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306
  • AI는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새로운 질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표방한 ‘국민주권정부’는 통치의 정당성이 국민의 일상적인 참여와 피드백의 순환 구조 안에서 재확인되는 거버넌스로 이해된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진짜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가치를 상징한다. 이는 AI 기본사회가 지향하는 원칙인 기술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누구도 기술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접근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AI 기반 기술은 대표성과 통제를 동시에 구현하기 어려웠던 기존 행정 시스템의 구조를 바꾸는 참여적 전환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컨대 ‘국민 AI 비서’는 단순한 정보 제공 기능을 넘어서, 시민이 행정에 질문하고 반론하며 제안할 수 있는 양방향 인터페이스로 작동할 수 있다. 정책 결정의 배경이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을 때, 국민은 AI 시스템을 통해 “왜 이 정책이 필요한가”, “다른 대안은 무엇인가”를 실시간으로 묻고 응답받을 수 있다. 이는 설명가능성이라는 기술 원칙이 정치적 책임성과 민주적 숙의의 확장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또한 AI는 참여의 기술적 진입장벽을 낮추고 디지털 주권의 실질화를 촉진한다. 온라인 공론장, 국민제안 플랫폼, 정책투표 시스템 등은 고도화된 언어 처리, 감정 분석, 요약 기술을 통해 누구나 쉽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정책으로 반영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한다. 과거의 행정이 선택된 전문가의 언어로 구성되었다면, AI는 다양한 언어와 감정, 삶의 맥락을 인식하고 조직화하는 능력을 통해 다층적인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모두의 AI가 정부의 도구가 아니라 ‘국민의 도구’로 작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참여민주주의는 단순히 정보를 소유하거나 열람할 수 있는 권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핵심은 시민이 그 정보에 기반해 정부 정책에 대해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며, 실제로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제도적 통로를 갖추는 데 있다. 이재명 정부의 국민주권정부 구상은 기술과 정치, 권리와 참여가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을 제시하며, AI 기본사회는 이러한 구조를 제도와 기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구체화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헌법 개정 시 디지털 국가 원리가 헌법의 통치 이념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결국 기술은 통치의 수단이 아니라, 국민의 참여를 구성하는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 AI를 통해 실현되는 기본사회는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체제가 아니라, 더 많은 시민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확장판이다. 그것은 이제 선언이 아니라 설계와 실천의 문제다.
    AI 기본사회와 국민주권정부
    by 김윤명
    2025.06.12 08:47:33
  • 물건들이 말을 걸고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 기술이 들어간 스피커는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고, 냉장고는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자동차는 자율 주행을 하고 먼지를 감지한 로봇청소기는 스스로 청소하고 로봇요리사는 혼자 요리를 한다. 전 세계 산업 기술 전 분야에서 인공지능(AI)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 핵심에는 AI 에이전트(Agent)와 이를 기반으로 한 AI 시스템이 있다. AI 에이전트는 데이터와 외부 정보를 통합하고 다른 에이전트들과 협업해 목표를 자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은 연결(connectivity)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결'에 이전에 보지 못했던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바로 AI 기술이 접목된 '초연결(hyper connectivity)'이다. AI 기술의 발달로 모든 영역의 경계가 사라지고 기술이 융합되는 ‘초연결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AI는 학습을 통해 지능을 갖고, 네트워크를 통해 모든 사물이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점차 고도화 되고 있다. 초연결시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결이 무한대로 확장되고 AI 기술이 접목되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진다. 초연결 시대의 기반은 AI와 연결이다.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결을 통해 데이터가 생성되고 클라우드 컴퓨팅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접근과 공유가 가능하다. 이렇게 생성된 데이터를 AI 기술을 통하여 분석하고 지식을 축적하며, 지능을 업그레이드하고 자동으로 최적의 의사 결정을 하게 된다. 이런 초연결 시대는 지금까지 다른 문화와 경제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형성해 나갈 것이다.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즉, 범용인공지능은 인간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작동하는 AI를 일컫는 용어다. 영화 아이언맨에 등장하는 만능 비서 ’자비스‘가 바로 AGI다. 아이언맨이 이야기하는 모든 요청 사항을 척척 수행하고 분석, 추론 행위뿐만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는 스스로 판단을 내려 행동한다. 오픈AI의 샘올트먼 CEO는 AGI가 4년 안에 완성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저서 ‘사피엔스(sapiens)’에서 현생 인류가 인지혁명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인지혁명은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출현한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으로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어를 통해 인류는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연결할 수 있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협력은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인간의 이런 사회적 본능은 연결의 폭을 점점 더 넓혀 나갔다. 뇌공학자 레이먼드 커즈와일(Raymond Kurzweil)은 그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에서 2029년 인공지능이 모든 인간의 지능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혁신을 반복해 결국에는 AI가 인류의 지능을 초월하는 특이점이 곧 도래한다는 것이다. 인지과학자 게리 마커스(Gary Marcus)는 그의 저서 ‘2029 기계가 멈추는 날’에서 AI에 인간의 뇌가 가진 상식과 추론 능력인 ‘딥 언더스탠딩(Deep Understanding)’을 부여하여, AI에 인간의 지식체계인 시간, 공간, 인과성이라는 세 개념에 접목해야 한다고 한다. 2029년, 기계가 인간을 초월하는 특이점은 기계가 인간이 되는 조건을 충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인류가 언어를 통한 인지혁명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했다면, 현생 인류는 AI를 통하여 새로운 연결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인간의 연결 능력은 AI를 통하여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까지 확장하고 있으며, 이는 인류의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킬 것이다. 인류의 연결은 AI 기술을 통해 더욱 진화하면서 발전할 전망이다. 우리가 만나게 될 인공지능을 통해 모든 것이 연결되는 초연결 AGI 시대, AI가 푸드테크 세상을 한층 앞당길 전망이다.
    '연결의 힘'과 AI
    by 안병익
    2025.06.10 11:07:04
  • ‘사람은 공간을 만들지만,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이 1943년 독일의 런던 폭격으로 파괴된 국회 의사당의 재건을 약속하면서 한 말이다. 처칠은 우리가 만들어낸 공간과 환경이 결국 우리의 삶, 사고방식, 공동체의 구조까지도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공간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에 거주하며, 그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를 넘어 기억과 감정, 만남과 회복, 사유와 상상의 터전이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거주함(Dwelling)’이라 했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의미 있게 거주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더 나은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정부는 ‘범정부 빈집 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 등 4개 부처가 공동으로 빈집 문제 해결에 나섰다. 국가 차원의 빈집 관리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농어촌빈집정비특별법’과 ‘빈건축물정비특별법’ 제정을 통해 국가와 소유자의 책무를 명확히 하고, 농어촌 빈집 리모델링을 통해 생활인구와 귀농·귀촌 예정자, 청년 등을 위한 주거·업무·문화공간으로의 재활용을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단순한 주거환경 개선을 넘어, 마을공동체의 회복과 지역 균형발전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감자꽃이 피던 지난달 24일, 충북 옥천군 ‘옥천공동체 허브 누구나’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작년에 개장한 안남면 최초의 마을 공중목욕탕 소식을 접했다. ‘목욕 한 번 하려면 버스 타고 읍내까지 30분을 가야 하고, 버스 시간 맞추려면 큰맘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는 안혁관 할머니(89세. 청정리)와 마을에 목욕탕이 생길 거라고 꿈도 꾸지 못하였다는 마을 어르신의 감회는 마을의 지속을 위한 필요 요소가 무엇인지 분명한 자각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마을의 목욕탕은 단순한 위생 공간을 넘어 마을에 사라진 온기를 되살리는 공동체의 심장이 되었다. 충남 서천군 마서면 ‘여우네 작은 도서관’도 같은 사례이다. 귀농한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위한 돌봄과 놀이공간이 없던 마을에 도서관을 구상하였다. 주민들의 협조로 마을의 유휴 공간을 활용해 만든 도서관은, 아이들을 돌보며 방과 후 아이를 맡길 수 있게 된 이들에게 마을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마을의 작은 도서관은 아이들과 주민들이 함께 숨 쉬는 공간으로 마을의 미래를 준비하는 디딤돌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사람과 공간과 시간은 곧 지역의 문화가 된다. 이렇듯 공간의 재탄생은 문제 해결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고 농촌의 회복력을 되살리는 시작점이 된다. 무위당 장일순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 했다. 그는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가진 생명력을 통해 풀뿌리 문화의 확장성을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 농촌에서 무위당의 생명 운동과 정신이 다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주민 스스로 공간을 회복하고, 마을의 필요를 채우며 문화의 싹을 틔울 때, 진정한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농촌의 빈집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엔 수많은 기억과 시간이 쌓여 있다. 빈집을 그저 철거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쓰임을 부여하고 마을에 맞는 방식으로 재생할 때, 비로소 공간은 사람을 살리고, 마을을 살리는 힘이 된다. 빈집 관리는 곧 사람을 위한 일이다. 이는 단지 행정적 정비가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체 회복을 위한 문화적 과제이다. 정부의 정책이 현장에서 실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손과 주민의 땀방울이 만나는 접점이 필요하다.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어 마을의 미래를 함께 그릴 수 있을 때, 정책은 지속 가능한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하얀 감자꽃이 말을 한다. ‘이곳에도 여전히 삶이 있다’라고.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소리 없이 무너져온 농촌 마을들을 돌아보며, 공간의 소중함을 되새겨 본다. 감자꽃은 풍요와 수확의 상징이라고 한다. 꽃이 수고를 다 하는 동안 감자가 땅속에서 튼튼하게 영글듯, 빈집과 공간 개선 정책도 현장의 필요와 그를 위한 지원이 이어질 때 진정한 수확으로 이어질 것이다. 감자꽃이 피는 지금, 공간 정비와 함께 우리가 꿈꾸는 더 나은 세상을 농촌에서 피워 보자. 우리의 시선을 도시를 넘어 농촌에 머물게 하자. 그곳이 곧 다시 회복해야 할 우리의 미래이다. /서경IN
    “감자꽃이 피었습니다”
    by 조금평
    2025.06.09 16:47:27
  • 최근 ‘도시의 마음’이란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 김승수는 전주시장을 지낸, 각별한 후배다. 그는 시장 재임 당시 책 읽는 시민들이 도시의 품격을 결정한다며 ‘책이 삶이 되는 책의 도시 전주’를 디자인했다. 시장 취임과 함께 시청사 로비를 책 읽는 공간으로 전환하고, 특색 있는 도서관을 신축 또는 리모델링함으로써 정책을 현실로 옮겼다. 10여년이 흘러 전주는 도서관 도시로써 입지를 굳혔다. 도서관을 찾는 발길이 급증하자 전주시는 아예 도서관 투어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저자가 꿈꾸었던 전주다움을 인정받고, 지역경제 활성화도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둔 것이다. ‘도시의 마음’은 안목과 관점을 일깨운다. 저자는 “도시가 바뀌면 시민들 삶도 바뀐다. 정책의 차이가 삶의 차이를 만든다. 도시에 마음을 담으면 시민들에게 반향이 일어나고, 그 반향은 도시와 사람을 동시에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저자는 책과 도서관으로 시민들 삶과 도시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반대 여론에 직면했다. 그는 시민들을 설득하고 공직사회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냈다. ‘도시의 마음’에는 이런 안목과 관점을 담았다. 책을 읽는 내내 일본 이시카와(石川) 현립도서관과 21세기 미술관, 다케오(武雄) 시립도서관, 시마네(島根) 현립미술관을 떠올렸다. 세 도시 모두 공공건축물을 통해 도시를 바꿨다. 잘 지은 미술관 하나, 도서관 하나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소멸을 막는다. 이들 도시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나라 지방도시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도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특색 없는 도시경관 일색이다. 매력적인 도시, 활력 있는 도시와 거리가 멀다. 무엇이든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일본은 매년 전국 47개 광역단체를 대상으로 매력도를 발표한다. 지난해 10월 발표한 ‘2024 매력도 랭킹’에서 1위는 홋카이도(北海道), 47위는 사가(佐賀) 현이었다. 그런데 사가 현에 한국인 관광객이 몰린다니 그 이유가 궁금하다. 사가 현 다케오는 인구 5만 명이 채 안 되는 소도시다. 수령 3000년 녹나무가 유명하지만 여행자들이 궁벽한 다케오를 찾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다케오 시립도서관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연간 100만 명이 다케오 도서관에 다녀간다. 도대체 어떤 도서관이기에 도시 인구의 20배 넘는 여행자들이 도서관을 찾을까. 2013년 문을 연 다케오 도서관은 책 읽고, 물건 사고, 커피 마시는 복합공간이다. 시민들은 이곳에서 책 읽고 수다를 떤다. 다케오 도서관은 ‘도서관은 조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부터 깼다. 24시간 연중 운영하니 지역주민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커뮤니티 공간이다. 주변 지형과 어울린 외관 설계 또한 인상적이다. 처음 다케오 도서관을 방문한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노을에 물든 도서관은 황홀했다. 뒷산을 배경으로 둥근 활시위 형태로 설계한 도서관은 위압적인 여느 도서관과는 달리 편안했다. 내부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숍과 잡화 코너도 독특했다. 이곳에서는 문구류부터 지역 특산물, 심지어 전통 술까지 판다. 도서관에서 웬 술이냐고 하겠지만 다케오 도서관에서는 가능하다. 2층은 책 읽는 공간이다. 시민들은 도서관에서 책 읽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지역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울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은 다케오 도서관을 벤치마킹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회자되는 이시카와 현립도서관은 2022년 7월 개관 이후 2년 9개월 만에 내방객 300만 명을 기록했다. 도서관은 짧은 기간에 21세기 미술관과 함께 가나자와를 대표하는 명소로 부상했으니 놀랍다. 빼어난 설계 덕분인데 지난해 일본 도서관협회 건축상을 받았다. 로마 콜로세움을 떠올리는 지붕 설계는 인상적이다. 이곳은 도서관 본래 기능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기능까지 수행한다. 3층까지 이어지는 360도 책으로 둘러싼 중앙 홀을 따라 올라가는 통로는 압권이다. 이곳에서 하루 종일 책에 파묻혔으면 했다. 시마네 현립미술관 또한 지역을 살린 공공건축물이다. 매끈한 우주선 모양을 한 미술관은 넓은 신지 호수에 접해 입지부터 남다르다. 호수와 어우러진 미술관은 시마네 시민들에게 자부심이다. 시민들은 일부러 동트는 새벽 또는 해질 무렵 미술관을 찾아 시간을 보낸다. 시마네 현은 이웃 돗토리 현과 함께 일본에서 인구가 가장 적다. 그런데도 여행자들이 시마네를 버킷리스트에 담는 건 미술관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이곳에서 우키요에 작품을 관람하며 느꼈던 감동은 여전하다. 다녀온 지 1년여가 흘렀지만 호수를 품은 미술관 풍광이 잊히지 않는다. ‘도시의 마음’에서 저자는 “공공은 성공의 기쁨과 자부심보다는 실패의 책임과 두려움을 먼저 생각한다. 여기에서 늘 마찰이 일어난다.”며 “적당한 성공은 철저한 실패보다 위험하다. 적당한 성공은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다. 적당한 성공으로는 누구의 마음도 흔들 수 없다.”고 했다. 공직사회가 실패의 책임과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면 다양한 정책을 기대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감사원의 정책감사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새로운 시도에 활기를 불어넣을지 기대된다.
    일본 소도시를 바꾼 공공건축물
    by 임병식
    2025.06.09 13:31:34
  • 전기차, 스마트폰, 태블릿 등 첨단 제품에 사용되는 핵심 광물은 대부분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을 거쳐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지역에서는 광물 채굴 수익이 무장세력의 자금원이 되거나, 아동노동 및 환경오염 등 심각한 인권·환경 침해로 이어지는 사례가 꾸준히 보고되어 왔다. 특히 아프리카 내륙의 콩고민주공화국(DRC)과 인접국에서는 주석, 탄탈럼, 텅스텐, 금(3TG) 등의 광물이 무력 분쟁과 인권 유린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이에 따라 국제사회는 이른바 ‘분쟁광물’에 대한 공급망 규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OECD는 2011년 광물 공급망 실사를 위한 가이던스를 발표했고, 미국은 도드-프랭크법을 통해 분쟁광물의 원산지 정보 공개를 의무화했다. EU도 2021년부터 ‘분쟁 및 고위험지역’(CAHRAs)에서 조달되는 분쟁광물에 대해 실사 및 공시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민간 부문에서는 ‘책임광물 이니셔티브’(RMI)가 제련소(정련소 포함)에 대한 인증 프로그램(RMAP)을 운영해 왔다. OECD는 제련소를 다양한 광물이 모이는 핵심 통제지점(choke point)로 보고 이들을 통해 상위 공급망(upstream)인 광산 등을 관리하는 구조를 설계했는데, RMI는 제련소가 OECD 기준에 따른 상위 공급망 실사 체계를 구축했는지 평가하여 인증을 부여한 것이다. 글로벌 기업은 자신이 조달하는 광물의 제련소를 추적하여 RMAP 인증을 취득했는지 점검하는 방식으로 광물 공급망 리스크를 관리해 왔다. 다만 기존의 분쟁광물 중심 규제와 민간 인증 시스템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에서 불법적으로 채굴된 주석이 RMAP 인증 제련소를 통해 유통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인도네시아가 ‘분쟁 및 고위험지역’으로 분류되지 않아 인증 심사를 수월히 통과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또한 인도네시아는 전 세계 니켈 생산량의 5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술라웨시 지역 등에서는 대규모 니켈 채굴로 인한 식수원 오염, 산림 파괴, 해양 생태계 훼손, 불법적 토지 수탈 등의 이슈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니켈은 분쟁광물(3TG)로 분류되지 않고 2022년까지도 RMAP 인증 대상이 아니어서 통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최근 들어 인도네시아 소재 일부 니켈 제련소가 RMAP 인증을 취득하기 시작했으나, 해당 인증 절차에 광산 현장실사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의 영세광산(ASM)이나 중간 유통단계에서 발생하는 리스크가 모두 통제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광물 공급망에 대한 규제와 실무 관행도 점차 발전하고 있다. EU는 2023년 배터리규정을 통해 니켈, 코발트, 리튬 등 책임광물 공급망에 대한 추적 및 실사 시스템 구축을 의무화했다. RMI는 올해 4월 보고 양식(EMRT)을 개정해 니켈, 리튬, 천연 흑연 등을 관리 대상 광물 목록에 포함했고, 현대자동차도 올해 5월 관리 대상 광물을 기존 5종(분쟁광물 4종 + 코발트)에서 전기차 배터리 광물을 포함한 20여 종으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부 글로벌 기업은 제련소의 RMAP 인증 여부를 서류로만 점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광산에 대한 현장실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테슬라는 2024년 보고서에서 인도네시아 니켈 광산 및 제련소를 직접 방문했으며, 광산 3곳에 대해 국제기준에 따른 감사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책임광물 공급망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특히 우리 기업과 직접 계약관계를 맺지 않은 해외의 제련소, 광물 중개상, 영세 광산 등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해 광물의 원산지나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 국내 제조사는 민간의 제련소 또는 광산 인증 정보 등을 1차적으로 활용하되, 해당 인증의 구조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정기적으로 국제기구의 데이터나 NGO 보고서 등을 살펴 인도네시아와 같은 고위험 지역을 선제적으로 스크리닝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그 시작이다. 또한 고객사의 요구를 협력사에 일방적으로 전가하기보다는, 자사의 책임광물 조달 기준 및 절차를 국제규범에 따라 명확히 수립한 뒤, 고객사에는 원칙 있게 설명하고 협력사에는 실현 가능한 조치를 책임감 있게 요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규제와 시장의 변화에 발맞추어 우리의 책임광물 공급망 관리 제도와 실무가 함께 진화해 가기를 기대해 본다.
    책임광물 공급망 리스크의 관리
    by 민창욱
    2025.06.07 08:00:00
  • 2022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상업위성 미)Starlink, Capella, 핀란드)ICEYE 등 활용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지난 3월, 트럼프와 젤렌스키 대통령의 종전 협상 회담이 결렬되자 미국은 위성영상 정보지원을 즉시 중단하며 우크라이나를 압박했다. 이 위성영상은 미 국가정찰국(NRO)이 상업우주 활용 프로그램으로 확보한 것이다. 오늘날 상업위성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여 지난해 4월, 미 국방부와 우주군은 각각 ‘상업 우주 통합 전략(Commercial Space Integration Strategy)’과 ‘상업 우주 전략’을 발표했다. 미 행정부의 ‘상업 우주 통합 전략’은 안보와 상업을 통합하려는 시도로 민간의 상업용 우주 솔루션 활용이 군사 작전 영역에서 효용성을 높을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하며, 우주상업 파트너십을 확보하고 육성하기 위한 전략을 상세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전략은 민간 우주 산업의 기술과 능력을 군사 및 국가 안보 분야에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우주에서의 위협을 감소시키고, 상업적 솔루션이 군사 작전에 효용성을 높이는 것을 추구한다. 주요 내용은 첫째, 상업 우주 솔루션의 군사 작전 분야 활용을 확대하기 위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둘째 상업 우주 산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혁신적인 상업 문화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셋째 상업 우주 산업의 개발 기간 단축과 시장 동향 파악을 통해 정부와 민간 부문 간의 협업 장벽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미 국방부는 상업 우주 산업의 활용 가능 분야를 파악하고 정부가 맡아야 할 역할을 설정한다. 미 우주군은 상업 우주 솔루션 사용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상업 부문과 지속적으로 협력한다. 이러한 실행 사례로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 위치한 미우주시스템사령부 소속의 ‘Innovation Hub VT-ARC’는 국가안보에 상용 우주솔루션을 활용하는 방안을 구현하는 곳으로 우주 우방국의 상용 우주업체 대상으로 위성통신, 우주감시, 우주정보, 항법(PNT) 분야의 순으로 미 우주군 사업 참여도 유도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민군협력진흥원에서 ‘민 · 군기술협력사업촉진법’에 따라 민·군겸용기술(Spin-up)의 개발과 국방기술의 민간이전(Spin-off), 민간기술의 국방 활용(Spin-on) 등의 민·군 기술협력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전담기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민·군 기술협력에 대한 사업·제도적 한계로 실질적으로 소요군의 활용이 필요한 소프트웨어 분야 개발까지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냉전 종식 후 군비를 축소해 온 유럽과 달리, 우리는 방위사업에 꾸준히 투자해 왔다. 최근 K-방산 수출이 괄목 성장한 계기가 되었다. 수출국이 실제 사용하지 않는 무기를 구매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러니 K-방산의 핵심 경쟁력은 적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우리 군이다. 국산화를 참고 기다려 준 우리 군 덕분에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서 오늘날 글로벌 방산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오늘날 미 행정부의 ‘상업 우주 통합 전략’은 정부 주도 우주 개발을 선택과 집중으로 전환하고, 우주 자산의 회복력 강화를 위한 경쟁 우위 모색에 방점이 있다. 국가가 민간 우주 자산을 활용하는 사례가 확대하고 있어 우리도 관련 사안에 대한 검토와 안보 환경 변화에 맞는 우주 생태계 구축 전략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즉, 미 우주군은 “구매할 수 있는 것은 구매하며 반드시 필요한 것은 구축한다”는 접근방식으로 상업 우주부문의 혁신을 유도하고 있다. 우리도 저비용 단기간으로 우주자산을 획득하고 소프트웨어 분야에 상업우주를 접목하는 ‘한국형 상업 우주전략’ 수립을 제언해 본다. 이와 함께 우주청과 방사청 컨트롤이 가능하고, 국가 안보를 고려한 민-군 우주안보 통합 전략 수립이 가능한 상위기관의 설립과 우주 생태계 구축을 위해 국방우주산업을 기반으로 민간우주산업을 육성화하는 전략적 접근도 필요하다. 또한, 글로벌 우주 협력을 통한 한국의 우주 산업 기반 강화와 우방국과의 우주 안보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K-방산을 ‘K-우주방산’으로 도약시키는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K-우주 방산’ 전략을 만들 때다   
    by 최성환
    2025.06.04 17:20:30
  • 지금 세계는 AI 전쟁 중이다. 이는 비유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이다. 데이터나 알고리즘이 총알이고, GPU가 무기이며, 언어모델(LLM)은 군수물자이다. 누가 먼저 기술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산업과 경제, 외교의 질서까지 판가름 나는 전면적 충돌의 시기다. 미국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반도체와 AI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중국은 국영자본을 동원한 기술독립 전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AI 규제법과 산업정책을 동시에 설계하며 주도권 확보에 나섰다. 이 판에서 우리나라는 어디에 서 있는가. 문제는 우리가 AI를 여전히 산업진흥이나 창업지원의 영역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데 있다. 국가 전략이 아니라 부처 단위의 ‘과제’ 수준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AI는 더 이상 기술개발지원이나 규제완화로 대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책’이 아니라 ‘전략’이다. 그리고 전략은 혼란이 아니라 일관성 위에서만 가능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감이다. 미국 코로나 백신 개발 프로젝트인 ‘Operation Warp Speed’처럼, 실패는 허용하되 속도는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정부는 대통령 직속의 ‘AI 국가전략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현행 국가AI위원회는 폐지해야 한다. 기획재정부도, 과기정통부도, 산업부도 이 전쟁의 지휘부가 될 수 없다. 그들은 병참본부로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전략은 기술을 이해하는 자가 짜야 하며,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행정가나 경영자가 아닌 야전형 기술 사령관이다. AI 전쟁의 리더는 현장에서 알고리즘을 만지고, 모델을 훈련하고, 틀을 이해하는 AI 기술 전문가여야 한다. 국가 AI 전략의 리더십이 기술에서 멀어질수록, 전략은 문서만 남고 실행은 흐려진다. 우리가 수년간 목격한 것은 바로 이 ‘전략 부재의 반복’이다. 수십 개 부처가 서로 다른 로드맵을 내고, 이름만 다른 지원 사업이 중복되고, 정작 기업들은 GPU 하나 수급하지 못해 개발을 포기하는 일이 벌어진다. ‘AI 강국’을 외치면서도 기반 기술과 생태계에 대한 투자는 여전히 표류 중이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국가AI연구소를 설립하여 국가 차원의 기술축적과 인재양성 시스템을 통합하고, 산발적인 R&D 과제를 전략적으로 정렬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보여주기식 정책’에 허비해 왔다. 스타트업 몇 곳 지원했다는 성과, AI 경진대회 몇 회 개최했다는 홍보, 국제기구 몇 곳 참여했다는 외교적 수치로 국가전략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환상을 걷어내는 일이다. 설명가능한 AI(XAI)와 같은 기술적 허상에 매달릴 시간에, 실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기술을 키워야 한다. 우리가 투자해야 할 것은 발표용 슬라이드가 아니라, 실제 코드를 짜고, 모델을 훈련하며, 국제 생태계에서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는 실전형 기술과 기업이다. AI 강국은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가 기술을 이해하고, 기술이 전략을 이끄는 체계 위에서만 가능하다. 전략이 없는 국가에겐 승리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AI는 전 세계에서 진화를 멈추지 않고 있다. 전장을 외면한 채 회의실에서만 전략을 짜는 나라에겐 미래가 없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시간은 지금이며, 준비해야 할 대상은 기술 그 자체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야전군은 기업의 AI 기술자들이다. 그들을 불러 모아야할 때이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한 몇 가지 전략을 제안한다. 첫째, K-LLM 전담 전투팀을 꾸려야 한다. 대한민국도 이제 말뿐인 K-모델이 아니라, 글로벌 수준에서 실제로 싸울 수 있는 자체 고성능 언어모델(K-LLM)을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가 GPU와 데이터를 책임지고, 민간 기술자가 주도하는 전담 전투형 개발팀을 구성하라. 산업현장에서 즉시 투입 가능한 실전형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전략 없는 기술은 무기 없는 군대와 같고, 기술 없는 전략은 말잔치일 뿐이다. 둘째, AI 연산 인프라를 민간에 개방해야 한다. AI는 연산이 곧 전투력이다. 스타트업이 GPU 부족으로 무너지는 동안 정부는 여전히 보고서만 쓴다. 국가가 수천 장의 GPU를 보유한 전용 AI 클러스터를 구축해 민간에 개방하고, 슬라이드가 아니라 소스코드로 평가하는 실전 배치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누구에게 총을 쥐여줄지, 그 기준은 문서가 아니라 코드로 정해야 한다. 셋째, 국가 전략데이터 API 개방이다. 모델이 아무리 정교해도 데이터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공공과 민간이 보유한 고품질 데이터셋을 ‘국가 AI 전략 자산’으로 편성하고, 기술자에게 API 형태로 실시간 개방해야 한다. 특히 한국어·법률·교육·의료 등 전문분야 데이터는 한국만의 전장을 열 수 있는 무기다. 데이터는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사용하는 연료다. 네째, 민간 기술자를 실전에 투입해야 한다. 국가 프로젝트는 더 이상 회의실에서 회의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기업은 물론, 스타트업 CTO, 시니어 개발자, 현업 알고리즘 설계자를 국가 AI 전투현장에 직접 투입하고, GPU·인증·전략 자원을 집중 제공하라. 민간 기술자는 보고용 명단이 아니라 전장을 돌파할 진짜 전투원이다. 현장에 기술자를 보내는 나라만이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마지막으로 실시간 테스트베드를 구축해야 한다. 모델의 품질은 실험실이 아니라 현장 사용 중 오류로 증명된다. 민원 시스템, 의료 요약, 행정 자동화 등 공공 영역에 AI 모델을 즉시 배치하고, 실시간 피드백과 오류 리포트가 돌아오는 AI 실전 테스트 플랫폼을 구축하라. 기술자는 매일 실전에서 싸우고, 모델은 매일 실전에서 진화해야 한다. 그게 전쟁이다.
    새 정부는 ‘AI국가전략위' 만들어야
    by 김윤명
    2025.06.03 11:09:38
  • 기업의 퍼블릭 어페어즈(Public Affairs) 활동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정부 관료를 만나고 국회의원을 설득하면 정책은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여전히 정치권이지만, 정책을 움직이는 힘은 시민단체, 전문가, 이익단체, 미디어 등 ‘제3자 그룹’으로 분산되고 있다. 권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흩어졌을 뿐이다. 정책은 법과 제도, 그리고 예산이라는 형식으로 실현된다. 그러나 그 형식을 실질적으로 만드는 본질은 ‘사람’과 ‘이해관계’다. 과거처럼 관료나 국회의원만을 겨냥한 일방향 설득으로는 설 자리가 없다. 여론을 선점한 시민단체 하나가 기업의 시장을 송두리째 흔들고, 학회 성명 하나가 법안의 생사를 갈라 놓는 시대다. 사회적 설득력이 없는 정책은 제도화되지 못하고, 제도화되지 못한 정책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환경·보건·플랫폼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 같은 흐름은 더욱 뚜렷하다. ‘탈플라스틱’ 캠페인으로 출발한 일회용 컵 규제는 몇몇 시민단체와 소비자단체의 꾸준한 이슈 제기와 언론 연계로 국회까지 연결됐고, 법제화로 이어졌다. 기업들은 규제가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본질을 인식했다. 문제는 사후 대응이 아니라, 초기의 무관심이었다. 제약업계의 약가제도 개편 역시 마찬가지다. 환자단체와 전문가 그룹이 ‘신약 접근권’이라는 공공성을 앞세우자 정책 프레임은 완전히 전환됐다. 정책을 앞당긴 건 정부가 아니라, 정책 바깥에서 문제를 구조화한 이들이었다. 정당성과 긴급성을 확보한 제3자가 정책 결정의 흐름을 바꾼 셈이다. ICT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일명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은 정부나 기업이 아니라 소상공인 단체와 소비자 권리단체들의 요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알고리즘의 투명성, 입점 수수료 문제 등을 제기하며 여론을 장악했고, 국회는 이 흐름을 외면하지 못했다. 플랫폼 기업들은 법안의 정합성에 대해 반박했지만, 사회적 정당성을 넘지 못한 반론은 정책의 벽을 막지 못했다. 이제는 정책의 권력 구조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해관계자는 정부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점점 더 조직화되고 다층화되고 있다. 이제 소셜폴리틱스의 시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기업이 생존하려면 이들과의 관계설정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 누구를 설득하고, 누구와 협력하며, 누구의 반발을 예측할 것인가. 이 복잡한 지형을 해독하는 도구가 바로 ‘살리언스(Salience) 모델’이다. 살리언스 모델은 이해관계자의 속성을 세 가지 기준으로 분류한다. ‘권력을 가졌는가’ ‘정당한가’ ‘긴급한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따라 기업은 대응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 목소리가 크다고 반드시 설득해야 할 대상은 아니며, 영향력이 낮다고 무시해도 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정당성과 긴급성을 가진 ‘의존적 이해관계자’는 언론과 여론을 움직이는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 그룹이다. 환경단체, 환자단체, 소비자단체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이들과의 조기 협력은 사회적 지지와 정책 우군 확보의 핵심이 된다. 반대로, 권력과 긴급성을 동시에 가진 ‘위험한 이해관계자’는 사전 대응 없이는 돌이킬 수 없는 리스크로 번질 수 있다. 정치권 핵심 인사나 거대노조, 언론 권력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단순한 메시지로는 설득할 수 없으며, 신뢰 기반의 대화 채널을 사전에 확보해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많은 기업들이 여전히 정부와 국회라는 공식 경로에만 의존한다. 변화한 환경을 읽지 못하고, 전략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설득의 기술을 넘어, 조율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해관계자의 언어를 읽고, 갈등을 구조화하며, 공통의 정책목표를 재설계하는 일. 퍼블릭 어페어즈의 본령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해관계자 맵핑은 결코 고비용 전략이 아니다. 포럼 하나, 리서치 하나, 소규모 자문그룹 운영만으로도 충분한 데이터와 신호를 얻을 수 있다. 관건은 이를 전략으로 축적할 수 있는 체계와 의지다. 정책은 언제나 사람의 손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지금 그 손은 점점 더 정부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퍼블릭 어페어즈 전략의 타깃은 넓어져야 한다. 정부청사나 국회만이 아니라, 거리의 시민사회, 기자실의 여론, 전문가의 보고서가 기업을 둘러싼 정책 환경을 바꾸고 있다. 이들을 이해하고, 구분하고, 조율하지 않으면 기업의 논리는 정책의 언어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정책이 되지 못한 논리는 곧 시장에서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소셜폴리틱스’ 시대가 왔다
    by 이보형
    2025.06.03 08:26:45
  • 서울고등법원이 지난 22일 카카오모빌리티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명령과 271억원 과징금을 전부 취소하는 판결을 내렸다. 공정위가 ‘가맹택시 콜 몰아주기’로 규정한 행위를 법원은 ‘합리적 차별’로 판단한 것이다. 택시 호출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카카오모빌리티가 어떻게 공정위를 상대로 완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카카오모빌리티의 카카오T앱에서는 두 가지 호출 방식이 있다. 가맹호출(유료)과 일반호출(무료)이다. 가맹호출은 카카오T블루 택시만 부를 수 있고, 일반호출은 주변 모든 택시가 대상이다. 그런데 일반호출에서도 가맹택시가 비가맹택시보다 우선적으로 배차를 받는다는 게 공정위의 문제 제기였다. 공정위는 ‘가맹택시나 비가맹택시나 일반호출 앱 이용약관에 똑같이 동의했으니 둘은 동등한 거래상대방이다. 차별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법원은 가맹택시와 비가맹택시의 의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다. 가맹택시는 별도의 가맹계약을 체결하고, 목적지를 확인하지 못한 채 강제 배차를 받으며, 카카오모빌리티의 각종 정책에 따라야 한다. 반면 비가맹택시는 단순히 앱 이용약관에만 동의하면 된다. 결국 법원은 ‘카카오모빌리티 입장에서 가맹택시와 비가맹택시는 거래조건이 다른 상대방이다. 차별에는 합리적 이유가 있다’고 판결했다. 과거 골프존이 가맹수수료를 내는 가맹점에만 신제품을 우선 공급한 것을 차별이 아니라고 본 것과 같은 논리다. 공정위가 두 번째로 지적한 것은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행위였다. 일반호출 시장에서 90% 넘는 점유율을 가진 카카오모빌리티가 가맹택시를 우대해 가맹시장까지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카카오모빌리티의 차별행위 이후에도 앤모빌리티, 코나투스, 브이씨앤씨, 우티 등 다양한 가맹택시 사업자들이 시장에 신규 진입했다는 점을 들어 경쟁제한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다. 사전적 우려보다는 실제적 효과를 중시한 것이다. 공정위의 시장 구분 논리에도 한계가 드러났다. 일반호출 시장과 가맹호출 시장을 별개로 본 것인데, 이는 플랫폼의 양면시장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빠른 호출이 핵심이며, 하나의 플랫폼에서 다양한 옵션을 제공받는 것이 오히려 편익을 증대시킨다는 점이 간과됐다. 알고리즘을 통한 차별의 입증도 쉽지 않았다. 알고리즘의 기술적 작동 방식과 그 결과로서의 차별적 효과 간의 인과관계를 법적으로 명확히 입증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그렇다면 공정위가 대법원에서 역전할 가능성은 없을까. 몇 가지 반박 논리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행정기관의 전문성과 정책적 판단에 대한 존중 범위다. 디지털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영역에서 공정위의 예측·정책적 판단의 합리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둘째, 시장지배력의 사전적 규제 필요성이다. 카카오모빌리티의 조사 결과 가맹기사와 비가맹기사 간 월평균 수입 차이가 1.04배에서 2.21배에 달했다. 카카오모빌리티의 택시 등 관련 시장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에서 사후적 경쟁제한 효과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셋째, 알고리즘 거버넌스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플랫폼 사업자가 알고리즘을 통해 시장 참여자를 차별할 때, 그 기준과 과정의 공개 의무나 공정성 담보 방안에 대한 법리가 정립될 필요가 있다. 이번 판결이 확정되더라도 플랫폼 규제의 근본적 과제는 남아있다. 혁신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가 풀어야 할 숙제다. 공정위는 판결문을 검토한 후 대법원 상고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카카오모빌리티 사건을 통해 디지털 플랫폼에 대한 보다 정교하고 균형 잡힌 규제 프레임워크가 정립되기를 기대한다.
    카카오모빌리티는 왜 공정위를 이겼을까
    by 안성훈
    2025.05.31 08:00:00
  •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기본’과 ‘모두’라는 개념은 AI 시대에 들어서며 그 의미가 전면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단지 용어의 재정의가 아니라, 헌법 질서의 구조 전환을 요구하는 사유의 출발점이다. 우리 시대의 ‘기본’은 더 이상 최소 생존의 보장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기본’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이해되었다. 식량, 주거, 교육, 의료, 노동 등은 이러한 생존 중심의 복지국가적 기본권 체계에서 핵심 구성요소였다. 그러나, 오늘날 AI 기술은 인간의 삶에 대한 조건을 ‘기술적 참여’ 여부에 따라 차별화하고 있으며,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사회적 소속과 판단 능력 자체를 좌우한다. AI가 인간의 의사결정 구조를 대체하거나 보조하는 환경에서 ‘기술의 비접근’은 곧 ‘사회적 배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새로운 ‘기본’은 기술로부터의 보호가 아닌, 기술을 통한 실질적 참여의 보장이어야 한다. ‘모두’는 형식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접근을 뜻한다. ‘모두’라는 단어는 겉보기에 포용적이고 평등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할 위험도 있다. 기술 인프라와 교육, 언어 능력, 경제력, 지역 격차 등은 AI 기술에 대한 접근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모두의 AI’가 단순히 서비스를 개방한다는 의미에 그친다면, 사회적 약자는 여전히 소외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의미의 ‘모두’는 형식적 평등을 넘어, 실질적으로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디지털 접근권, AI 리터러시 보장, 맞춤형 공공 서비스 등 적극적 정책수단이 동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두의 AI는 국민 모두가 AI 서비스를 이용함에 있어서 제한이나 차별을 받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AI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실질적이고, 사회적 권리로서 AI 기본권이 인정될 필요가 있다. 이처럼, AI 시대의 ‘기본’은 기술과 권리의 결합이다. 기본은 더 이상 사회보장 제도의 내부 개념이 아니라, 기술 사회 전반에 대한 설계 원칙이 되어야 한다. 이는 권리 없는 기술 도입이 아니라, 권리를 전제로 한 기술 사회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AI는 인간의 삶을 매개하고 판단을 구조화하는 도구이기에 기술 자체가 헌법적 의미를 띠는 존재 조건으로 기능한다. 즉, ‘AI 기본사회’란 AI 기술에 대한 접근·통제·이용·설명요구·이의제기 등이 보편적으로 보장되는 디지털 사회계약의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사회계약이 노동구조에 따른 근간이었다면 기본사회에서의 사회계약은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계약내용을 구성하여야 한다. AI를 통해 구현되는 세상이라는 점에서 AI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경우, 경쟁에서 배제될 수 있다. AI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과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볼 때, AI는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차이가 차별로 확대되지 않도록 AI 기본권의 실질적 보장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법과 헌법은 ‘기술 없는 기본’을 넘어야 한다. 기존의 헌법 이론은 기술을 외부적 요인으로 간주해왔으며, 대부분은 기술로부터의 보호라는 ‘방어적 권리 모델’에 기반해 왔다. 하지만 AI 사회에서는 기술이 기본권 실현의 수단이자 조건이 된다. 교육 받을 권리도 AI 튜터 없이 실현되기 어렵고, 행정 정보도 AI 기반으로 제공되는 시대에는 기술에 접근할 수 있어야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즉, AI는 권리의 내용이자 방법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법은 이제 기술 없는 기본권 논리에서 벗어나 기술로부터 권리를 확장하는 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 ‘모두의 AI’는 새로운 사회계약의 조건이다. 전통 사회계약은 ‘세금과 복지’, ‘노동과 안전망’이라는 교환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AI 사회의 기본계약은 ‘데이터와 권리’, ‘접근과 참여’, ‘기술과 책임’이라는 새로운 조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때 ‘모두의 AI’는 AI 기술이 일부 기업이나 국가 권력의 소유물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동등하게 접근하고 설계에 참여하며 책임을 공유하는 공공 자산임을 선언하는 개념이다. 법률과 정책은 이 새로운 계약의 문법에 따라, 기술의 공공화와 시민 참여의 제도화, 공정 분배의 원칙을 명시적으로 내장해야 한다. ‘모두’와 ‘기본’은 AI 시대의 헌법적 기초다. 결국 ‘모두’는 기술 포용의 대상을, ‘기본’은 기술로 구성된 삶의 조건을 재정의하는 개념이다. 국민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두에게 기본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AI 기본사회는 이러한 ‘모두’와 ‘기본’의 재발견을 바탕으로, 기술과 권리의 관계를 재설계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는 시도다. 이 개념의 전환을 제도화하지 못한다면, AI 기술은 권리의 도구가 아니라 배제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국민 모두가 AI를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는 사회인 AI 사회의 큰 의미는 AI에 대한 접근과 이용의 제한없는 AI 기본권의 보장이어야 한다. 앞으로, AI 기본권은 모든 정책·입법의 철학적·헌법적 기반이 되어야 한다.
    AI 시대 ‘모두’와 ‘기본’의 재발견
    by 김윤명
    2025.05.30 14:42:28
  • 자기관리의 대가로 통하는 데일 카네기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작은 성공에서부터 시작하면 어떤 목표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을 보면 쉽게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곤 한다. 그러나 새로 찾은 길에서조차 작은 성공을 맛보지 못한 채 다시금 포기하기 일쑤다. 도전하지 않는다면 결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반복의 힘’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적응력을 키우고 작은 실패들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며 근성 있게 도전하는 힘 말이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반복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많은 것을 배우고 습득하는 영유아 시기는 반복 학습이나 반복 놀이를 통해 배운 것을 기억하고, 응용할 수 있는 창의력을 키우는 만큼, 반복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세계 노벨상 수상자의 22%를 배출해 낸 이스라엘의 유대인 부모들은 영유아 시기부터 반복 교육을 지원한다. 종교적 특성상 영어, 히브리어, 고대 히브리어를 배워야 하는 유대인들은 식사 전 12개의 기도문을 암송한다. 부모는 반복적으로 기도하는 환경에 자녀들을 노출시켜 자연스럽게 기도문을 외울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반복하는 습관을 기르는 유대인 아이들은 공부를 반복해서 낭독하고 베껴 쓰며 생각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일상에서 반복되는 경험, 반복되는 놀이와 체험 속에서 사고력을 키우고 학습능력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반복의 힘을 경험하며 성장한 유대인들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도와주어야 하는 지를 알게 된다.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나는 국가들인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를 보면, 공통적으로 영유아 시기부터 반복 교육을 통해 모든 학생이 교육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좋은 교육환경’을 가진 이들 국가의 영유아 교육에서 강조되는 것은 아이들의 행복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도전하며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스웨덴에서는 영유아들에게 문자 교육 대신 산책이나 캠핑, 밖에서 뛰어오는 단순한 일상을 반복하게끔 한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환경의 가치를 깨닫게 되며,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배운 것들을 창의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지혜를 얻으며 행복하게 자라난다. 새로운 것을 습득할 수 있게 하려면 기존의 것들을 기억하고 응용하며 도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막무가내로 이것이 잘 안되니 새로운 것을 해보라고 지시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독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은 천천히 자란다. 결코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고 서두르거나 욕심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반복 놀이에서는 목적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 영유아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애를 쓰는 대신, 실패할 때마다 부담 없이 얼마든지 새롭게 놀이를 시도할 수 있다. 반복 놀이는 영유아로 하여금 행동 선택의 폭을 넓혀주기도 하는데, 놀이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반짝이는 창의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도전 과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반복 교육은 영유아로 하여금 기억, 자기조절, 언어사용, 친구와의 협력 등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매일처럼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반복적으로 행동하며 사고한다. 아이들은 어려운 것에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습득하고 반복되는 놀이의 기회를 통해 습득한 것을 좀 더 잘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어렵고 힘든 일에 도전하는 일을 지시하거나 강요하게 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느끼며 좌절감 속에서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생겨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반복에 노출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유아 시기부터 반복 학습을 통해 뇌를 자극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돕는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할 수 있는 끈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위인들의 일화 속에서도 그들이 얼마나 반복해서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작은 일에서부터 반복해서 작은 성취감을 얻게 되는 경험이 쌓이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영유아 시기의 반복 교육은 뇌를 깨우고 자극하여 점점 더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우리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대신 반복해서 도전하고 반복의 힘을 실천할 수 있는 행복한 어른이 되길 바란다면 지금부터라도 부모로서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면 어떨까.
    도전과 성취를 만드는 ‘반복의 힘’
    by 한서정
    2025.05.29 15:42:13
  • 최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올해 국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0.8%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저성장 흐름이 나타났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유사한 0%대의 낮은 성장률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미국의 관세전쟁에 의한 수출 감소가 주요 원인이라 하지만 반도체, 자동차, 이차전지와 같은 국내 주력 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이 흔들리고, 미래 혁신성장 동력인 AI 혁신경쟁에서 뒤처지는 모습들은 경제성장 멈춤에 대한 불안감을 높인다. 인간과 대화하는 인공지능(AI) 챗GPT는 불과 2년 만에 초기의 경이로움 단계에서 사용자가 5억 명에 이를 만큼 성장하고 있다. AI 발전에 필요한 기반 기술인 AI 반도체나 대규모 데이터 처리기술도 빠른 속도로 발전해 AI 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혁신 산업들이 움트고 있다. 로보택시, 휴먼로봇 등 새로운 개념의 기술혁신이 가시화되고 있고 특히 로보택시는 이미 상용화단계에 접어들어 새로운 이동혁신 서비스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로보택시는 운전자 없이 스스로 주행할 수 있는 자율주행기술 레벨 4의 기술을 탑재하고 운행되는 이동수단이다. 글로벌 로보택시 시장은 2030년까지 연평균 60% 이상 성장해 수천 억 달러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력과 규제 완화를 통해 미국과 중국의 기업들은 이미 기술혁신과 시장 선점을 위한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구글의 자회사인 웨이모(Waymo)는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운행서비스 중이며 테슬라는 운전대와 패달이 없는 자율주행차 운행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은 바이두(Baidu Apollo Go)가 베이징, 우한 등 10개 도시에서 유료 서비스 운행을 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은 세계 주요 도시들로 운행 범위를 넓히는 경쟁을 이미 시작했다. AI 기반 로보택시의 상용화에는 핵심기술 확보뿐만 아니라 여러 중요한 요소들이 갖춰져야 한다. 안전하고 혁신적인 자율주행기술에 도시 인프라 구축, 규제 완화 등 관련 제도 및 법제 정비가 필수적이다. 나아가 기존 자동차 산업 및 고용구조의 대개편을 유발해 산업 전환에 따른 대응과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해야 한다. 즉, 소유에서 공유로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자동차산업의 속성이 바뀌고 그에 따른 고용구조의 대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특히 운전 직종 수요 감소와 소프트웨어 중심 고용구조 전환에 따른 고용시장 혼란과 갈등을 조정할 재교육제도 및 사회 안전망 확충이 필요하다. 현재 국내 로보택시의 혁신경쟁력은 미중 선두기업들에 뒤처지고 있다. 국내 기업이 미국에 로보택시용 전기차 제공 및 운행 서비스 실시가 예정되어 있고 일부 스타트업들이 자율주행기술개발에 참여하고 있지만 핵심기술과 운영 플랫폼 경쟁력이 뒤처진다는 평가이다. 특히 국내 자율주행시스템은 일부 지역(서울 강남, 세종 등)에서만 소규모의 시험 운행을 하는 단계에 있다. 무인 운전 금지에 대한 규제가 여전하고 사회적 수용도가 낮아 자율주행 혁신경쟁에 장애가 되고 있다. 로보택시는 AI 기술을 적용한 혁신의 상징이자 산업구조 재편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국내 자동차산업은 제조업 총생산의 12%를 차지하고 직접 고용인력 33만명을 포함해 약 150만명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주력산업이다. 규제개혁과 사회적 수용성 미비로 신산업 혁신경쟁에 뒤처지면 새로운 혁신성장 동력 확보에 실패할 위험이 높다. 이미 ICT 혁신경쟁에서 낙오된 일본과 유럽의 사례는 혁신 격차가 경제성장에 치명적임을 제시한다. 로보택시로의 전환에는 자율주행 핵심기술 확보부터 서비스 관련 기술이 통합된 기술플랫폼과 고용, 제도, 규제, 도시인프라 설계까지 통합된 혁신체계가 필요하다. 즉, 기술개발, 규제개혁, 사회적 수용성, 산업구조 전환 전략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종합적인 정책패키지 접근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지금 정부의 과학기술혁신체계로는 통합된 관리가 어렵다. 현재 과학기술혁신체계는 기술개발에서 개발 기술의 사업화 이전을 주로 다룬다. 또한 기술 개발이 여러 부처에 분산관리돼 조정이 어렵다. 자율주행기술개발 관리도 산업부, 과기부, 국토부, 경찰청 등 여러 부처에 분산되어 있다. 더구나 관련 규제개혁, 제도 구축, 고용 등은 기술개발체계와는 별도로 다루어진다. AI 시대의 혁신 특징은 발전 속도가 빠르고 파괴적이다. 단순 기술혁신이 아닌 산업재편, 경제사회시스템 전환까지 유발한다. 지금의 과학기술혁신 관리체계로는 AI 시대의 기술개발과 혁신의 속성을 수용하기가 어렵다. 기술개발에서 산업구조 개편, 규제개혁, 노동시장 개편, 사회시스템 개혁의 연결성을 고려한 통합적 혁신정책체계의 구축과 이를 이끌어갈 거버넌스 개편이 필요하다. 단순히 부총리제 도입이 아니라 과학기술정책과 AI 혁신정책과의 연계를 위한 새로운 혁신거버넌스 체계를 설계해야 한다.
    AI 시대, 통합된 혁신체계가 답이다
    by 이민형
    2025.05.28 15:36:39
  • 26. 모순의 나라 “그건 모순이야!” 카페의 통유리 위로 가랑비가 빗금을 긋는 풍경에 몰두하다가, 나는 소스라쳤다. 누나가 선명한 한국말을 내뱉어서만은 아니었다. 대화를 시작할 때부터 유창한 영어와 미국식 제스츄어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던 누나는 내 눈동자의 초점이 자기에게로 모이자 다시 되풀이했다. “그건 모순이야.” 여태 영어로 대화를 이어가다가 하필 이 단어를 한국어로 뱉었다. 아버지의 발인 날에 한국에 도착한 누나는 내가 본가에 1주일 머무는 동안에도 계속 외출이 잦아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더구나 지극히 따르던 여동생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싸늘하게 변해버려 내상을 입었던 터라 누나도 그러려니 했다. 따로 카페에서 만나자고 제안한 쪽이 누나였다. 누나는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날 때 유산을 미리 받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줄은 몰랐다고 섭섭함을 드러내다가, 슬그머니 나에게 남겨진 비밀스러운 유산을 떠보았다. 내가 책 한 권을 받았을 뿐이라고 했을 때, 누나는 이번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건 모순이야.” 누나는 자신의 유산에의 불평을 나에게로 돌려 말하기 시작했다. 창끝이 나를 겨냥하듯 날이 선 누나의 눈이 나를 보았다. “아들 하나뿐인데, 어찌 유산이 책 한 권이야?” 이 질문의 대답은 나도 알지 못한다.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조촐한 유산을 나는 심리적으로 수용한 상태인데,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친지나 친구들은 여러 의미에서 더 난리였다. 그래서 누나가 이어서 던질 질문도 뻔했다. “책의 안을 샅샅이 찾아봤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했듯 똑같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는 누나가 던질 또다른 질문도 이미 알고 있다. “뭔가 있을 거야.” 친척들은 백지 수표나 보물섬 지도가 들어 있을 거라고 농담으로 위로했고, 어떤 이는 아버지의 ‘치매기’를 언급하며 위로했고, 어떤 이는 사랑받지 못한 아들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위로했다. 누나는 ‘뭔가’가 있을 거라는 정도의 차이였다. 하지만 나는 여느 때와 다른 심정을 느꼈다. 우선 누나가 내뱉은 ‘모순’이라는 단어 때문에 호흡이 가빠졌다. 나의 현재의 추락은 세계적인 작가와의 대담에서 맞닥뜨린 모순적인 한 문장 때문이었다. 책의 안을 샅샅이 뒤져보라고 다들 권했지만, 아버지는 성경 안에 세상의 물질을 숨길 분은 아니었다. 내가 만일 일말의 그런 의도로 성경을 뒤졌다면 스스로 상처를 더 크게 입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나의 말을 듣자, 아버지는 나에게 ‘뭔가’ 좋은 것을 주려고 했다고 느껴졌다. 나의 침묵에 더 대응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 이것이었다. “그 책 제목이 뭔데?” 책을 유산으로 받았다고 하면, 제일 먼저 책 제목을 물을 줄 알았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항상 마지막에, 더 물어볼 말이 없을 때, 비로소 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미국인 남편을 둔 누나에게 영어로 대답했다. “Bible!” 기세등등했던 누나가 그 책 제목을 듣자 갑자기 차분해졌다. 몸을 의자 뒤쪽으로 편안하게 뉘었다. 입을 쉴 줄 모르는 누나가 침묵하니 분위기가 일순간에 바뀌었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누나! 유산으로 책 한 권 받은 것이 왜 모순이야?”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누나는 정색했다. “내가 언제 모순이라고 그랬어? 얘 좀 봐.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그 책이 성경임을 알게 된 누나는 모순이라는 표현을 당장 거두어들였다. 나는 이 모순적인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누나. 내가 제일 싫어하는 표현이 뭔지 알지?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는 표현이야.” 외교관인 아버지의 첫 발령지인 튀니지에서부터 나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표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 후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를 떠돌며 그곳이 어디서든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곤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또래에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말을 한국어로 들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표현이었다. 이것은 아마 한 살 터울인 누나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누나는 그런 설움의 반작용으로 아예 외국인과 결혼했고, 나는 가는 나라마다 언어를 적극적으로 배워서 언어 능력자가 되었다. 누나는 다시 발뺌했다. “내가 언제 모순이라고 그랬어.” 나는 여러 나라를 돌며 여러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접하며 자랐다. 나의 혼란을 줄여주기 위해, 아버지가 ‘창과 방패’의 고사를 들려주셨다. 중국 초나라에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이 창은 워낙 날카로워서 뚫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외쳤고, 또한 그는 “이 방패는 워낙 단단해서 어떤 것도 뚫을 수 없다”고 외치며 호객 행위를 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당신의 창과 방패가 같이 싸우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던졌고, 상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처럼 서로 어긋나서 맞지 않는 것에서 ‘모순’이 생겼다고 했다. 나는 상인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서로 다른 상인이 다른 곳에서 말했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고 아버지에게 어필했다. 당시 어린 나의 표정을 보며 아버지가 웃으셨던가. 그 후 나는 창의 나라에도 살고 방패의 나라에서도 살았다. 이 나라에서 옳았던 것이 저 나라에서는 옳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옳고 그른 기준이 남들보다 넓어졌고, 여러 상황에 관대한 정서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누나의 변덕 아닌 변덕, 언어적 배반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두 상인이 창과 방패를 각각 다른 장소가 아니라 같은 장소에서 팔았다면 결국 싸움이 붙었을 것이고, 결판이 났을 것이다. 싸움은 무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한쪽은 반드시 지게 되어 있다. 모순은 기다려보면 결판이 난다. 하지만 기다려도 누나는 속 시원한 대답없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마무리 말을 했다.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다.” 나는 누나의 사유 변화 과정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아버지가 외아들에게 책 한 권을 유산으로 남긴 것이 모순이라고 했다가, 그 책이 성경이라고 했을 때 누나는 단번에 모순의 상태를 벗어났다. 더불어 자신의 유산에 대한 불만에도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런 누나의 변화와 상황의 변화에 묘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성경 한 구절 때문에 헤어나올 수 없는 현실적인 딜레마에 빠졌는데, 어떻게 성경 때문에 단번에 모순에서 벗어났는지 누나의 머릿속으로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누나답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너희는 값으로 사진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순간 그 모순적인 문장이 되살아났다. 내가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게 만든 진퇴양난의 문장이다. 나를 가장 수치스럽게 만든 문장이다. 누나의 침묵 속에 이 문장이 창처럼 다시 나에게 날을 세운다. 나는 아버지의 유품을 감히 펼치지 못했다. 나는 어떤 책도 거침없이 독파했지만, 이 책만은 자신이 없다. 이미 실패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피폐한 상황에서 성경을 읽게 되면 더 이해할 수 없는 미로에 빠질 것이고, 철저하게 무너져내릴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는 길이 나에게는 열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같은 예감으로 두려웠다. 뻔히 무너져내릴 것을 알면서 시작할 수는 없었다. 아예 책장을 들추어 보기조차 싫었다. 그런데 누나의 심리적 전이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아내고 싶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사치스럽고 욕심이 많은 누나를 처음으로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 부분 혹은 전체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종의 기원  <26회>
    by 김다은
    2025.05.26 09:00:00
  • 대한민국은 기술의 전환점을 지나고 있다.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산업의 도구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필수조건’으로 변화하고 있다. 행정은 AI로 자동화되고, 교육은 AI 튜터와 함께 이뤄지며, 의료와 돌봄도 AI 기반 플랫폼 위에서 작동한다. 문제는 이 기술 전환이 과연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로 주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 기술의 혜택은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왔다. 고소득층과 대도시는 AI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지만, 농어촌 주민, 고령자, 장애인, 저소득층은 여전히 ‘기술 밖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인공지능은 기회의 문이지만, 통제되지 않으면 또 하나의 격차가 된다. 이제 우리는 이 기술을 모두의 삶을 위한 기반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AI 기본사회의 출발점이다. AI 기본사회는 기술로 국민의 기본적 삶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AI는 더 이상 소수의 자산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향유해야 할 권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제안한 기본사회는 주거, 의료, 교육, 돌봄, 교통, 정보 접근 등 국민 삶 전반을 헌법상 권리로 실현하겠다는 선언이며, 기술 역시 그 일부로 포함된다. 국가는 이제 기술 기반 삶까지 책임지는 방향으로 거버넌스를 전환해야 한다. 기존 복지제도가 ‘일할 수 있어야 지원받는다’는 전제에 기반했다면, AI 기본사회는 ‘기술이 노동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시대’를 전제로 한다. 탈락자를 보조하는 정책이 아니라,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디지털 기반 안전망이 핵심이다. AI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며, 국민의 존엄을 지탱하는 사회적 인프라다. 그러나 기술 인프라만으로는 기본사회가 실현되지 않는다. AI 기본사회는 기술, 제도, 참여라는 세 축 위에 세워져야 한다. 첫째, 기술의 축으로는 공공이 주도하는 AI 인프라가 필요하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국민 AI 비서, 지역 기반 디지털 도움센터, 공공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RAG 시스템 등이 핵심이다. 특정 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개방형 모델과 공공데이터의 결합으로 모두의 AI를 실현해야 한다. 공공데이터는 국민의 것이며, 그것을 통해 제공되는 서비스 역시 공공이어야 한다. 둘째, 제도의 축으로는 ‘AI 기본권 헌장’ 제정과 ‘기본사회위원회’ 설치가 요구된다. AI 접근권, 이용권, 설명요구권, 포용권 등 새로운 사회권을 법제화하고, 이를 실행할 전담 기구를 통해 지속가능한 정책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 위원회는 소득, 돌봄, 교육, 주거 등 복지 각 분야의 정책을 AI 시대에 맞게 재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셋째, 참여의 축으로는 기술 통제를 기술자에게만 맡기지 않는 참여형 AI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시민, 기술자, 법률가, 정책가가 함께 참여하는 AI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공공 알고리즘의 투명성, 영향평가, 사전 인증 및 사후 모니터링 제도를 통해 기술의 공공성과 책임성을 확보해야 한다. 기술 민주주의는 선언이 아니라 구조화된 참여 설계로 가능하다. AI는 인간의 삶을 돕는 도구여야 한다. 경쟁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존엄한 삶을 위한 기술이 되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두고 기술이 주변을 채우는 사회가 바로 AI 기본사회다. 기술복지(tech-welfare)는 단순한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AI는 교육, 건강, 노동 등 인간다운 삶의 전 영역을 지지하는 공공 기반이 되어야 한다. 단절 없는 돌봄, 개인화된 교육, 데이터 기반 복지는 AI 없이는 실현되기 어렵다. 따라서 AI 기본권은 선택이 아닌 새로운 사회권으로 제도화되어야 한다. 지금은 기술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AI 기본사회로 나아가야 할 때다. 기술이 진보할수록 우리는 그 기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더 날카롭게 물어야 한다. AI 기본사회는 그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사회 비전이며, ‘모두의 AI’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 전략이다. AI가 갖는 가치는 기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국민의 권리이기도 하다.
    AI기본사회는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by 김윤명
    2025.05.25 12:03:56
  • 24세인 간호사 샤론은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서 겪은 성폭행 때문에 권위적인 인물들을 아주 불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심리상담과정에서도 성심을 다해 참여하는 것도 썩 내켜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꿈을 꾼다. “한 아이가 불길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처음에는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로 들어가 아기를 구해냈어요. 그러고 나서 아기를 안고 상담자의 집으로 달렸습니다.” 이 꿈을 게슈탈트(Gestalt, 독일어로 전체 혹은 형태를 의미) 방식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게슈탈트 꿈 작업은 보통 4단계로 이루어 진다. 첫 단계는 꿈 꾼이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다시 말해보게 한다. 샤론은 자신의 꿈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 ‘나는 한 아이가 불길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 아이가 불에 타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어요. 나는 처음에는 발을 동동구르면서 무기력하게 쳐다만 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용기를 내서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에 뛰어 들어가서 가까스로 아이를 구출했어요. 나는 그 아이를 안고 내가 지금 상담을 받고 있는 상담사의 사무실로 달려가다가 꿈에서 깼습니다.’ 샤론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연상하고 놓치거나 빠진 부분 보완하면서 꿈의 내용을 보다 명료화하게 된다. 두 번째 단계에서 샤론은 꿈에 등장한 요소들을 확인한다. 이 꿈에서는 ‘나, 한 어린아이, 불길, 상담사 등’이다. 세 번째 단계는 게슈탈트 치료자가 샤론에게 꿈의 요소들이 되어보게 한다. 예컨대, ‘당신이 불길에 싸인 어린이가 되어 보세요.’ 등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치료자는 꿈을 해석하기 보다 꿈을 꾼 샤론에게 꿈에서 본 것을 마치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연기(role play)해보도록 권유한다. 이러한 실연(enactment)을 통해서 샤론은 꿈의 진정한 의도를 깨닭게 된다. 이 방식을 통해서 샤론은 자신의 진정한 감정과 상황을 말하는 시점에서 알아차릴 수 있으며, 꿈을 이해하고 자신의 내면의 진정한 모습을 자각하게 된다. 샤론은 자신이 어린시절 받았던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있는 자신의 내면 아이의 모습을 보게된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내면 아이를 구하고, 자신이 현실에 치료를 받고 있는 상담자를 신뢰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게슈탈트 꿈 해석법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꿈이 주는 존재론적 메시지를 알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즉, 샤론은 자신의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불안과 공포의 여러 측면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그것도 그녀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이전에 분리되어 있던 '그녀'의 부분들이 ‘하나의 온전한 자기’로 합쳐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꿈 해석법을 제안한 사람은 게슈탈트 심리치료의 창시자인 프리츠 펄스(Fritz Perls, 1893~1970)이다. 프리츠 펄스는 칼 융과 마찬가지로 모든 꿈은 꿈꾸는 사람에게 꿈이 보내는 실존적 메시지를 갖고 있다고 본다. 특히, 꿈꾸는 사람이 외부의 권위적 인물이 행하는 ‘해석’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내면으로부터 그 메시지를 스스로 새롭게 발견할 때 그런 메시지의 존재를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고 보았다. 즉, 펄스는 꿈에 나오는 모든 요소들은 투사된 자신의 부분들이며, 이 요소들은 이상적으로 자기에 통합되고 수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마치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을 찾아서 원래 자리에 끼워 넣음으로서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프로이트에게 꿈은 ‘무의식으로 가는 왕도’이지만, 펄츠에게는 ‘꿈은 통합으로 가는 왕도’이다.
    ‘온전한 자기’로 통합되는 꿈
    by 국경복
    2025.05.25 11:55:02
  •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대재해처벌법) 부칙 제1조제1항은 “이 법은 공포 후 1년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한다. 다만, 이 법 시행 당시 개인사업자 또는 상시 근로자가 50명 미만인 사업 또는 사업장(건설업의 경우에는 공사금액 50억 원 미만의 공사)에 대해서는 공포 후 3년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 규정에서 “건설업”의 의미를 “건설업자”로 해석한다면 건설업을 영위하지 않으면서 건설공사를 도급한 경우에는 해당 부칙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 반면에 “건설업”의 의미를 “건설업에서 행해지는 공사”로 해석한다면 공사금액 50억 원 미만의 건설공사에서 발생한 중대산업재해에 대하여는 건설업을 영위하든 그렇지 않든 그 공사를 도급한 사람이나 수급한 사람 모두 부칙 조항이 적용되어 법 적용이 2024년 1월 26일까지 유예된다. 위 규정상 “건설업”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건설업자”의 의미로 한정되기보다 “해당 건설공사”의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보인다. 첫째,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상 엄격해석의 원칙과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는 형사법의 기본원칙에 입각하여야 한다. 부칙 조항에서 건설업의 경우에 상시근로자 수 대신에 공사금액을 기준으로 한 것은, 건설업의 특성상 상시근로자 수의 판단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건설업자의 상시근로자 수가 달라질 수 있는 점을 의미하기보다 개별 건설공사에서 공사일마다 출력 인원이 달라지는 점을 의미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건설업”의 의미를 ‘건설공사’가 아닌 ‘건설업자’로만 해석하는 것은,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경우에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는 형사법의 원칙에 정면으로 반한다. 둘째, 해당 부칙 조항의 취지를 고려하여야 한다. 위 부칙 조항의 취지는 영세사업자의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준비기간을 충분히 두기 위하여 유예기간을 두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입법취지를 고려하면, 건설공사의 경우 상시근로자 수가 아닌 공사금액을 기준으로 하는 특성에 비추어 ‘해당 공사의 규모’를 따져 중대재해처벌법의 적용 여부를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건설공사의 규모와는 무관한 건설공사를 도급한 사람의 상시근로자 수를 적용하여 법의 적용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위 부칙 조항의 입법취지에도 반한다. 특히 위 규정을 건설업을 영위하는 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하면, 건설공사에 관한 전문성이 높은 건설업자에게는 오히려 법 적용이 유예되는 반면에 건설공사에 무지한 비건설업자에게는 법 적용이 유예되지 않는 불합리한 결론을 낳는다.
     중대재해법상 ‘건설업’은 공사인가, 업자인가?
    by 김동현
    2025.05.24 11:00:00
  • 2024년 말부터 서울회생법원이 시범적으로 도입한 ‘종합적 고려법’은 회생절차의 실무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상대적 지분비율법’에 따른 회생계획안 심사기준을 보완하여, 기업의 실질적인 회생가능성과 이해관계인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려는 시도이다 기존의 회생절차에서는 회생계획안의 인가요건으로, 기존 주주의 지분율이 회생채권자에 대한 변제율보다 낮아야 한다는 상대적지분비율법이 적용되어 왔다. 이러한 기준은 특히 소규모 기업이나 창업 초기 기업의 경우, 경영자의 지분이 과도하게 희석되어 경영권을 상실하게 되는 문제를 야기했다. 예컨대, 상대적지분비율법에 따르면 회생채권자들이 10%만 변제받기로 한 경우, 기존 주주는 회생 후에도 10%보다 적은 지분만 보유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법리는 채무자 회사의 지분 가치를 ‘기계적으로 채무보다 항상 후순위’로 보고, 기존 주주의 경영 지속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초기 창업자·벤처기업의 경우, 회생 채권자는 대체로 소수이고, 변제율이 낮게 책정되기 때문에 기존 경영자의 지분이 0%에 수렴하게 되어, 회생 후에도 회사를 운영할 동기를 잃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소규모 법인의 경우에도, 기업가치 대부분이 경영자 개인의 능력이나 인적 네트워크에 기반하지만, 상대적 지분비율법은 이를 반영하지 않아 기존 경영자를 사실상 퇴출시키는 부작용이 있었다. 결국 이로 인해 회생 자체가 무의미해지거나, 오히려 파산을 선택하게 되는 도산유인이 발생하는 문제가 초래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회생법원은 소규모 기업의 특성과 현실을 반영하여, 기존 경영자가 회생 이후에도 일정 수준의 지분을 유지하며 경영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종합적 고려법을 시범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이는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책임경영을 유도하고, 회생절차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종합적 고려법의 적용 범위와 구체적인 기준에 대해서는 향후 명확한 정립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특히, 경영권 유지의 기준, 채권자 보호 방안, 회생계획안의 공정성 확보 등 다양한 요소에 대한 세심한 검토와 제도적 보완이 요구될 것이다. 회생절차는 단순히 채무를 조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과 시장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사회경제적 장치다. 종합적 고려법은 ‘형식보다 실질’에 기반하여, 회생제도의 본래 취지를 회복하고, 각기 다른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현실적인 균형점을 찾아내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의 생존을 지키는 회생, 종합적 고려법
    by 이응교
    2025.05.24 08:00:00
  • 일본에서는 엑스포(EXPO)를 ‘반파쿠’로 부른다. 만국박람회를 줄인 ‘만박(萬博)’의 일본어 발음이 반파쿠다. ‘천하의 부엌’ 오사카(大阪)에서 엑스포(4월 13~10월 13일)가 한창이다. 일본은 앞서 1970년 오사카, 2005년 아이치(愛知)엑스포를 개최한 바 있다. 등록박람회를 한 번도 열지 못한 우리와 달리 일본은 벌써 세 차례다. 5년마다 6개월간 개최하는 등록박람회는 세계 최대 규모다. 1993년 대전엑스포는 체급이 작은 인정박람회였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엑스포를 통해 패전국에서 벗어나 선진국 반열에 올랐음을 알렸다. 이후 한동안 일본은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지켰다. 오사카엑스포 주최 측은 55년 전 6,400만여 명에 비해 2,800만 명으로 관람객을 낮춰 잡았지만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지금이야 스포츠를 비롯한 메가 이벤트가 흔전만전하지만 19세기만 해도 볼거리는 흔치 않았다. 세계 최초 박람회는 1851년 런던박람회다. 일본이 국제사회에 처음 얼굴을 내민 것도 박람회를 통해서였다. 사쓰마(가고시마) 번은 1867년 파리박람회에 도자기를 첫 출품했다. 사쓰마 도자기는 유럽인들을 사로잡았고, 단박에 자포니즘(Japonism) 열풍을 불렀다. 유럽인들은 앞 다퉈 도자기를 사들였고 사쓰마 도자기는 최고 사치품이 됐다. 사쓰마는 도자기 판 돈으로 대포와 군함을 사들였고 조슈(야마구치)와 손을 잡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아이러니한 건 도자기 산업의 주인공이 조선도공이라는 점이다. 임진왜란 포로로 끌려간 조선도공들은 오늘날 반도체와 맞먹는 하이테크 산업을 주도하며 일본 개화에 기여했다. 쓰라린 역사다. 오사카는 한반도와 밀접한 곳이다. 원조 한류인 조선통신사와 연결 지어 생각하면 한층 각별하다. 지금도 오사카는 재일 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조선통신사의 주된 통로였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관계 개선을 위해 요청한 평화사절단이다. 한양을 떠난 통신사는 육로와 해로를 따라 에도로 향했다. 한양~에도는 왕복 4,600km에 이르는 거리다. 부산항부터 오사카까지 바닷길만 840km다. 오사카는 일본 본토 첫 기착지였다. 에도 막부는 통신사 행렬이 시모노세키에 들어서면 오사카까지 뱃길을 안내했다. 지난 11일 부산항을 출발해 보름여 만에 오사카에 도착한 조선통신사 재현 선 역시 세토내해 전통항해협의회 도움을 받았다. 비로소 본토에 오른 통신사는 요도우라(淀浦) 강을 거슬러 에도로 갔다. 지난해 자동차를 이용해 시모노세키부터 구레, 토모노우라, 히로시마를 다녀왔다. 선조들이 말과 배를 타고 이동했을 소도시 곳곳에서 조선통신사 행적을 만났다. 최근 엑스포 한국관에서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됐다. 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261년 만에 연 행사는 여러모로 뜻깊었다. 관람객들은 조선통신사 선박과 통신사 행렬에 흥미를 나타냈다. 조선통신사는 단순한 외교 사절을 뛰어넘은 평화와 문화 사절이었다. 1607~1811년까지 200여 년 동안 12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신뢰를 상징한다. ‘믿음을 통하는 사절단’이란 명칭 또한 일본으로 가는 사절단에만 사용했다. 통신사의 주요 임무는 도쿠가와 쇼군에게 국서를 전달하고 답서를 받아오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쇼군을 만나 국서를 교환함으로써 신뢰를 쌓았다. 통신사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다이묘들은 숙식과 행정편의를 제공하며 극진히 환대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과도한 접대로 지방재정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에도 막부는 조선통신사를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유용한 창구로 인식했다. 일본 지식인들은 통신사 행렬이 머무는 숙소를 방문해 밤새워 필담을 나누고 글씨와 시를 받는 것을 특별한 기쁨으로 여겼다. 서울역사박물관은 6월 29일까지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을 주제로 조선통신사 특별전을 열고 있다. 전시장에서는 친밀한 교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대와 하룻밤 이야기하는 것이 십 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는 일본 학자의 글은 인상적이다. 비록 불행한 근현대사를 공유하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에도 호우시절은 있었다. 대륙과 단절된 섬나라 일본에게 조선통신사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엑스포였다. 통신사가 머무는 동안 문화와 물물이 섞이고 지식은 확장됐다. 통신사 일원으로 다녀온 이언진은 ‘오사카는 큰 도회지라 진기한 보물은 용궁의 보물을 털어낸 듯, 페르시아 상인들도 눈부셔하고 절강의 처자들도 빛이 바래네’라며 오사카의 번화함을 묘사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상륙(1543년)해 서구 문물을 전하기 전까지 조선통신사는 유일한 문화 유입 창구였다. 어쩌면 조선과 일본의 악연도 조선통신사가 끊기면서 시작됐는지 모른다. 통신사는 1811년, 12차 사행을 끝으로 중단됐다. 이로부터 불과 65년 뒤 일본은 강화도조약(1876년)을 시작으로 조선침략을 본격화했다. 신뢰가 끊긴 자리에서 전쟁이 싹텄다. 에도 시대 외교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성신이라는 것은 진실 된 마음을 뜻하며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을 갖고 교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일 양국에 필요한 말이다. 2025년 오사카엑스포 한국관의 주제는 ‘연결’이다. 한일 양국이 새로운 미래로 나가는 것 또한 새로운 연결에 있다.
    오사카에서 만나는 ‘새로운 연결’
    by 임병식
    2025.05.19 15:54:44
  •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조항이 근로기준법에 도입 된 후 직장 내 괴롭힘 조사를 어떻게 진행할지 관련 실무상 여러 쟁점이 문제된다. 직장 내 괴롭힘 조사에 관하여는 근로기준법 제 76조의 2가 전부이다 보니 조사를 진행함에 있어 회사는 여러 의문이 들고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최선일지 고민이 된다. 구체적으로 괴롭힘 조사 과정에서 회사들이 요즘 로펌에 특히 많이 질문하는 부분이 직장 내 괴롭힘 조사 결과를 제보자 또는 피해근로자에게 알려주어야 하는지, 알려주어야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알려줘야 하는지 관련이다. 우선 직장 내 괴롭힘 조사 후 결과 통지 관련 근로기준법상 조사 결과를 제보자 또는 피해근로자에게 통지해야 한다는 명시적인 규정은 없다. 이때 우선 고려 할 부분이 근로기준법상 비밀유지 의무와의 관계이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3 제7항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사실을 조사한 사람, 조사 내용을 보고받은 사람 및 조사 과정에 참여한 사람은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피해근로자 등 의사에 반하여 다른 사람에게 누설해서는 아니 된다. 이 조항은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정보의 비밀유지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제보자가 피해근로자가 아닌 경우 제보자에게 조사 결과를 알려주는 것이 피해근로자의 의사에 반할 수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한편 피해근로자인 경우라도 조사 결과를 알려줘야 하는 부분에 대한 명시적 의무 규정은 없다. 다만 실무적인 관점에서 제보자에게 일정 수준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한 경우가 많다. 피해근로자는 회사가 어떻게 향후 조치를 취할지에 대하여 엄청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데 피해근로자가 조사 결과 내용을 공유받지 못한다면 피해근로자로서는 사안을 외부 기관으로 확대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며 사안이 커질 수 있다. 아울러 최근 대법원 판결에 의하면 회사는 피해근로자의 의견 청취 의무 관련하여 피해근로자가 향후 어떠한 입장을 취할지 관련하여 일정 부분 정보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취지이므로, 이러한 점 또한 고려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피해근로자에게 조사 결과를 공유 해 줄 경우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말해주어야 할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조사 관련 신고에 따른 조사가 진행되었고 완료되었다는 기본적인 사실 및 조사 결과에 따라 행위자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취해진다는 일반적인 사실은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제보한 내용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결론은 알려주는 것이 필요할 때가 많다. 다만, 행위자에 대한 구체적인 어떤 수준의 징계(정직, 감봉 등), 인사 조치에 관한 부분은 명예훼손 등이 문제될 수 있어 신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종종 피해근로자 또는 제보자가 제보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결론뿐 아니라 그렇게 판단을 한 근거에 대하여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참고인 진술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괴롭힘 판단 결과를 도출함에 있어 누구 진술을 더 신뢰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회사로서는 상당히 난처한데 이때는 위에서 언급된 비밀유지 및 나아가 조사 내용이 공유 되었을 경우 직원들 사이에 추가적인 분쟁, 불화가 발생하거나, 조사에 참여한 직원들의 개인정보, 명예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설명하며 정보 공유의 범위를 합리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과적으로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제보자에게 조사 결과를 알려줘야 한다는 명시적인 규정이 없다 보니 실무에서 여러 혼선이 있는데, 피해근로자의 알권리, 의견청취 관련 의무 및 비밀유지 의무, 행위자 및 참고인의 개인정보, 명예훼손 등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개별 사안에 맞는 조치를 취하는 균형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부장님 도대체 왜 조사 결과를 안 알려주시나요?  
    by 이태은
    2025.05.18 10:13:21
  • 상장폐지 절차의 장기화는 자본시장의 문제 중 하나로 지적되어 왔다. 최근 5년간 상장폐지 사례(71건)를 분석해보면, 그 중 87%인 62건이 상장폐지 또는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사유 발생부터 최종 퇴출까지 1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이러한 지연에 대해 자본의 효율적 배분을 저해하고 시장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어왔다. 기존 절차에 의하면, 코스피 시장의 경우 2심제로 운영되어 최대 4년의 개선기간이 부여될 수 있고, 코스닥 시장은 3심제로 최대 2년의 개선기간이 주어질 수 있다. 여기에 위원회 심의기간(20~30일)이 추가되고, '속개' 제도를 통해 실질적인 개선기간이 더 연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장폐지 절차의 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래소는 상장폐지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였다. 우선 심의단계가 축소된다. 특히 코스닥 시장의 경우, 상장적격성 실질심사 과정에서 심의주체가 동일한 2심과 3심을 통합하여 2심제로 개편된다. 이는 불필요한 절차 중복을 제거하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이해된다. 개선기간도 대폭 축소된다. 코스피 시장의 경우 형식적 사유에 대한 이의신청 시 최대 개선기간이 2년에서 1년으로 줄어들고, 실질심사의 경우 4년(1·2심 각 2년)에서 2년(각 1년)으로 단축된다. 코스닥 시장 역시 실질심사 시 최대 개선기간이 2년에서 1.5년으로 축소된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형식적 사유와 실질심사 사유가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의 처리 방식이다. 기존에는 형식적 사유에 대한 심사를 먼저 진행하고, 그 결과에 따라 실질심사를 진행하는 순차적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두 심사를 병행하여 진행하고, 어느 하나라도 상장폐지가 결정되면 최종 상장폐지가 확정되는 방식으로 변경된다. 다만, 기업의 정당한 회생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도 마련된다. 개선계획 이행이 임박했거나 조만간 법원 판결이 예정된 경우 등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심의단계별로 3개월의 추가 기간이 허용될 수 있다. 또한 회생·워크아웃 기업의 경우 제한적으로 1년의 추가 개선기간이 부여될 수 있다. 이러한 제도 변화는 상장폐지 절차의 신속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정당한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대한 기회 보장이라는 두 가지 목표의 균형을 추구한 것으로 평가된다. 상장기업들은 이러한 변화에 주목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 상장폐지 사유가 발생하면 과거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개선 조치를 완료해야 하므로, 평상시 재무건전성과 지배구조 관리에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한다. 만약 상장폐지 사유가 발생한 경우라면, 제한된 시간 내에 효과적인 대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전문가의 조력을 받아 체계적인 개선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상장폐지 절차, 이제는 더 빨라진다
    by 정성빈
    2025.05.17 15: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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