 사회적 합의를 포함한 윤리적인 고려까지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저작권법과 윤리의 관계는 법적인 가치판단만이 아닌 사회적, 공익적 여부라는 비교형량을 통해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AI 모델의 고도화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데이터가 공급되어야 한다. 수집된 데이터의 오남용으로 인한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차별, 불평등 심화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이슈가 제기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터의 중요성과 이에 따른 윤리적, 법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데이터 윤리가 확립될 경우, AI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 이는 데이터의 수집 및 이용 과정에서 관련 법을 준수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법적 규정을 준수하는 데이터 활용 방식은 AI 개발 기업과 서비스 제공자가 장기적으로 법적 분쟁을 예방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이용자의 신뢰를 얻는 기반이 된다. 데이터의 윤리적 이용은 데이터의 질적 가치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데이터 처리 과정에서 적절한 정제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윤리적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특히, 데이터 편향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AI 모델이 편향된 데이터를 학습하면 알고리즘이 편향된 결과를 내놓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 편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가치중립적인 키워드와 변수를 설정하여 보다 공정한 데이터 선별과 이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접근이 있다. 또한, AI 모델이 학습하는 데이터의 다양성을 확보하여 편향성을 줄이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별, 연령, 국적 등 다양한 인구통계학적 특성을 반영한 데이터 세트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AI 모델이 설명 가능성(explainability)을 갖추도록 연구하는 것도 데이터 윤리 실현의 중요한 방향이 될 수 있다. 몇 년전부터 ‘머신 언러닝(machine unlearning)’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언러닝은 AI 모델에 학습된 데이터를 제거하는 것이다. 실상 문제되는 생성물이 반복되지 않도록 관련 데이터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필터링은 원천적인 삭제가 아니기 때문에 우회하는 탈옥(jail break)을 통해 또다시 문제되는 생성물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 윤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법적 규제와 함께 정책적 대응도 중요하다. AI 개발 기업이 데이터 윤리를 준수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자율규제 모델을 도입할 수도 있으며, 정부 차원의 데이터 윤리 가이드라인을 강화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데이터 편향성이 사회적 차별을 고착화하거나 그러한 가능성이 높은 경우, 해당 알고리즘을 개발·운영하는 기업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필요할 것이다. 반면, 의도적이지 않은 데이터 편향에 대해서는 기술적·정책적 유연성을 유지하면서 개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AI 모델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데이터를 학습하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정 집단이나 특정 속성만을 반영한 데이터로 AI를 훈련할 경우, 모델이 갖는 편향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양한 관점과 경험을 반영하는 데이터 세트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며, 데이터 접근성과 품질을 동시에 고려한 법적·윤리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AI 기술 발전과 저작권법의 조화를 이루고, 기술혁신과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과 데이터 윤리
    by 김윤명
    2025.03.26 09:59:33
  • ‘3無 3有’대학으로 강의실과 교수와 등록금이 없고, 창조적 상상력과 통섭 융합력, 그리고 지역 리더십을 공부하는 대학이 우리나라에 있다. 3월 새 학기 국내의 모든 학교는 입학식 후 수업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이 대학은 3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1시, 경남 함양 오도재 정상에서 특별한 입학식을 진행한다. 1, 2, 3학년 전 학생이 1년 동안 공부할 학습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들공(공부에 들다)’을 선포하는 것이다. 농촌 혁신과 그린 르네상스(Green Renaissance)를 선도할 핵심 역량을 키운다는 사명으로 2020년 설립되어 2021년 3월 첫 입학생을 맞은 농촌유토피아 대학원, 그동안 1회 졸업생 배출과 함께 올해 5년째 입학생을 맞이하고 있다. 지속적인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농촌에 우리는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농촌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정책과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사업 결과 과시를 위한 재정 지원이나 단발성 일자리 창출만으로는 농촌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다. 핵심은 ‘사람’이다. 농촌을 유토피아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농촌을 단순한 거주지가 아닌 삶의 터전이자 창조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인재들이 필요하다. 현재의 대학 시스템은 도시 중심적이며, 특정 직업군 취업을 목표로 한 교육이 주를 이룬다. 농촌에서 창조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기존 대학은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농촌유토피아대학원은 기존 대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창조적 상상력과 지역 리더십을 바탕으로 농촌을 혁신적으로 디자인할 인재를 양성한다. 대학은 농촌의 마을과 현장을 학습 공간으로 활용함으로 전국 각지 모든 현장이 캠퍼스이며 강의실이다. 산림청장을 지낸 건국대 산림조경학과 김재현 교수, 전 농업진흥청장을 지낸 민승규 세종대 석좌교수,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장 등 각계 다양한 분야 최고 전문가 60여명의 멘토 교수도 있다. 농촌과 지역을 살리기 위한 종합적인 문제 해결 역량을 갖춘 인재를 키우기 위해 농업, 환경, 생태, 경제, 문화, 예술, 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들이 지식과 경험을 나누어 준다.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관계로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며 인재는 모셔야 한다는 취지에서 등록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장학습비를 지급한다. 이는 ‘미네르바 스쿨’(Minerva School), ‘에콜42’(École 42), ‘몬드라곤 팀 아카데미’(Mondragón Team Academy)등 세계적인 대안대학의 사례를 참고해, 이론과 실천을 결합한 혁신적인 학습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다. 농촌을 무대로 창조적 상상력을 실행하고 도전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배움터가 되고자 하는 농촌유토피아대학원은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닌, 농촌 혁신을 위한 플랫폼이 될 것이다.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농촌에서 새로운 경제 모델을 창출하고, 자립적이며 지속 가능한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데 앞장설 것이다. 이번 들공식을 준비하는 학교에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졌다. 자연 친화적 삶을 지향해 수도권의 오랜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귀촌을 위해 지역을 공부하던 중 농촌유토피아대학원에 입학한 최지혜씨(43세, 경남 함양 함양읍). 그녀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실행 과제를 수행하던 우수 학생이었다. 학업을 계속 이을 수 없어 안타까웠던 그녀가 들공식 소식에 맞춰 메모를 전해 온 것이다. “29일(농촌유토피아대학원 들공식 날), 저희집 자유롭게 오픈합니다. USB(Utopia Study Box·농촌유토피아대학원)분들 누구라도 하룻밤 주무실 수 있습니다. 5명이 쓸 수 있는 이불과 침낭 있습니다. 개인 이불 가지고 오시면 더 많은 분들 수용 가능하며, 큰방과 마루 등 최대 10명까지 잘 수 있습니다. USB 다니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고, 많이 배웠음에 작은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잘 곳 필요하신 분들 하룻밤 마음 편히 주무시고 가시면 됩니다. 주소는 함양읍 대실곰실로 ***입니다” 농촌유토피아를 배우고, 농촌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며, 농촌유토피아를 실행하는 이를 통해 유토피아 씨앗이 뿌려지고 있음을 직면하는 순간이다. 농촌유토피아는 대단한 혁신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농촌유토피아는 먹고 사는 걱정이 없고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한 농촌을 말한다.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문화적 삶을 누리며, 개인의 자아실현을 향한 노력이 공동체의 발전과 함께 자연스럽게 만나는 곳을 말한다. 새로운 농촌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농촌유토피아대학원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혁신적인 교육 모델로, 이를 통해 모두가 꿈꾸는 ‘사람이 사람답게 잘 사는 농촌’을 실현할 수 있는 작은 연장이 될 것임에 부푼 희망으로 들공식을 맞는다.
     아름다운 ‘들공식’
    by 조금평
    2025.03.25 13:54:14
  • “꿈에서 나는 시골에 있는 동안 내 아파트를 빌려 주기로 한 남자와 결혼했어요. 그런데 그는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였습니다. 그는 정직하지도 않고 직업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어요. 그가 아파트 비용을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나가게 할 수밖에 없었죠.”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는 당시에 서른 두살인 이 여성의 신경증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 유부남과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애인이 사업에 실패해 버렸다. 그와 결혼하는 것이 그녀의 소원이었지만 그 남자는 자신의 부인과 이혼하지 못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위와같은 꿈을 꾼 것이다. 그녀는 꿈을 통해서 스스로에게 자문하였다. ‘그는 내 아파트를 빌렸는데 집세를 지불할 수 없다. 그런 임차인을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대답은 ‘그는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결혼이라는 문제를 마치 ‘한 남자가 나의 아파트를 빌린다. 그가 집세를 지불할 수 없다면 그는 쫓겨나야만 한다’ 즉, 그녀의 진실된 무의식적인 감정은 파산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아들러는 이 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 꿈의 목적은 그 결혼에 반대하는 감정을 북돋는 일이었다. 그녀는 야심적인 여성이었으며 가난한 남자와 결합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아들러는 프로이트나 융과는 다소 다른 관점에서 꿈을 해석한다. 그는 ‘꿈은 꿈 꾼 사람의 생활양식(life style)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즉, 개인의 감정은 자신의 꿈에 반영되는데, 그 감정은 자신의 생활양식과 언제나 일치한다. 여기서 생활양식이란 자신, 타인과 세상을 바라다보는 스스로의 신념체계와 일상생활을 인도하는 감정과 행동양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활양식은 어린 시절의 경험, 가족 관계, 사회적 환경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형성되며, 개인의 사고방식, 감정, 행동 패턴에 영향을 미친다. 아들러에 의하면, 꿈은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삶의 문제를 표현하며 그가 현실에서 생각해 온 것을 반영한 것이다. 즉, 꿈은 단순히 무작위적인 이미지의 나열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방식, 가치관, 목표, 그리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꿈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삶의 패턴과 심리적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꿈은 자신의 무의식적인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과도 같다. 꿈의 해석을 통해서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결혼할 남성을 쫓아낸 여성의 꿈
    by 국경복
    2025.03.24 16:27:00
  • 오늘은 오이타 현 벳부에 있는 ‘리츠메이칸 APU’를 이야기해보자. APU는 개교 25주년에 불과하지만 성공한 지방 대학으로 회자된다. 교토에 있는 리츠메이칸 대학이 국제화를 목표로 2000년 설립한 자매 대학인데 인지도에서 이미 본교를 뛰어넘었다. APU는 개교 수년 만에 일본 내 명문 대학에 올라섰다. 영국 TIME이 발표한 2023년 ‘THE 일본대학 상위 200’를 보자. APU는 개교 이래 매년 20위권 안팎에 랭크됐는데, 2023년 역시 22위를 기록했다. 교육품질 1위, 교육 성취도 3위, 교육성과 20위 등 일부 항목에서는 최상위에 속해 있다. 도쿄나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등 대도시권이 아닌 지방에 소재한 대학에서 이런 성과를 냈으니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APU는 한국에서도 벤치마킹 사례로 입줄에 오르내린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지방도시는 소멸 위기에 직면한지 오래고, 지방대학은 ‘벚꽃 피는 순서대로 문을 닫는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APU는 대학이 지방을 살리고, 지방대학도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줬다. APU는 특화된 경쟁 요소를 바탕으로 명문 대학 반열에 올라 지역경제에 선순환을 가져왔다. 2023년 기준 일본 대학은 국립 86개를 포함해 총 813개에 이른다. 우리나라 409개에 비해 두 배쯤 많다. 우리와 일본은 면적(3.3배)과 인구(일본 1억 2,360만 명, 한국 5,180만 명)에서 두세 배 가량 차이 나는데, 대학 숫자도 얼추 들어맞는다. 일본에 대학이 813개라는 것도 놀랍지만 APU가 2%에 속한다는 건 더 놀랍다. 벳부(別府)는 ‘특별한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로부터 벳부가 온천이 풍부한 특별한 곳이라서 비롯된 지명이다. 벳부는 대략 3,000곳에 이르는 온천수원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 전체 온천에서 10% 이상을 차지하며 온천 용출량에서 최대다. 벳부 IC에 들어서면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흰 수증기가 연출하는 풍광이 이색적이다. 다양한 온천을 체험할 수 있기에 연간 90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이 다녀간다. 한국인 관광객은 압도적인데 전체 외국인 가운데 60% 상당을 차지한다. 벳부에 머문 지난주 관광 비수기임에도 적지 않은 한국인 관광객을 만났다. 이들이 골프장과 온천에서 뿌리고 가는 돈이 얼마나 될까 헤아리다 리츠메이칸 APU대학으로 생각이 미쳤다. APU는 도심에서 10여km 떨어진 산속에 있다. 대부분 대학이 도심에 위치한 것과 달리 APU는 위치부터 역발상이다. APU는 산 정상에 있어 학습 환경은 쾌적하다. APU캠퍼스에서 바라보는 벳부 만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학교 주변에 유흥 시설이 전무하고 도심과 격리돼,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유학 보낸 부모 입장에서는 다행이다.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있다. 1학년은 기숙사 생활을 하며 2학년부터는 시내에 집을 얻어 통학한다. 40~50분가량 걸리는 통학은 불편하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와 맞물려 있다. 대학은 스쿨버스를 운행하지 않는 대신 벳부 시는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연간 탑승권을 할인 판매(100만원)한다. 운수회사 입장에서는 고정 승객을 확보한 셈이다. 재학생들이 학비와 생활비로 지출하는 돈은 벳부 지역경제에 효자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학생 1인당 연간 평균 4,000만 원을 쓴다. 전체 학생 수를 고려하면 매년 2,200억 원 이상 돈이 벳부에 뿌려진다. 이 학교는 외국인 학생 비율이 높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체 학부생 5,516명 가운데 일본인 학생 2,981명, 외국인 학생 2,535명으로 대략 1대 1 규모다. 외국인 유학생의 출신 국가는 90개국에 이른다. 외국인 유학생들은 단순 노동력을 제공하며 또 다른 기여를 하고 있다. 영어가 유창하기에 편의점이나 온천장 등 외국인을 응대해야 하는 곳에서 APU 학생들은 인기다. 벳부에 머무는 동안 아르바이트하는 APU 학생을 여럿 만났다. 거리를 걷는 청년 대부분도 APU 학생으로,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APU와 벳부 시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선순환 상생 모델을 만들었다. APU는 지역이 처한 위기를 타개하려는 벳부 시와 국제화 역량을 확대하려는 리츠메이칸 대학과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했다. 벳부 시는 유치 단계에서 학교 부지와 운영비를 제공하고 행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APU는 2개 국어(일어와 영어)로 강의를 진행하기에 졸업생들은 취업시장에서 빠르게 팔린다. 100%대 취업률은 APU가 단기간 명문에 오른 비결이다. 학생들은 다국적 문화를 경험함으로써 글로벌 마인드를 익힌다. 좁은 취업문을 뚫어야 하는 우리 학생들을 생각하면 APU가 지나온 길은 부럽다. 유야(湯屋) 에비스 온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말레이시아 출신 APU 유학생 아흐마드는 “이달 졸업을 앞두고 있으며 도쿄에 소재한 대기업에 취업했다. 지난 4년 동안 APU에서 시간은 행복했다”고 자랑했다. 대학 생활을 행복했다고 추억할 수 있는 리츠메이칸 APU는 ‘특별한 도시’에서 만난 ‘별난’ 대학이다.
    특별한 도시 ‘벳부’에서 만난 ‘리츠메이칸 APU’
    by 임병식
    2025.03.24 16:17:32
  • 최근 유통업계의 구조조정이 가속화되면서 대형 임대인이 회생절차에 돌입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홈플러스와 같은 대형 유통업체가 회생절차를 개시할 경우, 해당 건물에 입점한 수많은 임차인들은 법적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된다. 이들은 기존 임대차 계약이 유지될 것인지, 보증금 반환은 가능한지, 차임을 계속 지급해야 하는지 등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법적 쟁점은 보증금반환채권과 차임 채무의 상계 가능성, 차임 거절의 효과, 그리고 임대차계약서에 포함된 도산해지조항의 효력이다. 이는 단순히 개별 임차인의 문제가 아니라, 상업용 부동산 시장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다. 먼저, 채무자회생법 제144조는 회생절차 개시 후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부담하는 차임 채무에 대해 일정 요건 하에 상계를 허용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당기 및 차기의 차임 채무'에 한해 상계가 가능하며, 예외적으로 보증금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그 이후 차임 채무에 대해서도 상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보증금이 있으면 향후 모든 차임 채무에 대한 상계가 허용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실무상 오해의 소지가 있다. 보증금반환채권은 임대차 계약이 종료되고, 미지급 차임이나 원상회복 비용 등이 정산된 이후 비로소 발생하는 채권이다. 따라서 회생절차 개시 당시 임대차 계약이 여전히 유효한 상태라면, 보증금반환채권은 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하며, 상계의 대상이 되는 자동 채권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이 같은 해석은 회생절차 내의 채권구조와 채무자 재산의 공평한 분배라는 회생법의 기본 원리에 기초한다. 결국, 보증금이 존재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향후 차임채무와의 상계가 가능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상계가 불가능할 경우, 임차인 입장에서는 차임의 지급을 일시적으로 유보하거나 공제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자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 역시 법적 한계를 가진다. 회생절차 개시 자체가 임대차계약의 효력을 자동으로 변경시키지는 않으므로, 계약상 차임 미지급에 따른 약정 해지 또는 법정 해지 사유는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한다. 다만, 차임의 일부나 1기 정도의 지급 유보로는 임대인의 해지가 가능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그 범위를 정교하게 조율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회생절차와 관련하여 임대차계약서상 흔히 등장하는 '도산해지 조항'의 효력 문제도 중요한 논점이다. 대법원은 회생절차 개시 자체만으로 계약이 당연히 해지되도록 하는 조항을 일률적으로 무효로 보지는 않지만, 쌍방 미이행 쌍무계약의 경우에는 관리인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취지에서 도산해지 조항을 무효로 본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최근 하급심 판결들도 회생절차 개시만으로 계약이 해지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고 있다. 결론적으로, 회생절차에 돌입한 임대인을 상대하는 임차인은 법적으로 불확실한 지점들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보증금으로 차임을 공제하거나, 회생절차 개시를 이유로 계약해지를 주장하는 것 모두 쉽지 않다. 이럴 때일수록 계약서 조항을 면밀히 분석하고 전략적 대응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회생절차와 임대차계약
    by 이응교
    2025.03.22 09:00:00
  • 23. 고도를 기다리며 어디선가 숨소리가 들렸다. 아니, 숨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이 새벽에, 무슨 숨소리일까.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내 숨소리는 아니었다. 내 숨은 몸 안에 들어있어서 들리지 않았고, 내 상체를 부풀렸다 가라앉혔다 할 뿐이었다. 들리는 숨소리는 내 몸 밖에서 나는 것이다. 더구나 내 숨보다 두 배 정도 주기가 빨랐다. 위층이나 아래층 사람의 코 고는 소리가 새벽의 조용한 기운 때문에 내려왔거나 올라왔을 수도 있었다. 새벽에 부부가 나누는 애정의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온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숨소리는 분명 내 침실에서 났다. 분명 내 곁에, 내 귓가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누운 채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확실하게 숨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나는 그 근원지를 탐색하기 위해 몸을 뒤집었다. 나는 잠을 깊이 자기 위한 캐노피 침대를 사용한다. 마치 유럽의 왕실 침대처럼 프레임을 세우고 천을 덧씌워 방의 시야를 가린 것이다. 한국의 모기장도 캐노피 침대를 닮았지만, 침대의 캐노피에는 아주 부드러운 천이나 장식이 달려있어 창문을 통해 바람이 흘러들면 미세한 소리가 날 때가 있다. 지금은 창문이 모두 닫힌 상태다. 더구나 이 소리는 사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생명이 내는 소리다. 파리나 모기도 아니다. 고양이나 개가 들어왔을 리도 없다. 나는 침대 프레임 위로 걸쳐놓은 긴 망사 천을 들추어보았고, 덮고 있던 이불 밑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서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베개였다. 내가 밤새도록 베고 잔 베개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베개에 다시 귀를 대보았다. 베개가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베개 앞뒤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베갯잇을 열어 안도 살펴보았다. 베개를 두드려도 보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활발하게 베개를 까뒤집고 털은 후 다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숨소리는 가라앉아 멈춘 상태였다. 나는 제자리에 베개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른 새벽에 깨어서 별일을 다 겪는 것 같지만, 나는 이런 현상에 대해 많이 놀라는 사람은 아니다. 우리의 가시적인 것을 넘어서는 미스터리 한 일들이 우주에는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매일 아침 베개는 숨소리를 내었는데, 오늘만 내가 들었을 수도 있다. 초등학교 때 이런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했을 때, 또래들은 나를 미친놈 취급했다. 당시 젊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의 첫 발령지인 튀니지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들의 몰이해가 이해되었다. 서로 언어 소통이 잘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경계에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에너지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바퀴벌레나 심지어 베개도 다른 에너지를 뿜어낸다. 그러므로 그 에너지들은 서로 만나고, 튕겨 나가거나, 서로 섞인다. 이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을 물리학은 알고 있다. 모든 물질은 분자여서 끊임없이 서로 경계 없이 섞이고 있다. 내 머리카락의 분자와 공기의 분자도 지금 눈에 보이지 않게 섞이고 있을 것이다. 내 숨소리가 베개에서 난 이유는 간단하다. 내 숨의 미소한 일부를 베개가 빼앗았기 때문이다. 나는 허약해졌고, 피폐해졌으며, 희망을 잃고 허망한 상태다. 베개는 나를 받치는 역할을 하면서 도리어 약해진 나에게서 에너지를 흡수해서 스스로 강해졌을 것이다. 베개는 내 숨을 가장 먼저 마실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더구나 내가 잠든 시간은 절호의 기회였다. 내가 내 숨결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베개에게 빈틈을 보인 것이다. 내가 다른 사물들보다 강한 에너지를 유지하지 못한 것이다. 베개의 숨소리가 내 숨보다 빨랐던 것은, 사물 주제에 사람의 숨을 감당해내려니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내가 뺏긴 것은 숨만이 아니었다. 특권처럼 누리던 신사의 품격이 거의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장례식을 끝내고 나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와 다른 위치로 내가 자연스럽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반대로 아버지는 살아 계실 때보다 죽음 후에 사람들에게 더 존경을 받았다.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몇 나라들의 심장병 아이들을 위해 아버지는 유산 전액을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기셨다.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귀중한 것이 있다고 어머니가 따로 말씀하셨지만, 아버지가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전달할지는 어머니도 모른다고 했다. 침대 프레임에 걸터앉아 있으니, 하루아침에 털이 다 뽑힌 새 같았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던 십자매 ‘도리’의 아름다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베란다의 새의 정원으로 나갔다. ‘도리’가 혼자 베란다 정원의 포도나무 가지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면 강아지처럼 흔들던 하얀 깃털이 아무런 반응이 없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노랫소리도 슬픈 울음소리도 없었다. 세상사의 명예에 목을 매달 때라면, 짝을 잃어 목소리를 잃은 버린 ‘도리’의 상태를 글로 써서 일간지에 당장 내놓았을 것이다. 독자들은 신기해하며 인간보다 낫다는 반응을 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독자의 반응을 즐겼을 것이고, 한두 출판사는 내 새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도리’의 슬픔을 내 명예나 경력을 위해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도리’는 나처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상태였다. 내 고통과 슬픔이 오죽하면 내가 베개에게 숨을 빼앗겼을까. 먹이를 줘도 ‘도리’는 날아서 가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양 눈이 옆으로 붙어 있는 탓에, 나를 더 잘 보기 위해 사시처럼 눈을 떠든 귀여운 모습도 사라지고 없었다. 장례식 기간을 포함하여 지난 2주간의 일정은 저절로 취소되었지만, 앞으로 이 주간의 일정은 내가 문자로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렸다. 해외문학 독서토론회에서 요청한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관한 초청 강연과, 희곡집들만을 파는 ‘아름다운 고집’이라는 작은 서점에서 있을 작은 공연 관람도 취소했다. 마감해야 하는 원고가 3개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빌미로 양해 메시지를 보냈다. 일방적인 취소임에도 위로의 메시지와 함께 이해한다는 답장들이 돌아왔다. 아파트 인터폰이 울려서 나가보았더니, 우편함이 넘쳐서 관리실에서 플라스틱 바구니에 우편물을 모아서 내 아파트 문 앞에 놓았다고 했다. 나는 우편물을 아파트 안으로 끌어넣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에 가까웠다. 나는 아파트주변을 조금 산책하고 싶었다. 아파트 단지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내 아파트 건물 앞과 옆 건물의 공터를 왕복해서 걸었다. 공터의 정자 옆을 지나가고, 다시 돌아서 정자 옆을 지나가고, 다시 돌아서 정자 옆을 지나가고, 다시 돌아서 내 결핍의 정자 옆을 지나갔다. 누군가 내려다본다면, 공터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반복해서 오가며 매우 열심히 운동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나는 이 목적없는 왕복 산책을 하다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했다던 이야기를 문득 떠올렸다. 올림픽에서 한 선수가 자신의 표적이 아니라 경쟁자의 표적에 사격한 실수에 관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나서, 내가 삶의 과녁을 잘못 조준하고 있다고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마저 전했다. 이 되돌이표 아침 운동도 과녁이 없는 행동임에는 분명했다. 과녁은 없다 해도,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왔다 갔다 걷고 있었지만, 정자 옆 빈터를 계속 확인했다. 그곳에 서 있던 여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이 아파트 안에 사는 여자인지 방문한 여자인지, 나와 같은 아파트 동에 사는 여자인지, 옆 동에 사는 여자인지,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만나면 어떻게 할지, 히드라처럼 얽히는 정서적인 감정이 치밀고 올라왔다. S와 이별 이후에 이렇게 간절히 원한 여자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알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들떠서 이렇게 헤매는 것부터가 과녁이 없는 화살 상태였다. 올림픽에서 경쟁자의 과녁에 발사한 선수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 화살을 쏘려는 이 비참한 한 남자의 행동은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상의 모든 성공과 성취를 내려놓았는데도, 내가 왜 이렇게 분주한지 알 수 없었다. 공허함을 채우려고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럴수록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내가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인물 같았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도를 기다리는데, 고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다시 방향을 틀어서 걸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산울림 극단이 갑자기 떠올랐다. 아버지를 따라 외국을 떠돌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관람한 곳이었다. 한국처럼 빠르게 변하는 나라에서 내가 어릴 때 본 극단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경제적 효용성이 적은 극단을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연극을 매우 사랑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았다. 아직도 남아 있는지 가보고 싶었다. 연약한데도 도도하게 부서지지 않은 것을 보고 싶었다. 내가 믿었던 세계와 내가 세운 세계가 차례차례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고 나서, 부서지지 않는 것을 갈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고도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종의 기원  <23회>
    by 김다은
    2025.03.17 09:00:00
  • 박훈 교수가 쓴 ‘위험한 일본책’을 읽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일본인의 친절과 관련해 쓴 대목인데 여러 면에서 공감 갔다. 나 또한 일본을 다니면서 일본인들이 이전 같지 않다고 느끼던 차였다. 박 교수는 ‘불친절해진 일본인’이란 글에서 더 이상 일본인은 친절하지 않다며 경험을 소개했다.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의 친절에 감동했다는 박 교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이 생겼다고 한다. 손님을 대하는 종업원들의 음성 톤과 태도가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감정이 거세된 친절을 ‘사이보그 친절’로 명명하고, 솔직하지 못한 일본의 국민성을 아쉬워했다. 그랬던 일본인들이 반갑게도(?) 많이 불친절해졌다며 반겼다. 박 교수는 이자카야에서 사케 잔을 가득 채워 달라고 했다가 종업원으로부터 레이저 눈빛을 받았다고 했다. 일본에서 손님을 쏘아보는 눈빛은 처음이었다는 그는 불친절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기계적 친절에서 벗어난, 일본 청년세대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선의를 담은 박 교수의 해석에 공감한다. 하지만 눈살을 찌푸릴 만큼 극단적인 불친절을 겪었던 나로서는 마냥 공감하기 어렵다. 근래 일본을 다니면서 ‘이건 아닌데’라고 느꼈던 게 한두 번 아니었다. 우연도 거듭되면 필연이 되고, 실수도 반복되면 악의가 되듯 연이은 불친절과, 무례함은 ‘일본의 친절’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지난해 가을, 도쿄 인근 하코네(箱根)에서 겪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불쾌하다. 유명 온천 관광지인 하코네는 도쿄에서 가까워 연중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하코네 여행은 고라(强羅) 역을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모든 버스와 산악열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곳이 고라 역이다. 나는 종점인 고라 역에서 내려야하기에 벨을 누르지 않았다. 버스가 정차하면 자연스럽게 내릴 생각이었다. 종점에 도착해 내리겠다고 하자 버스 기사는 짜증 섞인 얼굴로 “바가야로(멍청한 놈)”라고 중얼거렸다. 순간 나는 “뭐야? 바가야로?”라고 반문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얼버무리며 수습했다. 매일 같은 코스를 운행하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나머지 무심코 내뱉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용납하기 어려웠다. 도쿄 긴자에서 공항버스를 탈 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버스 타는 줄이 맞느냐는 물음에 중년 여성은 “그렇다”며 차갑게 응대했다. 버스가 출발할 때쯤에서야 그의 불손한 언사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출발 시간에 임박해 남편과 딸이 오지 않아 초조했던 것이다. 덮어놓고 친절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불쾌했다. 지난 1월 벳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쿠오카 공항행 버스 짐칸에 짐을 싣고 탑승하는데 중년 여성은 내가 새치기를 한다며 버스기사에게 격하게 항의했다. 예약석이기에 자신에게 불이익이 없을 뿐더러, 나 또한 새치기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소한 것조차 민감하게 대응하는 그를 보면서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했다. 박훈 교수는 일본 젊은 세대의 불친절을 긍정적인 변화로 받아들였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모두 중년인데다, 불친절과 무례는 정도를 한참 벗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일본의 지방 소도시에서는 감동어린 친절을 수시로 경험한다. 자칫 호들갑스럽다고까지 여겨지지만 ‘친절한 일본’은 긍정적인 자산이다. 이따금 주변에서 일본인의 친절을 ‘본심(혼네)’이 아닌 ‘겉치레(다테마에)’로 폄하하는 이들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러는 당신은 흉내라도 내봤느냐”며 반박한다. 그랬던 일본인들이 변했으니 난감하다. 직접 겪은 사례는 퍽이나 당혹스럽다. 도쿄 등 대도시와 유명 관광지에서 유독 흔하다. ‘사는 게 힘들다보니 각박해졌다.’고 이해하면서도 불쾌한 건 어쩔 수 없다. 무한경쟁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속성에서 비롯된 변화가 아닌가싶다. 그들에게 외국인은 더 이상 손님이 아니라 평온한 삶을 깨뜨리는 ‘침입자’일 뿐이다. 나아가 돈 벌이 상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친절에 앞서 짜증부터 나는 것이다. 여기에 동양인을 우습게 보는 국민성도 한 몫했으리라 짐작한다. 우리도 그렇지만 일본 또한 백인 앞에서는 다소곳하지만 동양인은 쉽게 대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한때 식민지였고, 이제는 많은 분야에서 경쟁상대로 떠오른 한국을 얕잡고 경계하는 일본인도 적지 않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지나며 헤매일 때 ‘메이드인 코리아’는 가전제품부터 반도체까지 ‘메이드인 제팬’을 무섭게 대체했다. 그럼에도 일본인의 친절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지난해 가을, 조선 독립운동가 무료 변론에 일생을 바친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간토 대지진 와중에 조선인 300여 명을 구한 오카와 쓰네키치 서장을 취재하러 가는 길에 만난 일본인들은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세차를 멈추고, 정원수 손질을 중단한 채 자신들 차로 나를 안내했다. 과도한 친절과 무례한 불친절이 공존하는 일본 사회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친절과 불친절 여부 또한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기에 선입견 역시 경계할 일이다. 다만 나는 가식적일망정 일본인의 친절이 계속되길 소망한다. 습관도 오래되면 태도가 된다. 일본인의 겉치레 친절도 시간과 함께 감동어린 친절로 바뀌었다고 믿는다.
    예전 같지 않은 ‘불친절한 일본인’
    by 임병식
    2025.03.13 10:07:02
  • 기후 변화 대응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친환경 산업이 주목받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친환경 기업에 대한 투자와 해외 진출 지원이 필수적이다. 동시에,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는 글로벌 경제 환경 속에서 금융 수출 전략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나라가 글로벌 친환경 산업의 선도국으로 자리 잡고, 동시에 금융 자본을 활용해 경제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민간 자본이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먼저, 정부 및 공공기관이 친환경 산업 육성 정책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탄소중립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친환경 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 연구개발 지원, 규제 완화 등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초기 단계의 친환경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보조금과 기술 지원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정책적 기반이 마련될 때, 기업들은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며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민간 자본이 공공자금을 지원하며 적극적으로 친환경 산업과 친환경 인프라 금융 수출 부문에 투자해야 한다. ESG(환경, 사회, 거버넌스) 경영이 기업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만큼, 은행, 보험, 연기금 등의 금융권과 PE, VC 등 민간 부문의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친환경 기업에 대한 투자는 수익성과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국내 금융기관들이 친환경 인프라를 기반으로 해외 금융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축적된 금융자본을 해외 자산으로 전환하는 것은 경제 성장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정부와 민간의 협력으로 국내 친환경 기업이 해외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K-탄소감축, K-물산업, K-순환경제 등 우리나라가 강점을 가진 친환경 기술을 기반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무역협정과 외교적 협력을 활용하여 해외 진출의 장벽을 낮추고, 민간 기업들이 해외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더 나아가, 민간 금융기관들은 해외로 진출하는 중소·중견 친환경 기업을 육성하고 전략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고령화로 인해 장기 자금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기관들이 글로벌 친환경 인프라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일본의 ‘와다나베 부인’처럼 한국의 ‘서학개미’가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기관투자가들도 해외에서 지속가능 인프라 금융자산 투자 확대를 통해 국가 경제 성장에 기여해야 한다. 트럼프의 정책 변화에도 불구하고 태양광, 육상풍력, ESS 등의 신재생에너지, 수퍼 사이클로 평가되는 미국의 전력 인프라 교체, 건물 에너지 효율화 기술, 배터리 및 플라스틱 등 자원 순환경제 등에 대한 수요 확대가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또 미국 이외에 중동 및 동남아시아 등에서도 기존 매립 위주 처리에서 재활용 및 소각 등으로 신속한 정책 전환이 추진되고 있어 지속가능 인프라 투자환경은 지역을 막론하고 전반적으로 양호하다. 친환경 기업의 성장과 해외 진출, 지속가능 인프라 금융수출 전략의 강화는 정부와 민간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말고, 민간은 적극적인 투자와 금융 지원을 통해 친환경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동시에 친환경 관련 금융수출 전략을 강화로 글로벌 경제에서 한국의 역할을 확대하여 보호주의 확산에 대응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친환경기업 해외진출 위한 금융지원 강화할 때다
    by 김세중
    2025.03.12 11:01:27
  • 16세기 조선,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다양한 방식으로 조선의 지도를 확보했다. 왜관에 거주하는 상인, 사신, 밀정 등을 활용해 정보를 수집했고, 이는 조선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반면, 조선은 명과의 협공을 위해 지도와 해도를 적극 활용했다. 역사는 이를 통해 지도가 단순한 지형 정보가 아니라 국가의 전략적 자산임을 보여준다. 21세기, 지도는 국가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와 기술 경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디지털 경제에서 지도데이터는 단순한 공간정보가 아니라 자율주행, 스마트시티, 인공지능(AI) 기반 공간 분석 등의 핵심 인프라가 된다. 그렇기에 구글의 정부에 대한 1대 5000 정밀지도 반출 요청은 단순한 서비스 개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디지털 주권(data sovereignty)과 직결된 사안이다. 디지털 경제에서는 데이터가 곧 시장의 핵심 요소다. 플랫폼 기업들은 소비자의 심리를 파악하고, 문화적 흐름을 분석하며, 이를 바탕으로 서비스를 설계한다. 지도데이터는 단순한 지형 정보가 아니라, 인간의 이동 패턴, 상업적 활동, 도시 구조 등 광범위한 데이터를 포함한다. 현대 사회에서 지도는 단순한 지형의 축소판이 아니라, 국가와 개인의 삶을 담고 있는 디지털 기반 인프라이다. 조선 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각 지방의 생활상을 담고 있는 정보지 역할을 했다. 현재 네이버 지도 역시 단순한 길찾기 도구가 아니라, 지역 정보와 생활 패턴을 반영하는 또 다른 디지털 플랫폼이다. 우리나라의 지도는 한국인이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리적 정보뿐만 아니라, 문화적 맥락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6년, 구글은 우리 정부에 1대 25000 축척이 아닌, 오차범위 3m 이내의 1대 5000 축척 지도를 요청했다. 더욱 정밀한 위치 기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반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군사시설 보호뿐만 아니라, 세금으로 제작된 공공데이터를 해외 기업이 무상으로 이용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절충안으로 군사·보안시설을 보안 처리한 후 반출을 승인하는 방안이 제시되었지만, 구글은 이를 거부했다. 지도데이터의 수정은 기업 방침에 맞지 않으며, 글로벌 클라우드 운영 방식상 국내에 별도 서버를 두지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이후에도 구글을 포함한 다른 플랫폼사업자들도 지도 반출 요청을 지속해 왔으며, 2025년 다시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구글에 지도 반출을 허용할 경우, 국내 기업과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지도 서비스 제공업체들은 자체적인 데이터 구축과 유지보수에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구글이 우리나라의 정밀지도를 확보하면, 글로벌 플랫폼을 기반으로 더욱 정교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고, 이는 국내 기업들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정밀지도는 자율주행차, 스마트시티, 드론 산업 등에서 필수적인 데이터이다. 통신사를 비롯하여, 현대차 등 국내 제조업체들은 독자적인 지도데이터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구글이 지도데이터를 확보할 경우 국내 기업들의 연구개발(R&D) 의존도가 커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장기적으로 국내 산업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부가 정밀지도의 반출을 허용하면, 정부는 자국 내 주요 지리정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공공 데이터를 활용한 서비스는 국가가 일정 부분 통제할 수 있어야 하지만, 글로벌 기업에 대한 정부의 정책 조정력이 약화될 수 있다. 무엇보다, 구글의 정밀지도 요구는 단순한 지도 서비스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도데이터를 활용해 자율주행, AI 기반 공간정보 분석, 스마트시티 등의 다양한 서비스로 확장하려는 목적이 크다. 이는 결국 메타버스 및 가상현실 사업과도 연결될 것이다. 이러한 사업적 필요에 따라 지도 반출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정부가 이를 허용한다면 다른 글로벌 기업들도 동일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국내 지도 인프라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다양한 기업들의 생존까지 위협할 수 있다. 단순히 플랫폼 사업자뿐만 아니라, 지도를 사용해야 하는 현대자동차와 같은 국내 제조업체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정밀지도 데이터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국가의 디지털 주권과 산업 경쟁력, 안보가 걸린 중요한 자산이다. 주요 국가들이 자국의 지도데이터를 전략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만큼, 정부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구글의 지도 반출 요구는 산업적·경제적·안보적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며, 장기적인 국가 경쟁력을 고려한 대응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데이터 통제권은 매우 중요한 이슈이며, 정부가 지도 데이터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이기 때문이다.
    구글의 지도반출 요청과 데이터 주권
    by 김윤명
    2025.03.10 16:16:27
  • 최근 자본시장의 변화에 발맞춰 상장폐지 요건이 대폭 강화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시가총액과 매출액 요건이다. 현재 코스피 시장의 시가총액 및 매출액 기준은 50억원으로 처음 설정된 이후 장기간 유지되어 왔다. 다만, 이러한 지난 10년간 해당 사유로 상장폐지된 사례가 전무할 정도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밸류업 노력이 부족하거나 성장 가능성이 낮은 기업의 상장을 계속 유지시켜 시장 경쟁력을 저해한다는 취지의 지적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하여 시가총액 및 매출액에 따른 상장폐지 요건이 2026년부터 단계적으로 강화된다. 코스피 시장의 경우 시가총액 요건이 현행 50억원에서 2028년까지 500억원으로 10배 상향되며, 코스닥 시장은 기존 40억원에서 300억원으로 조정된다. 매출액 요건 역시 큰 폭으로 상향된다. 코스피 시장은 현행 50억원에서 300억원으로, 코스닥 시장은 30억원에서 100억원으로 각 상향될 예정이다. 매출은 낮지만 성장 잠재력이 높은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한 완충장치도 마련된다. 시가총액이 일정 수준 이상인 기업에 대해서는 매출액 요건을 면제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코스피 시장은 시가총액 1,000억원, 코스닥 시장은 600억원 이상인 기업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각 시장에서 상향될 최종 시총 요건의 2배 수준으로, 성장성 높은 기업의 조기 퇴출을 방지하면서도 적정 수준의 기업가치는 유지하도록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요건 강화의 취지는 명확하다. 자본시장의 건전성을 제고하고, 투자자 보호를 강화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상장기업 수 증가율은 최근 5년간 17.7%로, 미국(3.5%), 일본(6.8%), 대만(8.7%) 등 주요국에 비해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반면 시가총액 대비 상장기업 수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는 0.9에 불과해 미국(22.5), 일본(2.3), 대만(2.0)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금번 상장폐지 요건 강화는 기업들의 자발적인 체질 개선을 유도하고, 불가피한 경우 시장에서 퇴출시킴으로써 전반적인 시장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다만, 새로운 기준이 적용되기까지는 3년여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 이는 기업들이 새로운 기준에 적응하고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기업들은 매출액과 시가총액 추이를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요건 충족이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미리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시가총액의 경우 신규 사업 발굴이나 기업가치 제고 활동을 통해, 매출액의 경우 영업력 강화나 신규 시장 진출을 통해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경우 전문가의 조력을 받아 구체적인 개선 방안을 수립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강화된 상폐제도…시총·매출이 핵심
    by 정성빈
    2025.03.08 16:41:07
  •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은 업무의 일부를 다른 기업에 도급하고 있고, 필요에 따라 도급하는 기업의 사업장에 협력업체가 상주하며 도급받은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이처럼 협력업체(수급인)가 원청(도급인)의 사업장 내지는 원청이 지배·관리하는 장소에서 작업을 할 때가 안전보건관리의 측면에서는 가장 어렵다. 원청에게는 자신의 근로자가 아니고, 협력업체는 남의 사업장이다 보니 안전보건관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협력업체의 규모가 영세하여 안전보건관리 역량이 부족한 경우도 많다. 협력업체의 안전보건관리는 무엇이 해법일까. 첫째,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수급인 근로자가 도급인 사업장에서 작업할 때 도급인의 의무로 정한 순회점검, 안전보건 협의체, 합동점검, 안전보건교육 실시 확인 등만 실질적으로 이행하여도 반은 성공이다. 나아가 수급인 근로자에 대하여 직접 안전보건조치를 취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수급인이 안전보건조치를 취하였는지 실질적으로 점검할 수 있다면 바람직하다. 여기서의 키워드는 "실질적으로"다. 어떤 사업장에 가보면 순회점검을 실시하였다면서 점검표는 만들어놓았는데, 점검사항에는 전부 동그라미(양호)로 표시하고 개선사항에는 모두 "없음"으로 기재되어 있다. 정말 양호한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순회점검은 하나마나다. 실제 산업재해 예방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재해 발생 시에 순회점검을 실시한 것으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둘째, 협력업체의 위험성평가를 최대한 지원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다. ‘사업장 위험성평가에 관한 지침’에서는 도급 사업에서 도급인과 수급인이 각각 위험성평가를 실시하도록 정하고 있다. 즉, 수급인이 수행하는 작업이더라도 그 작업을 맡긴 도급인도 해당 작업에 관한 위험성평가를 실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만, 고용노동부가 2023년 5월 펴낸 '새로운 위험성평가 안내서'에 따르면, 사업장의 상황에 따라 도급인과 수급인이 함께 위험성평가를 실시하고 각자의 위험성평가 실시규정에 따라 위험성평가 결과를 관리한다면 각각 위험성평가를 실시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중요한 점은 협력업체에 위험성평가 하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끝이 아니라, 그 위험성평가 결과를 원청이 검토하여 유해·위험요인이 충분히 파악되었는지, 그 유해·위험요인에 대한 개선대책이 적절히 수립되었는지, 개선대책이 실제로 이행되었는지를 확인·점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협력업체의 위험성평가만 충실히 이루어져도 중대재해 발생의 위험을 또 절반 이상 줄일 수 있다고 본다.
     협력업체의 안전보건관리 무엇이 해법일까
    by 김동현
    2025.03.08 09:00:00
  • 잘 차려진 음식도 그릇이 부실하면 맛과 멋을 살릴 수 없다. 기업이나 정부가 공들여 만든 정책·시스템·매뉴얼은 훌륭한 요리 레시피나 다름없지만, 결국 이를 담아내고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다. 정책과 시스템은 내용이고, 사람은 그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릇이 기울어져 있거나 금이 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음식도 흘러내리기 마련이다. 조직이 높은 비용을 들여 완벽에 가까운 매뉴얼을 만들어도,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기 힘들고, 심지어 위기 상황까지 초래할 수 있다. 2018년과 2019년에 발생한 보잉 737 MAX 추락 사고는 시스템과 매뉴얼이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보잉은 기체의 기수를 자동으로 낮추도록 설계한 조정특성보강시스템(MCAS)을 도입해, 새로운 엔진 설계에 따른 비행 특성을 보완하려 했으나, 내부 보고 체계가 원활히 작동하지 않았고, 비용 절감에 매달린 나머지 조종사 교육 역시 최소화되었다. 결국 MCAS의 작동 방식과 문제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차례 추락 사고가 일어나 수백 명이 희생되고 말았다. 사고 원인 조사 보고서와 이후 드러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만약 보잉 내부에서 위험 신호가 제대로 공유되고 조종사들이 새로운 시스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받았더라면, 그토록 참혹한 결과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정책에서도 마찬가지다. 2003년 440만명 수준의 비정규직이 2007년 570만명까지 늘어나자 정치권은 불안정한 근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09년 2년 이상 초과근무시 정규직으로 전환을 강제하는 비정규직 입법에 나섰다.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지만 국회는 결국 이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2024년 비정규직 근로자수는 845만명을 넘어서면서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논란을 되짚어 보면,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에 있다는 의견이 많았고, 단순히 기간 기준으로만 입법하는 것은 한계가 크다는 점을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했었다. 그럼에도 당시 입법을 추진하던 그룹이 표결을 강행하면서 결과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길도 한층 좁아졌다. 이처럼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목표와 수단을 정확히 일치시키는 사람들의 지혜, 제도를 본래 취지에 맞게 운용하려는 사람들의 합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도 자체가 오히려 독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반면 준비된 사람들이 제도와 시스템을 잘 활용하면 어떤 결과를 보여줄 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경우도 있다. 2020년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각국 보건 당국은 감염병 대응 매뉴얼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를 제대로 실행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과학적 권고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앞서고, 현장에 있는 의료진이나 공무원들이 충분히 훈련받지 못한 상황에서 시스템이 아무리 정교해도 소용이 없었다. 반면 한국·일본·대만 등은 달랐다. 전염병 대응 시스템이라는 내용물을 잘 담아낼 만한 그릇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이들은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사태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잇따라 발생한 감염병들을 겪으며, 일련의 방역 지침과 시민들의 행동 요령을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보완해 왔다. 매뉴얼과 숙련된 현장인원은 전세계 치명율이 1%일 때 10분의 1 수준으로 사망률을 억제하여 국민들의 생명을 지켜냈다. 매뉴얼과 시스템이라는 내용물에, 사람이라는 그릇이 견고하게 맞물릴 때만이 훌륭한 결과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기업과 정부가 정책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제도·시스템·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려면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위험 신호를 누구든 눈치 보지 않고 공유하고 논의할 수 있어야 하고, 담당자들이 반복적인 시뮬레이션과 교육으로 실제 상황을 예측하고 이슈가 발생했을 때 즉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의 제도나 훌륭한 시스템이 마련되어도 올바르게 활용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반대로 아무리 유능한 인재가 있어도 체계적인 매뉴얼 없이 즉흥적으로만 대처한다면 지속가능한 성과는 요원해 진다.
    사람인가 시스템인가
    by 이보형
    2025.03.08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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