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63
  • 대중가요를 생각해 보자. 한국의 대중가요는 서양음악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그 첫 모습은 창가다. 1876년 새문안교회 교인들이 지어서 부른 ‘황제탄신경축가’가 창가의 효시인 것으로 전해 온다. 구한말 등장한 창가, ‘권학가’의 가사는 서구 문명을 부지런히 배우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3·1운동(1919년)을 계기로 등장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하는 ‘희망가’ 역시 노랫말은 개화가사다. 1920년 이후 일본의 통치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되면서, 노래는 상류층 예술가곡과 평민층 유행가의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양반/상놈”의 계층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곡은 상류층, 유행가는 평민층의 노래가 된다. 30년대 ‘황성옛터’(1932, 이하 음반출간 년도), ‘목포의 눈물’(1935) 등이 SP음반을 통해 유행한다. 노래의 가사는 모두 일제 치하의 슬픔을 담고 있다. 해방을 맞이한 감격은 ‘신라의 달밤’(1947)으로 시작되었고, 6.25 사변은, ‘굳세어라 금순아’(1953), ‘단장의 미아리 고개’(1956)를 낳는다. 한국 전쟁은 반상 의식을 무너트리고 상류층으로 하여금 유행가를 받아들이게 한다. ‘이별의 부산 정거장’(1953), ‘경상도 아가씨’(1953)가 그 결과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하는 ‘전우야 잘 자라’(1950) 역시 상하층의 구별없이 널리 애창되었다. 초등학생까지 불렀던 군가였다. 70년대에 이르면 악보 읽기를 배운 한글 세대가 사회활동에 참여한다. ‘아침이슬’(1971)을 살펴보자. 낮은 음으로 시작한 “긴 밤 지새우고...”의 중얼거림은 “나 이제 가련다 저 넓은 광야...”로 치닫는다. 78년에는 대학가요제가 시작된다. ‘아침이슬’은 ‘Sad Movie’(1961)와 멜로디 구조가 같다. 주의력을 뒤에 둔 것이다. 오페라 ‘라 보엠’의 ‘사랑의 이중창’ 역시 같은 구조이지만, 규모가 훨씬 크다. ‘theme-ending’을 국어 교과서 용어를 빌려, 미괄법이라고 옮겨 부르자. 미괄법 노래는 이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사랑의 미로’(1985)는 후반의 “그대 작은 가슴에 심어준...”에 이르러 청자의 가슴을 친다.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했던 ‘그때 그 사람’(1978) 역시 미괄 선율에 속한다. 이즈음 대중적 상투성을 벗어난 가사도 등장한다. ‘희나리’(1985), ‘이연’(1990)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뽕짝’유행가 가사에 대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90년대, 대학가요의 열풍은 숨을 죽인다. 미국 랩(rap)의 영향 이후, 한국의 가요는 새 영역인 ‘강남 스타일’(2012)로 들어선다. ‘강남 스타일’을 포함한 K팝은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노래부르기”가 직업인 노래방 도우미들도 K팝 노래 하나 불러 보라고 하면 못한다고 대답한다. K팝은 국내용이라기 보다는 국외용이며, 수출 가요다.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보는 노래다. 둘의 차이는 축구경기를 보는 것과 직접 축구를 하는 것과의 차이에 비교된다. 이제 세계의 팝은 축구를 넘어서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야구 경기가 된 듯하다. 그래도 인간의 가창 욕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커피샵 만큼이나 많은 노래방이 이를 증언한다. 70년대 ‘뽕짝’은 ‘트롯트 가요’로 이름을 바꾸고, 개명을 기념하듯 ‘쌍쌍 파티’로 이어진다. 주현미의 ‘쌍쌍 파티’는 카세트에 담겨 대 유행에 올라 통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팔려 나갔다. 최근 TV주도의 ‘트롯트 경연’ 역시 그러한 열풍을 꿈 꾸고 있다. 스마트 폰 이후 음악은 디지털 매체에 기반하게 된다. 무엇보다 화면이 중요하다. 화면은 춤으로 채워지고, 음악은 춤과의 분리 이전으로 돌아간다. 타악기가 중요해지면서 노래는 멜로디에서 리듬패턴으로 옮겨간 느낌을 준다. 본령이 부르는 노래였던 예술가곡도 차츰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한때 유행한 ‘그리운 금강산’(1961) 역시 부르는 노래를 살짝 벗어나 있는 노래다. 노래는 차츰 춤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와 무관한 영역이 아직 남아있다. 음악대학 구성원들과 그곳 출신의 음악인들이다. 전국의 음대를 생각하면 그 수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자치단체의 교향악단과 합창단, 교회의 합창단, 그외의 합주단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의 삶은 대부분 열 살이 되기 전부터 클래식 음악과의 접촉으로 시작된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서양고전 음악은 이들의 몸에서 떼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의 활동은 대중음악의 작곡이나 연주, 감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직업이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중가요로부터 분리는 그만큼 심각한 것이다.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순한 비유로 설명해 보자. ‘황성옛터’(1932)나 ‘타향살이’(1934)가 마을 길을 2, 3분 걷는 체험이라고 한다면 베토벤의 교향곡은 유럽 왕궁의 정원과 실내를 30분 동안 걷는 체험일 것이다. 이들이 체험한 음악적 공간은 차원이 다르다. 귀족과 평민의 생각과 삶이 그 차원이 다르듯 말이다. 가요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왕과 귀족의 지배는 해체되었다. 이와 더불어 유럽의 고전음악 생산도 사라졌다. 생산을 촉구하고 평가하던 귀족층이 쇠락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전음악을 자처하는 사이비 음악이 행세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고전음악의 시대가 다시 나타날 리도 없고, 대중음악이 클래식과 같은 심오한 공간을 창조해 낼 수도 없을 것이다. 음악 전공자들도 이를 이해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 쇤베르크(Schönberg) 식의 무조성 음악만이 음악이고 그 이전의 음악은 퇴물이라는 작곡과 교수들과 학생들도 부르는 노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시대가 와야겠지만, “올까?”하는 의문이 든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한국의 대중가요
    by 서우석
    2024.04.27 06:30:00
  • 우리는 소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철학에서도 그렇다. 인도 철학만이 유일하게 소리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1600년 이후 유럽의 물리학은 소리의 원인이 물체의 진동이며, 진동은 공기를 통해 파동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을 밝혀왔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소리의 감각적 질이 외부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요즈음 철학에서는 감각적 질을 “qualia”라는 말로 지칭하며, 감각적 질은 뇌 안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뇌 밖에는 공기의 흔들림이 있을 뿐이다. 박쥐가 반사파로 지각하는 “qualia”가 시각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요즈음의 생각이다. 우리는, 새 소리는 새의 내면에 “qualia”로서 존재하고, 바람소리는 바람의 속성 안에 “qualia”로서 존재하며, 음파는 단지 그것을 전달해주는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다. 사물이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물신론적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피커를 통해 교향곡을 듣는 경우를 생각하면, 판단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스피커로부터 바이올린의 멜로디와 첼로의 반주, 그리고 관악기의 집적거림도 듣는다. 이때 스피커의 콘은 하나의 단선적 변화로 진동한다. 우리는 이 하나의 진동에서 동시에 여러 소리를 듣는다. 달팽이관은 고막의 진동을 수백 개가 넘는 “sine wave”로 분해한다.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뇌는 이 단순파들을 받아들여 개개의 악기 소리로 다시 합성해야 할 것이다. 그 기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927년 코펜하겐의 “양자 이론”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은 덴마크 출신인 닐스 보어(Niels Bohr)에게 “눈을 감으면 달이 없다는 뜻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 보어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아인슈타인은 펄쩍 뛴다. 속으로 “이 친구 미쳤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귀를 막으면 새들의 노래가 없는 것이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외부에 진동은 있지만, “qualia”가 없기 때문이다. 붓다의 생각을 보자. “감지되는 모든 것은 보이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보이는 것의 원인인 연기(緣起)의 단서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팔리어의 “paticca-samuppada”가 “緣起”의 어원이다. “의존해서-생겨남”의 뜻이다. 중국은 이 부분을 “色卽是空”으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의 단순성 때문에 그 뜻에 대한 이론이 분분했었다. 멋 부린 표현은 항상 복잡한 해석을 낳기 마련인가 보다. 소리에 대한 흥미로운 그러나 잘못된 생각을 살펴보자. 그리스인들은 두 물체의 충돌로 소리가 발생하며, 높은 소리는 낮은 소리보다 그 속도가 빠르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뛰어가는 사람을 낮은 목소리로 부르면 다들 이상하다고 쳐다 본다. 중국의 樂記는 “凡音之起, 由人心生也. 人心之動, 物使之然也.”라고 소리를 정의한다. 요약하자면, “凡音之起는 由人心生이고, 人心之動은 物使之然이다.” 즉, “모든 소리의 일어남은 마음이 생긴 때문이고, 마음의 움직임(생김)은 사물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다”로 풀이된다. 결론은 “마음이 소리를 그렇게(然) 만들어냈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然”이다. 우리의 관심은 “그렇게”가 아니라 “어떻게”이다. “어떻게”를 괄호 안에 넣어 설명해 보자. “마음의 움직임은 그렇게(然: 아이콘을 떠 올리려, 발음이 일어나게 해서) 소리를 만든다”가 된다. 한자가 먼저고 소리는 나중이라는 뜻인데, 이를 “然”으로 감춘 것이다. 소리는 뒤로 밀려나고, 아이콘, 즉 표의문자가 중국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게 된다. 소리에 대한 오해의 절정은 쭈커칸들(Victor Zucherkandl)의 주장에서 볼 수 있다. “Sound and Symbol”(1956, 번역 서인정, 1992. <소리와 상징>)에서 그는 “제 3의 공간”을 제시한다. 음악을 들을 때에 음들은 공간 안에서 움직인다. 음들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다시 내려오기도 한다. 음들이 움직이기 위해서 공간은 필수적일 것이다. 그는 시각적 공간과 정신적 공간에 이어 청각적 공간을 설정하고, 이 공간 역시 생활공간과 같은 실존하는 공간이라고 주장했다. 청각공간이 외부에 존재한다는 그의 믿음은 “qualia”가 외부에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위상수학을 생각해 본다. 위상수학은 공간을 정의한다. 공간은 하나의 집합이며, 한 집합(X)과, 그 집합과 똑 같은, 그러나 그 안에 공집합, 전체집합, 부분집합, 합집합, 교집합 등의 가족을 설정한 (T) 집합을 가정한다. 그리고 (X) 집합의 원소 하나하나와 (T) 집합의 가족 간의 연결을 결정해 준다. (X) 집합과 (T) 집합을 나눈 것은 설명을 위한 것일 뿐, 사실 둘은 하나의 집합이다. 모든 점과 모든 점이 연결되어 있는 공간이 우리의 몸이 존재하는 삶의 공간이다. 점과 점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한편 지하철 공간의 집합에는 1, 2, 3 호선 등의 부분집합과, 그 부분집합 간에 교집합이 있다. 환승역들이 교집합이다. 다른 라인에 있는 두 역 사이에는 직접적 연결이 없고, 집적적인 거리도 없다. 환승을 거쳐야만 연결된다. 음악적 공간은 음의 집합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거리가 없는 공간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성되는 마음 속의 공간이다. 몇 개의 음으로 시작해, 원소를 늘여 가며 커가는 공간이다. 집중해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소리의 원시적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이 공간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그래서 같은 음악이라도 다시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을 수 있다. 만들어가는 기쁨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음악이 외부에 없다는 뜻에서 음악을 “Nicht-in- diesem-Welt-Gehörenheit”라고 정의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말을 했던 철학자의 이름이 생각나지를 않는다. 검색을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소리에 대해 내가 아는 바는 여기까지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전 서울대 음악대학교 학장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소리란 무엇인가
    by 서우석
    2024.04.13 06:00:00
  • 요즈음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전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글로 자국어를 표기하는 국가가 나타나는가 하면, K팝에 몰입한 청소년들에게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치는 나라도 여럿 생겼다. 한국 문자와 한국 말의 성격을 생각해보자. 먼저 한글을 보자. 한글을 배우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석 능력을 획득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분석이다. “생각한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이 소리를 한 덩어리로 인식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로 “생각한다”는 뜻의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그 소리를 한 덩어리로 인식할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어느 나라 문자이건 발음 덩어리를 음절로 나누는 일은 첫 번 일어나는 통상적인 작업이다. 한글은 한 단계 더 진전한다. “생각한다”를 “생/ 각/ 한/ 다”로 나눈 다음 다시 각각을 자음과 모음으로 분석한다.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소리 덩어리를 음소차원까지 분석하려는 의지를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さ, し, す, せ, そ (사, 시, 수, 세, 소)”로 음절을 분절하지만 다시 자음과 모음으로 분절하지 않는다. 영어 역시 이런 점에서 그 분절이 명확하지 않다. 같은 “i”라도 경우에 따라 발음이 달라진다. “gh”나 “k”처럼 발음하지 않는 경우도 한 둘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한글의 이런 엄격한 논리를 터득한 아이들에게 사고의 단점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의 나의 경험을 하나 이야기해 보자. 초등 1년 때, 중 1이었던 형이 나에게 “영어는 정말 어렵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려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한다”는 말의 경우 “생, 각, 한, 다” 등에 해당되는 영어의 음절이 있을 것이며, 이 음절의 대응을 알면,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만큼 논리적이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어의 번역이 단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음절 또는 음소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형도 그렇게 상상했었기 때문에 영어가 어렵다고 말했는지 모른다.어릴 때부터 이런 논리적 경직성이 범국민적으로 생긴다면, 옳고/그름을 엄격하게 나누는 2분법에 함몰되는 것이 아닐까. 해방 후 한글 전용이 이루어졌고 지금의 한국인은 거의 전부가 한글 전용세대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고가 한자 시대와 달라졌다면 말이다. 한국어를 생각해 보자. “꽃이 아름답다”와 “꽃은 아름답다”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모교 출신인 20대 후배로부터 들은 답이다. “‘꽃이 아름답다’는 감각적이고 ‘꽃은 아름답다’는 의도적”이라는 답이었다. 이는 어느 정도 문장의 성격을 파악한 대답이다. “꽃이 아름답다”는 현실의 이야기다. 즉, 사실을 서술한 말이다. 반면, “꽃은 아름답다”는 현실이 아닌 마음 속의 이야기다. 다르게 말해, 개념서술이다. 한국어는 “는”과 “이”에 따라 개념서술, 사실서술로 나뉘는 것으로 보인다. 개념서술이 사실서술로 바뀌면, 토픽 서술이 된다. 개념 서술에 현실을 알리는 단어인 “이”가 들어갈 경우 토픽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이 꽃은 아릅답다”는 토픽서술이다. 섬세한 경우도 있다. “꽃은 아름답네요”가 그런 경우다. 이 말은 “꽃은 아름답다”와는 다르다. “~네요”는 현실적 대화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꽃은 아름답네요”는 토픽서술이다. 토픽을 정하는 “는”은 문장의 여러 성분에 첨가가 되어 그 앞 단어의 의미 범주를 토픽으로 설정한다. “철수가 오늘 학교에 간다”의 경우 “철수는 오늘 학교에 간다”, “철수가 오늘은 학교에 간다”, “철수가 오늘 학교에는 간다”등이 가능하다. “는”이 여러 곳에 붙는다는 통사론적 설명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토픽은 “그것에 대해서만 말하겠다”는 의미이므로 한 문장에 토픽이 한번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예외가 있다. 예외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 문장 안에 “는”이 두 번 들어가 비문이 되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되는 것은 토픽 서술에 대한 교육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에도 개념서술 문장이 있다. 그러나 이를 명시하는 문법적 장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Fire is hot”은 개념서술인지 사실서술인지 분명치 않다. 보통, “불은 뜨겁다”로 번역하는 것을 보면, 개념서술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Fire is hot”을 평평하게 발음하면 사실서술 쪽으로 치우치고, “fire”를 강하게 발음하면, 개념서술이 되지만, 토픽서술로도 이해된다. “Fire is hot”에서 “hot”을 토픽으로 삼으려면, “hot”을 강하게 발음하거나 “hot”을 앞으로 끌고와 “Hot is fire”로 말해야 할 것이다. 여하간 복잡하다. 문법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분명하다. 개념서술에 현실적 지시가 들어가면, 또는 사실서술에 “는”이 개입되면 토픽서술의 문장이 된다. 한국어는 이를 문법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한국어의 사실/개념/토픽 서술은 한글의 영향 만큼이나 우리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니?”의 뒤에는 그런 영향이 숨어있을 것이다. “너는 지금 토픽 개념없이 이야기 하는 구나” 하는 지적이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전 서울대 음악대학교 학장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한글과 한국어
    by 서우석
    2024.04.06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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