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77
  • 잘 차려진 음식도 그릇이 부실하면 맛과 멋을 살릴 수 없다. 기업이나 정부가 공들여 만든 정책·시스템·매뉴얼은 훌륭한 요리 레시피나 다름없지만, 결국 이를 담아내고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다. 정책과 시스템은 내용이고, 사람은 그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릇이 기울어져 있거나 금이 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음식도 흘러내리기 마련이다. 조직이 높은 비용을 들여 완벽에 가까운 매뉴얼을 만들어도,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기 힘들고, 심지어 위기 상황까지 초래할 수 있다. 2018년과 2019년에 발생한 보잉 737 MAX 추락 사고는 시스템과 매뉴얼이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보잉은 기체의 기수를 자동으로 낮추도록 설계한 조정특성보강시스템(MCAS)을 도입해, 새로운 엔진 설계에 따른 비행 특성을 보완하려 했으나, 내부 보고 체계가 원활히 작동하지 않았고, 비용 절감에 매달린 나머지 조종사 교육 역시 최소화되었다. 결국 MCAS의 작동 방식과 문제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차례 추락 사고가 일어나 수백 명이 희생되고 말았다. 사고 원인 조사 보고서와 이후 드러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만약 보잉 내부에서 위험 신호가 제대로 공유되고 조종사들이 새로운 시스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받았더라면, 그토록 참혹한 결과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정책에서도 마찬가지다. 2003년 440만명 수준의 비정규직이 2007년 570만명까지 늘어나자 정치권은 불안정한 근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09년 2년 이상 초과근무시 정규직으로 전환을 강제하는 비정규직 입법에 나섰다.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지만 국회는 결국 이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2024년 비정규직 근로자수는 845만명을 넘어서면서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논란을 되짚어 보면,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에 있다는 의견이 많았고, 단순히 기간 기준으로만 입법하는 것은 한계가 크다는 점을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했었다. 그럼에도 당시 입법을 추진하던 그룹이 표결을 강행하면서 결과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길도 한층 좁아졌다. 이처럼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목표와 수단을 정확히 일치시키는 사람들의 지혜, 제도를 본래 취지에 맞게 운용하려는 사람들의 합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도 자체가 오히려 독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반면 준비된 사람들이 제도와 시스템을 잘 활용하면 어떤 결과를 보여줄 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경우도 있다. 2020년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각국 보건 당국은 감염병 대응 매뉴얼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를 제대로 실행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과학적 권고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앞서고, 현장에 있는 의료진이나 공무원들이 충분히 훈련받지 못한 상황에서 시스템이 아무리 정교해도 소용이 없었다. 반면 한국·일본·대만 등은 달랐다. 전염병 대응 시스템이라는 내용물을 잘 담아낼 만한 그릇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이들은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사태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잇따라 발생한 감염병들을 겪으며, 일련의 방역 지침과 시민들의 행동 요령을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보완해 왔다. 매뉴얼과 숙련된 현장인원은 전세계 치명율이 1%일 때 10분의 1 수준으로 사망률을 억제하여 국민들의 생명을 지켜냈다. 매뉴얼과 시스템이라는 내용물에, 사람이라는 그릇이 견고하게 맞물릴 때만이 훌륭한 결과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기업과 정부가 정책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제도·시스템·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려면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위험 신호를 누구든 눈치 보지 않고 공유하고 논의할 수 있어야 하고, 담당자들이 반복적인 시뮬레이션과 교육으로 실제 상황을 예측하고 이슈가 발생했을 때 즉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의 제도나 훌륭한 시스템이 마련되어도 올바르게 활용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반대로 아무리 유능한 인재가 있어도 체계적인 매뉴얼 없이 즉흥적으로만 대처한다면 지속가능한 성과는 요원해 진다.
    사람인가 시스템인가
    by 이보형
    2025.03.08 09:00:00
  • 최근 경제 전문가들은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을 넘어 다시 살아날 것인가에 관심이 높다. 19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달린 일본 경제는 1990년대 초반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해 이후 30년 동안 회복하지 못한 채 초장기의 경제침체를 겪고 있다. 최근 일본 주식시장이 회복되고 일부 기업들의 혁신경쟁력이 살아나면서 경제부활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과거 일본은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철강, 전자제품, 자동차와 같은 주요 산업에서 세계 시장을 주도할 만큼 강력한 혁신경쟁력을 나타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부터 일본경제는 급격히 침체되기 시작한다. 그 계기는 미국이 일본과의 무역 불균형을 개선하기 위해 엔화의 평가절상을 요구한 플라자 합의(1985년)라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급격한 엔고 상황이 일본 기업의 수출경쟁력 하락에 영향을 미치자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는 양적 완화정책을 펼쳤고 넘치는 돈이 몰린 부동산과 주식의 자산버블이 꺼지면서 일본경제가 침체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당시 일본과 함께 플라자 합의의 대상이었던 독일 경제가 2000년대 초반에 회복되었던 것과 달리 일본의 경제침체는 유독 길게 지속되고 있다. 일본 경제가 오랜 시간 침체된 원인으로는 노동생산성 부진, 관치금융의 후진성, 기업의 혁신부족과 같은 경제구조적 문제에서부터 고령화와 저출산 등 사회구조적인 문제들까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 중에서 혁신이 성장의 원천인 점을 고려할 때 일본혁신시스템의 경쟁력 하락이 중요한 원인일 수 있다. 1980년대 영국의 혁신경제학자 프리만(Christopher Freeman)은 서유럽을 능가하는 일본 경제의 성공 원인으로 일본의 국가혁신시스템 경쟁력에 주목했다. 특히 일본 통상산업성(MITI)이 강력한 산업정책을 통해 전략산업을 발굴하고 해당 기업들의 기술개발을 지원하는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강조한다. 이러한 일본의 국가적 협력체계는 국가혁신시스템이라는 새로운 개념 등장의 토대가 될 만큼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혁신환경이 변화하면서 과거 일본혁신시스템이 가진 특징과 장점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단점으로 나타난다. OECD(2006)의 일본혁신시스템에 대한 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대 초까지 일본기업의 기술혁신은 다른 나라의 제품과 공정을 모방하는 공정혁신과 점진적 제품혁신 중심으로 큰 성과를 이루었으며 이런 혁신은 기업 내부에 한정된 폐쇄적 혁신활동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세계화에 따른 개방형 네트워크 지식 증가에 폐쇄적인 일본 기업들이 대응하지 못했다. 일본은 혁신시스템의 복잡성이 커지면서 정부의 정책개입도 효과적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의 혁신시스템은 연구개발 투자가 높지만 성과 창출이 낮았다. 여기에는 산학연 협력의 경직성과 시장의 높은 규제, 서비스 부문의 낮은 생산성 등이 연계된다. 정부정책은 과학과 기술에 집중되고 교육, 제품과 노동시장, 경쟁정책과 연결이 약해 혁신을 강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혁신시스템을 지배해 온 사회문화적 관성은 기본 다지기에 충실하지만 변화 대응이 느리고 위험 회피적이라는 특징이다. 여기에 경직적이고 관료화된 조직문화가 기업까지 퍼져있다. 이러한 속성은 소재부품처럼 오랜 시간과 장인정신이 필요한 분야 발전에는 유리하나 파괴적이고 빠른 혁신속도를 가진 기술 분야에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일본이 IT기술 수용에 취한 소극적인 태도와 디지털 전환 지체는 기업경쟁력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혁신 기반을 약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20여년에 걸쳐 과학기술 중심에서 혁신까지 확대하는 정책전환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그러나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개편 수준에 머물러 실질적인 혁신시스템 변화를 창출하지 못하였다. 국가혁신시스템을 규정하는 구조적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과감한 정책혁신과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선도형 혁신으로 시스템 전환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 정부의 전략적 혁신 역량과 리더십이 부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일본 정부는 혁신정책에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뒤늦게 디지털사회 대전환을 추진하고 경제안보전략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 부활에 적극 나서고 있다. 정부가 혁신리더십을 발휘해 새로운 민관 협력관계를 도모하는 모습이다. 아직 그 성과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혁신성과 창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는 이미 저성장의 길에 들어섰다. 우려스럽게도 고령화, 인구감소 등 사회문제뿐만 아니라 혁신 규제, 투자 대비 낮은 혁신성과 등 혁신시스템의 문제들까지 일본과 유사하다. 구조화된 침체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관성을 깨는 실질적이고 과감한 혁신이 필요하다. 기존 혁신시스템의 한계를 넘는 획기적인 제도혁신과 시스템 전환 창출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일본의 뒤늦은 혁신, 과연 성공할 것인가
    by 이민형
    2025.03.05 13:48:10
  • 프레임의 시대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과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뉴스가 소비되는 환경은 프레임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게 된다. 정부나 정치권이 이슈를 주도하려면 한 방에 꽂히는 메시지가 필수 요소처럼 여겨진다. 프레임은 복잡한 현안을 쉽게 전달해 대중적 인지와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정책 과정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으로 유명한 프레임 전문가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프레임을 ‘사고 체계를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로 정의하면서 특정 이슈가 강력한 프레임 속에 자리 잡으면, 이를 부정하려 할수록 그 프레임이 더욱 강화되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결국 프레임에 갇힌 대중이나 기업은 대안적 관점이나 다양한 가능성을 배제하고 사안을 바라볼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곧 실질적인 ‘정책 합의’보다 ‘찬반 양극화’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다. 단편적인 프레임이 야기하는 부작용은 다양하다. 첫째, 본질 왜곡이다. 프레임을 통해 이슈를 단순화하면 구조적 원인이나 다양한 이해관계가 생략되기 쉽다. 예컨대 코로나19 초기, 방역 실패의 책임을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돌리는 프레임이 확산되면서, 방역체계 자체의 한계나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하는 논의가 뒷전으로 밀려났다. 대중의 감정적 반응만 남았을 때, 정작 필요한 방역 대책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둘째, 프레임 경쟁이 조장하는 사회적 갈등이다. 기후변화 정책을 두고 ‘탄소 중립은 불가피하다’와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는 식의 극단적 구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하나의 프레임에 반대 측이 정반대 프레임으로 대응할수록, 정책 전반은 정파적 대립으로 흐르고 대중은 극단화된다. 언론과 소셜 미디어가 이 대립을 부추길수록 건설적인 논의는 점차 사라진다. 셋째, 정책 일관성과 신뢰의 훼손도 큰 문제다. 정치권이 단기적 이익을 노려 프레임을 수시로 바꾸면, 대중은 ‘정책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초기에는 ‘국민 모두를 위한 필수 안전망’이라던 복지 정책이 재정 문제가 대두되자 ‘과도한 국가 개입’이라는 프레임으로 전환된다면, 신뢰는 손상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지나친 정치화로 인한 합의 어려움이 있다. 정책 논의가 본래의 문제 해결 목적에서 벗어나 정당 간 포지션 싸움으로 치닫는 경우, 건설적 토론과 합의 도출은 힘들어진다. 공공 의료 개혁을 ‘사회주의적 의료 시스템’과 ‘시장 자유 침해’라는 이념 논쟁으로만 몰아가면 의료 인프라 개선과 같은 실질적 고민은 뒷전이 되기 쉽다. 이처럼 단편적인 프레임이 초래하는 부작용이 적지 않은 만큼, 이제는 아젠다 세팅을 통해 다층적 논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하나의 정책 과제를 ‘경제·사회·환경·제도’ 등 여러 층위로 나누어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이슈 트리(issue tree) 방식을 활용하면, 극단적 찬반 구도를 벗어나 합리적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업 친화'와 '노동자 보호’ 같은 이분법적인 노동정책을 ‘고용 안정성’ ‘노동시장의 유연성’ ‘재정의 지속 가능성’ ‘산업 구조 변화’ 등 세부 이슈를 체계적으로 살펴보는 식이다. 유연한 프레임 설정도 중요하다. ‘사회적 안전망 확충’처럼 단정적인 표현 대신 ‘미래세대를 위한 지속가능한 복지 개혁’이라는 포괄적·개방적 프레임을 제시하면 협상의 여지가 커진다. 여기에 정책 내러티브(Policy Narrative)를 적극 활용해 ‘문제 정의-해결책-기대 효과’의 구조를 갖춘 이야기로 풀어내면 대중이 문제의 맥락과 해결책, 그리고 그 영향까지 연쇄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다. 실행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다층적 협상 구조를 설계해나가는 것이다. 각 단계별로 합의 가능한 부분을 도출해 나가는 점진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사회, 전문가, 기업, 미디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갈등 조정과 중재를 담당할 수 있는 기제가 마련되어야 한다. 결국, 프레임은 한순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도구일지언정, 정책이 교착 상태에 빠지거나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는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기에 ‘프레임 전쟁’이 아니라 ‘아젠다 세팅을 통한 다층적 논의’가 정책실행을 위해 필수적인 프로세스로 자리잡아야 한다. 메시지와 이야기는 늘 강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정책이 실현되려면 프레임을 뛰어넘어 사회적 아젠다를 정책화하는 정교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이 없으면 프레임이 주는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만이 남아서 지속가능하고 예측가능한 정책을 만드는 걸 방해만 할 것이다. 결국 좋은 정책은 좋은 프레임에서가 아니라,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통해 탄생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좋은 ‘프레임'이 좋은 정책을 만드는가
    by 이보형
    2025.02.26 13:41:39
  • 겉과 속이 다른 일본인을 이해하는 게 어렵다고 한다. 또 과도한 친절과 모호한 언어습관에 주의해야 한다고 한다. 흔히 회자되는 일본인을 규정하는 국민성이다.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하지만 일본인만의 특성은 아니다. 일본인에게서 유달리 이런 정서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를 배려한 듯싶지만 애매모호하기까지 한 언어습관과 국민성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 본심과 겉치레 정도로 쓰이는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는 일본인의 특징을 설명할 때 쉽게 인용한다. 권력자나 공권력에 순종적인 일본인과 달리 한국인은 저항 기질이 강하다. 경제대국 중국과 일본을 ‘뙤놈’, ‘쪽바리’로 부르는 나라는 한국인이 유일하다. 또 왕조시대 숱한 민란부터 현대사회 대규모 집회까지 한국인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국가권력과도 기꺼이 맞섰다. 숨죽이며 순응하는 일본인과 크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일본 전문가들은 혼네(본심)와 다테마에(겉마음), 그리고 과도한 친절을 이해하는 코드로 ‘사무라이 문화’와 ‘와(和) 문화’에서 찾는다. 일본은 1185년 수립된 가마쿠라 막부부터 1868년 붕괴된 에도 막부까지 무려 700년 동안 사무라이가 지배한 칼의 나라였다. 사무라이 집단은 칼을 상시 휴대하고 걸핏하면 사람을 죽였다. 살벌한 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본심을 감춰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도하고 장수까지 누리는 사회는 흔치 않다.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따돌림 당한다. 하물며 목숨이 오가는 사무라이 시대, 공동체를 깨뜨리는 튀는 언행은 죽음을 의미했다. 공동체에 순응하는 ‘와(和) 문화’ 또한 겉치레에 능한 다테마에로 이어졌다. 촌락 공동체에서 마을의 질서를 어길 경우 가해지는 집단 따돌림을 뜻하는 ‘무라하치부(村八分)’는 가혹했다. 유령인간으로 취급하는 이지메를 피하려면 싫어도 좋은 척, 과장된 친절을 통해 공동체에 자신을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혼네와 다테마에는 이런 문화적 산물이다.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사무라이 정권, 공동체와 조화를 꾀해야 하는 와 문화는 일본 국민성의 원형질이다. 과도하다 싶은 친절 또한 여기에서 비롯됐다. 칼 든 사무라이 앞에서 살아남는 길은 면종복배와 위장된 친절, 웃음이었다. 본심은 감추고 비위를 맞춰야 생존 확률은 높았다. 일본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쓰미마센(미안합니다)”은 정말 미안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언어습관에 불과하다. 일본인들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에도 “쓰미마센”이라고 한다. 40년 전 처음 일본에 갔을 때는 “쓰미마센”을 진심으로 여겨 주변에 ‘일본은 친절한 나라’라고 했다. 언제부터인지 일본에서 듣는 “쓰미마센”은 공허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는 혼네와 다테마에가 다른 일본인을 쉽게 믿지 말라는 편견으로 확장됐는데, 일본인조차 “쓰미마센”을 정말로 미안하다는 뜻으로 여기는 이가 있을까 싶다. 혼네와 다테마에를 떠올릴 때마다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30여 년 전 가나자와(金澤) 시 초청으로 이시카와(石川) 현을 공식 방문했을 때다. 다다미가 깔린 전통 요정에서 만찬이 있었고, 가나자와 시장은 10분정도 늦었다. 그는 만찬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여닫이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수차례 허리를 굽혀 “쓰미마센”이라며 사과했다. 그는 6선 시장으로서 머리 희끗한 70대 초반이었다. 누구도 그가 예의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 정도는 늦을 수 있다고 여겼기에 우리 일행은 다소 당황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예의가 바르다’고 탄복했는데, 훗날 그때 행동은 보여주기 위한 다테마에는 아니었는지 혼동됐다. 정치인으로서 사무라이 관습대로 사과한 것은 아닌지 싶었다. 아마 사무라이 시대였다면 그는 영주가 주관하는 회의에 늦었다는 이유로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좀처럼 속내는 보이지 않는 국민성 때문인지 일본인을 친구로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중국인은 첫 만남에서도 “따거(형님)”라며 쉽게 마음은 여는 반면 일본인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다. 가깝게 지내는 일본인 가운데 주한 일본대사관 소속 외교관들이 있었다. 그들과 나는 매월 돌아가며 식사비용을 부담하며 1년 넘게 만남을 이어갔다. 허물없는 관계라고 여길법했건만 그들과 끝내 호형호제를 못한 채 헤어졌다. 그들은 내 호칭을 “임상”으로 부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났다. 이따금 SNS를 통해 안부를 주고받지만 끈끈한 인관관계를 중요시하는 한국인으로서는 왠지 허전했다. 대학 시절 연수 때도 느꼈지만 선을 넘지 않는 평행선을 유지는 일본의 국민성을 거듭 확인한 계기였다. 그들이 나를 다테마에로 대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전 주한 일본대사 또한 기억에 남는 관료다. 그가 대사로 있을 때 정세균 전 총리와 오찬을 주선했다. 아이보시 대사는 리모델링한 일본대사관도 소개할 겸 솜씨 좋은 일본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측은 일본대사관에서 오찬이 불러올 구설을 우려한 나머지 다른 장소를 제안하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후 다시 잡자고 했으나 본국으로 귀국하는 바람에 지키지 못한 약속으로 남았다. 한국 근무만 세 차례, 우리말이 유창한 아이보시 대사는 외교가에 이름난 친한파다. 여러 자리에서 한국에 대한 그의 진심을 숱하게 접했기에 나는 한국에 대한 그의 혼네를 의심치 않는다. 오히려 반일정서를 의식해 오찬 장소마저 흔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가 다테마에는 아니었는지 돌아본다. 한국인의 저항정신과 겉치레 또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쓰미마센'의 뿌리 '다테마에'
    by 임병식
    2025.02.23 08:07:38
  • 대선 때만 되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대선 캠프이다. 대통령의 꿈을 갖고 있는 정치인들은 선거 즈음하여 정책 공약의 개발과 선거전략의 수립을 위해 캠프를 차린다. 캠프라 부르는 이유는 임시로 마련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고산 정복을 위해 등반가가 꾸리는 베이스캠프와 같다. 이런 캠프에 대선 후보가 직접 관여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무실 운영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고 사람 관리하는 것이 번거로워 후보가 할 일이 아니다. 불나방처럼 자원자가 많이 몰려들어 구성이 잡다한 캠프에 후보가 깊이 개입하면 불필요한 잡음이나 구설에 휘말릴 수도 있다. 어차피 대선 한 철에만 생겼다가 없어지는 소모품인 캠프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 낙선하면 소용이 없고, 당선되면 부담이 되는 조직이다. 그러니 후보로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측근을 통해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통상 한 후보가 여러 캠프를 거느린다. 유력한 후보일수록 캠프가 많이 만들어진다. 주로 국회의원, 장·차관, 교수 출신의 친위계 인사가 좌장 노릇을 하며 하나씩 캠프를 맡아 세력 확대에 기여한다. 대선은 입신양명을 노리는 기회주의자들에게 큰 장이 열리는 ‘대목’이다. 대선 후보와 연분을 쌓아 고속출세할 수 있는 지름길이 대선 캠프에 참여하는 것이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보의 캠프에 이름을 걸어 놓으면 논공행상에 끼어 한자리 받을 수 있다. 로또보다 당첨 확률이 높다. 당연히 당선 가능성이 큰 후보의 캠프가 늘어나고 문전성시를 이룬다. 유명 브랜드의 인기 아파트 분양 현장에 떴다방이 난립하고 대박을 노리는 투기꾼들이 몰려들 듯이 말이다. 문제는 떴다방과 같은 캠프에서 만들어지는 공약이 날림으로 급조된다는 것이다. 대선 공약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국가를 어떻게 이끌고 나가겠다는 정책에 관한 약속이다. 당선자의 대선 공약은 차기 정부의 국정과제로 채택돼 우선적으로 추진된다. 부동산, 세금, 노동, 환경, 에너지 등에 관한 공약은 경제정책으로 전환되어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부 부처와 공공 기관은 대선 공약 과제에 예산과 인력을 집중해 달성도를 높이고자 노력한다. 국민들은 이런 공약과제가 탐색되고 수립되는 과정이 매우 체계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몇십 년 동안 여러 정부에서 추진한 정책과 해외 사례를 치밀하게 살펴보고 치열한 토론을 거쳐 정교한 공약이 개발될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 후보를 둘러싼 캠프 간에 연계나 협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협력보다 경쟁 관계가 두드러진다. 캠프의 인력 구성이나 운영 방침은 좌장에 따라 다르며 좌장들은 후보의 주목을 받아 실세로 떠오르기 위해 경합한다. 대권을 노리는 후보의 주변 캠프들 사이에서도 작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조율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캠프 안에서도 경쟁이 치열하다. 공약을 논의할 때 각자 자기가 내세운 정책 과제가 부각되도록 애쓴다. 다른 사람이 새롭고 신선한 정책을 발표하면 마치 논문 심사하듯이 조목조목 비판하며 흠집을 내려 한다. 사실 대선 공약을 개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이미 알려졌거나 이전 정부에서 이행한 정책은 신선도가 떨어진다. 다른 후보의 공약과 유사하면 차별성이 약하다. 과거와도 다르고 남과도 다르면서 유권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공약을 개발하려면 골머리가 아프다. 이미 다 파먹은 금광을 더 깊게 파서 금맥을 찾는 것과 같다. 그래서 캠프마다 정책의 연관성이나 실효성보다 차별성을 더 중요시하며 무엇인가 톡톡 튀는 공약과제를 발굴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진 공약이 나오기도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한 후보가 서로 상충하는 공약을 주장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요즘 대선 주자 선호도 1위인 원내 제1당의 대표가 ‘기본소득’에서 ‘기업성장’으로 서로 대립되는 정책을 주장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원래 전 국민에게 1인당 25만 원을 주는 민생회복지원금을 강조하다 갑자기 첨단기술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 6개를 만들어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주52시간 근무 예외’를 포함한 ‘반도체특별법’도 통과시키지 못하면서 삼성전자급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구호는 코미디라는 취급을 받았다. 지지층의 확장을 위해 새롭고 다양한 메시지를 제시하는 것은 이해된다. 그래도 상충된 공약을 쏟아내 갈팡지팡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상하다. 아마 기본소득파와 신성장파 등 각기 다른 캠프에서 제안한 공약을 한꺼번에 던지다 보니 충돌이 난 꼴이 아닌가 싶다. 이전 정부에서도 엇나가는 정책들을 동시에 추진해 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많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가 혼재되는 양상을 보였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 둘 다 추구하려다 어느 것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도 의료, 교육, 노동, 연구개발, 부동산 등의 정책에서 오락가락하다 국민의 지지를 잃고 총선에서 패배해 자멸했다. 결국, 한 정당이 계속 집권하지 못하는 근본적 원인은 어설픈 정책의 실패에 있다. 대통령은 한번 하고 물러나면 그만이다. 정당이야 서로 번갈아 정권을 잡으면 된다. 그러나 그 시행착오의 대가로 경제가 망가져 민생고에 시달리는 국민만 불쌍하다. 한 나라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대선 공약이 졸속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니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떴다방 대선 캠프의 '급조 공약'
    by 임채운
    2025.02.22 08:00:00
  • 살기 좋은 정주 공간과 쾌적하고 여유로운 농촌다움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촌공간정비사업이 몇 년째 진행 중이다. 이달초 2025년도 1차 신규 지원 대상 지구 12곳이 선정돼 새롭게 변모할 농촌 공간 조성지역에 대한 기대가 크다. 악취·소음 발생, 오염물질 배출 등 주민 삶의 질을 저해하는 난개발 시설을 정비·이전해 주민들을 위한 쉼터나 생활시설을 조성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다. 이러한 변화들로 ‘농촌다움’이 보존되고 경관의 시각적 효과와 환경의 쾌적성, 농업의 다양한 가치 부각과 경제적 부활로 생활 서비스는 높아지고, 삶의 질은 향상될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전남 영광군 묘량면은 또 다른 현재 농촌 모습을 대변한다. 2007년부터 17년간 지역의 고령 농민들과 공동 영농을 통해 소득 분배를 해 온 사회적 농장 ‘여민동락공동체’가 작년 12월 휴경을 결정했다. 설립 당시 평균 연령 72세의 농민들이 2023년 평균 연령 78.5세로 고령화가 주된 원인이었다. 청년층의 유입이 없는 정주민의 고령화는 ‘마을의 절멸’로 이어진다. 농촌 관련 정책 설계에 대한 주도권이 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와 현장으로 옮겨지면서 ‘농촌 지역 공동체’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지역의 문제를 논의하며 그에 필요한 일을 실행할 귀농·귀촌에 가치 지향적인 젊은 일꾼의 필요성은 절실하고, 이들의 정착에 필요한 안정적인 주거 공간 확보는 큰 숙제이다. 시골에서 집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로 정부의 빈집 개보수 정비사업이 시행되고 있지만, 현장 실정은 녹록치 않다. 농촌 공간 정비사업을 통해 기능을 상실한 채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농촌 지역의 각종 시설 공간들을 다양한 규모의 주거 공간으로 재구조화해 부족한 주거 공간 해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 일에 마을 공간 계획을 성공시킨 독일의 비트브르크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트브르크는 농림산업이 주축인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50년간 농민 90%가 감소했지만, 주민과 정보 교류를 통한 마을 공간계획의 효과로 12년 동안 약 10% 인구가 늘어나는 대반전을 이루었다. 234개 마을 중 180여 개 마을은 인구 500명 이하이고, 전체 마을의 절반은 주민 200명을 넘지 않는다. 이들은 다시 돌아오게 하는 농촌을 만들고 마을을 재생시키기 위해 주민들과 논의하며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하나씩 개선해 나갔다. 문화재로 지정된 주택의 전통을 살리면서 시설 이용이 편리하도록 기능 개선에 초점을 맞춰 정비된 도로 등은 쾌적함으로 찾는 이들을 환경에 매료시켰다. 농촌 마을 공간계획 실행으로 뛰어난 정주환경과, 영유아 보육에서부터 양로원 등 노인 돌봄의 사회적 공동체가 활발한 비트부르크 프룀 지역의 사례가 이번 농촌 공간 정비사업의 신규 지원 대상 지구에 선정된 12곳에 선기능(先機能) 요소로 적용되기 바란다. 또한 농업 현장에 AI 신기술이 도입된 상황 속의 농촌다움의 모습과 미래세대가 생각하는 농촌다움의 모습들이 주민의 공감을 통해 반영된 설계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물성매력(Experienceing the Physical: the Appeal of Materiality)의 물성(物性·Materiality)은 사전적으로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뜻한다. AI로 인해 힘들이지 않고 쉽게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간편한 세상, 디지털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실제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물성에서 감성적 매력을 느낀다. 농촌 마을 공간 재생에 지역 특산 건축 재료들이 활용되고, 건물과 자연환경이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 친화적 설계를 적용하여 전통과 현대 기술의 융합으로 마을의 전통과 문화가 이어지고, 생활의 편리함이 증가하는 주거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다양한 자연의 재료들을 통해 촉각적, 시각적 경험을 제공함으로 물리적 감각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공간조성으로 농촌에서 거주의 기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매력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지역 특성과 창조적 상상력이 융합된 농촌다움의 환경 조성은, 봄이면 우리 대한민국 농촌에 살구꽃 복숭아꽃이 만발한 물성매력의 성지가 될 것이다.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물성매력' 농촌
    by 조금평
    2025.02.19 16:56:34
  • 지난주 미일 정상회담 직후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의 ‘아부 외교’가 화제가 됐다. 뉴욕타임스는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저항’ 대신 ‘아부’를 택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에 대한 첫인상을 묻는 질문에 이시바 총리는 “TV에서 본 유명인을 직접 만나게 돼 기뻤다”면서 “무섭고 강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매우 진지하고 강력하며 미국과 전 세계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며 한껏 치켜세웠다. 외신은 트럼프 대통령의 입은 귀에 걸렸고, 회담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아부’라는 단어를 중립적 의미로 사용했다. 국제무대에서 듣기 좋은 말로 환심을 사는 이유는 국익을 위해서다. 칭찬을 마다할 정치인은 없기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유효한 외교 수단이다. “일본에 전할 메시지는 무엇이냐”는 취재진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사랑해요”라고 했다니 아부 외교는 남는 장사였다. 외신과 달리 국내언론은 이시바 총리의 외교적 수사를 다소 부정적 뉘앙스로 전했다. 동일한 사안을 전하면서도 일본 이슈라면 무조건 비판부터 하고보는, 국내 정서를 뛰어넘지 못한 관성에서 비롯된 보도였다. 정도를 넘어선 외교적 수사는 자칫 굴종으로 비춰질 수 있기에 신중해야 하지만 국익을 위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 용인할 수밖에 없다. 이시바 총리의 ‘아부’는 치밀한 준비를 바탕으로 한 실리외교라는 점에서 많은 걸 시사한다. 일본 외무성은 아베 전 총리의 부인을 지난해 12월 마러라고에 보내 트럼프와 대화 물꼬를 열었다. 이어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을 통해 1,000억 달러(약 145조원) 투자 선물 보따리를 제공함으로써 장사꾼 트럼프를 효율적으로 공략했다. 사소한 것 같지만 황금 투구 선물 또한 면밀하게 계산된 결과물이다. 투구를 제작한 곳은 이시바 총리의 고향 돗토리 현이고, 주문 시기는 지난해 11월이니 트럼프 당선 직후부터 준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정상 외교가 멈춘 한국 상황에서 일본이 대미 관계를 선점한 건 아픈 대목이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 일본의 실리외교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시바 총리는 미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 달 전부터 공부 모임을 갖는 등 치밀하게 준비했다. 외무상을 지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물론 외무성·경제산업성 간부들과 함께 ‘트럼프 식 맞춤형’ 문답을 만들고, 또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감소하고 있음을 표로 정리해 제시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얼마나 설득됐는지는 몰라도 향후 미일관계를 예상할 수 있다. 자세를 낮추는 일본 외교는 일본인 특유의 치밀함을 반영한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할복도 마다하지 않는 사무라이 문화를 미덕으로 삼는 일본에서 아부는 계산된 행동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로 있다가 권력을 손에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화가 상징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겨울날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고 있다가 따뜻한 신발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는 일본사회에서 아부가 아닌 미담으로 회자된다. 히데요시의 행동은 주군을 위한 충성이며, 훗날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은 이유마저 여기에서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러니 진영을 떠나 이시바 총리의 언행을 시비할 일본인은 없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마저 내려놓는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패전 이후 빛을 발했다. 미군정하에서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상은 맥아더 극동사령관의 비위를 맞춰 미군 직접통치에서 간접통치로 전환시켰다. 이로써 일본은 경제 부흥에 집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 일본은 미국과 코드를 맞춰 정상국가로 이행이라는 실리를 취했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1951년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한 뒤 안전보장은 미국에 맡기고 경제부흥에 집중하는 ‘요시다 노선’을 1980년대 초까지 견지했다. 이런 기조 아래서 이케다 수상 재임 당시 일본 경제는 9~10%대 고도성장을 달성하며 GATT와 IMF, OECD에 가입하며 사실상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패전 19년 만인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치른 배경에는 스스로를 낮춘 외교가 있었다. 일본이 록펠러센터와 콜롬비아 영화사를 매입하고 대규모 대미 무역흑자를 기록하면서 미국이 일본 때리기에 나서자 일본은 다시 엎드렸다. 일본은 ‘플라자 합의’에 이어 1985년 ‘마에다 리포트’를 토대로 10년 간 430조 엔에 달하는 재정지출과 미국 내수 시장 확대를 뒷받침했다. 또 경제구조를 바꾸고 시장을 개방하라는 미국의 압박을 따랐다. 당시 협상 항목만 200개에 달해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일본은 힘의 역학 관계를 인정하면서 보통국가로 보폭을 넓혔다. 이 결과 일본은 미국에 의존하던 국가안보에서 벗어나 자국이 공격 받거나 동맹국이 요구하면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에 참여하는 보통국가로서 지위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일본 외교는 철저하게 실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시바 총리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과 협력이 미국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 트럼프를 추켜세울 것,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준비했다. 나아가 정적이었던 아베 전 총리의 외교 방식까지 수용했다. 일본을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아부라고 폄하할 일도 아니다. 자신을 한껏 낮추는 일본 외교는 그런 기회조차 갖지 못한 한국 정치를 돌아보게 한다. 과시용 허세를 내려놓고 국익을 위해 아부를 자처하는 일본 정치를 주목한다. /서경IN
    이시바 총리의 계산된 '아부외교'
    by 임병식
    2025.02.15 11:33:28
  • 최근 유럽경제는 많은 경제전문가들의 우려의 대상이다. 오랜 기간 미국과 양대 축을 형성하는 산업국가로 세계 시장을 선도했던 유럽의 위상이 눈에 띄게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빅테크는 보이지 않고 화학, 제약, 자동차 등 전통적인 유럽의 주력산업 분야조차 경쟁력을 확연히 잃어가는 모습이다. 미국과의 부(富)의 격차는 크게 벌어지고 중국의 빠른 기술향상과 시장 잠식에 글로벌 시장 2인자의 자리가 흔들리고 있다. 작년 말 ECB(유럽중앙은행)는 ‘유럽경쟁력의 미래(2024)’ 보고서를 통해 EU경쟁력 위기의 심각성과 그 원인을 제시했다. 지난 20년간 EU(27개국)의 경제성장은 미국보다 속도가 느렸고 그로 인해 미국과의 GDP(국내총생산) 격차는 2002년 15%에서 2023년 30%로 확대됐다. 2020년 즈음에는 중국에 2위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이러한 유럽의 GDP 성장 둔화는 생산성 부진에 따른 것이며 이는 미국과의 혁신 격차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과 유럽의 혁신 격차의 문제는 최근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이미 30년 전인 1990년대 중반부터 제기된 사안이다. 당시 유럽의 학자들은 유럽의 기초과학 역량이 미국과 유사함에도 산업경쟁력에서는 왜 차이가 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이유를 과학성과의 상업화 부진에서 찾았다. 이 문제는 유럽 혁신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로 진단됐고, 유러피언 패러독스(European Paradox)라고 불렸다. 그러나 과학성과의 상업화 부진 구조는 개선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되었고 느린 혁신과 과감한 혁신성 부족이 유럽혁신시스템의 고유한 특징이 됐다. 유럽혁신시스템의 혁신지체와 파괴성 부족은 빠르고 과감한 변화의 속성을 지닌 IT기술이 3차 산업혁명의 주역으로 등장하자 구조적 문제를 넘어 치명적인 결함으로 드러났다. 유럽은 IT기술 변화 초기에 모바일폰 중심으로 경쟁력을 확보했으나 애플의 아이폰으로 대변되는 거대한 파괴적 혁신에 밀려 낙오자 신세로 전락했다. 그 결과 2010년 이후 유럽은 미국과의 IT산업 격차가 커지고 부의 격차도 크게 확대됐다. 이제 변변한 IT기업조차 없는 유럽은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미국의 빅테크 기업에 거대한 자국시장을 다 내주고는 빅테크 기업활동에 대한 규제로 대응하는 형국이다. 유럽 혁신시스템의 부진은 파괴적인 혁신기술을 대하는 정부정책에서 중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유럽은 미국과 달리 혁신의 촉진보다는 혁신의 위험에 대한 사전 규제를 강조한다, 미국이 파괴적 기술혁신에 의한 변화와 성장효과를 중시하는 것에 비해 유럽은 기술의 사회제도적 역할 제고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대응 탄소배출을 관리하기 위한 탄소국경조정제도,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로 대변되는 개인정보보호법 등은 대표적인 유럽형 규제로 유럽시장에 진출하려는 다른 나라 기업들에게 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런데 EU의 복잡하고 강한 규제는 자국 내 혁신기업들에게도 큰 부담을 주고 있다. ECB 자료에 의하면 지난 13년간(2008~2021) 유럽 유니콘(147개)의 약 30%(40개)가 본사를 해외로 이전했으며 대부분 미국으로 이전했음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동안 EU는 혁신성장보다 사회문제해결을 위한 연구와 혁신의 역할을 강조하고 관련 연구개발 투자를 크게 확대해 왔다. 그러나 지금 글로벌 혁신시장에서 나타나는 유럽의 혁신 위기 징후들은 그간 EU가 추진해 온 혁신정책의 기조와 그 전략들을 깊이 재점검해야 한다는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새로운 혁신 성장은 과감하게 혁신의 싹을 허용하고 수용하는 경제사회시스템 속에서만 가능하다. 강한 규제는 기업의 혁신활동에 장애가 되며, 특히 창조적 파괴와 속도 경쟁이 중요한 AI혁신에는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EU가 강조해 온 제도혁신을 통한 사회문제해결은 시장의 주체인 기업이 기존기술의 경제성을 뛰어넘는 신기술의 완결성을 확보해야 가능하다. 기후변화 대응 탈탄소화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의 혁신 격차 문제는 혁신의 기본 속성을 살리는 정책과 제도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올해 초부터 우리나라는 유럽연합(EU)의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 프로그램에 준회원국으로 공식 참여한다. 이는 유럽과의 과학기술협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전략적 기회의 확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동안 우리는 EU를 기술적, 정책적으로 벤치마킹해야 할 선도국가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협력의 전략적 효과를 창출하려면 유럽의 혁신시스템과 정책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우선 필요하다. 이제 유럽은 우리에게 벤치마킹과 함께 반면교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유럽의 혁신 위기가 시사하는 것들
    by 이민형
    2025.02.05 14:58:21
  • 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 하면 어둡고 음침한 냄새를 풍긴다. 사전적 정의로 정경유착은 정치와 경제가 밀착된 현상을 의미한다. 현실에서는 정치인과 기업인의 이해가 얽혀 야합하는 부도덕한 밀착관계를 지칭한다. 정경유착의 장면을 연상하면 밀실에서 권력자와 재력가가 은밀히 만나 돈 봉투를 주고받거나 지하주차장에서 차 트렁크에 돈다발이 든 사과박스를 옮기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과거 개발독재 시대에 정치인은 기업인에게 경제적 이권을 부여하고 그 반대급부로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지금은 정치인과 기업인의 은밀한 금전 거래는 불법이다. 정치인이 직접 기업인에게서 돈을 수수하면 부정부패로 형사처벌된다. 심지어 본인이 아니고 가까운 지인이 금품을 받거나 이득을 취해도 경제공동체라는 죄목으로 처벌 대상이 된다. 당연히 정경유착은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낙후된 관행이라 여겨진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전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아니다. 우리보다 더 노골적이다. 미국의 기업인들은 대선 후보 캠프에 엄청난 금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한다. 경제잡지 ‘포브스’(Forbes)는 지난 미국 제47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와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후보에 기부한 억만장자(순자산 10억 달러 이상)가 각각 81명, 52명이라고 조사했다. 블룸버그 기준 세계 부호 1위인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는 트럼프 캠프에 1억3000만 달러(약 1800억원)를 기부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대표적 억만장자인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 빌 게이츠는 해리스 캠프에 5000만달러(약 700억원)를 후원했다. 일론 머스크는 정치자금 지원을 넘어 러닝메이트처럼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머스크는 트럼프와 함께 미국 전역에 유세를 다니며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경합주의 보수 유권자 등록을 장려하기 위해 100만 달러의 ‘복권 행사’까지 주최해 법적 소송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축하행사에서 춤까지 추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정부효율부 수장으로 지명되어 실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대기업 회장이 일론 머스크처럼 특정 후보를 전폭 지원하며 대통령 선거판에 뛰어들었다가는 뼈도 못 추렸을 것이다. 정당의 비난 성명, 국회 청문회 소환, 언론의 비판. 시민단체의 반대시위가 폭풍처럼 몰아쳤을 것이다. 다른 대선 후보의 지지자들이 불매운동을 벌이고 노조도 파업을 선언해 기업이 거덜 났을 것이 분명하다. 기업인이 살짝 정치에 관한 의견만 표명해도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SNS 활동을 활발히 하여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렸던 어느 젊은 재벌 경영자는 정치적 성향의 글을 올렸다가 거센 비난 공세에 시달려 SNS를 끊었다. 국가 대표급의 유명 원로 가수는 작년 12월 은퇴 공연에서 오른팔과 왼팔에 비유하며 이념적 대립을 비판하는 발언을 한 것이 시대정신에 어긋난 양비론으로 맹공격을 받아 곤욕을 치렀다. 기업인이나 연예인은 사회적 공인으로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정서가 강하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일론 머스크의 정치 참여에 관해 별 반응이 없다. 머스크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본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카멀라 헤리스가 공개적으로 머스크의 트럼프 지지를 비난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공화당은 머스크가 불법으로 선거에 개입했다고 검찰에 고발하지도 않았다. 테슬라 본사 앞은 조용하고 테슬라의 전기차는 거부감없이 잘만 팔린다. 머스크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기사는 대선 개입보다 극우적 발언과 행동에 초점을 둔다.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취임식 축하 집회에서 무대에 올라온 머스크는 연설 도중에 팔을 곧게 뻗어 ‘파시스트 경례’를 연상시키는 손동작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독일에서는 한 달 내로 다가온 독일 총선에서 머스크가 극우 독일대안당(AID)에 대한 지지성명을 공개한 것에 반발해 테슬라 전기차를 구매하지 않겠다는 소비자들이 등장했다. 미국에서도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해 X(엑스)로 사명을 변경할 때 트위터 충성파들이 테슬라 전기차 불매운동을 벌였다. 일론 머스크는 워낙 돌출적으로 행동해 여론을 몰고 다닌다. 남의 이목이나 사회 통념을 무시하는 개인적 성향 때문에 욕을 먹지만 대통령 선거 참여로 비난받지는 않는다. 빌 게이츠가 머스크는 똑똑한 사람이지만 정치 개입은 비정상이라고 쓴소리한 정도가 두드러진 비판이다. 일론 머스크는 원래 민주당 지지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성전환 수술을 받은 것에 충격을 받고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민주당을 버리고 공화당으로 돌아서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일론 머스크는 이념, 권력, 이권 모두를 다 챙겼다. 기업인이 이렇게 정치에 올인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고서도 기업이 잘 돌아가는지 의문이다. 다음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하면 보복당하지 않을까 불안하지도 않은지 궁금하다. 미국인들은 기업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개인적 선택이며 권리라고 인정해 주는 것 같다. 기업인의 정치 참여와 경영 활동을 분리해 접근한다. 기업인도 다른 유권자처럼 게임의 규칙을 지키며 선거에 참여하면 별 문제없다고 간주한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국보다 더한 미국식 정경유착
    by 임채운
    2025.02.01 06:05:00
  • 데이터는 전통적인 생산의 3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과 더불어 생산의 4요소라고 칭하여 진다. 그만큼 데이터는 알고리즘 시대에 중요한 자원이다. 데이터는 매력적인 면이 있지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경우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데이터로 인해 우려되는 편향나 환각은 이제 식상한 주제가 돼버렸다. 데이터는 이미 존재하는 정보나 지식을 바탕으로 가공된다. 데이터의 수집, 가공, 처리 등 관련된 과정을 거치면서 데이터에는 의도성이 담기게 된다. 기업이나 사업자는 의도적으로 자사의 이익을 위해 데이터를 이용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개인정보를 수집해 이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가공하면서 가장 적합한 처리방식을 찾는다. 이를 통해 데이터의 이용성은 확장될 것이다. 문제는 데이터의 성질이 다양하다는 점에 있다. 저작물성, 개인정보성, 영업비밀성, 의료정보성, 사실정보성 등 다양한 유형의 데이터가 존재하기 때문에 데이터를 일의적인 것으로 다루기는 쉽지 않다. 또한, 관련된 법률도 그 성질만큼이나 다양하며 그에 따라 적용되는 법리가 달라질 수 있다. 그에 따라 기업의 데이터 정책과 거버넌스도 현행화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데이터 정책에 따른 정합성이 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발자는 서로 다른 체계에 따라 혼란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데이터 정책은 다양한 사내 정책과의 정합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는 법률에 따른 준수사항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애써 공들인 서비스가 작동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AI 모델을 설계하고 학습시키는 과정에서 AI가 추구해야할 가치가 인간의 가치와 벗어나서는 않되는 이유다. 그러한 가치에는 법적인 강제성 이전에 AI 윤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담겨있어야 한다. 만약, AI의 가치와 인간의 가치가 정합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면 해당 모델은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라도 이용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체계를 포함해 AI 모델이 갖추어야 할 가치와 그 가치가 인간의 가치와 부합되도록 하는 것이 AI 정렬(AI alignment)이다. 쉽게 말하면, AI 정렬이란 AI 모델이 시스템화하고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환경이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충돌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AI 법제를 정비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신뢰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AI가 가져야 할 가치 중 하나이며, 그 신뢰성을 담보하기 위한 다양한 AI 원칙들이 제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양한 영역에서 AI 원칙들이 제안됐으며 제안자의 성격이나 우선하는 가치에 따라 차이가 있다. AI 원칙은 AI가 가져야할 다양한 가치를 포함한다.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하자면, AI를 인간이 신뢰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때론 AI가 해석하는 인간의 가치가 인간이 의도하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정렬 위장(Alignment Faki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AI가 의도한 것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인간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결론이 내려지고 그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게임을 잘 하도록 지시했지만, 게임하는 능력을 높이기 보다는 시스템을 해킹하여 능력치를 높이는 식의 접근을 하는 경우다. 이는 하나의 사건이지만, AI 모델이나 시스템 자체가 보편적인 것이더라도 이러한 경우는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정적 예를 들어본다. 알파고는 바둑에 특화된 AI 시스템이지만, 바둑을 잘 두기 위해 상대방을 해킹하거나 또는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전력시스템을 통제하여 자신이 담긴 서버에만 전력이 공급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약한 인공지능이지만, 파급력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규제기준을 초당 부동소수점 연산인 플롭(FLOP)으로 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AI는 잠재적 위험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AI 신뢰성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는 안전하게 AI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AI는 인간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내부적인 처리과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위 말하는 블랙박스(black box) 현상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운 이유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설명가능한 AI(explainable AI)를 개발하고 있다. 또한, 법률에서도 설명요구권이나 알고리즘 적용거부권을 정보주체의 권리로써 규정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내용이 데이터 자체의 문제라면,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의 문제도 작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데이터 윤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저작권이 있는 정보를 임의로 크롤링하여 데이터화하는 것은 저작권법과 충돌할 수 있다. 지난 2023년 12월 뉴욕타임스(NYT)는 챗GPT(ChatGPT)를 서비스하는 오픈AI(OpenAI)나 그 관계 회사를 포함해 마이크로소프트(MS)를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다. 아마도, 대법원 판결까지는 수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그 많은 기업들이 데이터를 크롤링하여 사용하는 것은 공정이용(fair use)이라는 판단이 앞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상 구글의 북서치(book search) 서비스를 포함해 많은 소송에서 기업들은 공정이용을 근거로 면책받기도 했다. 오픈AI는 2023년 7월 AP 통신과는 별도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언론사들에게 지급한 비용이 수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반되는 다중적 정책이 소송에서 유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송은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지난 13일 지상파 방송 3사는 네이버에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이야 이유가 있든 없든 제기가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명확하게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갖춰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해당 기업의 신뢰성에 타격을 가져올 수 있으며, 혁신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서비스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거나, 비소비적이거나 비향유적인 것이라면 공정이용이 될 것이다. 기업들도 실효성 있는 데이터 정책과 거버넌스를 수립해야 한다. 지키지도 못할 정책들을 외부에 공개하는 것은 오히려 시장의 신뢰성을 저버리는 일이다. 벤처신화의 역사를 썼던 카카오는 알고리즘 조작으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처분을 받기도 했다. 선도적으로 AI 윤리헌장을 발표했지만, 실상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부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사례다. AI 윤리를 주장하는 기업의 진면목은 아닐는지 우려스럽다. 외부에 공시된 AI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문인 이유이다. 법적 강제력이 없는 AI 윤리의 한계를 보여준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그 하나가 보이지 않는 열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2월 AI 기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이제 하위법령 작업을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AI 기본법이 문제정의를 제대로 하지 못한채 입법이 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여서 입법을 하는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입법을 했는지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AI가 가져온 수많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우려스럽다. 그동안 기업들은 AI 관련 법률이 제정되지 않아 기업투자가 어렵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해왔다. 정부 정책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부처의 의지에 따라서 충분히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게 바라던 법이 제정되자, 법에 문제가 많고 규제적이다고 주장한다. AI 기본법에 규제라는 개념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국민의 안전을 위해 담보할 수 있는 규정을 찾기 어렵다. AI 안전을 위한 세심한 규정이 필요하고, 그 규정은 사업자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명확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예측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그것은 규제가 아닌 헌법상 국민의 안전보장이고 기업의 지속성장과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규제와 안전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기업들도 AI가 안전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내부 거버넌스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AI 기본법이 여러 이유로 개문발차(開門發車)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나 국회도 AI 기본법 개정을 위한 논의를 빨리 시작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A3가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AI 리터러시 없이는 AI가 가져오는 사회문제 해결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AI 기본법을 관통하는 데이터 윤리와 AI 정렬
    by 김윤명
    2025.01.26 08:00:00
  • 다음 달 16일이면 윤동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된다. 영정 속 학사모를 쓴 시인의 모습은 흔들림 없는 청춘이다. 윤동주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우리 세대 모두는 ‘서시’를 읽으며 젊은 날을 지나왔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고뇌로 점철된 고백이다. 일본 규슈 후쿠오카(福岡)는 윤동주가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다. 윤동주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943년 7월 체포됐다. 2년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둘은 이곳에서 마지막 1년 7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육첩방(六疊房) 남의 나라’에서 2월 16일, 3월 7일 차례로 숨졌다. 아직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광복을 반년 남겨 놓은 때였다. 두 사람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죽음을 맞은 곳도, 묻힌 곳도 같다.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함께 했고 서울 연희전문을 다녔다. 또 일본에서 유학을 했고 중국 용정에 나란히 묻혔다. ‘시인 윤동주 지묘’와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는 100m 떨어진 지척에 있다. 윤동주는 그해 3월 6일 장례를 치렀다.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에서 “그날따라 봄을 시샘하는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의 유골을 땅에 묻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했다”며 시린 그날을 묘사했다. 후쿠오카에 갈 때마다 이따금 구치소에 들리는데, 매번 뭉클한 감상에 젖는다. 아들 또래 청년들이 한창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지금은 구치소로 바뀌었지만 후쿠오카 형무소는 악명 높았다. 구치소 건물은 전혀 생각지 못한, 주택가와 인접해 있다. 우리 같으면 혐오시설이라며 이전 요구가 빗발쳤을 게 분명한데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싶었다. 국가에서 하는 일에 웬만해서 반기를 들지 않는 일본인 특유의 순종주의가 묻어 있다. 두 사람의 공식 사인은 병사(뇌출혈)지만 생체실험 사망설도 꽤 설득력 있다. 가장 먼저 생체실험 사망설을 제기한 이는 일본인 고노 에이치(鴻農映二)다. 한국에서 문학을 전공한 문학평론가 고노는 1980년 ‘현대문학’ 10월호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에서 생체실험 도중 숨졌을 가능성을 맨 처음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전쟁 말기, 일제는 모자란 피를 충당하기 위해 혈장을 대신해 생리식염수를 주사하는 실험을 했는데, 실험 도중 사망했다는 것이다. 두 가지 근거를 들었다. 첫째 ‘규슈제국대학에 해부용으로 제공함’이라는 전보, 둘째 면회 자리에서 송몽규가 했다는 말이다. 해부용 운운은 실험 도중 숨졌음을 추정케 하며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라는 송몽규의 말 또한 정황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이후 생체실험 사망설은 음모론을 넘어 어느 정도 구체화됐다.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TRA) 자료도 그중 하나다. 전후 연합군은 규슈제국대학 의대교수 5명을 전범 재판에 기소했는데, 미군 전투기 조종사 8명을 생체 해부한 혐의였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미군 포로의 장기를 적출하고 ‘바닷물 주사’를 꽂았다. SBS방송(2009년 8월15일)도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문서를 확인해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규슈제국대학이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를 상대로 바닷물 수혈 생체실험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일보 또한 2015년 4월 6일자 ‘이 끔찍한 짓을 우리가 했습니다, 미군 생체실험 규슈의대의 반성’이란 기사에서 미군 포로 생체 해부에 참여했던 일본인이 마이니치신문에 털어놓은 증언을 실었다. 19살 의대생 신분으로 실험에 참여했던 노인(2015년 89세)은 “당시 대학은 군을 거역하지 못했다. 산 채로 미군 장기를 적출했다. 또 혈관에 바닷물을 주입했다. 전쟁이 만든 광기였다”고 증언했다. 규슈대학 또한 2015년 4월 교내에 의학역사관을 개관해 미군 포로 생체 해부 사건을 기록한 전시물을 비치하고 추모 공간을 설치함으로써 생체 실험설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생체 실험 사망 의혹은 후쿠오카 형무소 사망자 추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옥중 사망자는 1943년 64명에서 1944년 131명, 1945년 259명으로 급증했다. 종전에 임박해 대규모 생체 실험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단기간 급증한 옥중 사망자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일본 정부는 80년 넘게 불편한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전후 일본 지식인과 시민들은 윤동주 시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참회하는 일에 적극적이다.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은 1994년 이후 30년 넘게 윤동주 시를 낭송하며 그를 기리고 있다. 이들은 매년 2월 16일 후쿠오카 구치소 옆 뜰에서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속죄한다.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80) 후쿠오카현립대 명예교수는 오랫동안 윤동주 시비 건립을 추진했다. 비록 좌절됐지만 그는 10년 가까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혼신을 다했다. 윤동주 묘를 처음 세상에 알린 이 또한 일본인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전 와세다대학 명예교수다. 그는 1985년 5월 용정 동산교회 묘지에서 윤동주 묘를 발견했다. 그가 없었다면 윤동주가 우리 곁에 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지 모른다. 마스오 교수는 2023년 9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윤동주와 한국문학’, ‘조선의 혼을 찾아서’를 통해 한국과 일본사회에 윤동주를 알렸다. 아부라야마 강과 무로미 강은 후쿠오카 구치소에 이르러 합류한다. 이곳 두물머리에서 동해까지는 1km 남짓이다. 지난 가을, 그곳 소나무 숲에서 윤동주와 송몽규를 떠올렸다. 그들도 차가운 감방에서 파도 소리를 들었을까,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 조선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며 일본 정부의 무심함을 탓했다. 다시 윤동주 서거 80주년을 맞아 군국주의 어두운 그림자와 양심적인 일본 시민 사이에서 일본 정부의 자세를 묻는다.
    윤동주 서거 80주년과 일본의 자세
    by 임병식
    2025.01.25 00:05:00
  • 2025년 새해가 시작되자 올 한해 전개될 글로벌 세상을 예견하는 전망들이 쏟아지고 있다. 전쟁, 테러 등 지정학적 불안의 지속, 고령화 및 양극화에 의한 사회적 갈등 확대, AI 기술 발전에 따른 경제사회적 파장 증가, 미중간 기술경쟁 격화 등 여러 위험과 불확실성 요소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동요인은 트럼프의 귀환이다. 전 세계가 이미 수년전에 트럼프 1기를 경험했음에도 당시 보여줬던 파격적인 의사결정과 예측불가능한 행동으로 인해 트럼프의 재집권은 글로벌 정치 및 경제질서의 불확실성을 크게 높이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는 트럼프는 미국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국제정치, 경제, 안보 등 모든 분야에서 기존 질서를 변화시킬 것으로 예견된다. 공공연히 강조해 온 관세장벽 강화는 국제무역질서를 어지럽힐 것이며 이미 한창 진행 중인 글로벌 공급망 개편도 미국의 이익을 내세워 변화를 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업가적 계산이 우선하는 그의 정치 스타일로 인해 구체적인 변화의 내용을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상황과 환경변화에 따라 이익의 기준이 달라지고 선택이 변화할 수 있어 이전에 추진했던 정책들을 다시 일관되게 추진할지도 불확실하다. 트럼프의 독특한 정치스타일은 장기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해야 하는 연구개발분야에서 변화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는 집권 1기에 많은 정부예산을 사용함에도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성과창출이 어려운 연구개발부문에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연방정부의 연구개발예산 삭감을 시도했을뿐만 아니라 기후변화, 환경, 신재생에너지, 보건의료분야와 같이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지만 회수의 불확실성이 높은 분야, 기업에 비용부담을 주는 분야들에 대한 연구개발정책의 역할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트럼프의 의사결정 스타일에 비추어 볼 때, 이전에 축소하고자 했던 분야라도 미국의 패권강화에 중요하거나 중국기업과의 경쟁에서 필요한 분야라면 입장을 선회할 수도 있어 예단하지 말고 유연하게 살펴봐야 한다. 또한 모든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AI분야, 차세대 전략분야인 양자기술분야, 미국의 군사적패권 강화와 직접 연계된 우주, 국방분야에 대한 트럼프의 정책과 투자는 크게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 분야도 효율성과 성과 창출을 강조하는 정부혁신의 영향으로 실용적 연구개발을 강화할 것이며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의 신기술 구현과 신산업경쟁력 제고에 집중할 것이다. 반면 기술패권 경쟁국인 중국과의 기술협력 및 기술거래에 대한 트럼프의 통제는 일관되고 더욱 강화될 것이다. 트럼프의 중국 압박은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더 큰 위험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트럼프의 압박이 중국을 기술자립화에 매진하게 해 오히려 중국의 기술수준과 확보 속도를 높이는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은 AI, 양자, 바이오, 우주, 이차전지 등에서 우리의 기술수준을 넘어 미국과 견줄 수 있는 단계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대외적으로 높은 불확실성 속에서 국내 상황은 정치적 불안정성이 높고 경제도 흔들려 올해 국내 경제성장률은 1%대로 낮아질 전망이다. 국가경제를 지탱해 온 반도체산업의 기술경쟁력이 흔들리고 자동차, 조선, 화학, 이차전지 등 주력산업들의 글로벌 시장경쟁력은 중국에 추월당하거나 위협받고 있다. 국내기업들의 경쟁력 하락은 대내외적 환경이 어려운 점에 일정 부분 기인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기술경쟁력의 부족이다. 지금의 혁신경제체제에서 개별기업의 기술경쟁력은 기업만의 역량이 아닌 정부, 대학, 연구기관 등 국가혁신주체들의 혁신역량과 연구생태계의 토대 위에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국내기업과 산업경쟁력이 하락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혁신체계의 혁신역량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과 연계된다. 트럼프 시대의 높은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트럼프 정책에 단답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과학기술혁신전략이 필요하다. 트럼프 스타일에 유리한 국내산업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면서 이후 포스트 트럼프시대의 신산업 경쟁력을 고려한 전략적 균형을 찾아야 한다. 특히 미국 주도의 AI시대로의 혁명적 전환에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AI 혁신생태계에 대한 진단과 혁신전략을 재검토해야 한다.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부족한 인재와 자원을 극복하기 위해 산학연과 정부가 공동협력하는 한국형 혁신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시스템 혁신도 시급하다. 나아가 단단한 산학연 혁신생태계에서 창출된 성과가 글로벌 신시장과 신산업을 선도하는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국내시장의 혁신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가 먼저 필요하다.
    트럼프 2기, 불확실성 대응한 과학기술혁신전략은?
    by 이민형
    2025.01.12 11:24:25
  • 올해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게 뜻깊은 해이다. 1945년 광복(일본은 종전)으로부터 80년,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60년 되는 해이다. 그동안 양국에는 숱한 일이 있었다. 맑은 날과 흐린 날이 교차하듯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지금도 양국 관계는 언제 깨져도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유리그릇이다. 말끔히 정리되지 못한 과거사를 머리에 둔 까닭이다. 특히 피해자로서 한국인에게 과거사는 인화성 높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우리 인식의 기저에는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깊게 깔려 있다. 광복 80년이 흘렀지만 수도 한복판에서 10년째 위안부 소녀상 철야 농성이 이어지고 ‘토착왜구’라는 말이 상대를 제압하는 유용한 기제로 통용되는 게 그렇다. 2023년 1인당 GNI(국내외에서 벌어들인 평균 소득)에서 한국은 처음으로 일본을 제쳤다. 가구당 순자산과 수출액도 일본을 앞질렀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은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18계단 앞섰다고 발표했다. 문화 분야에서도 K팝을 비롯한 K콘텐츠는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양국을 오가는 연간 방문객은 1000만 명을 넘어선지 오래됐다. 지구상에 이런 두 나라는 없다. 일본을 찾는 외국인 가운데 한국인은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정부관광국(JNTO)에 따르면 2024년의 경우 11월까지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3338만 명 가운데 한국은 795만 명으로 23.8%를 차지했다. 네 명 가운데 한 명꼴로 한국사람인 것이다. 도쿄와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는 물론이고 일본 소도시까지 우리 젊은이들로 북적일 정도다. 2030세대의 70%는 일본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경제와 문화에서 성과에 바탕을 둔 자신감으로 이해한다. 대한민국은 80년 전, 일제에서 해방된 나약한 한국이 아니다. 예전에 일본이 알던 한국이 아니라는 말이다. 광복 80년은 변화한 위상에 걸맞은, 자신감에 바탕을 둔 대일관계를 세우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과잉 민족주의가 넘치고, 일본 이슈에는 쉽게 흥분하고 분노한다. 개인 관계에서도 그렇듯 먼저 화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쪽에 허점이 많다. 분노는 냉정해야할 때 눈을 가린다. 한일 양국에는 한일관계를 악용하는 편협한 세력이 있다. 이들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 끝에는 끝없는 불신과 적대감이 있다. 청년세대는 당당한데 끝없이 피해의식만 자극한다면 무책임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5년 일본 방문에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하며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불행한 역사는 짧고 좋았던 때가 훨씬 길었다”며 전향적인 한일관계를 당부했다. 이후 한류는 일본 열도를 뒤덮었다. 앞서 조선통신사는 200여 년 동안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BTS와 블랙핑클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문화사절단이었다. 하지만 한일관계는 여전히 불안하고 삐걱댄다. 광복 80년, 국교 정상화 60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30년을 맞는 2025년은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기 좋은 해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두 나라는 어쩌면 가장 서로를 모른다. 불행한 과거는 용서하되 잊지 않는 자세를 견지할 때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도 열리리라 믿는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선진 7개국만 가입하는 ‘5030클럽’ 회원 국가이다. 이 중 제국주의를 경영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은 여러 지표에서 일본에 앞서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우위도 확보하고 있다. 청년세대는 도덕적 우위와 경제, 문화에서 우위를 토대로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 경제와 민주주의를 리드할 주인공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에 따라 동아시아 질서는 급격한 재편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우리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불행한 과거에 대해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모습을 보일 때 한국은 국제사회의 성숙한 일원으로 거듭날 수 있다. 박철희 주일 대사는 서울대 교수 재임시절 한 토론회에서 “일본 문제는 가만히 있으면서 여론에 편승해 비판만 하는 게 가장 편하다”는 말로 한국 사회의 곤혹스러움을 토로한 바 있다. 비판과 비난이 두려워 침묵하는 사회는 희망도 기대도 없다. 성숙한 토론이 실종된 사회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자각증세 없이 서서히 죽음을 맞는 당뇨병 환자와 같은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미셀 오바마는 “그들이 저급하게 갈 때,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했는데 한일관계에도 적용해볼 만하다. 일본을 도덕적으로 굴복시키는 품위와 관용을 떠올려본다. 일본을 찾는 외국인 4명 가운데 1명은 한국사람인 시대, 일본은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나라이다. 그렇다면 흥분과 분노를 내려놓고 긴 호흡에서 미래에 시선을 둬야 한다. 지난 40여 년 동안 100차례 넘게 일본을 다녔고, 최근 2년 동안은 과거사와 관련된 현장을 집중적으로 다녔다.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 이부스키(指宿)에서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왓카나이(稚內)까지 일본 열도를 종으로 횡으로 오가며 불행한 과거를 직시하는 한편 전후 일본세대가 보여주는 진솔한 움직임을 살폈다. 대학생 자격으로 처음 일본에 발을 디딘 뒤 언론인, 정치인, 대학 교수로 신분이 바뀌었다. 제 시선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뒤따랐다. ‘임병식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는 한계에 갇힌 양국 정치인들의 정치언어를 뛰어넘어 균형을 이야기한다. 참회와 반성의 토대 위에서 군국주의 망령과 싸우고 있는 시민모임은 원천이다. 일본은 종단거리만 2895km(도쿄 경유), 2700km(가나자와 경유)에 달하며 남한 면적 네 배에 달한다. 매주 저와 함께 ‘섬나라 왜놈’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일본과 일본인을 만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모색하길 기대한다.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의 조건
    by 임병식
    2025.01.07 14:32:05
  • 후진국 중 가장 빠르게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나라, 그 대한민국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작금의 현실과 사태로 볼 때 디스토피아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이니 말이다. 특히 농촌은 더욱 그러하다.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에다 기존 인구의 도시 유출까지, 거기에 문화와 교육과 의료와 복지의 사각지대가 너무 많아 생활의 불편 요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원래 농촌은 자연친화적 환경과 더불어 상생의 공동체가 살아있는 우리네 삶의 현장이었다. 농촌은 단순히 도시의 배후지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적 삶의 구현공간, 도농상생의 융합공간 그리고 기후위기 대응의 대안공간이 될 수 있는 곳이다. 농촌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으나 우리가 잊고 있던 ‘유토피아’가 될 수 있는 곳이다. 농촌유토피아란 먹고 사는 걱정이 없고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한 농촌을 말한다.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문화적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며, 개인의 자아실현을 향한 노력이 공동체의 발전과 자연스레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농촌이 이런 유토피아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일자리, 주거, 의료, 복지, 교육, 문화 등의 융복합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한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도시에서 이런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농촌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 충남 홍성의 홍동면이나 경남 함양의 서하면이 유토피아 성공사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런 유토피아를 만드는데 있어 관(官)이 아니라 민(民)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소위 관제 유토피아는 성공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깨어있는 민이 창조적 상상력으로 기획하고 지역주민이 공동체로 함께 할 때 유토피아는 성공할 수 있다. 물론 민이 먼저 씨앗을 심고 발아를 시키면 관이 도와주어야 한다. 이른바 선민후관(先民後官)이다. 이것이야말로 민관협치의 정석이고 또 지속가능한 모델이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스코틀랜드의 핀드혼 공동체나 호주의 크리스탈 워터스 그리고 인도의 오로빌 공동체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가까이는 일본의 가미야마 마을이 있다. 모두 민이 중심이 되어 만들고 성공한 곳이다. 그러면 유토피아(Utopia)와 유토피아(有土彼我)는 무엇이 다를까? 토머스 모어의 ‘Utopia’는 ‘어디에도 이루어질 수 없는 곳’, 즉 이상향이다. 반면 ‘有土彼我’는 ‘당신과 나 사이에 흙(자연)이 있는 곳’, 바로 농촌이다. 농촌이되 그냥 농촌이 아니라 ‘사람이 살만한 유토피아적 요소를 갖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런 농촌형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2020년에 농촌유토피아연구소가 만들어지고 이어 2021년에 농촌유토피아대학원이 만들어졌다. 시대정신에 맞는 창조적 상상력으로 농촌을 혁신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 중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2022년부터는 농촌유토피아 선도마을을 곳곳에 만들고 있다. 이런 농촌형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공동체 마을이 스페인에 있는, 인구 2700명의 ‘마리날레다’라는 곳이다. 이곳을 소개한 ‘우리는 이상한 마을에 산다’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우리는 우리가 미래에 원하는 것을 지금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내일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오늘 시작하면 그것이 가능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본보기가 됩니다. 정치를 하는 다른 방법, 경제를 하는 다른 방법, 함께 사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 다른 사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본보기 말입니다.” 또한 “유토피아는 근거 없는 환상이 아닙니다. 유토피아는 사람들이 가진 가장 고귀한 꿈입니다. 투쟁을 통해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평화의 꿈, 즉 공동묘지의 평화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평등과 평화를 이뤄내는 꿈입니다. 간디가 말했듯이 평화는 단순히 폭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생산하는 자원과 부를 소수가 빼앗아 가지 않고 그것이 다시 노동자에게로 오는 꿈입니다.” 온갖 어려움에도 타율과 경쟁이 아닌 자율과 협동의 가치로 마리날레다는 유토피아를 완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원하는 것을 내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실현해 낸다는 것이다. 저명한 미국의 교수이며 작가이자 활동가인 벨 훅스는 “만일 우리가 닫힌 시스템에서 열린 공간을 발견하고도, 거기에 들어갈 노력을 즉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감옥에 가두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아무리 디스토피아 세상이라 하더라도 틈은 있게 마련이다. 그 틈을 비집고 새로운 공생공락의 유토피아 세상을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도 농촌을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한 민간 차원의 움직임이 다양한 형태로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마을공화국을 만드는 운동가들도 있고, 융복합 농촌마을을 계획하는 전문가들도 있고, 귀농귀촌 생태마을을 건설하는 도시농부들도 있으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마을을 꿈꾸고 있는 청년들도 있다. ‘어디에도 없는 곳’ 유토피아(Utopia)는 이상향에 불과하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곳’, 유토피아(有土彼我)는 바로 우리 사이에 있다.
    유토피아(Utopia)? 유토피아(有土彼我)!
    by 조금평
    2024.12.31 15:53:37
  • AI 신뢰성(Trustworthiness)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신뢰성이 있다는 것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하거나 관리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AI 안전(Safety)이 확보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안전과 신뢰는 개념적으로 다르지만 정책적인 목표는 동일하다. AI 신뢰성은 궁극적으로 AI를 활용하는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다. 여기에는 AI 기본법상 영향을 받는 자를 포함하며 이들은 AI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자연인이다. AI는 본래 의도했던 편리함과 이익을 위해 사용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가정을 포함한다. 나아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거나 관리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역시 중요한 논점이다. AI 신뢰성이 확보된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AI를 이용함에 있어 안전한 상태가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것이다. 신뢰성의 주요 요소로는 공정성, 투명성, 안전성, 책임성, 설명 가능성, 프라이버시 보호 등이 있으며 이 요소들이 전부 또는 일부 지켜지지 않을 경우 이용자는 해당 AI에 대해 신뢰할 수 없다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AI 신뢰성을 위한 다양한 요소가 나열되고 있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정합성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는 기구나 단체의 특성에 따라, 각자의 영역에서 우선순위에 놓인 요소를 중심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신뢰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추상적 개념은 지양될 필요가 있다. 이는 책임의 영역에 관한 것이며 관리 가능하거나 수용 가능한 상태의 신뢰성이라면 회복력이나 치유 상황도 고려되어야 한다. 설명 가능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해당 시스템에 설명 가능한 모듈을 포함하거나 사람이 설명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면 이는 관리된 상황으로 볼 수 있다. 투명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데이터 윤리 측면에서 데이터의 출처, 유형 등에 대한 정보 공개가 요구된다. 물론, 데이터의 성질에 따라 프라이버시와의 연관성이 존재한다. 이처럼 신뢰성 요소는 개별적으로 작동할 수도 있지만 상호 연계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구분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신뢰성에 대한 이해는 절대적인 평가로 보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신뢰성이 저하된 상태인지, 또는 어떤 요소가 부족한 것인지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다. AI 윤리와 마찬가지로 신뢰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당히 추상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뢰성이 없다는 이유로 책임성이 부재하다고 평가하거나 법적 책임을 묻는다면 쉽게 인용되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윤리적 비난 가능성에 따른 책임에 한정할 될 필요가 있다. 이처럼 AI 신뢰성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법적 측면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신뢰성 요소에 대한 이슈와 법적으로 대응 가능한 상황을 준비하는 것은 AI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한 대응과 책임 명확화를 위해 필요하다. AI 신뢰성에 대한 법적 책임과 기준은 명확히 제시되지 않았지만 EU AI법에서 제시된 4가지 위험 수준에 따른 투명성 확보 의무화를 참고할 수 있다. EU AI법은 사업자의 투명성을 강조하며, 이는 AI에 대한 신뢰 가능성을 높이고 안전을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또한 AI 신뢰성은 AI 기술이 추구하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안전이란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AI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겨질 경우 해당 서비스를 이용할 것이다. 신뢰는 안전을 위한 관계 형성으로 볼 수 있다. AI가 추구하는 가치는 이용자가 해당 서비스나 제품을 안전하게 이용하도록 하는 데 있다. 신뢰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안전한 사회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 윤리는 신뢰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며, AI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적용되어야 한다. 윤리는 법과 제도의 부족한 부문을 채워가는 사회적 가치 규범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거버넌스 차원에서 안전을 다룰 필요가 있다. 안전을 강조하는 것은 규제적 속성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를 단순히 규제로 단정 짓는 것은 곤란하다. AI가 어떻게 발전하고 어떤 결과를 도출할지 예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전 예방 원칙에 따른 정책적 목표가 포함되어야 한다. 서비스나 제품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은 소비자기본법이나 제조물책임법의 입법 목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AI기본법은 AI 신뢰성 확보를 위한 다양한 정책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신뢰성 인증, 영향 평가, 생성형 AI의 표시 등이 그 예이다. 이는 AI의 내재적 한계와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거나 예기치 못한 기술적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AI 신뢰성을 논의함에 있어 신뢰성과 안전성을 구분하고 그 관계를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AI 기본법에는 안전에 관한 규정이 없으나 AI 신뢰성이 요구하는 신뢰 수준은 AI를 이용하는 국민의 안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신뢰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법적으로 정의 내리기 쉽지 않으므로 AI 윤리 측면에서 다뤄져야 한다. AI 기본법은 이러한 한계를 인지하고 있으며 신뢰성 확보를 위한 정책 규정을 두되 별도의 처벌 규정을 두지 않고 있다. AI 신뢰성을 통해 얻는 가치는 국민의 안전이다. 신뢰성이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이를 명확히 할 수 있는 원칙과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사업자의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AI 기본법에 기술 진흥과 국민 안전을 위한 균형 잡힌 정책이 담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AI를 이용한 사회문제의 해결, 리터러시의 확산 등을 포함하는 AI 기본법 개정 논의는 빨리 시작할수록 좋을 것이다. AI 기본법안은 국회 본회의 의결만 남겨두고 있다.
    무엇을 위한 AI 신뢰성인가?
    by 김윤명
    2024.12.28 07:05:00
  • 네이버가 소버린 AI(Sovereign AI)를 주장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부에서 검색과 AI가 충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합리적인 의심은 이렇다. 최근 발표된 네이버의 AI 전략은 서비스에 AI를 융합하는 모양새다. 그동안 네이버는 저작권을 제한하는 데이터마이닝(TDM)의 도입하는 저작권법 개정에 부정적이었다. 누구나 쓸 수 있도록 데이터가 개방되면, 네이버는 한글에 대한 독점력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경쟁관계에 있는 구글이나 OpenAI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도 한글 데이터에 대한 제한없는 이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검색을 위해서는 데이터를 제한없이 크롤링할 수 있도록 저작권이 제한되어야 하지만, AI를 위해서는 데이터를 개방하면 글로벌 기업들에게 경쟁력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에 개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검색과 AI 부문이 충돌하게 된다. 이는 구글도 다르지 않다. AI 모델 학습은 지속적인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동안 네이버는 적잖은 비용을 투자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기업의 수조원 단위의 R&D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네이버의 경쟁력인 한글화에 있어서도 글로벌 AI 서비스에 경쟁우위에 선다고 보기도 어렵다. 글로벌 기업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서도 한글 정보는 이미 네이티브를 넘어서고 있다. 앞으로, 더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네이버 검색은 한글을 기반하여 성장해 왔다. 그 덕분에 엠파스가 사라지고 야후도 국내시장에서 철수했다. 현재 검색시장의 경쟁은 네이버의 독점 내지 과점으로 이어졌다. 구글의 점유율도 상당히 높아지고 있다. 이는 경쟁을 통한 서비스 향성과 소비자 후생이 높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글은 특정 기업이 독점적인 마케팅을 주장할 가치가 아니다. 글로벌 시민 모두가 누려야 할 가치이다. 이러한 가치를 국내 기업이라고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시민이 한글을 제대로 익히고, 제대로 된 한글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과 네이버를 포함한 우리기업의 책무이다. 네이버이기 때문에 한글을 독점해야 한다는 논리는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기업의 전략으로는 옹색하다. 소비자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네이버를 쓰고, 구글을 쓰고, 네이버 쇼핑을 이용하거나 11번가를 선택할 수 있다. 멀티호밍(multihoming)이 가능하다. 이는 독점에 대한 네이버의 대응논리이기도 하다. 소비자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다른 플랫폼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AI는 더욱더 그러하다. 챗GPT나 제미나이(gemini)와 같은 글로벌 AI 서비스의 한글은 우리 국민들이 쓰기에도 어색함이 없다. 부족하더라도, 그 내용을 극복할 수 있는 문해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해외 시민들이 한글을 쓸려고 할 때 문제는 없을까? OpenAI, MS, 구글 등 수많은 AI기업들이 한글 서비스를 확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색하고 의미와 다른 정보가 출력된다. 이 책임은 기본적으로 그 회사에 있다. 그렇지만, 그 책임을 회사에 돌리고 부정확한 한글정보가 노출되지 않은 것에 불평만 할 것인가? 그 사이에 우리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향유하기 위해 한글정보를 얻고자하는 글로벌 시민들은 한글과 대한민국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지 않을까? 이러한 점도 고려돼야 한다. 네이버는 소버린 AI를 주장한다. 좀더 정확히는 한글 데이터 주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아니면, 한글을 지켜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좀 어색하다. 그런데, 네이버는 중동,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시장에서 소버린 AI를 통해 현지 언어와 문화에 맞는 AI 솔루션을 제공하며 글로벌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다. 네이버를 응원한다. 그렇지만, 소버린 AI에 한글을 볼모삼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마케팅이다. 이는 다중적이거나, 양면적이기도 하다. 한 가지 의문, 네이버는 어디에서 학습데이터를 소싱하고 있을까? 추측컨대, 모르긴 몰라도 크롤링이 가능한 모든 정보가 포함돼있을 것이다. 이용자의 노력의 산물인 블로그나 카페와 그리고 인터넷에 무수하게 공개된, 그렇지만 여전히 저작권 있는 개인의 정보였을 것이다. 그 안에는 KINDS나 기사를 제공하는 언론사의 수많은 기사가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권리자단체에서 데이터 출처 공개를 요구했을 때, 답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U AI법이나 미국의 저작권법 개정안에서는 학습데이터에 사용된 저작권 관련 정보를 충분히 공개하도록 하거나 저작권청에 제출토록 의무화하고 있다. 어떤 저작물이 사용되었는지 공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용하는 데이터가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데이터를 사용했는지를 공개한다면, AI 사업자는 해당 서비스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려고 법적, 윤리적인 노력을 할 것이다. 적어도, 소버린 AI를 주장하려면 권리자들에 어떤 보상을 할 것인지, 데이터 배당이나 데이터 보상에 대해 고민했어야 한다. 저작권은 권리자의 전가의 보도는 아니지만, 데이터를 아무런 보상없이 이용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서까지 독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네이버 회원이기도 한 일반 이용자로서 저작권자에 대한 데이터배당은 고민해야할 것이다. 플랫폼 내에서 그 가치는 산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데이터 하나하나에 고유의 id값이 부여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권리나 필요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윤리적인지도 검토돼야 한다. 기업의 주장은 그래야 한다. 적어도 정책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마케팅과는 달라야 한다. 알고리즘 조작을 앞세워 자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소비자의 후생을 저해하는 행위를 하면서 자율규제를 주장하는 플랫폼사업자들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수백억원대의 과징금 처분을 받고, 고등법원에서 패소한 네이버의 행태를 보면서, 소버린 AI를 주장하는 것은 표리가 부동한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과도 맞닿아있다면 나만의 우려인가? 특정 기업을 몰아주거나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국회 보좌관 시절, 모시던 의원을 설득하여 네이버의 데이터주권을 위한 국회 세미나를 4차례 정도 기획하여 진행한 바 있다. 최근 구글의 디지털책임위원회 위원으로서 구글의 사회적 책임(responsibility)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AI만이 공정하고 투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소버린 AI'는 왜 나왔을까?-네이버 AI와 검색의 충돌
    by 김윤명
    2024.12.22 08:47:09
  • 한국 사회에서 나이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가장 먼저 나이부터 재본다. 나이순에 따라 연배와 연장자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장유유서라는 오랜 유교적 전통의 잔재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는 오래 살아 나이가 많으면 지혜가 쌓인다고 존경을 받던 세상이었다. 50에 지천명(知天命)이요 60에 이순(耳順)이라는 공자의 말씀이 나이가 들며 성숙하고 현명해져 가는 인생의 단계를 묘사한다. 그런데 현대 기업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르다. 기업의 인사관리에서도 나이를 따진다. 다만 나이가 많으면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 홀대를 받는다. 생물학적 나이와 회사 기여도는 반비례의 관계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의 임금 형태는 연공서열형 호봉제로 근속 연수를 기준으로 임금이 결정된다. 오래 근무하면 자동으로 임금이 인상된다. 나이든 직원을 우대하는 임금제도로 도입됐다. 그런데 이 호봉제 때문에 나이든 직원이 기업의 부담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임금이 인상된 만큼 생산성이 올라가지 않고 새로운 기술이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걸림돌로 치부된다.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이런 현상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네이버, 카카오, 삼성SDS, LG CNS에서 50대 팀장급 관리자가 늘어나며 공무원 조직처럼 관료화됐다고 한다. 20~30대 직원들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려 할 때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50대 관리자가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 기술적 선도기회를 놓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이든 직원을 직장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정년 제도를 운용한다. 연령을 기준으로 정년을 정하며 현재 근로자의 법정 정년은 만60세이다. 흥미롭게도 선진국에서는 법률로 제정한 의무적 정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경찰, 소방관 등의 특정 직종을 제외하면 연령에 따른 강제적 퇴직은 불법이다. 최근에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정년을 65세로 연장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정년은 별 의미가 없다. 정년까지 근무하는 직장인은 드물다. 대부분은 정년 전에 여러 이유로 회사를 떠난다. 임원으로 승진해 나가면 다행이다. 보통은 임원이 되지 못하고 중간에 밀려난다. 경기는 주기적으로 부침을 겪는데 침체기에 기업들은 구조조정에 돌입하고 인원을 감축한다. 희망퇴직 또는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감원도 몇 년생까지 적용하다는 식으로 나이를 정해 실시한다.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실상은 세대교체를 추진하는 것이다. 요즘이 딱 그런 시기이다. 팬데믹과 고금리로 침체된 국내 경기가 계속 악화되는 가운데 미국의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국내 탄핵정국의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내수와 수출 기업 모두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인력 감축에 나서고 있다. 올 하반기에 삼성전자, 포스코, SK텔레콤, LG디스플레이, 롯데온, 신세계면세점, G마켓 등의 대기업들이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KT는 전체 인력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다. 기업들은 주로 50대 임직원을 희망퇴직의 형태로 내보냈는데 그 여파로 50대 고용률이 지난 4월부터 8개월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같은 기간에 30대와 40대의 고용률은 늘어났는데 50대의 고용률만 감소했으니 50대가 감원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임원 인사에서는 더 혹독한 세대교체가 나타났다. 롯데그룹은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임원 인사를 단행하며 60대 이상 임원의 80%를 퇴진시켰다. 우리은행은 부행장의 절반가량을 물갈이하며 1970년대생 부서장들을 부행장과 임원으로 발탁하여 승진시켰다. 구조조정이라는 태풍에 50~60대 임직원이 쓸려가는 와중에서도 무풍지대가 존재한다. 대기업의 지배주주 경영자들은 모두 안전하게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승진잔치를 벌였다. 실적 부진을 이유로 대거 임직원을 퇴직시킨 식품 및 유통업계의 내수기업에서는 3~4세 경영자들이 회장, 사장, 부사장 등으로 승진하였다. 세대교체의 흐름에 편승해 1986년생 3세가 입사한 지 5년밖에 안 돼 부사장으로 승진한 사례도 있다. 나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철밥통 경영진은 은행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금융그룹은 이사가 70세를 넘어도 임기를 보장받도록 지배구조 내부규범을 개정했는데 이는 연임에 성공할 경우 3년 임기를 채울 수 있게 해주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이다. KB금융그룹과 우리금융그룹도 이사가 70세를 넘어도 임기를 보장받도록 하고 있다. 70세가 넘어도 이사를 할 수 있는 직위는 회장밖에 없다. 지배주주가 없는 금융그룹에서 회장이 주인 노릇 하며 70세 넘어서도 계속 하려는 욕심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금융그룹의 70세 임기 연장을 두고 ‘나이는 걸림돌이 아니다’라는 신문논평도 나왔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나이는 ‘벼슬’도 ‘걸림돌’도 아니어야 한다. 획일적으로 나이로 끊기 보다는 개인별로 성과를 평가해 정당하게 일할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혈연과 경영권의 특혜가 없어도 누구나 나이에 상관없이 오래 능력을 발휘하며 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내 나이가 어때서 일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라는 노랫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by 임채운
    2024.12.22 08:13:31
  • 농촌지역 소멸 위기를 대변하는 것 중 하나는 초등학교의 폐교 소식이다. 농촌유토피아연구소 본사가 있는 경상남도에도 2024년 12월 기준 미활용 폐교가 65개나 있는데 빠른 시간 내에 많이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농촌지역 초등학교는 역사적 정체성과 문화적 가치를 공유한 지역공동체의 구심 역할로서,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농촌학교의 급격한 감소는 여러 분야에서 지역의 쇠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농촌유토피아연구소는 그간 함양 서하초등학교를 비롯해 전국의 많은 지역에서 농촌학교살리기와 마을공동체살리기를 해왔다. 이는 학교가 살아야 마을이 산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일이다. 최근 장수군에서 ‘지역소멸에 대응하는 교육의 역할과 방향’이라는 국제포럼이 개최됐다. 인구 2만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지방소멸 대표지역 장수군에서, 이런 규모와 주제의 포럼이 열린다 해서 만사를 제치고 행사장으로 달려갔다. 인구감소 사회의 미래를 논한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우치다 타츠루 선생을 초빙하여 지역소멸 관련 대담도 갖는다니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작은학교살리기를 통한 마을공동체 활성화’라는 주제는 주관심 분야이기도 해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1박 2일간 열리는 행사에는 마을과 학교의 존립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전국의 다양한 공교육과 풀뿌리교육 관계자 150여명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학령인구 감소로 폐교 위기에 놓인 학교교사들을 비롯해 지역 학부모가 중심이 된 마을교사들, 그리고 교육 바로세우기에 진정인 지역 활동가들이 모인 것이다. 췌장암 항암치료 중으로 온라인으로 참여한 우치다 타츠루 선생의 과소지역(過疏地域)에서 과밀지역(過密地域)으로의 자본 이동 재해석은 자본주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국가존속을 위한 자급자족 방안 중 교육자립을 위한 모국어 정책 제언은 교육의 중요성을 재인식시켜 주었다. 소멸위기에 놓인 지역에 있어 교육공동체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배운 바가 많았다. 한 참석자는 “아이들을 마을과 지역에서 환대하는 일의 중요성과 지역의 문화를 다시 발굴하고 다양함을 연결시킬 필요성을 느낀다”고 했으며, 또 다른 참석자는 “지금 지역에서 학교와 교사의 역할과 모습이 한계에 도달한 만큼, 미래 교육 방향의 과제를 함께 해결해 나갈 대화의 플랫폼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역이 소멸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민과 관의 협치가 꼭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마을교육공동체의 활성화 없이는 학교도 살아남을 수 없고, 학교가 살지 않으면 마을도 존속할 수 없다는데 많은 참석자들이 동의했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농촌을 유토피아로 만드는 일인 것이다. 농촌유토피아란 농촌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선하여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만는 것이다. 각 지역과 특색에 맞는 실현가능한 모델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2023년 3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는 소멸위기에 놓인 일곱 개 지방자치단체가 모여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 등의 해결을 위해 ‘농촌유토피아 선도마을’을 만들기로 협약했다. 탄소중립과 자립자족 그리고 기본소득을 핵심으로 하는 ‘농촌유토피아 선도마을’은 현재 전북 곡성군과 충북 괴산군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주거와 일자리, 경제, 의료, 복지 등이 가능한 50~100호 내외의 마을을 만드는 과업인 것이다. 결국 이번 포럼은 농촌을 농촌답게 만드는 다양한 의견 표출의 장이었다. 농촌유토피아의 계획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수확이라고 볼 수 있다. 지역에서 개최되는 이런 행사가 농촌공동체를 활성화 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귀한 뜻들이 모여 농촌유토피아는 싹을 틔우고 종래는 큰 나무로 자라날 것을 희망해 본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소멸지역에 새싹 틔우는 농촌유토피아 공동체
    by 조금평
    2024.12.17 13:17:26
  • 트럼프 당선자는 첫 번째 임기 동안 아르테미스 프로그램 시작, 국가우주위원회(National Space Council) 복원, 미국 우주군 창설 등 여러 실질적인 우주 정책을 개혁했다. 그리고 이번 당선 승리 연설에서는 우주 분야가 차기 행정부의 우선순위가 될 것임을 분명히 밝혔는데, 이 중에서도 상업 우주 분야가 미국에서 최우선 의제로 거론되고 있다. 미국의 상업 우주발전 전망과 관련해 올 7월에 발표된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 정책 강령에는 “미국은 지구 궤도에 가까운 곳에 강력한 제조업을 창출하고 미국 우주비행사를 달과 화성으로 다시 보낼 것”이라며 "급속히 확장되고 있는 상업 우주부문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해 우주에서 거주하고 개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향후 트럼프 두 번째 임기 기간, 상업 우주부문의 집중적인 투자와 육성을 예측하게 한다. 이러한 예측은 올 4월 미 우주군이 발표한 ‘상업 우주전략’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미우주군은 우주 궤도에서 파괴되거나 고장 난 위성을 신속하게 교체하는 대응형 신속발사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적국의 우주 공격에 대응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미국의 우주에 대한 경쟁 우위를 증진하기 위해 우주 서비스 프로세스를 재조명하고 상업 파트너십을 육성하는 방법을 상업 우주전략에서 상세히 천명하고 있다. 이는 곧 미 우주군의 근본적인 마인드 변화를 시사하며 상업 우주활용을 선언하는 것이다. 미 우주군의 상업 우주 전략을 선정하는 4대 지침에는 △기업의 능력, 상품, 서비스 등의 활동이 미 우주군이 요구하는 능력 또는 요구 사항에 대한 충족 여부인 ‘운영 유틸리티’ △보유한 능력, 상품, 서비스의 비용이 미 우주군이 계약할 만한 수준을 보유하는 여부인 ‘실행 가능성’ △기업의 능력, 상품, 서비스 또는 활동이 미 우주군 프로젝트의 탄력성에 기여하고 다른 기업 대비 지속적인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여부인 ‘설계에 의한 탄력성’ △마지막으로 미 우주군 요구작전 충족, 신속하게 위협에 대응하는데 적합하고 다른 기업 대비 우위 서비스 제공 여부인 ‘신속한 현장배치’ 등으로 구성된다. 또 상업 우주 전략을 추진하는 4대 지침에는 △어떠한 단일 제공자나 솔루션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을 지양하고 조화를 강조하는 ‘균형’ △군 표준과 절차는 상업분야의 혁신, 속도, 규모를 저해하지 않으면서 정부와 상업 솔루션 간의 운용성을 강화하는 ‘상호 운용성’ △상업 제공자의 수를 늘리고 공급망을 다양화하며 사용되는 솔루션의 종류와 수를 확대하는 ‘탄력성’ △마지막으로 솔루션 사용은 법적, 윤리적으로 준수되며 국제적인 규범과 표준 그리고 국방 우주에서의 ‘책임있는 행동’ 등으로 분류된다. 현재 미 우주군은 상업 우주전략 선언 이후 위성 등의 우주시스템에 대한 공급망 다각화를 위해 동맹국과 협력을 강화하는 중으로 상업 우주기술에 대한 투자와 동맹국과의 협력 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즉, 우주 시스템을 공동 계획하고 구축함으로써 중복을 방지하고 상호 운용성을 증진하며 해외 파트너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다국적 광대역 글로벌 통신위성(WGS) 개발, 일본 QZSS 항법위성에 미국 우주감시 센서탑재 등은 미우주군의 우주시스템 조달에 우방국과의 상호운용성을 고려한 대표적인 상업 우주전략의 사례이다. 이처럼 미우주군은 보유하고 있는 것은 최대한 활용하고, 구매할 수 있는 것은 구매하며 반드시 필요한 것은 구축한다는 접근방식을 통해 상업 우주부문의 혁신을 최대한 유도하고 있다. 이에 앞으로 다가올 트럼프 두 번째 임기를 맞아 미우주군의 상업 우주전략 분석을 통해 우리 국방우주 실정에 부합하는 ‘한국형 상업 우주전략’을 수립하는 것을 제언해 본다
    트럼프 2기 시대, 美 우주군의 상업 우주 전략   
    by 최성환
    2024.12.02 17:27:23
  • 경제수명 연장을 위해 노후자산을 키우고자 할 때는 포트폴리오 구축이 기본이다. 포트폴리오 구축은 자산을 다양한 투자수단에 분산함으로써 수익과 위험을 균형 있게 관리하는 전략 중 하나다. 수익과 위험의 균형을 맞춘 자산 배분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금융자산이 바로 채권이다. 채권은 주식, 부동산 등 타자산과의 상관관계가 낮아 전체 포트폴리오의 위험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채권 투자는 개별채권을 사는 직접투자와, 펀드(ETF 포함)처럼 전문가에게 운용을 맡기는 간접투자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중 채권ETF는 개별채권과는 달리 거래소에서 주식처럼 매매할 수 있어 유동성이 높다. 운용 전문가가 다수의 채권에 분산투자하기 때문에 신용위험 관리측면에서도 유리하다. ETF 1주 상당액만으로도 투자를 시작할 수 있어 진입장벽도 낮다. 한 마디로 채권투자 입문용으로 적합하다. 반면, 단점도 있다. 펀드의 일종인 ETF에 대해서는 투자기간 동안 운용보수 등이 부과된다. 개인투자자가 개별채권에 투자하는 경우 이자수익에 대해서만 세금을 내지만, ETF 투자시에는 이자수익뿐만 아니라 채권 매매차익도 과세대상이다. 또한, 만기가 존재하는 개별채권과는 달리, 채권ETF에는 만기(존속기한)가 따로 없는데, 만기 유무는 금리위험(가격변동위험)과 관련해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개별채권과 채권ETF 모두 금리변동에 따라 가격이 오르거나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개별채권의 경우에는 만기까지 보유함으로써 가격변동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 발행사의 신용위험이 현실화하지 않는 한, 만기시점에 미리 정해진 원리금을 수령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만기가 없는 채권ETF는 엑싯시점의 가격에 따라 매매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만약 채권ETF에 투자하면서도 가격변동위험을 피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때 활용할 수 있는 상품이 있다. 바로 ‘만기매칭형’ 채권ETF다. 일반적인 채권ETF는 다양한 만기의 채권들을 사고 팔면서 운용수익을 내는 반면, 만기매칭형 ETF는 만기가 거의 동일한 채권들을 사서 만기까지 보유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이에 금리변동에 상관없이 존속기한까지 만기매칭형 ETF를 보유한다면, 매수시점에 확인한 예상 만기수익률(YTM, Yield to Maturity)과 거의 같은 수익을 실현할 수 있다. ETF의 특성상 보통 10개 종목 이상의 채권을 편입하고 있지만, 마치 개별채권 한 종목에 투자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셈이다. 이처럼 매매가 편리한 ETF와, 만기가 존재하는 개별채권의 장점이 결합된 만기매칭형 채권ETF는 은행예금보다는 높은 수익을 추구하면서도 자산의 가격변동성은 피하고 싶은 투자자에게 매력적인 선택지다. 만기매칭형 채권ETF를 매수 후 만기까지 보유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수익률, 즉 예상 만기수익률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해당 ETF를 출시한 자산운용사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각 운용사는 홈페이지에 만기매칭형 ETF의 만기수익률을 전일 기준으로 고지한다. 만기매칭형 ETF의 만기는 편입채권의 만기와 거의 같은 시점으로 설계되기 때문에 채권 원리금상환 직후 ETF는 자동 청산된다. ‘만기매칭형’이라는 이름은 이처럼 편입채권 만기와 ETF 만기와 같다는 데서 유래한다. 편입채권의 만기시점은 ’25-08’ 등과 같은 형태로 ETF 종목명에 표시되는데, ’25-08’은 2025년 8월을 의미한다. 편입대상 채권은 국공채, 특수채, 금융채, 회사채 등으로 일반적인 채권ETF와 다르지 않다. 만기매칭형이라고 해서 ETF를 반드시 만기까지 보유할 필요는 없다. ETF 매수 이후 금리 하락으로 인해 가격이 투자자 본인이 원하는 수준으로 오른다면, 만기 전에 매도해 시세차익을 거둘 수도 있다. 반대로 금리가 올라 가격이 하락한다면, 손실 회피를 위해 만기까지 보유하면 된다. 만기매칭형 채권ETF는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국내시장에 존재하지 않았다. 채권ETF 투자에 수반하는 가격변동위험을 회피하는 수단으로서 시장 수요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본 상품을 통해 채권ETF 투자와 개별채권 투자의 이점을 동시에 누리면서 자산포트폴리오의 변동성도 낮추는 효과를 경험해 보기 바란다.
    만기매칭형 ETF로 가격변동위험 헤지를!
    by 남창주
    2024.11.30 10:14:08
1 2 3 4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