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77
  • 최근 반려동물의 증가와 함께, ‘리얼 베이비돌’ 인형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실제 아기처럼 정교하게 제작된 인형을 통해 불안 완화와 정서적 안정을 얻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인형을 통해 외로움과 상실을 치유받는 이들에게 감정과 존재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위로와 치유의 과정을 보며 자연과 우리의 관계를 질문해 본다. 인간은 문명을 창조했다. 불을 발견하고 바퀴를 만들었으며, 도시를 세우고 산업을 일으켰다. 자연을 정복하고, 기술 발전을 통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와 노동을 대신하는 지금, 인간은 자연 없이 살 수 있을까. 지난 6월, 강원도 인제에 위치한 DMZ 평화생명동산을 찾았다. 16년째 현장을 가꾸고 있는 정성헌 이사장은 “이곳은 인간이 만든 공간이 아닙니다. 자연이 만든 삶터입니다. 인간은 그저 머물며 치유와 희망을 얻을 뿐이지요.”라고 말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바람과 흙냄새까지 살아 숨 쉬는 동산. 그곳은 단순한 교육장이 아닌 생명과 평화의 성소였다. 자연은 쉼 없이 자신을 회복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진정한 활력을 되찾고 있었다. 개발이 멈춘 DMZ 생태보존지구는 다양한 야생 동식물이 자생하고,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공간에서 자연은 본래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연이라는 ‘비인간 존재’의 강력한 메시지로, 자연을 지키는 일이 단순한 환경보호를 넘어, 인류의 생존 조건이자 평화의 출발임을 각인시켰다. 도시화와 산업화는 우리 삶을 급격히 바꾸었다. 도시는 과밀과 고립에 시달리고, 농촌은 감소와 소멸의 위기를 겪고 있다. 기술과 효율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은 점점 자연과 단절되었고, 단절은 고립과 상실을 넘어 불안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그동안 깨끗한 물, 건강한 흙, 맑은 공기의 가치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은 생태계를 파괴했고, 기후 위기로 인한 폭염과 홍수, 가뭄과 산불의 빈번한 자연재해는 우리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되묻게 한다. 자연은 더 이상 무한정 제공되는 대상이 아니며, 자연을 지키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자연은 인간 생명의 지속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균형과 공존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이끌 지도자 양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기술 중심이 아닌 생명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이들, 곧 자연 생태의 가치 철학을 갖춘 이들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프랑스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만을 중심에 두는 사고를 넘어, 자연과 비인간 존재들을 ‘행위자(Actant)’로 바라보며 그들과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했다. 인간은 자연과 연결된 존재이며, 그 관계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대형 선박은 정교한 기술의 집약체지만, 위기 상황에서 일부가 붕괴되도록 설계된다. 선체 전체의 위험을 막기 위해 의도된 약점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를 ‘디자인 위크 니스(Design Weakness)’라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신학적 관점에서 창조주는 인간을 완전한 자립체로 만들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에 의존하도록 디자인되었으며 그 의존성은 계획된 약점이다. 자연과의 연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인간이다. ‘비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배제하거나 지배할 대상이 아니다. 자연, 동물, 다양한 생명체들은 인간이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고, 상처받은 감정을 회복하며,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배우고,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이러한 전환의 실험은 DMZ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DMZ가 보여주는 공존의 생태는 농촌에도 뿌리내리고 있다. 농촌은 단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자연 생태 공동체의 가능성을 지닌 곳이다. 이것이 또 하나의 ‘농촌유토피아’이며, 지역의 지속 가능한 경제·문화 모델이기도 하다. 전남 곡성과 충북 괴산에 진행되고 있는 ‘농촌유토피아 선도마을’은 이러한 비전을 실천에 옮기는 중요한 기반이다. 비인간이 인간을 구한다. 자연을 보존하고 되살리는 일은 인간을 구하는 일이다. 자연과 공존하는 삶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자연’을 조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이 기후 위기와 지역 소멸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 농촌이 다시 살아나는 길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책임이다.
    ‘비인간’이 인간을 구한다
    by 조금평
    2025.08.01 14:05:01
  • 정책은 이성의 산물일까, 감정의 표현일까. 공공정책이란 이름 아래 제안되는 수많은 제도들은 과학적 근거, 전문가의 논리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정책을 움직이는 힘은 합리성을 넘어 정서와 감정, 그리고 공감으로 뒷받침된다. 그런 이유에서 ‘정책 브랜드(policiy brand)’란 개념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책을 논할 때의 필요조건은 합리성이다. 문제 진단, 대안 탐색, 비용 편익 분석. 이 모든 과정이 이성적 판단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현실의 정책은 종종 그 합리적 울타리를 넘어서는 대중의 정서와 정치적 역학에 좌우된다. 그래서 국민이 정책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정책과 어떻게 정서적으로 연결을 맺고 있느냐도 중요하다. 즉 정책은 단순히 이성적 설계물을 넘어 ‘감정적 언어로 포장된 정치적 선택’으로도 표현된다. 때문에 정책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타당성이라는 기초 위에 국민의 공감이라는 정서적 지지대가 굳건히 세워져야 한다. 대부분의 기업은 과학적 근거와 합리적 추론을 내세워 정책 제안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데이터를 갖고 있습니다’, ‘국제 비교 지표가 있습니다’, ‘전문가 검토를 거쳤습니다’와 같은 익숙한 접근을 선호한다. 그리고, 정부의 담당자들이 합리적인 기준에 의해 최적의 선택을 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이미 1940년대에도 행동경제학의 아버지였던 하버트 사이먼은 정부정책의 선택과정에서 공무원 역시 ‘한계적 합리성’의 틀 안에서 최적의 해법보다는 ‘만족스러운 해법’을 찾는 경향이 있음을 밝혔다. 정책결정의 과정에서도 정책의 수용 과정에서도 단순히 합리적인 접근만으로는 정책이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지난 2005년 경주로 지역선정이 된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의 경우만 봐도, 초기 필요성과 방사성 물질이 실제로 위험하지 않다는 주장만 반복하다가 굴업도에서 부안까지 19년 동안 부지선정을 못하고 표류했다. 결국 2005년 전문가뿐만 아니라 시민단체를 설득하고, 지역사회 발전과 실생활에 이점을 준다는 구체적인 스토리를 통해 지역민을 설득하면서 성공적으로 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미국산 소고기 사태나, 의대정원 2000명 증원, 초등학교 5세 입학 등 합리적으로는 필요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정책들도 ‘왜, 어떻게’라는 구체적인 스토리라인을 만들지 못하면서 정책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실패는 단순히 정책실패에 끝나지 않고 오랜 기간 사회적 후유증을 낳기 때문에 정책의 초기 단계부터 어떻게 정책을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기업의 정책 담당자들은 회사가 추구하는 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정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공공의 서사’ 속에 위치시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첫째, 정책에 ‘이야기’를 입히고, 숫자를 넘어서는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건조한 통계를 넘어 그 정책이 누구의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손에 잡히는 이야기를 보여줘야 한다. 예를 들어, 환경 정책이라면 탄소 배출량 감소 그래프에 그치지 말고, 맑은 공기 속에서 마스크를 벗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는 식이다. 생생한 스토리는 정치인에게는 명분과 비전을, 국민에게는 공감과 참여의 동기를 제공한다. 둘째, ‘핵심 가치’를 명확히 하고 ‘상징’을 만들어야 한다. 정책은 복잡한 개념의 묶음이어서는 안 된다. 간결하고 강력한 슬로건이나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정책의 본질을 압축해야 한다. 독일의 산업계는 높아가는 임금과 노후화되는 산업시설을 바꾸기 위해 정부의 정책변화가 필요했다. 그들은 정부와 함께 ‘인더스트리 4.0(Industry 4.0)’이라는 슬로건 아래 제조업과 ICT의 결합을 통해 국가차원에서 스마트공장, 디지털 전환을 촉진하는 캠페인을 만들어 냈다. 명확한 아이덴티티를 통해 정치권의 지지층과 국민의 정서적 유대감이 형성했다. 셋째, ‘참여의 장’을 확장해야 한다. 정책은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소통의 과정이다. 국민과 이해관계자들이 정책 형성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길을 넓히고, 그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단순히 정보 제공을 넘어,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공동의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합리적 근거는 전문가의 언어일 수 있으나, 참여는 모두의 언어라는 점을 잊지 말자. 국민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담긴 정책에 더 큰 애정을 느낀다. 사소해 보이더라도 국민의 여론을 조사하거나 하는 방법들은 매우 효과적이다. 넷째, 과학과 합리기반의 단어들을 ‘공공의 언어’로 번역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정책 제안은 종종 전문가 언어에 갇힌다. 하지만 매력 있는 정책 브랜드는 누구나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 ‘위해 우려’라는 말보다 ‘우리 아이의 안전’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마음에 닿는다. 마지막으로 ‘지속적인 소통’으로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정책 수립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끝이 아니다. 정책이 집행되는 과정에서도 기업에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책 추진과정에서 정책을 안착시키고 지속될 수 있도록 정부를 지원하고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책과정에서 성공과 실패를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대안을 공유하면서 국민과 이해관계자 모두와 정서적 거리를 계속 좁혀가야 한다. 그래야 정책성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감정 없는 정책은 제안될 수는 있어도, 살아남기 힘들다. 정책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때 비로소 사회적 선택을 받는다. 데이터와 그래프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책은 ‘좋은 말’이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될 때 힘을 얻는다.
    정책은 숫자보다 ‘서사’를 만들어야
    by 이보형
    2025.07.24 10:37:56
  • 제주에 머문 지난주, 많은 건축물을 보고 다녔다. 소문난 건축물을 순례하는 내내 왜 건축을 예술 영역에 포함시키는지 어렴풋하니 수긍했다. 또 세계적으로 일본 건축이 강한 이유도 헤아려봤다. 제주를 대표하는 현대 건축물은 수풍석 뮤지엄과 본태박물관, 방주교회, 포도호텔, 유민미술관, 글라스 하우스다. 이들 건축물만 보러 오는 여행객도 꽤 된다. 모두 일본과 연관돼 있다. 본태박물관과 유민미술관, 글라스 하우스는 안도 다다오(Tadao Ando) 작품이다. 나머지 수풍석 뮤지엄과 방주교회, 포도호텔은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Itami Jun)이 설계했다. 둘 다 일본에 뿌리를 뒀다. 볼거리가 흔전만전 널린 제주에서 멋진 건축물과 만남은 색다른 경험이다. 본태박물관과 수풍석 뮤지엄, 방주교회, 포도호텔은 서로 가깝다. 본태박물관은 전시 작품도 수준급이지만 건축물 자체로도 멋지다. 안도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건축가다. 그의 건축 철학은 자연과 조화, 즉 자연과 조응하는 것이다. 오사카 ‘빛의 교회’와 시코쿠 나오시마 ‘지추(地中)미술관’은 안도를 세계에 알린 걸작이다. 안도는 빛을 활용하는데 탁월하다. 빛의 교회와 지추미술관은 정점에 있다. 안도는 바다와 인접한 지추미술관을 땅 밑으로 설계함으로써 자연을 존중했다. 수년 전 이곳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버려진 섬을 예술 섬으로 바꾼 것도 놀랍지만 미술관에 대한 고정 관념을 바꿨다. 섭지코지 유민미술관과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SAN)도 안도 작품이다. 이들은 지추미술관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노출 콘크리트를 기본으로 빛과 물을 차용해 비슷한 느낌이다. 유민미술관 역시 수평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시공간을 땅 속으로 설계했는데 편안하다. 정원과 전시공간을 잇는 통로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한쪽 벽면을 창으로 뚫었는데 그 프레임 속으로 푸른 파도와 성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본태박물관 또한 안도의 건축 철학에 충실하다. 노출 콘크리트와 빛, 물이 어울려 ‘本態, 본래의 모습’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살렸다. 관람 동선 끝에 배치한 수련 연못 또한 설계자 의도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유민미술관 앞 ‘글라스 하우스’는 TV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등장한 핫 플레이스다.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뻗은 V자 건물은 그대로 풍경이 됐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닿은 바다가 보이는 통유리가 시원스레 펼쳐 있다. 글라스 하우스에서는 제주 농산물로 빵을 굽는다. 제주의 바람과 물, 흙이 키운 당근과 감자, 마늘, 호박, 꿀이 주된 식재료다. 안도의 작품이 한국과 일본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두 나라 정서가 비슷한 때문이다. 두 나라 국민들은 여백 미와 사색에 잠겨도 좋을 단아한 분위기에 푹 빠진다. 제주에서 안도와 함께 거론되는 스타 건축가는 이타미 준이다. 한국명은 유동룡이다. 그는 김수근 건축상과 프랑스 예술훈장 슈발리에와 레지옹 도뇌르 훈장, 일본 최고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상을 수상했다. 방주교회와 포도호텔, 수·풍·석 뮤지엄에는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이 온전히 반영돼 있다. 이타미 준 또한 자연과 조화를 지향한다. 현지인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이 찾는 방주교회도 각별하다. 물위에 떠 있는 노아의 방주를 형상화했는데, 삼방산을 향해 나갈 채비를 마친 모습이다. 최근 내부 문제로 소란스럽다니 안타깝다. 비오토비아 수풍석 뮤지엄은 물과 바람, 돌을 모티브 삼았다. 많은 이들은 이곳에서 위안을 얻는다. 수 박물관은 천단을 연상케 하며, 풍박물관에서는 무시로 바람 소리를 듣는다. 이타미 준의 딸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2024년 제주 저지마을에 유동룡 박물관을 열었다. 두 사람 외에도 일본에는 내로라하는 건축가가 즐비하다. 우리는 한 명도 없는 프리츠커 상을 무려 10명이나 받았다. 안도 다다오, 단게 겐조, 카즈요 세지마, 이소자키 아라타, 이토 토요, 쿠마 켄코 류에 니시자와 등이다. 지난해 도쿄여행 당시 들린 네즈 미술관도 프리츠커 상을 받은 쿠마 켄고(Kengo Kuma) 작품이다. 네즈 미술관은 미술관 자체가 빼어난 작품이다. 대나무와 목재로 설계한 진입부는 인상적이다. 이 길에 서자 어린시절 추억이 되살아났다. 하코네 폴라 미술관도 매력적이다. 푸른 숲 속에 서 있는 미술관은 한 마리 학을 닮았다. 흰색과 강렬한 절제미로 눈길을 끈다. 일본 건축은 왜 이렇게 잘 나갈까. 장인정신과 섬세함이 바탕에 있다. 일본에는 수 백 년 된 기업이 흔한데, 건축 또한 이런 토양에서 구축됐다.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는 정신문화도 다른 요인이다. 한국과 일본 건축은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 지진과 쓰나미, 화재 등 잦은 자연재해와 두 차례 원폭, 도쿄공습 등 대규모 전쟁도 건축 발전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짐작한다. 다시 짓고 튼튼하게 짓고 아름답게 지으려는 과정에서 세계 최고 수준 건축문화를 낳았다. 1995년 대지진 참사를 겪은 고베가 건축학도들에게 실험장인 이유다. 한국에도 프리츠커 수상자가 나오길 기대하는 이들에게 제주 건축기행을 권한다. /서경IN
    ‘프리츠커 상’ 10명 배출한 일본 건축의 저력
    by 임병식
    2025.07.15 16:01:39
  • 최근 미국의 '골든 돔 법안(Golden Dome Act)'과 관련 논의는 미사일 방어 체계의 미래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한국의 안보 전략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거 아이언 돔(Iron Dome)이 보여준 근접 방어의 성공 사례를 넘어, '골든 돔'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광범위하고 다층적인 방어망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톰 크래머(Tom Cramer) 상원의원과 댄 설리번(Dan Sullivan) 상원의원이 발의한 '골든 돔 법안'은 미사일 방어 시스템의 통합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미사일 요격기를 추가하는 것을 넘어, 기존 및 신규 역량을 조화롭게 연결하여 하나의 거대한 방어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특히, 우주 기반 센서와 인공지능(AI) 기술의 적극적인 활용은 '골든 돔'이 지향하는 미래형 미사일 방어의 핵심 요소이다. 즉, 오늘날 미사일 방어 시스템은 특정 위협에 대한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골든 돔'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부터 극초음속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포괄적인 방어 능력을 목표로 한다. 이는 다양한 속도와 고도에서 작동하는 요격 미사일, 첨단 레이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우주 기반 추적 및 탐지 시스템의 통합을 요구한다. 한반도의 특수한 안보 환경을 고려할 때, '골든 돔' 개념은 한국의 미사일 방어 전략에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첫째, 다층 미사일 방어 체계의 고도화이다. 현재 한국은 한국형 미사일 방어 체계(KAMD)를 구축하고 있지만, 북한의 미사일 능력 고도화, 특히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에 대한 대응 역량 강화가 시급한 실정이다. '골든 돔'이 제시하는 다층 방어망 개념은 한국이 이미 운용 중이거나 개발 중인 패트리어트, 천궁-II, L-SAM 등을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상층 방어 역량을 강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둘째, 우주 기반 자산의 중요성 증대이다. '골든 돔'은 우주 기반 센서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국 역시 정찰 위성 개발 및 운용을 통해 북한 미사일 발사 징후를 조기에 탐지하고 추적하는 역량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와 더불어 저궤도 위성군을 활용한 미사일 경보 및 추적 시스템 구축을 장기적인 목표로 추진해야 한다. 이는 지상 레이더의 한계를 극복하고, 발사부터 요격까지의 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셋째, 인공지능(AI) 및 데이터 통합의 가속화이다. '골든 돔'은 방대한 센서 데이터를 통합하고 분석하며, 최적의 요격 솔루션을 도출하는 데 AI 기술을 활용한다. 한국군도 미사일 방어 시스템에 AI를 도입하여 의사 결정 속도를 높이고, 오탐지율을 줄이며, 복합적인 위협에 대한 대응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다양한 센서에서 수집되는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통합하고 분석할 수 있는 플랫폼 구축이 동시 개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한미 동맹과의 협력 강화이다. '골든 돔' 법안 자체가 미국의 국가 미사일 방어 전략의 일환인 만큼, 한미 동맹 간의 미사일 방어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새로운 기술과 개념을 공유하고, 연합 훈련을 통해 상호 운용성을 높이며, 궁극적으로는 한미 양국이 하나의 통합된 미사일 방어 체계로 기능할 수 있도록 상호 운용성에도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골든 돔' 개념을 당장 한국에 적용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 기술적 난이도, 그리고 정치적 고려사항 등 여러 도전 과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고도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미사일 방어 능력의 혁신적인 발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우리는 최근 발표된 나토의 '상업우주 전략'에서 얻은 교훈처럼, 민간 우주 기업의 혁신적인 기술을 국방에 적극적으로 통합하고,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강화하며, AI와 같은 첨단 기술을 선도적으로 도입하여 미래형 미사일 방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골든 돔'이 제시하는 비전은 단순히 미사일을 막아내는 것을 넘어,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억제력을 제공할 것으로 한국도 '골든 돔'의 개념을 바탕으로 더욱 견고하고 포괄적인 방어막을 구축하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낼 때이다.
    ‘골든 돔’과 한국의 우주안보 전략 
    by 최성환
    2025.07.13 17:19:58
  • 소위 ‘티메프 사태’가 발생한 지 1년이 되었다. 티메프 사태는 싱가포르에 설립된 한국계 이커머스(e-commerce) 업체인 큐텐과 한국 내 계열회사인 티몬, 위메프가 플랫폼 내 판매업체들에게 정산 대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게 되면서 대규모 소비자 피해로 이어진 사건이다. 이보다 3년 전인 2021년 8월 전국을 뒤흔들었던 소위 ‘머지포인트 사태’를 계기로 선불업 등록 면제기준 강화, 선불전자지급수단 할인발행 제한, 선불충전금 보호 등을 주요 내용으로 전자금융거래법이 개정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개정법 시행(2024년 9월) 직전에 티메프 사태가 터진 것이다(티메프 사태에서도 무분별한 상품권 할인발행을 통한 정산대금 돌려막기가 문제되었다). 티메프 사태 발생 이후 정부 차원의 TF가 구성되었다. 금융당국은 판매업체들에게 유동성을 지원하고 소비자들의 결제취소·환불 절차를 도왔고, 관계부처 논의를 거쳐 2024년 9월 전자지급결제대행(PG)업 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이 개선안에서는 PG사의 정산자금 보호장치 마련, PG업 진입규제 강화, 경영지도기준 미준수 시 행정조치 근거 마련 등 PG업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전자금융거래법 개정 방향이 제시되었다. 금감원은 올해 초 검사업무 운영 계획을 배포하면서 대형 전자금융업자(빅테크사)에 대해 올해부터 정기검사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고, 5월에 네이버파이낸셜에 대한 정기검사를 개시했다. 상기 논의를 반영한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도 발의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이커머스 등의 영업 특성을 고려한 PG업의 범위 조정이다. PG업은 본질적으로 “제3자(타인) 간”의 대금결제를 대행하는 영업이다. 그런데 현행 법규정과 그간 금융당국 실무해석에 따르면 이커머스와 같은 일반 상거래 업체들이 “자기 사업” 영위의 일환으로 수행하는 내부 정산 업무까지 모두 PG업의 범위에 해당하게 되는데, 이것은 과도한 규제라는 지적이 예전부터 있어 왔다. 이를 고려해서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은 PG업을 (자기사업이 아닌) 제3자 간 거래의 대가 수수·정산업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명확히 하고, 이커머스, 대규모유통업자, 프랜차이즈본사(가맹본부) 등이 자기사업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각각 판매업체, 납품업자, 가맹점사업자에 대한 관계에서 처리하는 내부정산업무는 PG업의 범위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에 맞추어 (내부정산업무를 수행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이커머스업체를 대규모유통업자로 의제하고 판매대금 별도관리의무 및 정산기한 준수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의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도 발의되었다(소위 ‘티메프 방지법’). 문제는 작년에 발의된 개정안이 대통령 탄핵과 대선 정국을 거치면서 반년이 넘도록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그 사이에 올해 3월 온라인 명품 거래 플랫폼 발란의 판매대금 미정산 사태가 터졌고, 발란은 회생절차에 들어갔다). 규제 공백을 해소하고 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방법론을 논의하는 데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논의가 지연되는 와중에 또 다른 ‘OO 사태’가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규제당국과 국회, 관련 업계가 지혜를 모아 속도감 있게 제도를 정비하고 대응해 나갈 필요성이 제기되는 시점이다.
    티메프 사태, 그 후
    by 유정한
    2025.07.12 09:00:00
  • 2025년 6월의 울산. 대한민국의 산업화 신화가 시작된 그 땅 위에, 새로운 종류의 고속도로 건설의 첫 삽을 떴다. 이재명 대통령은 그 출범식에서 “AI 고속도로”라는 표현을 꺼냈다. 자동차 대신 알고리즘이 질주하고, 화물 대신 데이터가 흐르는 디지털 고속도로. 그 말은 단지 상징이 아니다. 산업화의 경부고속도로를 뛰어넘는 디지털 주권국가로의 국가 재설계 선언이다. 울산은 과거, 중화학공업의 심장이었다. 조선소와 정유소가 엔진을 돌리고, 철강이 도시를 달궜다. 그리고 지금, 그 산업의 심장 위에 새로운 심장이 놓인다. AI 연산을 위한 데이터센터, 그것도 단순한 기업용이 아닌 ‘국가용’으로 기획된 플랫폼이 바로 그것이다. 대통령은 울산에서, 대한민국이 어떤 미래로 갈 것인지를 직접 보여줬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했을 때, 산업화의 구체적 청사진은 없었다. 하지만 아스팔트 위로 공장이 생기고, 수출길이 열렸고, 중산층이 움직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말한 AI 고속도로도 같은 궤를 따른다. AI가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려면, 우선 고속도로가 있어야 한다. 연산과 저장, 네트워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산업 AI도, 의료 AI도, 교육 AI도 허상에 불과하다. 이제 AI는 특정 기업의 기술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할 기반시설이 되었다. 울산 AI 데이터센터는 바로 그 첫 구조물이다. 기술을 공공 인프라로 전환하려는 국가 차원의 ‘기술 사회계약’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데이터 확보를 위한 국가 전방위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깔딱고개’를 넘어서고 있는 경제를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AI 뉴딜’을 추진하여야 한다. 이번 출범식이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히 데이터센터가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가 ‘서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수도권과 판교에 집중된 디지털 자원을 전국으로 분산하려는 전략적 시도가 울산에서 실행된 것이다. 디지털의 중심축이 서울에만 머물러 있다면, AI는 결국 또 하나의 수도권 권력이 된다. 이재명 정부는 디지털 대전환을 ‘수도권 이익의 확대’가 아닌 ‘국민 모두의 기본권 확장’으로 설계하고 있다. 광주·전남, 대전, 강원 등에도 분산된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계획은 ‘모두의 AI’를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물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아니라, 기술 접근의 격차를 줄이는 일이다. AI에 의한 혜택이 지방에 골고루 나누어져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모두의 AI’는 이재명 대통령의 디지털 정책을 관통하는 핵심 철학이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적 구호가 아니라, 국가가 기술의 설계자이자 조율자로서, 기업과 시민 모두가 동등하게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구조를 짜야 한다는 뜻이다. 울산 데이터센터는 민간기업과 함께 설계되었지만, 공공의 목적을 분명히 지향한다. 중소기업, 스타트업, 지자체, 학교, 시민 단체도 AI 인프라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AI 기본사회를 위한 ‘AI 바우처’, ‘AI 교육’, ‘국민 AI 비서’는 바로 그 통로다. 울산에서 시작된 이 실험은 기술 민주주의로 향하는 시험대다. 인공지능이라는 고속도로에 국민 모두가 탈 수 있도록 설계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디지털 불평등만 확산될 뿐이다. AI 고속도로는 단지 기술 인프라가 아니다. 그것은 “누가 설계하고, 누구를 위해 작동하며, 누구의 언어로 세계를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정치적 플랫폼이다. 다만, 정치는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국산 GPU’, ‘소버린 AI’, ‘한국형 LLM’을 언급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 개발이 아닌, 디지털 자립과 문화 주권의 문제다. ‘소버린 AI’를 위해 무엇보다 데이터의 확보가 중요하다. 민간과 공공이 서로 다른 데이터 거버넌스를 갖고 있으며, 저작권 문제 때문에 데이터 확보가 어렵다. 이를 위해 이해관계의 조정이나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데이터 관련 법제가 실효성 있게 작동할 수 있도록 전면적으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더 이상 외국 빅테크의 클라우드에 의존하는 기술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 설계하고 구현하는 AI 정부가 되어야 한다. 울산 데이터센터는 그 첫 번째 인프라일 뿐이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법제도, 윤리원칙이 함께 설계되는 거버넌스 체계다. 시행도 전에 논란 중인 AI 기본법을 ‘AI 산업 및 인프라 진흥을 위한 법률’로 전면 개정해야 한다. 아울러, ‘모두의 AI’와 사회문제의 해결과 디지털 포용 등 ‘AI 기본사회’의 구현을 위한 ‘AI 기본사회법’ 제정도 고려해야 한다. 초고성능컴퓨터법에 따른 국가초고성능컴퓨팅위원회를 현실화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울산에서 출발한 이 디지털 고속도로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설계 중이며,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느냐에 따라 그 노선도, 정거장도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빠른 기술을 원하는가, 아니면 함께 가는 기술을 원하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AI 고속도로”에 대해 말한 순간, 그는 과거의 대통령들이 산업화 시대의 도로 위에 섰던 것처럼, 디지털 헌법의 제1조를 낭독한 셈이었다. 이제, 그 헌법을 함께 써 내려갈 주체는 국민이다. 고속도로는 혼자 달리는 길이 아니다. 함께 탈 준비가 되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다.
    AI고속도로 위의 대통령
    by 김윤명
    2025.06.27 15:10:10
  • 기업에게 정책은 나침반과 같다. 방향이 분명해야 길을 내고, 전략을 세우고, 투자도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기업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을 바꾸는 나침반을 붙잡고 항해하고 있다. 전임 정부에서 추진한 규제 완화나 산업 육성 정책이 새 정부에서는 폐기되거나 반대로 전환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탈원전과 친원전, 벤처 기업 지원 정책의 대폭 확대와 정권 교체 후의 축소, 반도체 특별법이나 바이오헬스 지원 로드맵 같은 산업 전략마저도 정권 교체 이후 재검토 대상이 되는 현실은, 기업들에게 예측 불가능성과 전략적 혼란을 초래한다. 지방투자 보조금, 탄소중립 지원, 환경 규제 유예 등 실무적으로 경영전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정책 기조가 5년 주기로 바뀐다면, 기업은 성장보다 생존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이런 풍토에서는 기업이 자신이 가진 핵심 역량을 한 곳에 몰아 성장 동력을 만들기보다는 정책 리스크를 감안해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방어적 전략에 자원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다. 해외자원투자, 풍력발전, 플랫폼 기업 육성 정책 등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는 사업들이 많다. 정책의 방향성이 신뢰받지 못하면 민간의 투자는 위축되고, 국가 산업 전략의 동력도 분산된다. 이처럼 정책이 리셋되는 문화의 근본 문제는 ‘정정(訂正)’의 부재다. 일본의 경영철학자 아즈마 히로키가 ‘정정하는 힘’에서 말했듯, 정정이란 “과거를 인정하면서도 현재에 맞게 해석을 조정해 나가는 힘”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과거의 정책을 전면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는 계승하고 문제는 조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정정’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춰야 한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전 정부의 주요 정책을 정책 백서로 체계적으로 평가하고, 국민과 기업 앞에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정정할지 공개하는 평가 시스템을 만들면 어떨까? 또 주요 산업 정책의 변경 시에는 기업 현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급격한 전환 대신 점진적 조정과 의견 수렴 절차를 의무화하는 정책 연속성 고려하는 제도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특히, 경제에 영향을 많이 주는 산업 전략과 관련해서는 민간도 함께 참여하는 국가 차원의 전략기구를 만들어서 새로운 정책에 대한 비토권을 줘 보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이러한 시스템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독일의 에너지전환정책(Energiewende, 에네르기벤데라 읽는다)은 좋은 예이다. 독일은 정권이 바뀌어도 2050년까지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핵심 기조를 유지하면서 각 정권은 그 안에서 세부 실행방안을 조정해왔다. 성급한 전환 대신 정책 정정의 과정을 제도화한 결과, 기업들은 10년 단위의 전략을 안정적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17세기 프랑스의 재무장관이던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가 국가주도의 산업육성 전략을 주창한 이후로 ‘콜베르주의적 디리지즘(국가개입경제, dirigisme)’의 정책적 전통을 수립하고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원자력이나 항공·우주 산업등에서 국가 주도의 전략개발과 공공조달의 유지, 기술 투자를 일관되게 이어오면서 산업적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관련 기업들이 장기적인 투자전략을 수립하고, 연관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근간이 된 것이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유임시킨 결정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단순한 인사 유지가 아니라, 전임 정부의 정책 중에도 이어가야 할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 정책의 연속성을 지키겠다는 선언의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이런 실용적인 결정들이 축적되어 이제 우리나라도 ‘리셋’이 아닌 ‘정정’을 통한 산업발전 전략을 가져가고 기업들도 예측가능한 경영전략을 수립할 수 있지 않을까. 리셋은 기억을 지우지만, 정정은 기억을 살리며 현재를 갱신한다. 민간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정책은 성과를 계승하고 오류를 고치는 ‘정정의 힘’으로 지금의 경제위기가 극복되길 기대한다. 그래야 기업도 다시 성장에 집중할 수 있다.
    리셋 아닌, 정정(訂正)되는 나라
    by 이보형
    2025.06.27 14:56:19
  •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우선 레인.’ 김포와 김해, 하네다와 후쿠오카 공항에 설치된 안내판이다. 양국 정부는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해 6월 한 달 동안 전용 창구를 시범 운영 중이다. 반응은 뜨겁다. 한국과 일본 국민들은 다른 외국인과 함께 줄을 서지 않고 곧장 심사대를 통과한다. 뭔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이들이라면 안다. 고작 10분만 빨리 입국 절차를 마쳐도 이게 어딘가 싶다. 이러니 외교관 대우나 다름없는 전용 창구를 지나면서 우쭐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게 진짜 교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네다공항은 외국인 입국심사 창구 16개 가운데 6개를 한국인 우선 레인으로 할당했다. 또 외국인 공용 키오스크 43개 중 16개를 한국인 전용으로 확보했다. 우리는 흔히 섬나라 일본은 소심하며 통이 작다고 한다. 축소지향 일본인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맞다. 그러나 한일 수교 60년을 맞는 일본 정부의 행보는 파격이다. 지난주 주일 한국대사관이 주최한 한일 수교 60주년 기념식에는 이시바 총리를 포함 전·현직 총리만 4명이 참석했다. 우리로 말하자면 이재명 대통령을 비롯해 전직 대통령 3명이 참석한 것이니 놀랍다. 수년 전 수출규제와 경제보복, 죽창가와 노 재팬을 외치며 서로에게 으르렁댔던 것을 떠올리면 뭔가 싶다. 미묘한 변화는 일본을 찾는 한국인과, 한국을 찾는 일본인의 표정에서부터 확인된다. 긴장감 대신 내 집을 찾은 듯 편안하다. 지난주, 제주 카멜리아힐에서 오사카에서 왔다는 이십 대 후반 일본 여성 관광객을 만났다. 그들은 수국이 만개한 정원에서 “스고이(놀라운, 대단한)”를 연발하며 환히 웃었다. 도쿄 최대 번화가 긴자와 오모테산도 힐에서 만난 우리 청년들도 거침없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올해 일본을 찾는 한국인은 1,000만 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사상 처음이다. 출입국 통계에 따르면 올해 출국장을 나선 3명 가운데 1명은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인 또한 앞다퉈 한국을 찾는다. 올해 400만 명을 넘어설 게 분명하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는 없다. 양국 거리에서 들리는 “굉장하다”와 “스고이”가 낯설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총리의 행보 또한 파격의 연속이다. 이시바 총리는 SNS에 이 대통령의 당선 축하 메시지를 올리면서 한국어를 병기했다. 이 대통령도 SNS에 한국어와 일본어로 화답했다. 한국을 아직도 자신들 식민지로 인식하는 일본 극우 인사들이나 조금이라도 일본에 우호적일라치면 ‘신 친일파’로 공격하는데 익숙한 민주당 지지층 모두에게 이시바와 이재명은 못마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양국 정상의 언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이 대통령은 G7 정상회담장에 먼저 도착해 이시바 총리를 기다렸고 상석을 양보하며 배려했다. 아베가 트럼프에게 황금색 드라이버를 선물한 것은 비굴해서가 아니다. 지도자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종종 자신을 낮춘다. 이 대통령은 “작은 차이를 넘어서자”며 일본 국민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또 “한·일은 앞마당을 같이 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며 지정학적 입지도 상기시켰다. 과거사를 덮어두자는 게 아니다. 한일관계는 속도도 더디지만 그나마 쉽게 무너지는 게걸음을 반복해 왔다. 엉성하게 쌓아 올린 돌탑이 따로 없다. 김영삼 정부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충돌, 이명박 정부에서 독도 방문, 문재인 정부 경제전쟁까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한일관계는 뇌관이었다. 특히 과잉 민족주의와 결합할 때 양국관계는 쉽게 파국으로 치달았다. 한일수교 60년, 올해는 새로운 출발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분절점이다. 그동안 정치권은 ‘친일파’와 ‘토착 왜구’ 주홍글씨를 동원해 상대를 제압하고 낙인찍었다.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는 쏠쏠했으나 외눈박이 역사 인식이라는 비판도 상당했다. 오랜 시간 일본을 다닌 내가 내린 결론도 다르지 않다. 낯선 소도시를 여행하고 그들과 대화하며 막연한 적대감을 내려놓고 마음을 열었다. 흔히 일본인의 친절을 ‘다테마에(겉마음)’와 ‘혼네(속마음)’는 다르다며 폄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때마다 나는 “그러는 당신은 흉내라도 내봤냐”고 반문한다. 그런 이들에게는 일본의 어떤 장점을 들이대도 쇠귀에 경 읽기다. 메이지유신 세대의 정치적 결단은 좋은 본이지만 그마저 흠만 들춘다. 당시 변방이었던 사쓰마와 조슈는 앞다퉈 영국으로 유학생을 보냈다. 또 메이지 정부는 1년 10개월에 걸쳐 12개국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다. 19세기 후반, 그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무얼 했나. 일본 비판만 올인하는 건 무책임하다. 물론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의 양면성을 부정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일본인에게도 배워야 한다는 사실마저 부인할 필요는 없다. 한일 양국은 외교와 안보, 경제, 문화까지 협력할 공간이 넓다. 트럼프의 관세정책 때문에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공조할 분야도 많다. 이념 중심 진영외교에서 벗어난 국익 중심 실용외교는 생존의 문제다. 한시적인 전용 입국심사 창구는 진심과 정성이 수반된다면 상설화할 수 있다. 서로의 언어로 말할 때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언제까지 훈풍을 지속할 수 있을지 실용외교를 기대한다.
    한일에 부는 훈풍 “이런 게 진짜 교류”
    by 임병식
    2025.06.27 14:39:59
  • ‘규제혁신’은 정부가 기술정책을 말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다. 인공지능, 블록체인, 자율주행, 바이오 등 새로운 산업이 떠오를 때마다 규제는 흔히 ‘속도를 늦추는 장애물’로 지목되고, 규제완화는 ‘성장의 열쇠’로 환영받는다. 정부는 “먼저 허용하고 나중에 보완한다”는 이른바 ‘선허용-후규제’ 전략을 내세우고, 기업들은 시장 진입 기회의 확대를 기대한다. 실제로, 스타트업과 기술 기반 기업에게 규제완화는 초기 투자 리스크를 낮추고 실험을 용이하게 만들어주는 유연성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정부 역시 일자리 창출, 산업 경쟁력 강화, 기술 주도권 확보라는 명분 아래 규제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규제샌드박스’, ‘네거티브 규제전환’ 등의 제도는 이러한 흐름을 제도화한 결과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기업이 바라는 ‘지속가능한 기술 발전’으로 곧장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 규제를 단순히 없애는 것이 기술 생태계의 건전한 성장을 보장하는가.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단기적 규제완화는 기술개발을 촉진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법적 안정성과 사회적 신뢰가 결여된 환경에서 기술 생태계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규제가 없다고 해서 기술이 반드시 발전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방향 상실, 사회적 반발, 글로벌 기준과의 괴리라는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규제는 기술을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다. 규제는 기술이 사회 안에서 조화롭게 작동하도록 돕는 장치이며, 기술 발전의 방향을 함께 설계하는 기준선이다. 규제혁신은 규제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시대의 변화에 맞춰 규범과 절차를 재구성하자는 요청이다. 예컨대 개인정보보호라는 규범을 전면화한 유럽의 개인정보보호일반규정(GDPR)은 글로벌 기업들에게 기술적 구조를 수정하게 했고, 그 결과 사용자들의 신뢰는 오히려 증대되었다. 규제는 기술에 제동을 거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인간을 위한 것이 되도록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문제는 ‘규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다. 규제는 늘 기업을 옥죄는 적으로만 간주되고, ‘혁신’은 규제와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규제는 기술의 위험을 조정하고 사회적 신뢰를 확보하는 장치다. 기업이 바라는 기술 발전은 단지 수익이 아니라, 시장 수용성과 제도적 정당성 위에서 비로소 지속 가능해진다. 규제는 그 기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제를 비판하는 많은 기업들이 정작 ‘자율규제’를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정부가 규제하면 관치라 비판하고, 자율에 맡기면 가이드라인을 달라고 한다. 이는 ‘규제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수동적 규제문화의 반영이다. 자율규제를 원한다면 먼저 자율규제를 설계하고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순서다. 최근 발생한 SK텔레콤과 예스24의 해킹사건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사점이 크다. ‘규제혁신’의 분위기 속에서 기본적인 사이버보안 대책조차 허술했다면, 이는 규제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자의 태도와 역량, 그리고 책임 회피의 문제다. 규제의 부재를 혁신의 기회로 착각할 때, 기술은 오히려 사회적 위험이 된다. 오늘날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회를 재구성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기술정책은 민주주의의 문제로 확장된다. 특정 기업이나 기술집단에 의해 규제체계가 설계될 때, 시민의 권리와 공공의 안전은 어떤 방식으로 보장되는가. 규제는 바로 그 논의의 통로이며, 공공의 가치가 반영되어야 하는 절차다. 따라서 진정한 기술 발전은 단기적 자유나 유연성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사회 전체가 수용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되며, 신뢰 위에서 작동하는 기술만이 지속 가능하다. 규제는 그 신뢰를 설계하는 장치이며, 기술의 인간 중심성을 지키는 제도적 약속이다. 혁신은 자유 속에서 이뤄지지만, 그 자유는 규범 위에서만 정당화된다. 이 점에서 규제는 결코 시대에 뒤처진 것이 아니다.
    ‘규제’에 대한 몇 가지 오해
    by 김윤명
    2025.06.19 10:02:27
  • AI는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새로운 질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표방한 ‘국민주권정부’는 통치의 정당성이 국민의 일상적인 참여와 피드백의 순환 구조 안에서 재확인되는 거버넌스로 이해된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진짜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가치를 상징한다. 이는 AI 기본사회가 지향하는 원칙인 기술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누구도 기술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접근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AI 기반 기술은 대표성과 통제를 동시에 구현하기 어려웠던 기존 행정 시스템의 구조를 바꾸는 참여적 전환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컨대 ‘국민 AI 비서’는 단순한 정보 제공 기능을 넘어서, 시민이 행정에 질문하고 반론하며 제안할 수 있는 양방향 인터페이스로 작동할 수 있다. 정책 결정의 배경이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을 때, 국민은 AI 시스템을 통해 “왜 이 정책이 필요한가”, “다른 대안은 무엇인가”를 실시간으로 묻고 응답받을 수 있다. 이는 설명가능성이라는 기술 원칙이 정치적 책임성과 민주적 숙의의 확장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또한 AI는 참여의 기술적 진입장벽을 낮추고 디지털 주권의 실질화를 촉진한다. 온라인 공론장, 국민제안 플랫폼, 정책투표 시스템 등은 고도화된 언어 처리, 감정 분석, 요약 기술을 통해 누구나 쉽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정책으로 반영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한다. 과거의 행정이 선택된 전문가의 언어로 구성되었다면, AI는 다양한 언어와 감정, 삶의 맥락을 인식하고 조직화하는 능력을 통해 다층적인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모두의 AI가 정부의 도구가 아니라 ‘국민의 도구’로 작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참여민주주의는 단순히 정보를 소유하거나 열람할 수 있는 권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핵심은 시민이 그 정보에 기반해 정부 정책에 대해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며, 실제로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제도적 통로를 갖추는 데 있다. 이재명 정부의 국민주권정부 구상은 기술과 정치, 권리와 참여가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을 제시하며, AI 기본사회는 이러한 구조를 제도와 기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구체화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헌법 개정 시 디지털 국가 원리가 헌법의 통치 이념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결국 기술은 통치의 수단이 아니라, 국민의 참여를 구성하는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 AI를 통해 실현되는 기본사회는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체제가 아니라, 더 많은 시민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확장판이다. 그것은 이제 선언이 아니라 설계와 실천의 문제다.
    AI 기본사회와 국민주권정부
    by 김윤명
    2025.06.12 08:47:33
  • ‘사람은 공간을 만들지만,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이 1943년 독일의 런던 폭격으로 파괴된 국회 의사당의 재건을 약속하면서 한 말이다. 처칠은 우리가 만들어낸 공간과 환경이 결국 우리의 삶, 사고방식, 공동체의 구조까지도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공간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에 거주하며, 그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를 넘어 기억과 감정, 만남과 회복, 사유와 상상의 터전이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거주함(Dwelling)’이라 했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의미 있게 거주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더 나은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정부는 ‘범정부 빈집 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 등 4개 부처가 공동으로 빈집 문제 해결에 나섰다. 국가 차원의 빈집 관리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농어촌빈집정비특별법’과 ‘빈건축물정비특별법’ 제정을 통해 국가와 소유자의 책무를 명확히 하고, 농어촌 빈집 리모델링을 통해 생활인구와 귀농·귀촌 예정자, 청년 등을 위한 주거·업무·문화공간으로의 재활용을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단순한 주거환경 개선을 넘어, 마을공동체의 회복과 지역 균형발전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감자꽃이 피던 지난달 24일, 충북 옥천군 ‘옥천공동체 허브 누구나’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작년에 개장한 안남면 최초의 마을 공중목욕탕 소식을 접했다. ‘목욕 한 번 하려면 버스 타고 읍내까지 30분을 가야 하고, 버스 시간 맞추려면 큰맘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는 안혁관 할머니(89세. 청정리)와 마을에 목욕탕이 생길 거라고 꿈도 꾸지 못하였다는 마을 어르신의 감회는 마을의 지속을 위한 필요 요소가 무엇인지 분명한 자각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마을의 목욕탕은 단순한 위생 공간을 넘어 마을에 사라진 온기를 되살리는 공동체의 심장이 되었다. 충남 서천군 마서면 ‘여우네 작은 도서관’도 같은 사례이다. 귀농한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위한 돌봄과 놀이공간이 없던 마을에 도서관을 구상하였다. 주민들의 협조로 마을의 유휴 공간을 활용해 만든 도서관은, 아이들을 돌보며 방과 후 아이를 맡길 수 있게 된 이들에게 마을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마을의 작은 도서관은 아이들과 주민들이 함께 숨 쉬는 공간으로 마을의 미래를 준비하는 디딤돌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사람과 공간과 시간은 곧 지역의 문화가 된다. 이렇듯 공간의 재탄생은 문제 해결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고 농촌의 회복력을 되살리는 시작점이 된다. 무위당 장일순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 했다. 그는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가진 생명력을 통해 풀뿌리 문화의 확장성을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 농촌에서 무위당의 생명 운동과 정신이 다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주민 스스로 공간을 회복하고, 마을의 필요를 채우며 문화의 싹을 틔울 때, 진정한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농촌의 빈집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엔 수많은 기억과 시간이 쌓여 있다. 빈집을 그저 철거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쓰임을 부여하고 마을에 맞는 방식으로 재생할 때, 비로소 공간은 사람을 살리고, 마을을 살리는 힘이 된다. 빈집 관리는 곧 사람을 위한 일이다. 이는 단지 행정적 정비가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체 회복을 위한 문화적 과제이다. 정부의 정책이 현장에서 실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손과 주민의 땀방울이 만나는 접점이 필요하다.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어 마을의 미래를 함께 그릴 수 있을 때, 정책은 지속 가능한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하얀 감자꽃이 말을 한다. ‘이곳에도 여전히 삶이 있다’라고.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소리 없이 무너져온 농촌 마을들을 돌아보며, 공간의 소중함을 되새겨 본다. 감자꽃은 풍요와 수확의 상징이라고 한다. 꽃이 수고를 다 하는 동안 감자가 땅속에서 튼튼하게 영글듯, 빈집과 공간 개선 정책도 현장의 필요와 그를 위한 지원이 이어질 때 진정한 수확으로 이어질 것이다. 감자꽃이 피는 지금, 공간 정비와 함께 우리가 꿈꾸는 더 나은 세상을 농촌에서 피워 보자. 우리의 시선을 도시를 넘어 농촌에 머물게 하자. 그곳이 곧 다시 회복해야 할 우리의 미래이다. /서경IN
    “감자꽃이 피었습니다”
    by 조금평
    2025.06.09 16:47:27
  • 최근 ‘도시의 마음’이란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 김승수는 전주시장을 지낸, 각별한 후배다. 그는 시장 재임 당시 책 읽는 시민들이 도시의 품격을 결정한다며 ‘책이 삶이 되는 책의 도시 전주’를 디자인했다. 시장 취임과 함께 시청사 로비를 책 읽는 공간으로 전환하고, 특색 있는 도서관을 신축 또는 리모델링함으로써 정책을 현실로 옮겼다. 10여년이 흘러 전주는 도서관 도시로써 입지를 굳혔다. 도서관을 찾는 발길이 급증하자 전주시는 아예 도서관 투어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저자가 꿈꾸었던 전주다움을 인정받고, 지역경제 활성화도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둔 것이다. ‘도시의 마음’은 안목과 관점을 일깨운다. 저자는 “도시가 바뀌면 시민들 삶도 바뀐다. 정책의 차이가 삶의 차이를 만든다. 도시에 마음을 담으면 시민들에게 반향이 일어나고, 그 반향은 도시와 사람을 동시에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저자는 책과 도서관으로 시민들 삶과 도시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반대 여론에 직면했다. 그는 시민들을 설득하고 공직사회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냈다. ‘도시의 마음’에는 이런 안목과 관점을 담았다. 책을 읽는 내내 일본 이시카와(石川) 현립도서관과 21세기 미술관, 다케오(武雄) 시립도서관, 시마네(島根) 현립미술관을 떠올렸다. 세 도시 모두 공공건축물을 통해 도시를 바꿨다. 잘 지은 미술관 하나, 도서관 하나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소멸을 막는다. 이들 도시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나라 지방도시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도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특색 없는 도시경관 일색이다. 매력적인 도시, 활력 있는 도시와 거리가 멀다. 무엇이든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일본은 매년 전국 47개 광역단체를 대상으로 매력도를 발표한다. 지난해 10월 발표한 ‘2024 매력도 랭킹’에서 1위는 홋카이도(北海道), 47위는 사가(佐賀) 현이었다. 그런데 사가 현에 한국인 관광객이 몰린다니 그 이유가 궁금하다. 사가 현 다케오는 인구 5만 명이 채 안 되는 소도시다. 수령 3000년 녹나무가 유명하지만 여행자들이 궁벽한 다케오를 찾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다케오 시립도서관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연간 100만 명이 다케오 도서관에 다녀간다. 도대체 어떤 도서관이기에 도시 인구의 20배 넘는 여행자들이 도서관을 찾을까. 2013년 문을 연 다케오 도서관은 책 읽고, 물건 사고, 커피 마시는 복합공간이다. 시민들은 이곳에서 책 읽고 수다를 떤다. 다케오 도서관은 ‘도서관은 조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부터 깼다. 24시간 연중 운영하니 지역주민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커뮤니티 공간이다. 주변 지형과 어울린 외관 설계 또한 인상적이다. 처음 다케오 도서관을 방문한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노을에 물든 도서관은 황홀했다. 뒷산을 배경으로 둥근 활시위 형태로 설계한 도서관은 위압적인 여느 도서관과는 달리 편안했다. 내부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숍과 잡화 코너도 독특했다. 이곳에서는 문구류부터 지역 특산물, 심지어 전통 술까지 판다. 도서관에서 웬 술이냐고 하겠지만 다케오 도서관에서는 가능하다. 2층은 책 읽는 공간이다. 시민들은 도서관에서 책 읽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지역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울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은 다케오 도서관을 벤치마킹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회자되는 이시카와 현립도서관은 2022년 7월 개관 이후 2년 9개월 만에 내방객 300만 명을 기록했다. 도서관은 짧은 기간에 21세기 미술관과 함께 가나자와를 대표하는 명소로 부상했으니 놀랍다. 빼어난 설계 덕분인데 지난해 일본 도서관협회 건축상을 받았다. 로마 콜로세움을 떠올리는 지붕 설계는 인상적이다. 이곳은 도서관 본래 기능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기능까지 수행한다. 3층까지 이어지는 360도 책으로 둘러싼 중앙 홀을 따라 올라가는 통로는 압권이다. 이곳에서 하루 종일 책에 파묻혔으면 했다. 시마네 현립미술관 또한 지역을 살린 공공건축물이다. 매끈한 우주선 모양을 한 미술관은 넓은 신지 호수에 접해 입지부터 남다르다. 호수와 어우러진 미술관은 시마네 시민들에게 자부심이다. 시민들은 일부러 동트는 새벽 또는 해질 무렵 미술관을 찾아 시간을 보낸다. 시마네 현은 이웃 돗토리 현과 함께 일본에서 인구가 가장 적다. 그런데도 여행자들이 시마네를 버킷리스트에 담는 건 미술관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이곳에서 우키요에 작품을 관람하며 느꼈던 감동은 여전하다. 다녀온 지 1년여가 흘렀지만 호수를 품은 미술관 풍광이 잊히지 않는다. ‘도시의 마음’에서 저자는 “공공은 성공의 기쁨과 자부심보다는 실패의 책임과 두려움을 먼저 생각한다. 여기에서 늘 마찰이 일어난다.”며 “적당한 성공은 철저한 실패보다 위험하다. 적당한 성공은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다. 적당한 성공으로는 누구의 마음도 흔들 수 없다.”고 했다. 공직사회가 실패의 책임과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면 다양한 정책을 기대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감사원의 정책감사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새로운 시도에 활기를 불어넣을지 기대된다.
    일본 소도시를 바꾼 공공건축물
    by 임병식
    2025.06.09 13:31:34
  • 2022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상업위성 미)Starlink, Capella, 핀란드)ICEYE 등 활용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지난 3월, 트럼프와 젤렌스키 대통령의 종전 협상 회담이 결렬되자 미국은 위성영상 정보지원을 즉시 중단하며 우크라이나를 압박했다. 이 위성영상은 미 국가정찰국(NRO)이 상업우주 활용 프로그램으로 확보한 것이다. 오늘날 상업위성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여 지난해 4월, 미 국방부와 우주군은 각각 ‘상업 우주 통합 전략(Commercial Space Integration Strategy)’과 ‘상업 우주 전략’을 발표했다. 미 행정부의 ‘상업 우주 통합 전략’은 안보와 상업을 통합하려는 시도로 민간의 상업용 우주 솔루션 활용이 군사 작전 영역에서 효용성을 높을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하며, 우주상업 파트너십을 확보하고 육성하기 위한 전략을 상세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전략은 민간 우주 산업의 기술과 능력을 군사 및 국가 안보 분야에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우주에서의 위협을 감소시키고, 상업적 솔루션이 군사 작전에 효용성을 높이는 것을 추구한다. 주요 내용은 첫째, 상업 우주 솔루션의 군사 작전 분야 활용을 확대하기 위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둘째 상업 우주 산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혁신적인 상업 문화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셋째 상업 우주 산업의 개발 기간 단축과 시장 동향 파악을 통해 정부와 민간 부문 간의 협업 장벽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미 국방부는 상업 우주 산업의 활용 가능 분야를 파악하고 정부가 맡아야 할 역할을 설정한다. 미 우주군은 상업 우주 솔루션 사용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상업 부문과 지속적으로 협력한다. 이러한 실행 사례로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 위치한 미우주시스템사령부 소속의 ‘Innovation Hub VT-ARC’는 국가안보에 상용 우주솔루션을 활용하는 방안을 구현하는 곳으로 우주 우방국의 상용 우주업체 대상으로 위성통신, 우주감시, 우주정보, 항법(PNT) 분야의 순으로 미 우주군 사업 참여도 유도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민군협력진흥원에서 ‘민 · 군기술협력사업촉진법’에 따라 민·군겸용기술(Spin-up)의 개발과 국방기술의 민간이전(Spin-off), 민간기술의 국방 활용(Spin-on) 등의 민·군 기술협력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전담기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민·군 기술협력에 대한 사업·제도적 한계로 실질적으로 소요군의 활용이 필요한 소프트웨어 분야 개발까지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냉전 종식 후 군비를 축소해 온 유럽과 달리, 우리는 방위사업에 꾸준히 투자해 왔다. 최근 K-방산 수출이 괄목 성장한 계기가 되었다. 수출국이 실제 사용하지 않는 무기를 구매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러니 K-방산의 핵심 경쟁력은 적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우리 군이다. 국산화를 참고 기다려 준 우리 군 덕분에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서 오늘날 글로벌 방산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오늘날 미 행정부의 ‘상업 우주 통합 전략’은 정부 주도 우주 개발을 선택과 집중으로 전환하고, 우주 자산의 회복력 강화를 위한 경쟁 우위 모색에 방점이 있다. 국가가 민간 우주 자산을 활용하는 사례가 확대하고 있어 우리도 관련 사안에 대한 검토와 안보 환경 변화에 맞는 우주 생태계 구축 전략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즉, 미 우주군은 “구매할 수 있는 것은 구매하며 반드시 필요한 것은 구축한다”는 접근방식으로 상업 우주부문의 혁신을 유도하고 있다. 우리도 저비용 단기간으로 우주자산을 획득하고 소프트웨어 분야에 상업우주를 접목하는 ‘한국형 상업 우주전략’ 수립을 제언해 본다. 이와 함께 우주청과 방사청 컨트롤이 가능하고, 국가 안보를 고려한 민-군 우주안보 통합 전략 수립이 가능한 상위기관의 설립과 우주 생태계 구축을 위해 국방우주산업을 기반으로 민간우주산업을 육성화하는 전략적 접근도 필요하다. 또한, 글로벌 우주 협력을 통한 한국의 우주 산업 기반 강화와 우방국과의 우주 안보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K-방산을 ‘K-우주방산’으로 도약시키는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K-우주 방산’ 전략을 만들 때다   
    by 최성환
    2025.06.04 17:20:30
  • 대한민국은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AI 3강’ 진입을 목표로 기술 경쟁력 확보에 집중해 왔다. 초거대 AI, AI 반도체, AI 데이터 센터 구축, AI 대학원 설립 등 다양한 분야에 전략적 투자를 이어가며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 중국과는 다른 조건과 환경에 처해 있다. 그들은 거대한 내수시장과 막대한 자본, 방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독보적인 경쟁력을 구축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규모가 제한적이며 직면한 사회·산업적 과제도 다르다. 따라서 무작정 그들의 길을 좇기보다 우리만의 독특한 강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과 조선·해양, 방산 산업 경쟁력은 우리 경제의 큰 자산이다. 여기에 K-한류가 보여준 창의성과 문화적 영향력, 뛰어난 IT 인프라와 인재, 신속한 실행력과 협업 문화, 사회적 신뢰가 더해진다. 특히 이런 강점들은 디지털트윈 기반 가상실험 기술 발전에 좋은 토대가 된다. 디지털트윈은 현실 세계의 복잡한 시스템을 가상 공간에 구현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시험할 수 있게 한다. 이를 통해 정책과 산업 현장의 문제를 미리 진단하고 최적의 해법을 찾을 수 있어, AI 기술 개발을 넘어 실질적 가치 창출로 연결하는 핵심 도구가 된다. 그동안 우리 AI 정책은 주로 기술 확보에 집중했다. 그러나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다. AI가 우리 사회와 산업이 당면한 현실적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할지, 국민 삶에 어떤 실질적 가치를 더할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더욱이 정책 설계에 AI 기술자 중심 의견이 모이면서, 정치·경제·군사·사회·보건·행정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와 현장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무엇보다 문제를 구조화하고 다양한 대안을 모델링과 시뮬레이션으로 가상 실험하며 검증하는 과정이 부족하다. 모델링은 단순 IT 기술이 아니라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고 해법을 설계하는 핵심 도구이자 실행 기술이다. 이제 대한민국 AI 정책은 ‘어떤 AI 기술을 확보할까’에 앞서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는 무엇이며 AI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에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분야 전문가와 시민이 참여하는 정책 설계, 모델링 기반 가상실험, 그리고 분산 실행 체계 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 진정한 AI 강국은 단순 기술 순위가 아니라 AI가 국민 삶과 사회 문제 해결에 실질적 가치를 만들 때 가능하다. 제조업, 조선·해양, 방산부터 K-한류 창의성, IT 인프라와 인재까지 우리만의 다채로운 강점을 살려 AI를 슬기롭게 활용하는 길,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AI 정책이 나아가야 할 미래다.
    ‘AI 3강’ 실질적 가치 창출에 집중해야
    by 양영진
    2025.06.04 15:11:44
  • 지금 세계는 AI 전쟁 중이다. 이는 비유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이다. 데이터나 알고리즘이 총알이고, GPU가 무기이며, 언어모델(LLM)은 군수물자이다. 누가 먼저 기술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산업과 경제, 외교의 질서까지 판가름 나는 전면적 충돌의 시기다. 미국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반도체와 AI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중국은 국영자본을 동원한 기술독립 전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AI 규제법과 산업정책을 동시에 설계하며 주도권 확보에 나섰다. 이 판에서 우리나라는 어디에 서 있는가. 문제는 우리가 AI를 여전히 산업진흥이나 창업지원의 영역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데 있다. 국가 전략이 아니라 부처 단위의 ‘과제’ 수준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AI는 더 이상 기술개발지원이나 규제완화로 대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책’이 아니라 ‘전략’이다. 그리고 전략은 혼란이 아니라 일관성 위에서만 가능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감이다. 미국 코로나 백신 개발 프로젝트인 ‘Operation Warp Speed’처럼, 실패는 허용하되 속도는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정부는 대통령 직속의 ‘AI 국가전략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현행 국가AI위원회는 폐지해야 한다. 기획재정부도, 과기정통부도, 산업부도 이 전쟁의 지휘부가 될 수 없다. 그들은 병참본부로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전략은 기술을 이해하는 자가 짜야 하며,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행정가나 경영자가 아닌 야전형 기술 사령관이다. AI 전쟁의 리더는 현장에서 알고리즘을 만지고, 모델을 훈련하고, 틀을 이해하는 AI 기술 전문가여야 한다. 국가 AI 전략의 리더십이 기술에서 멀어질수록, 전략은 문서만 남고 실행은 흐려진다. 우리가 수년간 목격한 것은 바로 이 ‘전략 부재의 반복’이다. 수십 개 부처가 서로 다른 로드맵을 내고, 이름만 다른 지원 사업이 중복되고, 정작 기업들은 GPU 하나 수급하지 못해 개발을 포기하는 일이 벌어진다. ‘AI 강국’을 외치면서도 기반 기술과 생태계에 대한 투자는 여전히 표류 중이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국가AI연구소를 설립하여 국가 차원의 기술축적과 인재양성 시스템을 통합하고, 산발적인 R&D 과제를 전략적으로 정렬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보여주기식 정책’에 허비해 왔다. 스타트업 몇 곳 지원했다는 성과, AI 경진대회 몇 회 개최했다는 홍보, 국제기구 몇 곳 참여했다는 외교적 수치로 국가전략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환상을 걷어내는 일이다. 설명가능한 AI(XAI)와 같은 기술적 허상에 매달릴 시간에, 실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기술을 키워야 한다. 우리가 투자해야 할 것은 발표용 슬라이드가 아니라, 실제 코드를 짜고, 모델을 훈련하며, 국제 생태계에서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는 실전형 기술과 기업이다. AI 강국은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가 기술을 이해하고, 기술이 전략을 이끄는 체계 위에서만 가능하다. 전략이 없는 국가에겐 승리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AI는 전 세계에서 진화를 멈추지 않고 있다. 전장을 외면한 채 회의실에서만 전략을 짜는 나라에겐 미래가 없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시간은 지금이며, 준비해야 할 대상은 기술 그 자체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야전군은 기업의 AI 기술자들이다. 그들을 불러 모아야할 때이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한 몇 가지 전략을 제안한다. 첫째, K-LLM 전담 전투팀을 꾸려야 한다. 대한민국도 이제 말뿐인 K-모델이 아니라, 글로벌 수준에서 실제로 싸울 수 있는 자체 고성능 언어모델(K-LLM)을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가 GPU와 데이터를 책임지고, 민간 기술자가 주도하는 전담 전투형 개발팀을 구성하라. 산업현장에서 즉시 투입 가능한 실전형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전략 없는 기술은 무기 없는 군대와 같고, 기술 없는 전략은 말잔치일 뿐이다. 둘째, AI 연산 인프라를 민간에 개방해야 한다. AI는 연산이 곧 전투력이다. 스타트업이 GPU 부족으로 무너지는 동안 정부는 여전히 보고서만 쓴다. 국가가 수천 장의 GPU를 보유한 전용 AI 클러스터를 구축해 민간에 개방하고, 슬라이드가 아니라 소스코드로 평가하는 실전 배치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누구에게 총을 쥐여줄지, 그 기준은 문서가 아니라 코드로 정해야 한다. 셋째, 국가 전략데이터 API 개방이다. 모델이 아무리 정교해도 데이터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공공과 민간이 보유한 고품질 데이터셋을 ‘국가 AI 전략 자산’으로 편성하고, 기술자에게 API 형태로 실시간 개방해야 한다. 특히 한국어·법률·교육·의료 등 전문분야 데이터는 한국만의 전장을 열 수 있는 무기다. 데이터는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사용하는 연료다. 네째, 민간 기술자를 실전에 투입해야 한다. 국가 프로젝트는 더 이상 회의실에서 회의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기업은 물론, 스타트업 CTO, 시니어 개발자, 현업 알고리즘 설계자를 국가 AI 전투현장에 직접 투입하고, GPU·인증·전략 자원을 집중 제공하라. 민간 기술자는 보고용 명단이 아니라 전장을 돌파할 진짜 전투원이다. 현장에 기술자를 보내는 나라만이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마지막으로 실시간 테스트베드를 구축해야 한다. 모델의 품질은 실험실이 아니라 현장 사용 중 오류로 증명된다. 민원 시스템, 의료 요약, 행정 자동화 등 공공 영역에 AI 모델을 즉시 배치하고, 실시간 피드백과 오류 리포트가 돌아오는 AI 실전 테스트 플랫폼을 구축하라. 기술자는 매일 실전에서 싸우고, 모델은 매일 실전에서 진화해야 한다. 그게 전쟁이다.
    새 정부는 ‘AI국가전략위' 만들어야
    by 김윤명
    2025.06.03 11:09:38
  • 기업의 퍼블릭 어페어즈(Public Affairs) 활동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정부 관료를 만나고 국회의원을 설득하면 정책은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여전히 정치권이지만, 정책을 움직이는 힘은 시민단체, 전문가, 이익단체, 미디어 등 ‘제3자 그룹’으로 분산되고 있다. 권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흩어졌을 뿐이다. 정책은 법과 제도, 그리고 예산이라는 형식으로 실현된다. 그러나 그 형식을 실질적으로 만드는 본질은 ‘사람’과 ‘이해관계’다. 과거처럼 관료나 국회의원만을 겨냥한 일방향 설득으로는 설 자리가 없다. 여론을 선점한 시민단체 하나가 기업의 시장을 송두리째 흔들고, 학회 성명 하나가 법안의 생사를 갈라 놓는 시대다. 사회적 설득력이 없는 정책은 제도화되지 못하고, 제도화되지 못한 정책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환경·보건·플랫폼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 같은 흐름은 더욱 뚜렷하다. ‘탈플라스틱’ 캠페인으로 출발한 일회용 컵 규제는 몇몇 시민단체와 소비자단체의 꾸준한 이슈 제기와 언론 연계로 국회까지 연결됐고, 법제화로 이어졌다. 기업들은 규제가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본질을 인식했다. 문제는 사후 대응이 아니라, 초기의 무관심이었다. 제약업계의 약가제도 개편 역시 마찬가지다. 환자단체와 전문가 그룹이 ‘신약 접근권’이라는 공공성을 앞세우자 정책 프레임은 완전히 전환됐다. 정책을 앞당긴 건 정부가 아니라, 정책 바깥에서 문제를 구조화한 이들이었다. 정당성과 긴급성을 확보한 제3자가 정책 결정의 흐름을 바꾼 셈이다. ICT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일명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은 정부나 기업이 아니라 소상공인 단체와 소비자 권리단체들의 요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알고리즘의 투명성, 입점 수수료 문제 등을 제기하며 여론을 장악했고, 국회는 이 흐름을 외면하지 못했다. 플랫폼 기업들은 법안의 정합성에 대해 반박했지만, 사회적 정당성을 넘지 못한 반론은 정책의 벽을 막지 못했다. 이제는 정책의 권력 구조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해관계자는 정부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점점 더 조직화되고 다층화되고 있다. 이제 소셜폴리틱스의 시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기업이 생존하려면 이들과의 관계설정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 누구를 설득하고, 누구와 협력하며, 누구의 반발을 예측할 것인가. 이 복잡한 지형을 해독하는 도구가 바로 ‘살리언스(Salience) 모델’이다. 살리언스 모델은 이해관계자의 속성을 세 가지 기준으로 분류한다. ‘권력을 가졌는가’ ‘정당한가’ ‘긴급한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따라 기업은 대응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 목소리가 크다고 반드시 설득해야 할 대상은 아니며, 영향력이 낮다고 무시해도 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정당성과 긴급성을 가진 ‘의존적 이해관계자’는 언론과 여론을 움직이는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 그룹이다. 환경단체, 환자단체, 소비자단체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이들과의 조기 협력은 사회적 지지와 정책 우군 확보의 핵심이 된다. 반대로, 권력과 긴급성을 동시에 가진 ‘위험한 이해관계자’는 사전 대응 없이는 돌이킬 수 없는 리스크로 번질 수 있다. 정치권 핵심 인사나 거대노조, 언론 권력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단순한 메시지로는 설득할 수 없으며, 신뢰 기반의 대화 채널을 사전에 확보해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많은 기업들이 여전히 정부와 국회라는 공식 경로에만 의존한다. 변화한 환경을 읽지 못하고, 전략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설득의 기술을 넘어, 조율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해관계자의 언어를 읽고, 갈등을 구조화하며, 공통의 정책목표를 재설계하는 일. 퍼블릭 어페어즈의 본령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해관계자 맵핑은 결코 고비용 전략이 아니다. 포럼 하나, 리서치 하나, 소규모 자문그룹 운영만으로도 충분한 데이터와 신호를 얻을 수 있다. 관건은 이를 전략으로 축적할 수 있는 체계와 의지다. 정책은 언제나 사람의 손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지금 그 손은 점점 더 정부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퍼블릭 어페어즈 전략의 타깃은 넓어져야 한다. 정부청사나 국회만이 아니라, 거리의 시민사회, 기자실의 여론, 전문가의 보고서가 기업을 둘러싼 정책 환경을 바꾸고 있다. 이들을 이해하고, 구분하고, 조율하지 않으면 기업의 논리는 정책의 언어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정책이 되지 못한 논리는 곧 시장에서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소셜폴리틱스’ 시대가 왔다
    by 이보형
    2025.06.03 08:26:45
  •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기본’과 ‘모두’라는 개념은 AI 시대에 들어서며 그 의미가 전면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단지 용어의 재정의가 아니라, 헌법 질서의 구조 전환을 요구하는 사유의 출발점이다. 우리 시대의 ‘기본’은 더 이상 최소 생존의 보장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기본’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이해되었다. 식량, 주거, 교육, 의료, 노동 등은 이러한 생존 중심의 복지국가적 기본권 체계에서 핵심 구성요소였다. 그러나, 오늘날 AI 기술은 인간의 삶에 대한 조건을 ‘기술적 참여’ 여부에 따라 차별화하고 있으며,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사회적 소속과 판단 능력 자체를 좌우한다. AI가 인간의 의사결정 구조를 대체하거나 보조하는 환경에서 ‘기술의 비접근’은 곧 ‘사회적 배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새로운 ‘기본’은 기술로부터의 보호가 아닌, 기술을 통한 실질적 참여의 보장이어야 한다. ‘모두’는 형식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접근을 뜻한다. ‘모두’라는 단어는 겉보기에 포용적이고 평등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할 위험도 있다. 기술 인프라와 교육, 언어 능력, 경제력, 지역 격차 등은 AI 기술에 대한 접근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모두의 AI’가 단순히 서비스를 개방한다는 의미에 그친다면, 사회적 약자는 여전히 소외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의미의 ‘모두’는 형식적 평등을 넘어, 실질적으로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디지털 접근권, AI 리터러시 보장, 맞춤형 공공 서비스 등 적극적 정책수단이 동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두의 AI는 국민 모두가 AI 서비스를 이용함에 있어서 제한이나 차별을 받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AI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실질적이고, 사회적 권리로서 AI 기본권이 인정될 필요가 있다. 이처럼, AI 시대의 ‘기본’은 기술과 권리의 결합이다. 기본은 더 이상 사회보장 제도의 내부 개념이 아니라, 기술 사회 전반에 대한 설계 원칙이 되어야 한다. 이는 권리 없는 기술 도입이 아니라, 권리를 전제로 한 기술 사회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AI는 인간의 삶을 매개하고 판단을 구조화하는 도구이기에 기술 자체가 헌법적 의미를 띠는 존재 조건으로 기능한다. 즉, ‘AI 기본사회’란 AI 기술에 대한 접근·통제·이용·설명요구·이의제기 등이 보편적으로 보장되는 디지털 사회계약의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사회계약이 노동구조에 따른 근간이었다면 기본사회에서의 사회계약은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계약내용을 구성하여야 한다. AI를 통해 구현되는 세상이라는 점에서 AI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경우, 경쟁에서 배제될 수 있다. AI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과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볼 때, AI는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차이가 차별로 확대되지 않도록 AI 기본권의 실질적 보장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법과 헌법은 ‘기술 없는 기본’을 넘어야 한다. 기존의 헌법 이론은 기술을 외부적 요인으로 간주해왔으며, 대부분은 기술로부터의 보호라는 ‘방어적 권리 모델’에 기반해 왔다. 하지만 AI 사회에서는 기술이 기본권 실현의 수단이자 조건이 된다. 교육 받을 권리도 AI 튜터 없이 실현되기 어렵고, 행정 정보도 AI 기반으로 제공되는 시대에는 기술에 접근할 수 있어야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즉, AI는 권리의 내용이자 방법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법은 이제 기술 없는 기본권 논리에서 벗어나 기술로부터 권리를 확장하는 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 ‘모두의 AI’는 새로운 사회계약의 조건이다. 전통 사회계약은 ‘세금과 복지’, ‘노동과 안전망’이라는 교환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AI 사회의 기본계약은 ‘데이터와 권리’, ‘접근과 참여’, ‘기술과 책임’이라는 새로운 조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때 ‘모두의 AI’는 AI 기술이 일부 기업이나 국가 권력의 소유물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동등하게 접근하고 설계에 참여하며 책임을 공유하는 공공 자산임을 선언하는 개념이다. 법률과 정책은 이 새로운 계약의 문법에 따라, 기술의 공공화와 시민 참여의 제도화, 공정 분배의 원칙을 명시적으로 내장해야 한다. ‘모두’와 ‘기본’은 AI 시대의 헌법적 기초다. 결국 ‘모두’는 기술 포용의 대상을, ‘기본’은 기술로 구성된 삶의 조건을 재정의하는 개념이다. 국민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두에게 기본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AI 기본사회는 이러한 ‘모두’와 ‘기본’의 재발견을 바탕으로, 기술과 권리의 관계를 재설계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는 시도다. 이 개념의 전환을 제도화하지 못한다면, AI 기술은 권리의 도구가 아니라 배제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국민 모두가 AI를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는 사회인 AI 사회의 큰 의미는 AI에 대한 접근과 이용의 제한없는 AI 기본권의 보장이어야 한다. 앞으로, AI 기본권은 모든 정책·입법의 철학적·헌법적 기반이 되어야 한다.
    AI 시대 ‘모두’와 ‘기본’의 재발견
    by 김윤명
    2025.05.30 14:42:28
  • 최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올해 국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0.8%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저성장 흐름이 나타났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유사한 0%대의 낮은 성장률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미국의 관세전쟁에 의한 수출 감소가 주요 원인이라 하지만 반도체, 자동차, 이차전지와 같은 국내 주력 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이 흔들리고, 미래 혁신성장 동력인 AI 혁신경쟁에서 뒤처지는 모습들은 경제성장 멈춤에 대한 불안감을 높인다. 인간과 대화하는 인공지능(AI) 챗GPT는 불과 2년 만에 초기의 경이로움 단계에서 사용자가 5억 명에 이를 만큼 성장하고 있다. AI 발전에 필요한 기반 기술인 AI 반도체나 대규모 데이터 처리기술도 빠른 속도로 발전해 AI 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혁신 산업들이 움트고 있다. 로보택시, 휴먼로봇 등 새로운 개념의 기술혁신이 가시화되고 있고 특히 로보택시는 이미 상용화단계에 접어들어 새로운 이동혁신 서비스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로보택시는 운전자 없이 스스로 주행할 수 있는 자율주행기술 레벨 4의 기술을 탑재하고 운행되는 이동수단이다. 글로벌 로보택시 시장은 2030년까지 연평균 60% 이상 성장해 수천 억 달러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력과 규제 완화를 통해 미국과 중국의 기업들은 이미 기술혁신과 시장 선점을 위한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구글의 자회사인 웨이모(Waymo)는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운행서비스 중이며 테슬라는 운전대와 패달이 없는 자율주행차 운행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은 바이두(Baidu Apollo Go)가 베이징, 우한 등 10개 도시에서 유료 서비스 운행을 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은 세계 주요 도시들로 운행 범위를 넓히는 경쟁을 이미 시작했다. AI 기반 로보택시의 상용화에는 핵심기술 확보뿐만 아니라 여러 중요한 요소들이 갖춰져야 한다. 안전하고 혁신적인 자율주행기술에 도시 인프라 구축, 규제 완화 등 관련 제도 및 법제 정비가 필수적이다. 나아가 기존 자동차 산업 및 고용구조의 대개편을 유발해 산업 전환에 따른 대응과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해야 한다. 즉, 소유에서 공유로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자동차산업의 속성이 바뀌고 그에 따른 고용구조의 대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특히 운전 직종 수요 감소와 소프트웨어 중심 고용구조 전환에 따른 고용시장 혼란과 갈등을 조정할 재교육제도 및 사회 안전망 확충이 필요하다. 현재 국내 로보택시의 혁신경쟁력은 미중 선두기업들에 뒤처지고 있다. 국내 기업이 미국에 로보택시용 전기차 제공 및 운행 서비스 실시가 예정되어 있고 일부 스타트업들이 자율주행기술개발에 참여하고 있지만 핵심기술과 운영 플랫폼 경쟁력이 뒤처진다는 평가이다. 특히 국내 자율주행시스템은 일부 지역(서울 강남, 세종 등)에서만 소규모의 시험 운행을 하는 단계에 있다. 무인 운전 금지에 대한 규제가 여전하고 사회적 수용도가 낮아 자율주행 혁신경쟁에 장애가 되고 있다. 로보택시는 AI 기술을 적용한 혁신의 상징이자 산업구조 재편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국내 자동차산업은 제조업 총생산의 12%를 차지하고 직접 고용인력 33만명을 포함해 약 150만명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주력산업이다. 규제개혁과 사회적 수용성 미비로 신산업 혁신경쟁에 뒤처지면 새로운 혁신성장 동력 확보에 실패할 위험이 높다. 이미 ICT 혁신경쟁에서 낙오된 일본과 유럽의 사례는 혁신 격차가 경제성장에 치명적임을 제시한다. 로보택시로의 전환에는 자율주행 핵심기술 확보부터 서비스 관련 기술이 통합된 기술플랫폼과 고용, 제도, 규제, 도시인프라 설계까지 통합된 혁신체계가 필요하다. 즉, 기술개발, 규제개혁, 사회적 수용성, 산업구조 전환 전략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종합적인 정책패키지 접근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지금 정부의 과학기술혁신체계로는 통합된 관리가 어렵다. 현재 과학기술혁신체계는 기술개발에서 개발 기술의 사업화 이전을 주로 다룬다. 또한 기술 개발이 여러 부처에 분산관리돼 조정이 어렵다. 자율주행기술개발 관리도 산업부, 과기부, 국토부, 경찰청 등 여러 부처에 분산되어 있다. 더구나 관련 규제개혁, 제도 구축, 고용 등은 기술개발체계와는 별도로 다루어진다. AI 시대의 혁신 특징은 발전 속도가 빠르고 파괴적이다. 단순 기술혁신이 아닌 산업재편, 경제사회시스템 전환까지 유발한다. 지금의 과학기술혁신 관리체계로는 AI 시대의 기술개발과 혁신의 속성을 수용하기가 어렵다. 기술개발에서 산업구조 개편, 규제개혁, 노동시장 개편, 사회시스템 개혁의 연결성을 고려한 통합적 혁신정책체계의 구축과 이를 이끌어갈 거버넌스 개편이 필요하다. 단순히 부총리제 도입이 아니라 과학기술정책과 AI 혁신정책과의 연계를 위한 새로운 혁신거버넌스 체계를 설계해야 한다.
    AI 시대, 통합된 혁신체계가 답이다
    by 이민형
    2025.05.28 15:36:39
  • 대한민국은 기술의 전환점을 지나고 있다.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산업의 도구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필수조건’으로 변화하고 있다. 행정은 AI로 자동화되고, 교육은 AI 튜터와 함께 이뤄지며, 의료와 돌봄도 AI 기반 플랫폼 위에서 작동한다. 문제는 이 기술 전환이 과연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로 주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 기술의 혜택은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왔다. 고소득층과 대도시는 AI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지만, 농어촌 주민, 고령자, 장애인, 저소득층은 여전히 ‘기술 밖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인공지능은 기회의 문이지만, 통제되지 않으면 또 하나의 격차가 된다. 이제 우리는 이 기술을 모두의 삶을 위한 기반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AI 기본사회의 출발점이다. AI 기본사회는 기술로 국민의 기본적 삶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AI는 더 이상 소수의 자산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향유해야 할 권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제안한 기본사회는 주거, 의료, 교육, 돌봄, 교통, 정보 접근 등 국민 삶 전반을 헌법상 권리로 실현하겠다는 선언이며, 기술 역시 그 일부로 포함된다. 국가는 이제 기술 기반 삶까지 책임지는 방향으로 거버넌스를 전환해야 한다. 기존 복지제도가 ‘일할 수 있어야 지원받는다’는 전제에 기반했다면, AI 기본사회는 ‘기술이 노동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시대’를 전제로 한다. 탈락자를 보조하는 정책이 아니라,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디지털 기반 안전망이 핵심이다. AI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며, 국민의 존엄을 지탱하는 사회적 인프라다. 그러나 기술 인프라만으로는 기본사회가 실현되지 않는다. AI 기본사회는 기술, 제도, 참여라는 세 축 위에 세워져야 한다. 첫째, 기술의 축으로는 공공이 주도하는 AI 인프라가 필요하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국민 AI 비서, 지역 기반 디지털 도움센터, 공공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RAG 시스템 등이 핵심이다. 특정 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개방형 모델과 공공데이터의 결합으로 모두의 AI를 실현해야 한다. 공공데이터는 국민의 것이며, 그것을 통해 제공되는 서비스 역시 공공이어야 한다. 둘째, 제도의 축으로는 ‘AI 기본권 헌장’ 제정과 ‘기본사회위원회’ 설치가 요구된다. AI 접근권, 이용권, 설명요구권, 포용권 등 새로운 사회권을 법제화하고, 이를 실행할 전담 기구를 통해 지속가능한 정책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 위원회는 소득, 돌봄, 교육, 주거 등 복지 각 분야의 정책을 AI 시대에 맞게 재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셋째, 참여의 축으로는 기술 통제를 기술자에게만 맡기지 않는 참여형 AI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시민, 기술자, 법률가, 정책가가 함께 참여하는 AI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공공 알고리즘의 투명성, 영향평가, 사전 인증 및 사후 모니터링 제도를 통해 기술의 공공성과 책임성을 확보해야 한다. 기술 민주주의는 선언이 아니라 구조화된 참여 설계로 가능하다. AI는 인간의 삶을 돕는 도구여야 한다. 경쟁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존엄한 삶을 위한 기술이 되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두고 기술이 주변을 채우는 사회가 바로 AI 기본사회다. 기술복지(tech-welfare)는 단순한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AI는 교육, 건강, 노동 등 인간다운 삶의 전 영역을 지지하는 공공 기반이 되어야 한다. 단절 없는 돌봄, 개인화된 교육, 데이터 기반 복지는 AI 없이는 실현되기 어렵다. 따라서 AI 기본권은 선택이 아닌 새로운 사회권으로 제도화되어야 한다. 지금은 기술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AI 기본사회로 나아가야 할 때다. 기술이 진보할수록 우리는 그 기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더 날카롭게 물어야 한다. AI 기본사회는 그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사회 비전이며, ‘모두의 AI’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 전략이다. AI가 갖는 가치는 기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국민의 권리이기도 하다.
    AI기본사회는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by 김윤명
    2025.05.25 12:03:56
  • 일본에서는 엑스포(EXPO)를 ‘반파쿠’로 부른다. 만국박람회를 줄인 ‘만박(萬博)’의 일본어 발음이 반파쿠다. ‘천하의 부엌’ 오사카(大阪)에서 엑스포(4월 13~10월 13일)가 한창이다. 일본은 앞서 1970년 오사카, 2005년 아이치(愛知)엑스포를 개최한 바 있다. 등록박람회를 한 번도 열지 못한 우리와 달리 일본은 벌써 세 차례다. 5년마다 6개월간 개최하는 등록박람회는 세계 최대 규모다. 1993년 대전엑스포는 체급이 작은 인정박람회였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엑스포를 통해 패전국에서 벗어나 선진국 반열에 올랐음을 알렸다. 이후 한동안 일본은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지켰다. 오사카엑스포 주최 측은 55년 전 6,400만여 명에 비해 2,800만 명으로 관람객을 낮춰 잡았지만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지금이야 스포츠를 비롯한 메가 이벤트가 흔전만전하지만 19세기만 해도 볼거리는 흔치 않았다. 세계 최초 박람회는 1851년 런던박람회다. 일본이 국제사회에 처음 얼굴을 내민 것도 박람회를 통해서였다. 사쓰마(가고시마) 번은 1867년 파리박람회에 도자기를 첫 출품했다. 사쓰마 도자기는 유럽인들을 사로잡았고, 단박에 자포니즘(Japonism) 열풍을 불렀다. 유럽인들은 앞 다퉈 도자기를 사들였고 사쓰마 도자기는 최고 사치품이 됐다. 사쓰마는 도자기 판 돈으로 대포와 군함을 사들였고 조슈(야마구치)와 손을 잡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아이러니한 건 도자기 산업의 주인공이 조선도공이라는 점이다. 임진왜란 포로로 끌려간 조선도공들은 오늘날 반도체와 맞먹는 하이테크 산업을 주도하며 일본 개화에 기여했다. 쓰라린 역사다. 오사카는 한반도와 밀접한 곳이다. 원조 한류인 조선통신사와 연결 지어 생각하면 한층 각별하다. 지금도 오사카는 재일 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조선통신사의 주된 통로였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관계 개선을 위해 요청한 평화사절단이다. 한양을 떠난 통신사는 육로와 해로를 따라 에도로 향했다. 한양~에도는 왕복 4,600km에 이르는 거리다. 부산항부터 오사카까지 바닷길만 840km다. 오사카는 일본 본토 첫 기착지였다. 에도 막부는 통신사 행렬이 시모노세키에 들어서면 오사카까지 뱃길을 안내했다. 지난 11일 부산항을 출발해 보름여 만에 오사카에 도착한 조선통신사 재현 선 역시 세토내해 전통항해협의회 도움을 받았다. 비로소 본토에 오른 통신사는 요도우라(淀浦) 강을 거슬러 에도로 갔다. 지난해 자동차를 이용해 시모노세키부터 구레, 토모노우라, 히로시마를 다녀왔다. 선조들이 말과 배를 타고 이동했을 소도시 곳곳에서 조선통신사 행적을 만났다. 최근 엑스포 한국관에서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됐다. 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261년 만에 연 행사는 여러모로 뜻깊었다. 관람객들은 조선통신사 선박과 통신사 행렬에 흥미를 나타냈다. 조선통신사는 단순한 외교 사절을 뛰어넘은 평화와 문화 사절이었다. 1607~1811년까지 200여 년 동안 12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신뢰를 상징한다. ‘믿음을 통하는 사절단’이란 명칭 또한 일본으로 가는 사절단에만 사용했다. 통신사의 주요 임무는 도쿠가와 쇼군에게 국서를 전달하고 답서를 받아오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쇼군을 만나 국서를 교환함으로써 신뢰를 쌓았다. 통신사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다이묘들은 숙식과 행정편의를 제공하며 극진히 환대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과도한 접대로 지방재정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에도 막부는 조선통신사를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유용한 창구로 인식했다. 일본 지식인들은 통신사 행렬이 머무는 숙소를 방문해 밤새워 필담을 나누고 글씨와 시를 받는 것을 특별한 기쁨으로 여겼다. 서울역사박물관은 6월 29일까지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을 주제로 조선통신사 특별전을 열고 있다. 전시장에서는 친밀한 교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대와 하룻밤 이야기하는 것이 십 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는 일본 학자의 글은 인상적이다. 비록 불행한 근현대사를 공유하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에도 호우시절은 있었다. 대륙과 단절된 섬나라 일본에게 조선통신사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엑스포였다. 통신사가 머무는 동안 문화와 물물이 섞이고 지식은 확장됐다. 통신사 일원으로 다녀온 이언진은 ‘오사카는 큰 도회지라 진기한 보물은 용궁의 보물을 털어낸 듯, 페르시아 상인들도 눈부셔하고 절강의 처자들도 빛이 바래네’라며 오사카의 번화함을 묘사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상륙(1543년)해 서구 문물을 전하기 전까지 조선통신사는 유일한 문화 유입 창구였다. 어쩌면 조선과 일본의 악연도 조선통신사가 끊기면서 시작됐는지 모른다. 통신사는 1811년, 12차 사행을 끝으로 중단됐다. 이로부터 불과 65년 뒤 일본은 강화도조약(1876년)을 시작으로 조선침략을 본격화했다. 신뢰가 끊긴 자리에서 전쟁이 싹텄다. 에도 시대 외교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성신이라는 것은 진실 된 마음을 뜻하며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을 갖고 교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일 양국에 필요한 말이다. 2025년 오사카엑스포 한국관의 주제는 ‘연결’이다. 한일 양국이 새로운 미래로 나가는 것 또한 새로운 연결에 있다.
    오사카에서 만나는 ‘새로운 연결’
    by 임병식
    2025.05.19 15: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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