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77
  • 채팅 하고 그림을 그리고, 문장도 ‘그럴듯하게’ 만드는 생성형 AI가 세상을 놀라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AI가 단순히 말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움직이고 행동하는 시대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사람처럼 걷고 손을 쓰는 휴머노이드, 하늘을 나는 드론, 스스로 판단해 도로를 주행하는 자율주행차까지. 이들은 이제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물리 세계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실제 임무를 수행하는 ‘피지컬(Physical) AI’로 진화 중이다. 최근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SPRI)의 보고서도 이 흐름을 짚고 있다. 보고서는 피지컬 AI가 미래 주력 산업이 될 것이라며, 관련 기술 확보와 인프라 구축의 시급함을 강조한다. 매우 중요한 문제 제기다. 하지만 보고서의 기술적 초점이 다소 편향돼 있다는 점은 아쉽다. 예컨대 멀티모달 LLM이나 강화학습, 초경량화된 LLM 등은 중요한 요소이긴 하나, 그것만으로는 피지컬 AI가 직면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이른바 신뢰성·안전성·효과성을 해결하긴 어렵다. 실제로 지금의 대형언어모델(LLM)은 텍스트 기반의 추론이나 언어 처리에 강점을 가지지만,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물리 환경에서는 실시간 판단이나 안전 확보에 한계가 있다. 특히 사람과 함께 동작하거나 사람을 대신해 움직여야 하는 AI는 단순히 잘 작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뢰할 수 있어야 하고, 안전해야 하며, 실제로 효과적으로 일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바로 ‘디지털트윈 기반 시스템 엔지니어링’이 그 해답이다. 디지털트윈은 실제 물리 시스템을 정밀하게 모델링해 가상공간에 복제한 것이다. 이 디지털 세계에서 다양한 시나리오를 실험하면서, AI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미리 검증하고 조율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강화학습 기반 AI가 실제 환경에서 겪게 될 시행착오와 위험을 사전에 줄이고, 신뢰성과 안전성을 확보하면서 효과적인 작동 여부까지 검증할 수 있다. 피지컬 AI는 단순한 기술의 집합이 아니다. 복잡한 시스템이다. 따라서 단편적인 기술의 연결이 아니라, 통합 설계와 반복 검증을 통한 시스템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가상실험을 기반으로 한 통합적 개발 체계 없이는 피지컬 AI는 현실에서 오히려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미 미국, 일본 등은 피지컬 AI와 디지털트윈을 연계한 테스트베드와 실험 인프라를 국가 주도로 구축하고 있으며, 관련 생태계를 전략적으로 정비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아직 연구개발 중심의 분절된 접근에 머물러 있고, 실제 환경에서의 실증과 검증 체계는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가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이 될 수 있는 시점이다. 이제는 LLM의 고도화나 알고리즘 경쟁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AI가 현실에서 신뢰할 수 있고, 안전하게,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검증하는 체계를 갖추는 데 눈을 돌려야 한다. 기술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건 ‘현실에서 잘 작동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피지컬 AI는 인류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기술이다. 동시에 그만큼의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디지털트윈 기반 시스템 엔지니어링을 중심으로, 신뢰성과 안전성, 효과성을 확보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통합 대응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피지컬 AI, 우리는 준비되어 있는가
    by 양영진
    2025.05.16 17:09:41
  • 인공지능(AI)은 산업과 경제를 넘어 교육, 복지, 노동, 행정 등 사회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동시에 AI는 점점 더 인간의 외양과 감각, 행동을 모사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형태로 구현되며, 기술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기술은 사람을 닮아가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오래된 문제가 새로운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AI는 본질적으로 기술이지만, 이제는 인간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핵심 사회 인프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이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주어지고 있지는 않다. 고령자, 저소득층, 장애인, 농어촌 주민 등 디지털 소외계층은 AI 기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기술의 진보가 오히려 새로운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술보다 먼저 사회적 계약의 내용과 방식부터 다시 써야 한다. ‘모두의 AI’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정책 비전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주요 정책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AI 접근권, 이용권, 설명요구권, 차별금지권 등을 포함한 ‘AI 기본권 헌장’을 제정하고, 이를 법제도 전반에 반영해야 한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사회권 체계를 구축하는 핵심이다. 둘째, ‘국민 AI 비서’와 같은 공공 AI 플랫폼을 구축해 복잡한 공공서비스를 통합 제공하고, 국민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개방형 디지털 복지 체계를 조성해야 한다. 셋째, 디지털 소외계층을 위한 AI 바우처 제도와 지역 기반 디지털 도움센터를 운영하여 기술격차를 완화해야 한다. 넷째, AI 시대에 필요한 역량을 국민이 갖출 수 있도록 생애주기별 AI 리터러시 교육을 제도화하고, 이를 평생학습 체계에 편입시켜야 한다. 다섯째, AI로 인한 기술 실업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주 4일제 도입 등 노동시간의 재구조화를 포함한 새로운 사회 안전망 전략이 필요하다. 이는 생산성 향상으로 확보된 잉여 시간을 삶의 질 향상으로 전환하는 사회적 분배 방식이다. 여섯째, 이러한 변화를 지속 가능하게 뒷받침할 수 있도록 시민, 기술자, 법률가, 산업계 등이 함께 참여하는 참여형 AI 기본사회 거버넌스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기술의 통제는 기술자만의 권한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AI가 점차 인간의 감정과 판단을 흉내 내는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구현되고 있는 오늘날,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거나 우위에 놓이는 상황에 대한 윤리적·법적 대응 또한 긴요하다. 기술은 사람을 모방할 수 있어도 인간 존재의 의미를 대신할 수는 없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다움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정치와 제도는 그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기존의 사회계약은 노동 중심의 산업사회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시민은 일하고 세금을 내며 국가에 참여했고, 국가는 그 대가로 복지와 보호를 제공했다. 그러나 AI가 인간의 노동을 재구성하고, 기술과 데이터가 새로운 부의 원천이 되는 시대에는 이 계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 ‘AI 중심의 지능정보사회’에 맞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다시 써야 할 시간에 서 있다. 이러한 사회계약의 재구성이 실질적인 정책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분배와 성장이 균형을 이루는 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모두의 AI’는 분배의 비전이지만, 그 실현은 지속가능한 성장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공공은 디지털 기술에 대한 투자와 인프라를 확충하고, 민간은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공공 LLM, 개방형 API, AI 바우처와 같은 정책은 민간 기업의 기술 진입을 유도하고, 기술 확산이 곧 생산성 향상과 신산업 창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분배는 성장 없이 가능하지 않고, 성장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기술 기반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기술 기반의 공공 혁신과 민간 생태계의 균형 있는 선순환이 구축될 때, AI로 창출된 부가 사회 전체로 환류되는 구조를 실현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포용적 분배의 전제이다. 이것이 바로 ‘모두의 AI’가 지향하는 가치이며, 기술과 인간의 공존을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의 실질적 내용이다.
    ‘모두의 AI’를 위한 길
    by 김윤명
    2025.05.16 13:47:41
  • ‘현대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야쿠시마(屋久島) 달린다’ 얼마 전 ‘서울경제신문’과 ‘연합뉴스’에 실린 흥미로운 기사 제목이다. 요지는 현대차에서 생산한 전기 버스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야쿠시마 섬을 운행한다는 것이다. 최근 장재훈 부회장을 비롯한 현대차 임원들은 야쿠시마를 방문해 무공해 전기 버스 5대를 인도했다. 고작 5대를 팔기 위해 그들이 먼 길을 간 이유가 궁금했다. 동행한 김정훈 상무(상용 품질담당)는 “‘바다 위 알프스’로 불리는 청정한 야쿠시마에 현대차가 달린다는 것은 전기 버스 강자로서 경쟁 우위를 선점하는 한편 일본 시장에서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듣고 보니 현대차의 야쿠시마 진출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야쿠시마와 인접한 다네가시마(種子島)에 관심이 끌렸다. 두 곳은 가고시마를 갈 때마다 마음에 둔 섬이다. 섬 전체가 세계자연유산인 야쿠시마는 1993년 유네스코에 등재됐는데 일본 최초였다. 유네스코가 야쿠시마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때 묻지 않은 원시림에다 신령스러운 삼나무 때문이다. 제주도 4분의 1 크기인 이곳에는 1000년을 넘긴 삼나무가 즐비하다. 특히 수령 7000년으로 추정되는 조몬스기는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일본에서만 관람객 1,300만 명을 기록한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에도 나오는 조몬스기와 이끼 숲은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원령공주’는 환경파괴의 위험을 그린 수작으로 야쿠시마에 친환경 버스가 필요한 이유다. 영화를 제작한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은 챗GPT가 그리는 지브리 풍 만화의 원조인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야오 감독은 오랫동안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해 왔는데 ‘원령공주’ 외에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벼랑 위의 포뇨’ 등으로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을 경고해 왔다. 지난해 다녀온 히로시마 현 토모노우라(鞆の浦) 역시 감독이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소재로 삼은 작은 어촌 마을이다. 하야오는 훼손 위기에 처한 토모노우라를 배경으로 ‘벼랑 위의 포뇨’를 제작했다.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히로시마 지방법원은 도로 건설계획을 중지했다. 토모노우라가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하게 된 것은 하야오 감독 덕분이다. 야쿠시마로 가는 길은 간단치 않다. 후쿠오카 또는 가고시마 공항으로 이동한 뒤 다시 쾌속선을 타고 2시간을 달려야 한다. 탐방객들이 원행을 마다하지 않는 건 독특한 식생을 보기 위해서다. 야쿠시마는 아열대 기후부터 설산까지 보기 드문 섬이다. 연평균 강우량은 2,500~1만mm로 ‘한 달에 35일 비가 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짙은 이끼가 섬을 뒤덮고 수 천 년 된 삼나무 숲을 형성했다. ‘원령공주’에 등장하는 이끼 숲길은 탐방객들에게 최고 코스다. 탐방객들은 원시림과 이끼 숲을 헤치며 섬의 주인은 숲이고, 인간은 손님에 불과함을 깨닫고 돌아간다. 지척에 있는 다네가시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다네가시마는 일본에 처음 화승총이 전해진 곳으로, 과장되게 말하자면 근대 일본의 시발점이다. 1543년 9월 23일 다네가시마에 상륙한 포르투갈 상인 100여 명은 훗날 전쟁 판도를 바꾼 화승총을 에도막부에 전했다. 다네가시마 도주 도키타카는 이들로부터 2000냥을 주고 화승총 두 자루를 구입했다. 오늘 날 수 억 원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액수도 놀랍지만 당시 도키타카는 15살에 불과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화승총이 지닌 위력을 간파한 것이다. 도키타카는 화승총을 철포(鐵砲·뎃포)로 개량했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철포를 실전에 투입해 천하를 통일했다. 이후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조선을 유린하고 근대 일본으로 가는 종자돈을 마련했다. 다네가시마에 포르투갈 상인이 상륙한 뒤, 임진왜란까지 걸린 시간은 49년에 불과했다. 그동안 조선도 화승총을 받아들일 기회가 있었지만 조선 지식인들은 변화에 둔감했다. 1653년 또 한 차례 기회가 왔지만 역시 흘려보냈다. 그해 제주에 표류한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 상인 38명은 조선에 13년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그들을 전국에 분산한 채 구경거리로만 소비했다. 앞선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일본의 실용주의와 조선의 탁상공론은 훗날 지배와 피지배라는 치욕스러운 역사로 귀결됐다. 정치하는 이들의 책임이 그때나 지금이나 가볍지 않은 이유다. 전국시대 뎃포(鐵砲)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철포도 없이 싸우는 무모함을 빗댄 말이 ‘무대포(無鐵砲)’다. 조선은 한동안 정신 승리에만 골몰한 중국 소설속의 아Q처럼 무댓포 시대를 지냈다. 도요타 자동차는 글로벌 메이커 1위다. 현대 전기 버스가 일본에 상륙한 건 뎃포로 무장한 실력 덕분이다. 일본 최초 화승총을 받아들인 다네가시마, 일본 첫 세계유산 야쿠시마에 현대 전기차의 첫 상륙은 의미 있다. 우리나라 전기 버스가 일본 열도를 뒤덮는 날이 온다면 반도체에 이은 기술의 승리일 것이다. 역사는 반복한다는데, 이번에는 어떤 형태로 변주될지 궁금하다. 조만간 두 섬에 다녀오고 싶다.
    천년 삼나무 일본 섬에 상륙한 현대차
    by 임병식
    2025.05.08 16:03:30
  • 기업의 위기관리 컨설팅을 하다 보면 늘 긴장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위기 상황에서 임원들이 모여 심각하게 회의를 거듭하지만, 정작 고객과 직접 맞닿아 있는 현장의 목소리가 빠지는 경우가 많다. 고객센터 상담원, 세일즈 담당자, 이들의 경험과 통찰이 회의실 문턱을 넘지 못하면, 결정은 어김없이 현장과 어긋난다. 그렇게 2차, 3차 위기가 시작된다. 위기관리를 위한 결정이 새로운 위기를 낳는 아이러니다. 정책 수립도 다르지 않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 환경과 대내외 경제의 변동성 속에서 정부가 정책을 세우는 일은 늘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규제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과거의 틀에 갇혀 있고, 새롭게 떠오른 기술과 서비스는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시장에 나오지도 못한 채 사라진다. 무엇이 이 벽을 넘게 할 수 있을까. 결국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기업의 목소리에 정부가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답이다. 영국 금융감독청(FCA)의 규제 샌드박스는 좋은 예다. 핀테크 산업이 급성장하던 2016년, FCA는 기존 금융 규제가 신기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규제를 무턱대고 없애기보다는, 기업들에게 제한된 환경에서 신기술을 시험할 기회를 주었다. 기업이 시장에서 직접 서비스를 실증하고, 그 데이터를 정부와 공유하며 규제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구조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168개 기업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시장에 진입했고, 참여 기업들은 기존보다 50% 이상 더 많은 자금조달에 성공했다. ‘선구매 후결제(Buy Now Pay Later)’ 모델을 실험한 질치(Zilch)는 그 대표적 사례다. 기존 규제의 틀에서는 서비스를 내놓을 수 없던 질치는 FCA 규제 샌드박스에서 소비자 보호 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지 시험했다. 실증 결과, 400만 명의 고객과 20억 달러 기업가치를 가진 회사로 성장했다. 한국도 2019년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는 등 나름의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특히 기술 변화 속도가 가장 빠른 인공지능(AI) 분야만 봐도 그렇다. 수년 전부터 AI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했지만, AI 활용에 관한 규제와 정책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오랜 논의 끝에 인공지능기본법이 가까스로 통과됐지만, 이미 글로벌 기업들은 한국보다 한참 앞서 달리고 있다. 단지 AI만의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 산업, 모빌리티, 원격의료 등 어느 분야를 보더라도 혁신은 시장에서 앞서가고, 규제는 뒤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왜 이토록 우리의 정책은 현실을 따라잡지 못할까. 결국 답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은 누구보다 기술의 변화와 시장의 반응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존재다. 그들의 경험과 데이터를 정책에 담아냈다면, 이렇게 뒤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기업과 정부의 협력을 ‘야합’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적 정서에 갇혀 있다. 정부가 기업의 의견을 수용하면 어김없이 따라붙는 ‘특혜’, ‘재벌 편들기’라는 비난이 발목을 잡는다. 결국 귀를 닫고 안전한 길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두려움을 버려야 할 때다. 혁신 기술이 시장을 이끄는 시대, 정부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면,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담아야 한다. 기업과의 협력은 야합이 아니라, 혁신을 현실로 만드는 동반자 관계다. 규제는 시장을 지키는 울타리다. 하지만 그 울타리가 너무 높으면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된다. 울타리는 지키되, 그 안에서 새로운 길을 낼 유연성이 필요하다. 기술과 시장, 정책과 규제가 함께 움직일 때, 혁신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정부가 기업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 바로 여기에 있다.
    규제 개혁, 결국 현장에 답이 있다
    by 이보형
    2025.05.07 14:08:51
  • 책무구조도 도입은 요 근래 금융업권의 주요 화두이다. 과거에 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금융회사의 내부통제 부실 문제가 지적되었다. 금융회사와 임직원들을 어떠한 근거로 어디까지 제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무상 논란도 있었다. 개정「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책무구조도 도입 의무가 마련된 것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한 것이다. 책무구조도는 영국 금융서비스 및 시장법(Financial Services and Markets Act 2000: FSMA)상 고위 경영자 및 인증제도(Senior Managers and Certification Regime, SM & CR)에 근거하고 있는 고위 경영자 및 거버넌스에 대한 책임지도(responsibilities map)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책무구조도 도입에 따라 금융회사 임원별로 소관 영역에 대한 내부통제 ‘책무’가 명확하게 식별, 배분되어야 한다. 임원은 소관 영역에서 내부통제·위험관리 기준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관리조치를 이행해야 한다. 대표이사는 전사적 내부통제체계를 구축하고 임원들의 내부통제 활동을 감독하는 내부통제 ‘총괄’ 관리 의무를 부담하며, 임원별 내부통제 책무를 배분한 ‘책무구조도’를 작성해서 금융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대표이사와 고위임원들에게 중징계가 부과될 수 있기 때문에 세간에서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에 따라 책무구조도를 도입해야 하는 기한은 업권별로 다르다. 은행·금융지주회사는 올해 1월 책무구조도 제출을 완료했다. 금융투자업자·보험사는 자산총액·운용재산 규모에 따라 올해 7월 또는 내년 7월까지, 여신전문금융회사·저축은행은 자산총액 규모에 따라 내년 7월 또는 후년 7월까지 책무구조도를 도입해야 한다. 책무구조도 도입을 준비하는 금융회사들은 고충이 많다. 각자의 영업, 내규와 조직 현황을 전반적으로 점검해서 법의 취지에 맞게 내부통제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직 개편, 업무 분장·조정, 인사이동이 수반되는 경우가 생긴다. 내규도 정비해야 하고 전산시스템과 업무 프로세스를 변경해야 한다. 간단한 일이 아니고 전사적인 역량이 투입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금융당국도 새로운 제도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책무구조도 시범운영 제도를 시행해서 업권별 책무구조도 도입 기한 전에 참여를 희망하는 금융회사로부터 책무구조도를 조기에 제출받아 사전 컨설팅을 해주고 있다. 시범운영 기간 중에는 내부통제 관리 의무가 완벽하게 이행되지 않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 등 인센티브도 준다. 컨설팅 과정에서 금융회사들에 공통적으로 발견된 실무상 쟁점에 대해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려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당분간은 시행착오가 불가피할 것이다. 축적된 실무가 많지 않고 금융회사마다 경영 여건과 조직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금융당국이 제공하는 컨설팅이나 가이드라인에만 의존해서 개별 회사들이 내부통제 시스템을 단기간에 완결적으로 보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금융회사의 적극적인 실행 의지와 금융당국의 적정하면서도 유연한 감독권 행사가 결합되어 책무구조도 도입이 대형 금융사고를 예방하고 금융회사의 내부통제 시스템이 한층 고도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책무구조도, 내부통제 고도화를 위한 성장통
    by 유정한
    2025.05.07 12:38:00
  • 대한민국에서 검찰개혁은 미완이다. 권력기관 개혁을 이야기할 때마다 검찰이 우선적으로 거론되었지만, 그 실상은 절반에 불과하다. 검찰은 수사와 기소권을 가진 한 축이지만, 그 결과를 판단하는 법원 역시 사법권력의 또 다른 축이다. 검찰만 변화한다고 해서, 사법 구조 전체가 새롭게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둘러싼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파기환송 결정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은 무죄를 기대했지만, 이는 지나치게 나이브했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만약 검찰개혁이 실질적으로 이뤄진다면, 그 다음 개혁의 방향은 어디로 향할까. 법원이다. 검찰 권력이 줄어들면, 사법부 권력에 대한 문제 제기는 자연스러운 수순이 된다. 판결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무관해야 한다는 이상론은 누구나 동의하지만, 현실에서 법원이 권력기관의 일부로 작동해온 역사적 경험은 무시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오랜 기간 동안 정권의 변화에 맞춰 온건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권력의 흐름에 편승해왔다. 이 상황에서 법원이 개혁의 칼날이 자신을 향할 가능성을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법원은 검찰개혁 이후 ‘개혁의 다음 타깃’이 될 것을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움직임을 정치적, 제도적 차원에서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재명 후보 사건은 그런 긴장 관계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번 대법원의 파기환송은 단순한 법리 검토의 결과로만 해석할 수 없다. 사법부가 자신들의 기존 권력을 방어하는 첫 신호로 읽어야 한다. 민주당은 무죄를 기대했지만, 이는 대한민국 사법권력의 구조를 냉정히 바라보지 못한 순진한 희망에 불과했다. 정치는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이다. 이재명 후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권력기관 개혁은 이제 2막을 맞고 있다. 검찰개혁이 미완이라면, 법원개혁이 기다리고 있다. 법원은 이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반발한다. 진정한 사법개혁을 원한다면, 이제는 법원이라는 성역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더 과감한 대안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 판사의 한계와 권력적 이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정한 범위에서는 인공지능(AI) 판사의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소액사건이나 반복적 사건의 경우, AI를 통한 예측적 판결이 실험되고 있다. AI 판사는 인간과 달리 정치적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고, 동일한 법률 기준에 따라 일관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최종 판단은 인간이 해야겠지만, 사법절차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AI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사법의 신뢰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단순한 제도 수정을 넘어, 기술을 활용한 구조적 혁신이 필요하다. 법원개혁은 인간 판사의 권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사법 신뢰를 회복하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제는 법조 엘리트의 폐쇄적 성역을 깨고, AI라는 새로운 도구를 통해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사법체계를 고민해야 할 때다.
    사법절차 정의를 위한 AI
    by 김윤명
    2025.05.06 10:11:36
  •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해법은 제도와 정책을 넘어, 삶의 기억을 품은 공간과 사람의 회복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올해 4월 현재 대한민국 수도권의 인구는 약 2,600만명으로 이는 전국 총인구의 50%를 차지한다. 도시 집중화로 인한 수도권 인구 밀집과 지방 소멸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 만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잃어버린 일자리와 사람들을 다시 지역으로 불러 들이는 ‘리쇼어링(Reshoring)’은 과연 가능할까. 고착된 도시 생활과 일상의 안정성을 포기하고, 낯선 지역으로의 귀환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질문의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답은 ‘사람’과 ‘공간’, 그리고 그곳에서 피어나는 ‘상상력’에 있다. 지난달 26일, 농촌유토피아대학원 학생들과 경주 불국사 인근 진현동을 찾았다. 수학여행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세월의 격랑 속에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폐허로 방치되었다. 지역을 강타한 지진과 코로나19 팬데믹, 인구 감소의 삼중고 속에 문화와 역사마저 침묵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최근 지역 주민들과 문화 재생의 뜻을 함께하는 민간인들의 노력으로 ‘불리단길 형성’이라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변화의 현장을 수업으로 마주했다. 수업이 진행된 ‘주오일장’은 과거의 포장마차 감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실내 포차 공간이다. 평소에는 저녁에만 문을 여는 곳이, 이날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나의 강의장이 되었다. 지역의 유휴 공간이 ‘교육과 사유(思惟)’의 장소로 탈바꿈된 것이다. 이는 농촌유토피아를 실행하는 학생들의 발표와 토론장으로 ‘로마드대학원(nomad+campus)’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상상력을 창조하라’는 주제로 지역에 방치된 폐 공간을 살려 지역 활성화를 이루고 있는 젬스톤 F&B(주) 이창렬 대표의 강의는 현장이 학문을 도전하게 하고, 이론이 실천으로 검증되었다. ‘도시에서 지역으로’라는 말이 물리적 이동이 아닌,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이동임을 실감하게 했다 스페인 자치공동체 마리날레다를 이야기한 ‘우리는 이상한 나라에 산다’에 “빵과 장미”라는 구절이 있다. 인간에게는 생존을 위한 빵뿐 아니라, 존엄과 꿈을 위한 장미도 필요하다는 의미다. ‘주오일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방치된 공간을 공동체의 가치와 지역 청년들의 소통을 담아낸 ‘장미’와 같은 공간이다. 농촌유토피아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수업에 참여한 대학원생 조윤지씨는 “여러 분야에서 이미 각자의 재능으로 전환을 향해 나아가는 분들을 보며 많이 배웠다”며 “비록 지금은 일개 도시민이지만, 도시와 지역의 모습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데 일조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또 대학원생 박수진씨는 “현장을 통해 우리 젊은 청년들의 조용하지만 힘찬 움직임을 보며 많은 것을 깨달았다”며 현장 수업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들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한 의지로 다져졌다. 농촌유토피아대학원이 추구하는 교육은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닌, 현장을 교과서로 삼는 실천적 배움이다. 지역 사람들의 삶과 공간, 그리고 역사와 문화 유지를 통해 상상력을 창조하는 인재를 육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농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실제적 대안인 것이다. 진현동의 불리단길, 주오일장, 그리고 이곳을 찾는 청년들의 발걸음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지역’의 희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공간 활용의 기술을 넘어 가능성에의 도전과 사람을 품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변화다. 지역은 누군가의 삶터이며, 기억의 저장소다. 지역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한 인구 감소의 문제가 아닌 삶의 방식과 역사, 공동체의 가치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농촌유토피아는 농촌을 살리자는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어떤 공동체를 꿈꾸는지를 묻는 질문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유토피아는 멀리 있는 이상향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가능성의 씨앗이 심어진 곳, 그곳이 도시든 농촌이든, 삶이 숨 쉬는 곳이 바로 유토피아다. ‘리쇼어링’의 열쇠는 정책 이전에 사람이고, 공간이며, 상상력이다. 지역이 살아나는 현장에 농촌유토피아는 강한 생명의 꽃을 피울 것이다.
    빵과 장미 그리고 ‘리쇼어링’
    by 조금평
    2025.05.01 13:00:36
  • 작년 국내 과학기술계는 두 가지 큰 사건을 겪었다. 하나는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이 전례 없이 삭감된 것으로, 그간 한번도 경험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라 연구현장에 미치는 충격과 혼란이 사뭇 컸다. 다른 하나는 유명 학술지인 네이처 인덱스(Nature index)가 특집기사를 통해 한국이 높은 연구개발 투자에 비해 연구개발 성과가 놀라울 정도로 낮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성격과 방식으로 발생했지만 그 배경에는 모두 연구개발 성과가 저조하다는 문제 인식과 비판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공공연구개발 투자 대비 성과가 낮다는 비판은 이미 10년 전부터 제기되었다. 더욱이 GDP 대비 정부연구개발투자 비중이 세계 1~2위 수준임에도 연구개발 저생산성 구조는 개선되지 못하고 고착화되는 양상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는 ‘한국형 R&D 패러독스’라는 부정적인 별칭으로 불린다. 그동안 정책적 노력으로 일부 성과 개선이 있었지만 여전히 연구개발투자 증가율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질적인 성과 개선이 더디다. 네이처 인넥스는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공동연구의 확대, 여성 연구인력의 확대, 산학협력 강화 등을 제언했지만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선 ‘별로 와닿지 않는다’라는 반응이다. 이유는 우리나라만이 지닌 독특한 구조적 관성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정부 주도로 경제발전을 추진해 왔고 과학기술은 그 과정에서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역할을 해 왔다. 정부의 높은 관심과 기대는 연구개발 투자 확대로 이어졌지만 그에 비례해 정부가 연구생태계에 미치는 지배적 영향력도 두드러지게 큰 특징이 있다. 그동안 대학과 공공연구기관 등 주요 연구주체들은 연구예산의 대부분을 정부 재원에 의존해 왔다. 그런데 정부는 공공연구기관을 연구개발의 특수성을 고려해 별도로 예외적 관리하기보다는 일반 공공기관과 유사하게 예산투입관리를 강화하는 방식을 적용해 왔다. 이로 인해 연구주체들은 실질적 성과창출보다 정부의 형식화된 요구와 규율에 맞추는 데에 집중하게 되었고, 연구현장은 점점 관료화라는 덫에 빠지게 되었다. 관료화된 연구환경에서 연구자들은 성과가 불확실한 도전과제보다는 예측가능한 안전한 연구를 선택하며, 실질적인 필요성보다는 형식적 요건을 충족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데 집중하게 된다. 경쟁이 곧 효율이라는 인식은 과잉 경쟁과 폐쇄적 문화를 낳아 개방과 협력생태계 형성을 어렵게 한다. 성과관리는 객관성이 강조되어 정량평가에 의존하게 되고 전문성에 기반한 정성 평가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연구성과 창출의 핵심요소인 도전성, 유연성, 창의성을 잃게 해 혁신적인 성과창출과 질적인 제고를 방해한다. 그동안 연구생태계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다. 정부는 과잉경쟁 환경을 완화하기 위해 경쟁 중심의 예산제도인 PBS(Project Based System) 개선을 추진해 왔고 과도한 평가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들도 일부 시행해 왔다. 또한 출연연구기관의 자율적 운영을 제약했던 공운법(공공기관운영에 관한 법률)적용도 어렵게 해제되었다. 문제는 이런 조치들이 일부 파편화된 개선에 머물거나 또 다른 제도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제도 개선의 구조적 한계 즉, 정부의 권한 축소나 관리 노선에서 예외를 요구하는 자율과 책임 운영방식은 수용되기 어려운 경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도래와 기술패권 경쟁 심화로 과학기술의 혁신적인 성과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핵심요소가 되었다. 이제 연구성과는 단순한 과학적 성과를 넘어 국가안보와 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전략적 자산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연구성과를 창출하는 주체들의 현장 생태계가 도전적이고 창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지 못한다면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더라도 혁신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다. 국가간 혁신경쟁의 치열함 속에서 경쟁력의 핵심은 적합한 전략개발 능력과 인재의 탁월성에 있다. 그래서 우수한 전문인력들이 집결해 있는 공공연구기관의 연구환경을 선진화하는 것은 극한의 혁신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다. 핵심기술의 전략 개발에 필요한 통찰력도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접근과 연구를 통해서 길러지고 확보된다. 우리나라는 외형적으로는 경제규모(GDP) 세계 12위, 수출규모 6위라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 규모(GDP 대비 정부연구개발비 비중)도 글로벌 선두권이다. 그런데 국가 혁신 소프트웨어인 운영시스템과 연구생태계의 질적 수준은 지난 20년간 선진화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단순한 투자 확대를 넘어 연구생태계의 선진화 혁신을 통해 한국형 R&D 패러독스 구조를 극복하고 과학기술혁신 강국으로 변화해야 한다.
    ‘한국형 R&D 패러독스’ 어떻게 극복할까
    by 이민형
    2025.04.29 11:03:58
  • 노인복지관의 풍경을 그려본다. 스마트폰을 꺼내 AI 챗봇으로 건강 상담을 받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어르신들과 정작 컴퓨터 전원 버튼조차 낯설어하는 분들이 공존하는 풍경은 역설적이었다. “AI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삶이 훨씬 편리해진 건 확실해요.” 누군가가 말했지만, 그 편리가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는 현실은 분명한 문제다. AI는 이제 ‘선택의 기술’이 아니다. 교육, 의료, 복지, 고용·금융 심사 등 우리 일상의 구석구석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기술 혜택을 누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간극은 내내 커져만 간다. AI 활용 능력이 곧 생존 능력이고, 디지털 리터러시는 존엄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행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이하 AI 발전법)은 산업 진흥과 규제 완화에만 골몰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 법은 1년여간 유예되어 2026년 시행 예정이다. 기업 지원, 연구개발 촉진, 신시장 창출 등 성장 전략은 촘촘해 보이지만, AI로 인한 차별·편향·사생활 침해에 대응할 장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제안한 ‘모두의 AI’를 뒷받침하기 위한 ‘AI 기본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AI 기본권의 내용은 첫째, AI 접근권이다.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AI 서비스·교육·인프라에 균등히 접근할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도서관·복지관 등 공공장소를 ‘AI 교육 거점’으로 삼고, 온라인·오프라인 AI 리터러시 강좌를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 둘째, AI 공정성과 설명권이다. 자동화된 결정의 영향 요인과 알고리즘 핵심 논리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시각자료로 설명받을 권리를 법에 명시해야 한다. 셋째, AI 고른 혜택이다. AI로 인한 과실을 누구나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개인의 데이터가 제공되었다면 그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후보가 추진했던 ‘경기도 데이터 배당’은 이러한 정치철학이 담겨진 것이다. 이처럼 실질적 권리로서 AI 기본권을 법률에 새겨야만, 기술 발전의 과실이 소수에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AI가 그리는 세상은 법과 제도가 일관되게 뒷받침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AI 기본권의 보장 없이 무분별한 산업 성장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AI 기본권은 곧 ‘AI 기본사회’라는 더 큰 비전으로 이어진다. AI 기본사회란 일부 계층이 아닌 모두가 AI 혜택을 체감하는 포용적 사회를 뜻한다. 교육 격차 해소를 위해 초·중·고 교육 과정에 AI 리터러시 과목을 도입하고, 지방·도서벽지에도 동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디지털 복지 강화를 위해 취약 계층 대상 AI 건강 모니터링·맞춤형 복지 서비스를 구축하되, 개인정보 보호 장치를 철저히 마련한다. 공공서비스 혁신 차원에서 AI 도입 시 시범사업·사전영향평가·국민 의견 수렴 절차를 의무화한다. 이를 현실로 만들려면, 법제와 거버넌스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 우선, 현행 AI 발전법은 문제의 정의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AI라는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산업성장을 위한 가치도, 국민의 AI 기본권에 대한 가치도 담겨있지 않다. AI와 입법을 위한 문제정의가 처음부터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지금 하위법령 작업중이나 이 또한 이해관계에 휩쓸리고 있다. 입법과정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방안을 제시한 사람은 시행령 작업에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AI 기본법과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제대로 입법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행 AI 발전법은 ‘AI 산업법’으로 개정하여 기술개발과 혁신을 전담토록 한다. 기업 지원·데이터 시장 활성화·규제 완화는 이 법에서 다루는 것이 맞다. 산업진흥과는 별개로, AI 기본권과 AI 기본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내용은 ‘AI 기본법’을 제정하여 구체화해야 한다. 법이 바뀌면, 제도를 운영할 거버넌스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AI 기본권을 구체화하고 AI 거버넌스로서 현재 산업 중심으로 짜인 ‘국가AI위원회’를 ‘AI기본사회위원회’로 확장 개편하는 것이다. 위원회는 산업영역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영역까지 포괄하고, 정책의 심의·조정 권한 및 예산권까지 갖는 위원회로 성격을 변모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등 관련 위원회의 역할과 거버넌스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기술 발전과 함께, 그 기술을 공정하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새 정부는 AI 기본권과 AI 진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AI는 생활, 교육, 산업, 문화, 상거래 등 모든 영역에서 기본 인프라가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별로 AI를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통령 소속으로 ‘AI 국가전략위원회’를 두고 글로벌 ‘AI TOP 3’를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 수장은 행정가나 경영자 출신이 아닌 AI 기술 전문가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AI 기본법은 특정 부처의 특정 과를 위한 ‘과법’이 아닌 대한국인의 ‘모두의 법’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AI는 기업이나 국민 모두의 AI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AI 기본권 없이 AI 성장은 없다
    by 김윤명
    2025.04.28 17:17:16
  • 433년 전 4월 13일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서막이 오른 날이다. 1592년 이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봉장으로 하는 왜군 17만여 명은 조선 침략 길에 올랐다. 규슈 남단 가라쓰(唐津)에서 출항한 왜군은 12시간 만에 부산진항에 상륙했다. 왜군은 다시 육로를 따라 한양까지 무인지경으로 내달았다. 무능한 선조는 2주 만에 안방을 내준 채 의주로 도주했고, 분노한 백성들은 도성을 휘저으며 곳곳에 불을 놓았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가 불탔고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수많은 문화유산은 잿더미가 됐다.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에 걸쳐 왜군이 출진했던 가라쓰에 다녀왔다. 임진왜란 직전 축조한 이곳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은 왜군이 출진에 앞서 호흡을 가다듬었던 곳이다. 지금은 텅 빈 성터만 있다.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였던 나고야 성터를 돌아보는 내내 눈부신 벚꽃 아래서 착잡했다. 후쿠오카를 빠져나와 규슈 북서부에 위치한 사가(佐賀) 현 가라쓰로 가는 길은 한적하다. 교통체증으로 번잡한 후쿠오카와 달리 해안도로는 여유롭다. 50km, 1시간여를 달려 가라쓰에 접어들면 무지개 솔밭으로 불리는 국가명승 ‘니지노 마쓰바라(虹の松原)’가 눈에 들어온다. 가라쓰 성에 오르자 지나온 솔밭과 바다를 낀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과거 가라쓰는 대륙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살려 조선, 중국과 교역을 통해 흥성했다. 지금은 여느 지방 소도시와 다를 바 없지만 433년 전 가라쓰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무라이들로 북적였다. 나고야 성 주변으로 130여 개에 달하는 진영이 섰다니 엄청난 전쟁특수를 짐작할 수 있다. 나고야 성터와 나고야 성 박물관은 불행한 과거를 돌아보는 한편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히젠’은 규슈 서부를 일컫는 옛 행정 명칭이다. 우리나라 호남, 영남, 호서와 같다. 나고야(名護屋) 성은 혼슈 중부에 위치한 나고야(名古屋) 성과는 발음만 같을 뿐 다른 성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는 조선 침략을 앞두고 이곳에 축성을 지시했다. 전국 통일 후 도요토미는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는데, 조선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도요토미가 궁벽한 가라쓰에 축성을 지시한 건, 조선과 최단 거리(140km)에다 배를 숨기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쾌속선을 이용하면 부산에서 가라쓰까지 2~3시간이면 충분하다. 왜군은 이곳에 진을 치고 조선 침략을 논했다. 당파로 갈린 조선 정부가 전쟁 가능성을 놓고 대립할 때 도요토미는 대륙 침략에 필요한 전쟁 수행을 마쳤던 것이다. 도요토미는 명나라 정벌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조선침략도 포함돼 있었다. 사무라이의 칼과 기치로 숲을 이뤘을 나고야 성은 이제 쓸쓸한 폐허다. 가라쓰에는 당시 10만여 명이 몰려 오사카에 이은 제2 도시였다. 50만 평, 둘레 6km에 달하는 방대한 성터를 돌다보면 세월이 덧없다는 걸 실감한다. 떠들썩한 함성은 간데없고 거친 바람만 웅성댄다. 왜군이 빠르게 한양을 접수하자 조선정부는 갈팡질팡했다. 시기와 질투에 눈먼 선조는 판단력마저 상실했다. 의병과 이순신에 힘입어 가까스로 나라를 보존했음에도 그는 이순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역사는 선조를 어리석고 비열한 군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무능한 왕을 꼽을 때마다 선조는 인조, 고종과 함께 거론된다. 당파 싸움에 매몰된 조선은 언제 무너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일본 정황을 살피고 돌아온 동인 김성일과 서인 황윤길은 전혀 다른 정세 판단을 내놓았다.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이 침입할 것”이라며 경계를 촉구한 반면 김성일은 “사려 깊지 못한 허풍”으로 일축했다. 도요토미에 대한 인물평 역시 “눈빛이 반짝반짝하며 담과 지략이 있다”와 “쥐새끼와 같아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된다”며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훗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당파싸움의 폐해를 경계했지만 진영싸움은 오늘도 여전하다. 나와 내 편만 옳다는 확증편향으로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막대한 사회갈등 비용은 성장 동력을 갉아먹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대주의는 심화됐다.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의해 조선은 다시 태어났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앞세우며 속국을 자처했다. 자신들의 무능으로 국토가 유린됐음에도 통렬한 반성 대신 중국을 떠받드는 것으로 합리화했다. 무능한 나라에 무능한 기득권층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400여 년 전 임진왜란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주춧돌과 성곽만 남은 나고야 성터에서 자문했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에 자신 없다. 12.3 계엄 이후 망가진 나라를 바로 세우고 국민을 중심에 두는 정치가 절실하다. 다시 횃불을 든 분노한 시민들이 아른거린다.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 ‘나고야 성’
    by 임병식
    2025.04.14 13:33:44
  • 최근 글로벌 혁신시장은 기술패권화 흐름과 함께 국가 간 혁신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글로벌 혁신 강자인 미국은 미래기술을 앞세워 질주하고 중국이 맹렬히 추격하는 G2 중심의 혁신경쟁체제가 펼쳐지는 중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기술력을 앞세워 신산업과 시장을 선점하자 이들과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유럽 및 아시아 선진국들은 파괴적 혁신을 창출하는 첨단기술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그 돌파구로 각광받는 대안이 미국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Defenc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모델이다. DARPA는 구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 충격을 계기로 1958년에 설립된 미국 국방부(DOD) 산하의 연구개발 기획평가관리기관이다. 이 기관은 미국의 기술적, 전략적 우위 선점을 목표로 도전적인 과제를 발굴하고 해결해 뛰어난 혁신성과를 창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군의 레이다망을 피하기 위한 스텔스 전투기를 비롯해 무인항공기, 군사용 로봇과 같은 국방전략기술의 확보뿐만 아니라 기술이전을 통해 인터넷, GPS, 인공지능(Siri), 드론, 자율주행, 의료용 백신 등과 같은 파괴적 혁신기술들을 탄생시켰다. 그로 인해 혁신강국인 미국에서 DARPA는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한 영국, 독일, 일본 등 혁신경쟁국들은 미중과 벌어지는 혁신격차를 줄이기 위해 DARPA를 모방한 혁신적인 연구개발제도를 경쟁적으로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국가마다 구체적인 방식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들 모두 도전적인 연구개발을 통한 첨단기술 확보와 획기적인 혁신성과 창출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대부분 기대했던 혁신성과 창출이 잘 보이지 않는다. 원인은 도전적인 연구개발에 집중한 기술 확보만으로는 파괴적 혁신 창출에 요구되는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DARPA 제도를 도입한 국가들은 임무 달성을 위한 도전적인 연구개발 추진이나 연구개발 수행에 전권을 가진 PM(Project Manager) 제도와 같은 연구관리 방식에 주목한다. 정작 중요한 도전 임무의 설정 조건은 간과된다. DARPA는 일반적인 공공수요가 아닌 군사전략적 우위 확보를 위해 현장에서 확보되어야 하는 명확한 필요수요를 도전 임무로 설정한다. 그리고 이를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로 해결한다. 국방에 필요한 사항이 민간에도 통용되는 것이면 개발된 기술은 민간에 이전되고 거대한 시장수요로 이어진다. 일례로 핵 공격에 대비한 안전한 정보관리를 위해 서버를 여러 곳에 분산 배치해야 하는데 이를 연결하기 위해 개발된 알파넷(ARPAnet)은 민간의 연결 네트워크 수요와 만나면서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인터넷으로 발전되었다. DARPA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분야와 달리 거대한 조달시장을 통해 혁신적인 제품을 수용하는 것이다. 안정적인 혁신시장은 기업에게 기술혁신 참여를 유인하고 조달가능한 수준으로 신기술의 완결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또한 개방적인 연구네트워크는 민간으로 첨단기술의 이전을 촉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이러한 안정적인 혁신시장의 존재와 개방적인 협력 체계, 시장의 혁신 수용이 DARPA의 차별적인 혁신성과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처럼 DARPA는 일반적인 공공연구개발과 유사한 과정을 거치지만 그 내용은 완전 차별적이다. 특히 도전의 필요성과 내용이 명확하고 쉽게 제시되고, 기술개발 및 개발 기술의 사업화 과정은 모두 혁신을 향해 유연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성과 창출 여건에도 최근의 혁신환경 변화에 대응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사업화 성과 창출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 첨단기술의 상업화 중요성은 전 구글 최고경영자(CEO)인 에릭 슈미트가 설립한 미국의 민간 싱크탱크인 SCSP(Special Competitive Studies Project)의 미중 간 주요 전략기술분야 경쟁력 분석 보고서(Welcome to the Arena, 2025)에서도 제기된다. 미국이 주요 기술분야에서 앞서가고 있지만 중국은 제조업 역량을 기반으로 상업화에 집중하는 전략을 통해 격차를 줄이거나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첨단 기술혁신 경쟁에서 기술개발 전략 못지않게 상업화와 시장전략이 중요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술패권화에 따른 글로벌 혁신경쟁체제에서 혁신 강국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략적 위치를 점검하고 재설정해야 한다. 특히 도전적인 연구개발체계를 넘어 시장의 혁신전략 강화를 포함하는 국가혁신체계의 재구성을 추진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 여건에 맞는 독창적인 혁신전략으로 우리만의 혁신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G2 잡으려면 국가혁신체계 다시 짜야
    by 이민형
    2025.04.03 11:13:41
  • 변화의 시기, 미래에 대한 예측에 관심이 더욱 커진 시기에 기업들은 순도가 높은 정보에 대한 욕구는 높으나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보의 옥석을 가리는데 많은 애를 먹는다. 요즘은 누구나 카톡으로 지라시를 받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증권가를 중심으로 미확인된 정보를 지라시라는 형태로 소수에게 돌렸는데 유튜브 등이 활성화되면서 누구나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생성하고 유통시키면서 우리는 ‘지라시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에는 지라시를 통해 어느 정도 신뢰성 있는 정보를 얻기도 했는데 개인미디어 시대가 되면서 유튜브 등을 통해 접하는 많은 정보가 진실과는 괴리된 허무맹랑한 것들이 많다. 사업 전략을 세우고 규제에 대응하며 사회와 소통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자원인 정보를 보다 정제된 형태로 받고자 하는 기업들의 요구는 높지만 현실은 정제된 형태로 제공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정책 입안자의 발언, 입법 예고안, 이해관계자의 주장, 언론 보도, 여론조사, 소셜미디어 담론 등 수 많은 형태의 정보들이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신호’의 역할을 하기 보다는 ‘소음’에 가깝다. 대니얼 카너먼은 ‘노이즈: 생각의 잡음’에서 인간의 판단이 왜 잘못되는지를 설명하면서 편향(bias)만큼이나 판단의 일관성 없는 변동성, 즉 노이즈(noise)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정부, 의회, 시민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기업이 정책 환경을 해석하고 전략적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양보다 정보의 순도를 먼저 따져야 한다. ‘정보를 얼마나 모았는가’보다 ‘무엇을 걸러냈는가’가 사업의 명운을 좌우하는 시대다. 퍼블릭 어페어즈가 필요한 이유이다. 기업이 정책 대응을 둘러싼 의사 결정을 할 때, 내부 논의 과정에서 얼마나 정밀한 정보가 쓰였는지, 이해관계자들과 대화에서 얼마나 전략적으로 정보를 배열했는지가 중요하다. 규제 환경을 바라보는 분석의 정교함,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의 균형감, 그리고 침묵할 때와 발언할 때를 구분할 수 있는 전략적 분별력이 퍼블릭 어페어즈의 품질을 결정짓는다. 그 점에서 독일 화학기업 바스프는 탁월한 사례다. 유럽연합이 도입한 화학물질 규제 REACH는 산업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규제였지만, 많은 기업들이 불확실성과 복잡성에 당황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무엇보다 기다려보면 산업의 입장을 반영해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보고서들을 보면 환경에 대한 EU의 의지를 과소평가했다. 반면 바스프는 초기 단계부터 정책 흐름을 정보로 분석했다. 입법 동향, 추진 세력의 의도, 규제 대상의 세부 범위를 면밀히 해석해 자사 제품의 리스크 수준을 계량화했고, 내부적으로는 전사적인 이행 로드맵을 설계했다. 더 나아가 고객사, 공급망과의 정보 연계를 강화해 ‘규제 대응 선도 기업’으로 신뢰를 확보했고, 결국 경쟁사들보다 앞서 REACH에 부합하는 신제품을 출시했다. 이는 단지 규제를 이행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책을 전략화하고 경쟁 우위로 전환한 전형적인 사례다. 반면 규제 문서의 복잡성에 휩싸여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한 기업들은 시장 내 입지를 잃었고, 일부는 생산 중단까지 경험해야 했다. 미국의 존슨앤존슨(J&J)의 오피오이드 남용문제에 대한 전향적이고 진취적 결정은 제대로 된 퍼브릭 어페어즈 전략의 구사로 기업의 위기가 오히려 도약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마약성 진통제였던 오피오이드는 뛰어난 효과에도 불구하고 중독성 때문에 오랜 기간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미국 전역에서 오피오이드 남용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제약기업들은 전방위적인 소송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제약회사였던 J&J는 다른 제약사들과 달리 방어적 입장을 취하는 대신 제품 유통 구조, 처방 트렌드, 시장 점유율을 기반으로 자사의 책임 범위를 정확히 분석했고, 이를 바탕으로 뉴욕 주정부와 가장 먼저 합의했다. 제품 판매 중단과 2억3000만 달러의 배상금은 결코 가벼운 결정이 아니었지만, 이 선제적 조치는 존슨앤드존슨을 문제 해결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이 합의에 대해 연방의원들과 전문가를 포함한 사회지도층이 J&J와 뉴욕주의 합의에 지지성명을 내는 등 그 결정을 칭찬했다. J&J는 오랜 기간 유지해 온 명성을 지킬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바스프, J&J는 ‘정보’를 그저 수집하거나 반사적으로 대응한 것이 아니라, 명확히 판단하고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함을 잘 보여준다. 퍼블릭 어페어즈의 본질은 정책 대응이 아니라 정보를 맥락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활용하는 것에 있다. 정책 변화의 가능성을 정보로 조기에 포착하고, 이해관계자 간의 정합성을 설계하며, 리스크를 전략으로 치환하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기업에게 요구되는 진짜 정보력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트럼프의 관세정책도 마찬가지다. ‘미국도 힘들텐데 설마’하는 기대와 정확한 정보의 부족으로 많은 기업들이 플레이어(player)보다는 관중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실 이번에 발표된 USTR의 ‘2025 나라별 무역장벽보고서’의 내용은 매년 발표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트럼프 행정부와 만나면서 그 중요도가 높아졌다. 맥락이 변하면 정보의 중요도도 변한다. 때문에 사실만을 파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까지 포괄해서 봐야 소음이 정보가 된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일수록, 진짜 질문은 단순해진다. 지금 이 정보는 신호인가, 소음인가.
    지라시 그리고 ‘정보 혹은 소음’
    by 이보형
    2025.04.02 14:14:50
  • 디지털트윈(Digital Twin)은 현실 세계의 객체, 시스템, 프로세스를 가상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시뮬레이션하는 기술입니다. 이를 통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트윈의 개념은 단순한 '디지털'과 '트윈(쌍둥이)'이라는 직관적인 단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오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디지털트윈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고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디지털트윈은 단순한 정보 제공 시스템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IT 기반의 정보 시스템은 데이터를 가공하고 전달하는 역할에 그치지만, 디지털트윈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실행 가능한 해법을 도출할 수 있는 ‘지혜의 도구’입니다. 지혜는 단순한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능력입니다. 디지털트윈은 다양한 시뮬레이션과 분석을 통해 단순한 데이터 이상을 제공하며, 궁극적으로 지혜를 구하는 도구로 작용합니다. 디지털트윈 기술은 AI 개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디지털트윈 기반 가상실험을 통해 AI를 만드는 데 필요한 데이터를 무한정 생성할 수 있습니다. 현실 세계를 가상으로 재현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함으로써, AI 모델 학습에 필요한 방대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데이터는 Agent AI와 Physical AI를 실현할 수 있는 핵심 기술입니다. Agent AI와 Physical AI는 인간의 개입 없이 실제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자율적으로 일을 수행하는 AI입니다. 디지털트윈은 현실 세계를 정밀하게 모델링하고 시뮬레이션하며, 그 데이터로부터 AI가 자율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게 해줍니다. 디지털트윈이 제공하는 정확한 현실 재현은 AI가 실시간으로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자율적으로 동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합니다. 디지털트윈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PoC(Proof of Concept, 개념 증명)가 필요합니다. PoC는 디지털트윈 기술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데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실험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 기술적 실현 가능성을 입증하고, 고객의 요구에 맞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PoC는 디지털트윈의 실제 적용 가능성을 확인하고, 기술 개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디지털트윈 기반의 PoC는 AI 모델을 위한 데이터를 생성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통해 Agent AI와 Physical AI의 구현 가능성을 테스트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고객의 요구사항을 면밀히 분석하고, 실제 데이터를 활용하여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PoC의 목표는 단순히 기술을 시연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기술이 실제 문제 해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디지털트윈은 AI 혁신의 핵심 기술로, 데이터를 무한정 생성하고 이를 통해 Agent AI와 Physical AI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인 PoC는 디지털트윈이 실제 환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검증하고, 기술적 실현 가능성을 입증하는 과정입니다. 디지털트윈을 통해 AI 혁신을 가속화하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트윈은 ‘지혜의 도구’
    by 양영진
    2025.03.31 14:51:41
  • 우리도 그렇지만 일본 또한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이 있었다. 메이지유신을 즈음해 궁벽한 시골에서는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쏟아졌다.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기 전까지는 시골 출신이라도 신분상승을 꿈 꿀 수 있었다. 이제 ‘개천 용’은 옛말이 됐다. 일본에서 ‘개천 용’이 많이 난 지역은 하나같이 외진 시골이다. 가고시마 가지야초(加治屋町)와 야마구치 하기(萩)가 대표적인데, 모두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깡촌이다. 이곳에서 메이지유신을 전후해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무더기로 나왔는데, 총리대신은 물론이고 해군대장과 육군대장, 교육‧정치 사상가가 줄을 이었다. 남쪽 끝 가지야초에서는 ‘유신 3걸’ 중 오쿠보 도시미치(총리)와 사이고 다카모리(참모 총장)를 비롯해 총리 2명, 육군대장 3명, 해군 대장 6명이 나왔다. 가지야초 ‘유신의 길’에는 이곳 출신 인물 18명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는데 면면이 빼어나다. 모두 반경 500m에서 나고 자랐다. 하기(萩) 또한 마찬가지다.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요시다 쇼인을 정점으로 이토 히로부미(총리)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육군 대장), 기도 다카요시(유신 3걸), 다카스키 신사쿠(회천 대업 주역), 가쓰라 다로(육군 대신과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총리와 조선 총독)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인구 4만 명에 불과한 곳에서 총리 5명과 대신, 육군대장이 배출됐으니 그야말로 ‘개천 용’의 성지다. 인물 경쟁에서 오이타(大分)현 기쓰키(杵築) 시를 빼놓을 수 없다. 구니사키(國東) 반도에 속한 기쓰키 또한 규슈 북동쪽에 위치한 한적한 바닷가다. 그런데도 일본 근대사를 추동한 숱한 ‘개천 용’이 나왔다. 지난주 구니사키 반도를 일주하면서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은 쇠락했지만 한때 일본 근대사를 쥐락펴락한 인물들이 쏟아졌다는 게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일본인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 대부분은 우리와 악연이라서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일관계가 제대로 보인다. 김종필 총리는 “한·일 역사를 넘나들면 영웅이 역도(逆徒)가 되고 역도가 영웅이 된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앞서 소개한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카타 아리토모, 데라우치 마사다케, 가쓰라 다로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조선 침략과 직접 연관돼 있다. 오이타가 배출한 최고 스타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다. 게이오(慶應)대학을 설립하고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쿠자와는 뛰어난 계몽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당대 일본 지식인과 근대화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후쿠자와는 700여 년 동안 지속된 막부 정치를 끝내고 서양문물을 수용하자고 역설한 선각자였다. 김옥균을 비롯해 유길준,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윤치호 등 조선의 개화파 사상가들도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후쿠자와는 갑신정변에도 개입했다. 요시다 쇼인과 함께 일본 근대화를 언급할 때마다 나란히 거론되는 후쿠자와는 얼마 전까지 일본 최고액 1만 엔 권을 장식하기도 했다. 정한론과 주변 국가 침략을 부추긴 죄과가 있지만 그에 대한 오이타 시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오이타가 배출한 또 다른 인물은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1887~1957)다. 그는 태평양 전쟁 당시 외무대신을 지냈고 천황을 대신해 항복문서에 날인했다. 10여 년 전 처음 기쓰키 성에서 시게미쓰와 조우했는데 예상치 못했다. 인근 무사마을을 돈 뒤 오른 기쓰키 성에서 전시물 가운데 시게미쓰 유품이 눈에 뜨였다. 윤봉길 의사 사진과 그가 입었다는 혈흔이 묻은 해진 옷, 그리고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사진 등이다. 윤 의사가 왜 이곳에 있을까하는 의문은 사진 설명을 읽고 풀렸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기념식장에서 윤 의사가 던진 폭탄에 오른 발을 잃었다. 너덜너덜한 옷은 그때 입었던 것이다. 그는 1945년 8월 15일에는 미주리 전함에서 일본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날인했다. 유튜브 영상에서 나레이터는 ‘일본 대표단을 이끄는 시게미츠 외무상은 수년 전 상하이에서 한국인 애국자에 의해 부상을 입었으며, 한쪽 다리는 의족이다.(They are headed by Agent Mamoru Shigemitsu, Foreign Minister of the Japanese surrender Cabinet, who was wounded by a Korean patriot in Shanghai years ago and walks on an artificial leg.)’고 소개한다. 기쓰키 시가 시게미쓰 유품을 전시한 의도는 자랑스러운 출향 인사임을 알리기 위해서였겠지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불편한 역사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쓰키 성에서 ‘상하이 의거’ 관련 유품이나 항복문서 서명 사진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기쓰키를 찾는 한국인들 감정을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인지 알 수 없다. 지난주 방문에서도 시게미쓰가 쓴 휘호와 저서, 가족사진으로 새롭게 꾸민 전시물만 확인했다. 이외 기쓰키 출신으로 조선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南次郎, 1874~1955)와 연합함대 사령관을 역임한 해군 대장 도요다 소에무(豊田副武, 1885~ 1957), 호세이(法政)대학 설립자 가네마루 데쓰(金丸鐵)와 이토 오사무(伊藤修), 그리고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1924~) 총리가 있다. 소도시치고는 대단한 인맥이다. 어쩌면 기쓰키 시민들은 이들을 통해 더는 ‘개천 용’을 기대할 수 없는 상실감을 달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니사키 반도에서 만난  ‘개천 용’
    by 임병식
    2025.03.31 10:54:57
  • 우리는 지금 초연결, 초지능, 초실감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술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사회의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심화시키며, 예측의 위험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조차 부족한 상황입니다. 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이 특징인 VUCA 시대에는 기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선진국의 모델을 따라가고 최적화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롤모델조차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어떻게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 빠른 추격 전략, 지속 가능할까=한국은 과거 선진국을 빠르게 따라잡으며 경제적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검증된 기술을 빠르게 도입하고 효율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기술과 시장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어 단순한 모방과 최적화만으로는 지속적인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속도가 경쟁력이었지만, 이제는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기존 데이터만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으며,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의적 접근이 필수적입니다. 무엇보다, 빠른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켜야 합니다. ◇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 사랑과 지혜=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인간에 대한 사랑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변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단순한 의지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며, 갈등이 심화되면서 대립과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마치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구하는 도구로서 디지털트윈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 지혜를 구하는 도구, 디지털트윈=지혜는 단순한 정보나 데이터가 아닙니다. 데이터가 많다고 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잘못된 정보나 편향된 데이터는 판단을 흐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 환경에서 실험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상에서 검증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디지털트윈은 현실 세계를 가상 공간에 재현하고,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최적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기술입니다. 실제 환경에서 실험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상에서 검증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실험해 최선의 선택을 찾아내며, 불확실성을 줄이고,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습니다. 즉, 디지털트윈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불확실한 세상에서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기 위한 필수 도구입니다. ◇ 디지털트윈이 필요한 이유=VUCA 시대에서는 기존 방식으로 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제는 데이터를 넘어, 실제 문제 해결을 위한 가상실험이 필수적입니다. 디지털트윈을 활용하면, 국방에서는 미래 전장을 시뮬레이션하여 최적의 전략을 도출할 수 있고, 스마트시티에서는 도시의 복잡한 교통 문제를 예측하고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 제조업에서는 공장 운영을 최적화하고 유지보수를 예측할 수 있고, 에너지 분야에서는 효율적인 운영 방안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디지털트윈은 단순한 예측 도구가 아니라, Politics(정치), Military(군사), Economy(경제), Society(사회), Information(정보), Infrastructure(기반시설)이 엮여 있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지혜의 도구입니다. ◇탁 트인 세상을 향해=VUCA 시대, 우리는 복잡한 문제 속에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디지털트윈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불확실한 세상에서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기 위한 필수 도구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문제를 해결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을 통해 디지털트윈이 어떻게 세상과 사람을 이롭게 하는지, 복잡한 문제를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 탐구해 나가겠습니다. 춘래불사춘의 시기, 디지털트윈으로 탁 트인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갑시다. ▲탁 트윈(Tag Twin) 컬럼을 연재하는 이유 =이 칼럼을 통해, 디지털트윈이 어떻게 세상을 더 이롭게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방향을 잃고, 대립과 분열로 인한 갈등 속에서 문제 해결의 길을 찾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를 갖게 되었습니다. 디지털트윈은 단순한 시뮬레이션 도구가 아니라,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지혜의 도구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문제를 해결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특히, 탁 트윈(Tag Twin)이라는 칼럼을 연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디지털트윈 기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탁 트윈’의 ‘탁(Tag)’은 KAIST 김탁곤 교수님의 40여 년간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탁' 교수님은 디지털트윈을 활용하여 세상과 사람을 이롭게 하고, 복잡한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방법론을 정립하고 실현해 오셨습니다. 이 칼럼은 이러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탁 트인'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지혜로운 도구를 활용하여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문제를 해결하며, 모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탁 트인 세상을 위해
    by 양영진
    2025.03.27 17:19:01
  • 저작권법은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공정한 이용을 보장함으로써, 사회적 이익과 문화·산업 발전의 균형을 도모한다. 그러나 AI 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의 데이터 활용이 필수적이 되면서, 저작권법과 데이터 윤리 사이의 충돌이 심화하고 있다. 기계학습을 위한 데이터의 확보를 위해 텍스트·데이터 마이닝(TDM)을 입법화하거나 또는 실제 소송에 적용되고 있다. AI 모델 구축 과정에서 방대한 데이터를 이용하면서 저작권법이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학습 데이터에 적용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요구된다. 데이터 윤리는 AI 모델의 학습과 결과물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만, 윤리적 고려가 법적 규제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TDM 규정을 두고 있는 나라는 공정이용 규정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입법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독일 지방법원에서는 저작권법에 근거하여 학습데이터의 TDM에 대한 무죄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인공지능 학습을 위한 데이터 수집 과정에서 저작권법과 데이터 윤리는 밀접하게 연결된다. 빅데이터 처리와 인공지능 학습 과정에서는 데이터의 복제, 분석 등이 필수적으로 발생하며, 이를 무분별하게 활용할 경우 저작권법 위반 행위가 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 저작권법은 TDM 규정을 두고 있지 않고, 공정이용 규정만 두고 있다. 특히, TDM의 특성상 불특정하게 수집된 데이터 안에 저작물이나 개인정보가 포함될 수 있어 관련 법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순한 법적 문제를 넘어 데이터 수집의 윤리성, 프라이버시 보호, 그리고 창작자의 권리 존중과 같은 윤리적 문제와도 연결된다. 데이터 수집에서 접근에 제한된 표지(robots.txt)의 강제성이 없는 경우, 이에 대한 접근여부는 저작권법이 아닌 윤리적인 고려를 통해서 판단하여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러한 행위유형을 공정이용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이다. 공정이용은 법적인 근거를 갖지만, 일반조항이 갖는 성격상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대략적인 방향을 제시하지만, 법원은 이를 바탕으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해석론의 확장이지, 권리창설로 보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 법원이 권리를 창설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AI 윤리나 데이터 윤리가 저작권법에 지나치게 개입할 필요는 없겠지만, 윤리적 고민이 법의 해석과 향후 인간이 아닌 저작자의 등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높다. 다만, 지나친 윤리의 법화(法化)는 지양되어야 한다. 기술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법의 규제적 속성보다는 윤리적 논의가 합리적이다. 다만, 그 논의 방향은 윤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함께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한다. 데이터 윤리와 저작권법은 모두 기술혁신과 개인의 권리 보호 사이의 균형을 추구한다. 생성형 AI의 학습을 위한 데이터셋이 인터넷에 공개된 정보를 크롤링해 제작되는 과정에서, 이용 허락 조건에 맞지 않게 이용할 경우 저작권 침해나 데이터 윤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AI 기술 발전이라는 사회적 가치와 창작자의 권리 보호라는 가치 사이의 윤리적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AI와 관련하여 저작권법과 데이터 윤리는 전통적인 저작권법의 해석과 적용이라는 법적 가치만이 아닌 기술적으로 유연하게 상황을 바라보아야 한다. AI는 사회적 합의를 포함한 윤리적인 고려까지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저작권법과 윤리의 관계는 법적인 가치판단만이 아닌 사회적, 공익적 여부라는 비교형량을 통해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AI 모델의 고도화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데이터가 공급되어야 한다. 수집된 데이터의 오남용으로 인한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차별, 불평등 심화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이슈가 제기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터의 중요성과 이에 따른 윤리적, 법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데이터 윤리가 확립될 경우, AI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 이는 데이터의 수집 및 이용 과정에서 관련 법을 준수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법적 규정을 준수하는 데이터 활용 방식은 AI 개발 기업과 서비스 제공자가 장기적으로 법적 분쟁을 예방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이용자의 신뢰를 얻는 기반이 된다. 데이터의 윤리적 이용은 데이터의 질적 가치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데이터 처리 과정에서 적절한 정제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윤리적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특히, 데이터 편향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AI 모델이 편향된 데이터를 학습하면 알고리즘이 편향된 결과를 내놓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 편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가치중립적인 키워드와 변수를 설정하여 보다 공정한 데이터 선별과 이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접근이 있다. 또한, AI 모델이 학습하는 데이터의 다양성을 확보하여 편향성을 줄이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별, 연령, 국적 등 다양한 인구통계학적 특성을 반영한 데이터 세트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AI 모델이 설명 가능성(explainability)을 갖추도록 연구하는 것도 데이터 윤리 실현의 중요한 방향이 될 수 있다. 몇 년전부터 ‘머신 언러닝(machine unlearning)’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언러닝은 AI 모델에 학습된 데이터를 제거하는 것이다. 실상 문제되는 생성물이 반복되지 않도록 관련 데이터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필터링은 원천적인 삭제가 아니기 때문에 우회하는 탈옥(jail break)을 통해 또다시 문제되는 생성물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 윤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법적 규제와 함께 정책적 대응도 중요하다. AI 개발 기업이 데이터 윤리를 준수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자율규제 모델을 도입할 수도 있으며, 정부 차원의 데이터 윤리 가이드라인을 강화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데이터 편향성이 사회적 차별을 고착화하거나 그러한 가능성이 높은 경우, 해당 알고리즘을 개발·운영하는 기업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필요할 것이다. 반면, 의도적이지 않은 데이터 편향에 대해서는 기술적·정책적 유연성을 유지하면서 개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AI 모델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데이터를 학습하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정 집단이나 특정 속성만을 반영한 데이터로 AI를 훈련할 경우, 모델이 갖는 편향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양한 관점과 경험을 반영하는 데이터 세트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며, 데이터 접근성과 품질을 동시에 고려한 법적·윤리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AI 기술 발전과 저작권법의 조화를 이루고, 기술혁신과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과 데이터 윤리
    by 김윤명
    2025.03.26 09:59:33
  • ‘3無 3有’대학으로 강의실과 교수와 등록금이 없고, 창조적 상상력과 통섭 융합력, 그리고 지역 리더십을 공부하는 대학이 우리나라에 있다. 3월 새 학기 국내의 모든 학교는 입학식 후 수업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이 대학은 3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1시, 경남 함양 오도재 정상에서 특별한 입학식을 진행한다. 1, 2, 3학년 전 학생이 1년 동안 공부할 학습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들공(공부에 들다)’을 선포하는 것이다. 농촌 혁신과 그린 르네상스(Green Renaissance)를 선도할 핵심 역량을 키운다는 사명으로 2020년 설립되어 2021년 3월 첫 입학생을 맞은 농촌유토피아 대학원, 그동안 1회 졸업생 배출과 함께 올해 5년째 입학생을 맞이하고 있다. 지속적인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농촌에 우리는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농촌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정책과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사업 결과 과시를 위한 재정 지원이나 단발성 일자리 창출만으로는 농촌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다. 핵심은 ‘사람’이다. 농촌을 유토피아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농촌을 단순한 거주지가 아닌 삶의 터전이자 창조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인재들이 필요하다. 현재의 대학 시스템은 도시 중심적이며, 특정 직업군 취업을 목표로 한 교육이 주를 이룬다. 농촌에서 창조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기존 대학은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농촌유토피아대학원은 기존 대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창조적 상상력과 지역 리더십을 바탕으로 농촌을 혁신적으로 디자인할 인재를 양성한다. 대학은 농촌의 마을과 현장을 학습 공간으로 활용함으로 전국 각지 모든 현장이 캠퍼스이며 강의실이다. 산림청장을 지낸 건국대 산림조경학과 김재현 교수, 전 농업진흥청장을 지낸 민승규 세종대 석좌교수,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장 등 각계 다양한 분야 최고 전문가 60여명의 멘토 교수도 있다. 농촌과 지역을 살리기 위한 종합적인 문제 해결 역량을 갖춘 인재를 키우기 위해 농업, 환경, 생태, 경제, 문화, 예술, 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들이 지식과 경험을 나누어 준다.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관계로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며 인재는 모셔야 한다는 취지에서 등록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장학습비를 지급한다. 이는 ‘미네르바 스쿨’(Minerva School), ‘에콜42’(École 42), ‘몬드라곤 팀 아카데미’(Mondragón Team Academy)등 세계적인 대안대학의 사례를 참고해, 이론과 실천을 결합한 혁신적인 학습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다. 농촌을 무대로 창조적 상상력을 실행하고 도전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배움터가 되고자 하는 농촌유토피아대학원은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닌, 농촌 혁신을 위한 플랫폼이 될 것이다.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농촌에서 새로운 경제 모델을 창출하고, 자립적이며 지속 가능한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데 앞장설 것이다. 이번 들공식을 준비하는 학교에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졌다. 자연 친화적 삶을 지향해 수도권의 오랜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귀촌을 위해 지역을 공부하던 중 농촌유토피아대학원에 입학한 최지혜씨(43세, 경남 함양 함양읍). 그녀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실행 과제를 수행하던 우수 학생이었다. 학업을 계속 이을 수 없어 안타까웠던 그녀가 들공식 소식에 맞춰 메모를 전해 온 것이다. “29일(농촌유토피아대학원 들공식 날), 저희집 자유롭게 오픈합니다. USB(Utopia Study Box·농촌유토피아대학원)분들 누구라도 하룻밤 주무실 수 있습니다. 5명이 쓸 수 있는 이불과 침낭 있습니다. 개인 이불 가지고 오시면 더 많은 분들 수용 가능하며, 큰방과 마루 등 최대 10명까지 잘 수 있습니다. USB 다니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고, 많이 배웠음에 작은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잘 곳 필요하신 분들 하룻밤 마음 편히 주무시고 가시면 됩니다. 주소는 함양읍 대실곰실로 ***입니다” 농촌유토피아를 배우고, 농촌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며, 농촌유토피아를 실행하는 이를 통해 유토피아 씨앗이 뿌려지고 있음을 직면하는 순간이다. 농촌유토피아는 대단한 혁신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농촌유토피아는 먹고 사는 걱정이 없고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한 농촌을 말한다.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문화적 삶을 누리며, 개인의 자아실현을 향한 노력이 공동체의 발전과 함께 자연스럽게 만나는 곳을 말한다. 새로운 농촌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농촌유토피아대학원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혁신적인 교육 모델로, 이를 통해 모두가 꿈꾸는 ‘사람이 사람답게 잘 사는 농촌’을 실현할 수 있는 작은 연장이 될 것임에 부푼 희망으로 들공식을 맞는다.
     아름다운 ‘들공식’
    by 조금평
    2025.03.25 13:54:14
  • 오늘은 오이타 현 벳부에 있는 ‘리츠메이칸 APU’를 이야기해보자. APU는 개교 25주년에 불과하지만 성공한 지방 대학으로 회자된다. 교토에 있는 리츠메이칸 대학이 국제화를 목표로 2000년 설립한 자매 대학인데 인지도에서 이미 본교를 뛰어넘었다. APU는 개교 수년 만에 일본 내 명문 대학에 올라섰다. 영국 TIME이 발표한 2023년 ‘THE 일본대학 상위 200’를 보자. APU는 개교 이래 매년 20위권 안팎에 랭크됐는데, 2023년 역시 22위를 기록했다. 교육품질 1위, 교육 성취도 3위, 교육성과 20위 등 일부 항목에서는 최상위에 속해 있다. 도쿄나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등 대도시권이 아닌 지방에 소재한 대학에서 이런 성과를 냈으니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APU는 한국에서도 벤치마킹 사례로 입줄에 오르내린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지방도시는 소멸 위기에 직면한지 오래고, 지방대학은 ‘벚꽃 피는 순서대로 문을 닫는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APU는 대학이 지방을 살리고, 지방대학도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줬다. APU는 특화된 경쟁 요소를 바탕으로 명문 대학 반열에 올라 지역경제에 선순환을 가져왔다. 2023년 기준 일본 대학은 국립 86개를 포함해 총 813개에 이른다. 우리나라 409개에 비해 두 배쯤 많다. 우리와 일본은 면적(3.3배)과 인구(일본 1억 2,360만 명, 한국 5,180만 명)에서 두세 배 가량 차이 나는데, 대학 숫자도 얼추 들어맞는다. 일본에 대학이 813개라는 것도 놀랍지만 APU가 2%에 속한다는 건 더 놀랍다. 벳부(別府)는 ‘특별한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로부터 벳부가 온천이 풍부한 특별한 곳이라서 비롯된 지명이다. 벳부는 대략 3,000곳에 이르는 온천수원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 전체 온천에서 10% 이상을 차지하며 온천 용출량에서 최대다. 벳부 IC에 들어서면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흰 수증기가 연출하는 풍광이 이색적이다. 다양한 온천을 체험할 수 있기에 연간 90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이 다녀간다. 한국인 관광객은 압도적인데 전체 외국인 가운데 60% 상당을 차지한다. 벳부에 머문 지난주 관광 비수기임에도 적지 않은 한국인 관광객을 만났다. 이들이 골프장과 온천에서 뿌리고 가는 돈이 얼마나 될까 헤아리다 리츠메이칸 APU대학으로 생각이 미쳤다. APU는 도심에서 10여km 떨어진 산속에 있다. 대부분 대학이 도심에 위치한 것과 달리 APU는 위치부터 역발상이다. APU는 산 정상에 있어 학습 환경은 쾌적하다. APU캠퍼스에서 바라보는 벳부 만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학교 주변에 유흥 시설이 전무하고 도심과 격리돼,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유학 보낸 부모 입장에서는 다행이다.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있다. 1학년은 기숙사 생활을 하며 2학년부터는 시내에 집을 얻어 통학한다. 40~50분가량 걸리는 통학은 불편하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와 맞물려 있다. 대학은 스쿨버스를 운행하지 않는 대신 벳부 시는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연간 탑승권을 할인 판매(100만원)한다. 운수회사 입장에서는 고정 승객을 확보한 셈이다. 재학생들이 학비와 생활비로 지출하는 돈은 벳부 지역경제에 효자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학생 1인당 연간 평균 4,000만 원을 쓴다. 전체 학생 수를 고려하면 매년 2,200억 원 이상 돈이 벳부에 뿌려진다. 이 학교는 외국인 학생 비율이 높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체 학부생 5,516명 가운데 일본인 학생 2,981명, 외국인 학생 2,535명으로 대략 1대 1 규모다. 외국인 유학생의 출신 국가는 90개국에 이른다. 외국인 유학생들은 단순 노동력을 제공하며 또 다른 기여를 하고 있다. 영어가 유창하기에 편의점이나 온천장 등 외국인을 응대해야 하는 곳에서 APU 학생들은 인기다. 벳부에 머무는 동안 아르바이트하는 APU 학생을 여럿 만났다. 거리를 걷는 청년 대부분도 APU 학생으로,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APU와 벳부 시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선순환 상생 모델을 만들었다. APU는 지역이 처한 위기를 타개하려는 벳부 시와 국제화 역량을 확대하려는 리츠메이칸 대학과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했다. 벳부 시는 유치 단계에서 학교 부지와 운영비를 제공하고 행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APU는 2개 국어(일어와 영어)로 강의를 진행하기에 졸업생들은 취업시장에서 빠르게 팔린다. 100%대 취업률은 APU가 단기간 명문에 오른 비결이다. 학생들은 다국적 문화를 경험함으로써 글로벌 마인드를 익힌다. 좁은 취업문을 뚫어야 하는 우리 학생들을 생각하면 APU가 지나온 길은 부럽다. 유야(湯屋) 에비스 온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말레이시아 출신 APU 유학생 아흐마드는 “이달 졸업을 앞두고 있으며 도쿄에 소재한 대기업에 취업했다. 지난 4년 동안 APU에서 시간은 행복했다”고 자랑했다. 대학 생활을 행복했다고 추억할 수 있는 리츠메이칸 APU는 ‘특별한 도시’에서 만난 ‘별난’ 대학이다.
    특별한 도시 ‘벳부’에서 만난 ‘리츠메이칸 APU’
    by 임병식
    2025.03.24 16:17:32
  • 박훈 교수가 쓴 ‘위험한 일본책’을 읽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일본인의 친절과 관련해 쓴 대목인데 여러 면에서 공감 갔다. 나 또한 일본을 다니면서 일본인들이 이전 같지 않다고 느끼던 차였다. 박 교수는 ‘불친절해진 일본인’이란 글에서 더 이상 일본인은 친절하지 않다며 경험을 소개했다.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의 친절에 감동했다는 박 교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이 생겼다고 한다. 손님을 대하는 종업원들의 음성 톤과 태도가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감정이 거세된 친절을 ‘사이보그 친절’로 명명하고, 솔직하지 못한 일본의 국민성을 아쉬워했다. 그랬던 일본인들이 반갑게도(?) 많이 불친절해졌다며 반겼다. 박 교수는 이자카야에서 사케 잔을 가득 채워 달라고 했다가 종업원으로부터 레이저 눈빛을 받았다고 했다. 일본에서 손님을 쏘아보는 눈빛은 처음이었다는 그는 불친절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기계적 친절에서 벗어난, 일본 청년세대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선의를 담은 박 교수의 해석에 공감한다. 하지만 눈살을 찌푸릴 만큼 극단적인 불친절을 겪었던 나로서는 마냥 공감하기 어렵다. 근래 일본을 다니면서 ‘이건 아닌데’라고 느꼈던 게 한두 번 아니었다. 우연도 거듭되면 필연이 되고, 실수도 반복되면 악의가 되듯 연이은 불친절과, 무례함은 ‘일본의 친절’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지난해 가을, 도쿄 인근 하코네(箱根)에서 겪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불쾌하다. 유명 온천 관광지인 하코네는 도쿄에서 가까워 연중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하코네 여행은 고라(强羅) 역을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모든 버스와 산악열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곳이 고라 역이다. 나는 종점인 고라 역에서 내려야하기에 벨을 누르지 않았다. 버스가 정차하면 자연스럽게 내릴 생각이었다. 종점에 도착해 내리겠다고 하자 버스 기사는 짜증 섞인 얼굴로 “바가야로(멍청한 놈)”라고 중얼거렸다. 순간 나는 “뭐야? 바가야로?”라고 반문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얼버무리며 수습했다. 매일 같은 코스를 운행하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나머지 무심코 내뱉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용납하기 어려웠다. 도쿄 긴자에서 공항버스를 탈 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버스 타는 줄이 맞느냐는 물음에 중년 여성은 “그렇다”며 차갑게 응대했다. 버스가 출발할 때쯤에서야 그의 불손한 언사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출발 시간에 임박해 남편과 딸이 오지 않아 초조했던 것이다. 덮어놓고 친절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불쾌했다. 지난 1월 벳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쿠오카 공항행 버스 짐칸에 짐을 싣고 탑승하는데 중년 여성은 내가 새치기를 한다며 버스기사에게 격하게 항의했다. 예약석이기에 자신에게 불이익이 없을 뿐더러, 나 또한 새치기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소한 것조차 민감하게 대응하는 그를 보면서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했다. 박훈 교수는 일본 젊은 세대의 불친절을 긍정적인 변화로 받아들였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모두 중년인데다, 불친절과 무례는 정도를 한참 벗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일본의 지방 소도시에서는 감동어린 친절을 수시로 경험한다. 자칫 호들갑스럽다고까지 여겨지지만 ‘친절한 일본’은 긍정적인 자산이다. 이따금 주변에서 일본인의 친절을 ‘본심(혼네)’이 아닌 ‘겉치레(다테마에)’로 폄하하는 이들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러는 당신은 흉내라도 내봤느냐”며 반박한다. 그랬던 일본인들이 변했으니 난감하다. 직접 겪은 사례는 퍽이나 당혹스럽다. 도쿄 등 대도시와 유명 관광지에서 유독 흔하다. ‘사는 게 힘들다보니 각박해졌다.’고 이해하면서도 불쾌한 건 어쩔 수 없다. 무한경쟁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속성에서 비롯된 변화가 아닌가싶다. 그들에게 외국인은 더 이상 손님이 아니라 평온한 삶을 깨뜨리는 ‘침입자’일 뿐이다. 나아가 돈 벌이 상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친절에 앞서 짜증부터 나는 것이다. 여기에 동양인을 우습게 보는 국민성도 한 몫했으리라 짐작한다. 우리도 그렇지만 일본 또한 백인 앞에서는 다소곳하지만 동양인은 쉽게 대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한때 식민지였고, 이제는 많은 분야에서 경쟁상대로 떠오른 한국을 얕잡고 경계하는 일본인도 적지 않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지나며 헤매일 때 ‘메이드인 코리아’는 가전제품부터 반도체까지 ‘메이드인 제팬’을 무섭게 대체했다. 그럼에도 일본인의 친절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지난해 가을, 조선 독립운동가 무료 변론에 일생을 바친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간토 대지진 와중에 조선인 300여 명을 구한 오카와 쓰네키치 서장을 취재하러 가는 길에 만난 일본인들은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세차를 멈추고, 정원수 손질을 중단한 채 자신들 차로 나를 안내했다. 과도한 친절과 무례한 불친절이 공존하는 일본 사회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친절과 불친절 여부 또한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기에 선입견 역시 경계할 일이다. 다만 나는 가식적일망정 일본인의 친절이 계속되길 소망한다. 습관도 오래되면 태도가 된다. 일본인의 겉치레 친절도 시간과 함께 감동어린 친절로 바뀌었다고 믿는다.
    예전 같지 않은 ‘불친절한 일본인’
    by 임병식
    2025.03.13 10:07:02
  • 16세기 조선,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다양한 방식으로 조선의 지도를 확보했다. 왜관에 거주하는 상인, 사신, 밀정 등을 활용해 정보를 수집했고, 이는 조선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반면, 조선은 명과의 협공을 위해 지도와 해도를 적극 활용했다. 역사는 이를 통해 지도가 단순한 지형 정보가 아니라 국가의 전략적 자산임을 보여준다. 21세기, 지도는 국가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와 기술 경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디지털 경제에서 지도데이터는 단순한 공간정보가 아니라 자율주행, 스마트시티, 인공지능(AI) 기반 공간 분석 등의 핵심 인프라가 된다. 그렇기에 구글의 정부에 대한 1대 5000 정밀지도 반출 요청은 단순한 서비스 개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디지털 주권(data sovereignty)과 직결된 사안이다. 디지털 경제에서는 데이터가 곧 시장의 핵심 요소다. 플랫폼 기업들은 소비자의 심리를 파악하고, 문화적 흐름을 분석하며, 이를 바탕으로 서비스를 설계한다. 지도데이터는 단순한 지형 정보가 아니라, 인간의 이동 패턴, 상업적 활동, 도시 구조 등 광범위한 데이터를 포함한다. 현대 사회에서 지도는 단순한 지형의 축소판이 아니라, 국가와 개인의 삶을 담고 있는 디지털 기반 인프라이다. 조선 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각 지방의 생활상을 담고 있는 정보지 역할을 했다. 현재 네이버 지도 역시 단순한 길찾기 도구가 아니라, 지역 정보와 생활 패턴을 반영하는 또 다른 디지털 플랫폼이다. 우리나라의 지도는 한국인이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리적 정보뿐만 아니라, 문화적 맥락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6년, 구글은 우리 정부에 1대 25000 축척이 아닌, 오차범위 3m 이내의 1대 5000 축척 지도를 요청했다. 더욱 정밀한 위치 기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반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군사시설 보호뿐만 아니라, 세금으로 제작된 공공데이터를 해외 기업이 무상으로 이용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절충안으로 군사·보안시설을 보안 처리한 후 반출을 승인하는 방안이 제시되었지만, 구글은 이를 거부했다. 지도데이터의 수정은 기업 방침에 맞지 않으며, 글로벌 클라우드 운영 방식상 국내에 별도 서버를 두지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이후에도 구글을 포함한 다른 플랫폼사업자들도 지도 반출 요청을 지속해 왔으며, 2025년 다시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구글에 지도 반출을 허용할 경우, 국내 기업과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지도 서비스 제공업체들은 자체적인 데이터 구축과 유지보수에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구글이 우리나라의 정밀지도를 확보하면, 글로벌 플랫폼을 기반으로 더욱 정교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고, 이는 국내 기업들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정밀지도는 자율주행차, 스마트시티, 드론 산업 등에서 필수적인 데이터이다. 통신사를 비롯하여, 현대차 등 국내 제조업체들은 독자적인 지도데이터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구글이 지도데이터를 확보할 경우 국내 기업들의 연구개발(R&D) 의존도가 커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장기적으로 국내 산업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부가 정밀지도의 반출을 허용하면, 정부는 자국 내 주요 지리정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공공 데이터를 활용한 서비스는 국가가 일정 부분 통제할 수 있어야 하지만, 글로벌 기업에 대한 정부의 정책 조정력이 약화될 수 있다. 무엇보다, 구글의 정밀지도 요구는 단순한 지도 서비스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도데이터를 활용해 자율주행, AI 기반 공간정보 분석, 스마트시티 등의 다양한 서비스로 확장하려는 목적이 크다. 이는 결국 메타버스 및 가상현실 사업과도 연결될 것이다. 이러한 사업적 필요에 따라 지도 반출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정부가 이를 허용한다면 다른 글로벌 기업들도 동일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국내 지도 인프라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다양한 기업들의 생존까지 위협할 수 있다. 단순히 플랫폼 사업자뿐만 아니라, 지도를 사용해야 하는 현대자동차와 같은 국내 제조업체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정밀지도 데이터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국가의 디지털 주권과 산업 경쟁력, 안보가 걸린 중요한 자산이다. 주요 국가들이 자국의 지도데이터를 전략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만큼, 정부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구글의 지도 반출 요구는 산업적·경제적·안보적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며, 장기적인 국가 경쟁력을 고려한 대응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데이터 통제권은 매우 중요한 이슈이며, 정부가 지도 데이터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이기 때문이다.
    구글의 지도반출 요청과 데이터 주권
    by 김윤명
    2025.03.10 16: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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